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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신도 쓸데가 있다-27화 (27/259)

[27화]

백작 일가와 아침 식사를 마친 베오날드는 다음 일정을 위해서 곧바로 움직였다.

다음 일정은 백작가의 가정교사에게서 받는 각종 수업으로, 매일매일 진행되며 요일마다 각각 다른 것을 배운다.

주로 배우는 것은 예법, 수학, 역사, 문학, 춤 등등… 귀족에게 필요한 소양들이었다.

그리고 오늘 배울 것은 역사와 예법 과목이었다.

“저는 역사 교사인 벨이라고 합니다. 그럼 수업을 진행하겠습니다. 도련님들, 저는 교육을 맡은 자로서 엄격하게 진행할 터이니 불평 마십시오. 그러면…….”

‘…왜 귀족 가문의 가정교사들은 저런 마녀 같은 스타일인 걸까? 우리 가문도 저랬는데 말이지. 우리 아버지 대에도 그랬고, 내가 가주가 되었을 때도 저런 스타일인 것 같았는데… 어디서 만들어 내나?’

가정교사는 삐쩍 마른 중년 여성으로, 머리를 올려 묶은 깐깐하고 표독해 보이는 스타일이었다. 베오날드는 ‘500년이 지났음에도 이건 변하지 않는 건가?’라고 생각하며 그녀가 가르치는 내용에 집중하려고 했다.

하나 그의 옆에 있는 랄트는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았는데, 식사 후 이 교실에 오자마자 곧바로 책상에 엎드리더니 그대로 뻗어 버린 것이었다.

“랄트 도련님, 랄트 도련님, 일어나세요. 수업 시작할 겁니다.”

“…드르러어엉…….”

“도련님!”

“으아아아!”

콰당!

찌를 것 같은 하이 톤의 일갈이 떨어지자 랄트는 벌떡 일어나더니 그대로 의자와 함께 쓰러졌다.

베오날드는 그 상황에 웃고 싶었지만 겨우겨우 참아 내면서 무표정하게 랄트를 바라보았다.

그 표정은 상당히 볼만한 것으로 부끄러움, 민망함, 졸린데 깨운 것에 대한 분노 등등…다양한 감정을 담고 있었다.

“이익… 이이익!”

“얼른 착석하십시오! 캘러메인 백작가의 뒤를 이으셔야 할 분이!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아니… 아침에 갑자기 뛰어다녀서 힘들었다고! 젠장! 안 해!”

“어디 가십니까? 도련님! 도련님! 후우~ 결국 또 이렇게 되었군요.”

랄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수업에서 도망쳐 버렸다.

남은 건 베오날드와 가정교사 벨뿐. 서로 어색하게 시선을 주고받던 중 가정교사 벨은 헛기침을 하며 분위기를 전환하고자 했다.

“크흠! 어쩔 수 없군요. 저도 일단 고용이 된 몸. 제 몫을 해야 하니 베오날드 님에게라도 교육을 진행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시골 출신으로 입양되셨다고 들었습니다만, 그렇다고 한들 캘러메인 백작가의 명예를 짊어진 몸이 되셨으니 가차 없이 진행할 것입니다.”

“예! 선생님.”

기합을 잔뜩 넣은 베오날드의 반응에 만족한 듯 벨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본격적으로 수업에 들어갔다.

역사라곤 하지만 막 수천 년, 수만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현재 대륙이 어째서 6개의 나라로 갈라졌으며, 그동안 일어난 주요 사건과 전쟁사에 대해 가르치는 것이 주였다.

“현재 대륙은 우리 칼레움 제국부터 시작해서 한 제국, 다이나 왕국, 볼레아 왕국, 가르칸 공화국, 신성국. 이렇게 여섯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나라 이름… 여기서 처음 듣는 거지? 하긴, 시골에서 나라 이름이 무슨 상관이겠어. 기껏해야 캘러메인 백작가가 전부였지. 그나저나 익숙한 이름도 몇 있네. 다이나, 볼레아 가문 녀석들, 성공했나 보군.’

500년 뒤였지만 역사의 흔적은 이어지고 있는 것에 베오날드는 피식 웃었다.

자신이 있을 당시엔 다이나 후작가, 볼레아 변경백으로 불렸고, 다이나 후작가는 마법 명문가, 볼레아 변경백은 무가(武家)로서 명성을 떨치는 곳이었다.

물론 그래 봐야 일개 가문에 불과할 뿐. 통일 제국 시기의 국력은 막강했으며 황실을 등에 업은 ‘노이멀 가문’에 충성을 바친 놈들이었다.

‘그놈들이 황제니 왕이니 자칭하며 거들먹거린다라? 정말 웃기지도 않네. 자기네들 가보를 나한테 바치고 살려 달라고 애걸하던 놈들이 말이야. 푸훕훕.’

“베오날드 도련님, 왜 웃으십니까? 제 수업의 어디에 웃음 포인트가 있는 거지요?”

“태양빛 아래 살면서도 보질 못하여 감겨 있던 눈이 뜨여, 그 광휘를 보게 되었으니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고작해야 더스티클록 영지와 이 캘러메인 영지가 세계의 전부였던 전 지금 막 세계의 광대함에 감동하고 있습니다.”

“…흠, 그렇군요. 하긴 사람은 높은 산에 올라서서 세계를 바라보면 그 광대함에 감동하기도 하니, 도련님의 심경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닙니다만, 지금은 중요한 수업 시간입니다. 이번은 넘어가 드리도록 하지요.”

“예, 감사합니다!”

적절한 말재주로 위기를 넘긴 베오날드. 그리고 가정교사 벨의 교육은 계속됐다.

전반적으로 모두가 유용한 정보였기에 베오날드는 단 하나의 내용도 까먹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동시에 무서울 정도로 집중해서 자신이 가진 지식을 갱신해 나갔다.

‘현 대륙의 판도, 그리고 국가의 과거사, 진행 상황을 모두 알 수 있다니! 최고로군!’

‘어쩜… 저런 열정적인 눈빛을!’

가정교사 벨은 이곳뿐만 아니라 도시의 상인과 유력자, 장인, 기사, 귀족 자제들의 교육도 맡고 있었는데, 여러 도련님들 대부분은 ‘역사’나 대륙에 대한 것을 이야기하면 시시해하거나 지루해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개중엔 심하면 아까 전의 랄트 도련님처럼 도망치는 경우도 있었는데, 14살처럼 보이지 않는 이 시골 출신 소년은 자신의 수업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열정적으로 응해 주고 있지 않은가?

‘무골(武骨)처럼 보이는 자인데… 학구열도 이리 뛰어나다니! 캘러메인 백작가에 보배가 들어왔군요.’

“선생님? 갑자기 수업을 멈추셨는데…….”

“음, 시간이 이렇게 되었으니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요. 그리고 오늘 배웠다고 해서 끝나는 게 아닙니다. 머릿속에 확실히 집어넣어서 도련님의 것으로 만들어야 제대로 배웠다고 할 수 있는 겁니다.”

“물론입니다!”

“보람이 있으니 좋군요. 그럼 다음 주에 봅시다.”

“예!”

그렇게 베오날드의 첫 역사 수업이 끝났다.

전반적으로 선생은 만족한 수업이었지만 베오날드에겐 약간 미진한 점이 있었는데, 바로 지도의 문제였다.

‘아니,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대륙 모양이 바뀌는 건데? 역사 선생이면 대륙 전체 지도 정도는 있어야 되지 않아?’

아무리 개발새발이라도 자신의 위치와 대륙 전체 지도만 있으면 자신의 영지였던 ‘베노피스’를 찾는 건 정말로 식은 죽 먹기인데!

‘…저 저급하게 그린 지도만 봐도 화가 날 지경인데, 그나마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뭔가 확실히 할 수 있는 게 없어. 젠장!’

통일 제국 시절 질리게 본 지도를 기억하고 있는 베오날드가 자신의 기억과 저 저급한 지도를 최대한 맞춰 보려고 했지만 매우 어려웠다.

‘게다가 지명도 다 다르고… 해안선도 다르고……! 대체 전쟁 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거지? 땅이라는 게 이렇게 쉽게 바뀌는 게 아닐 텐데……. 하아~ 일단 나중에 하자.’

결국 베노피스의 위치를 가늠하는 건 차후로 미루자고 생각하는 베오날드였다.

그리고 잠시 쉬는 시간을 가지고 다음 예법 수업이 이어졌는데, 대귀족으로 수십 년을 산 베오날드에게 예법이란 숨 쉬는 것과 같기에 이제 최신 트렌드만 알면 될 정도였다.

40분 만에 예법 선생은 눈물을 흘리며 베오날드의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도련님께 제가 가르칠 것은 없습니다! 도련님의 수업료는 받을 수 없습니다. 신이 내린 천부적인 창조의 기적 앞에! 저는 그저 길 안내밖에 할 게 없습니다.”

‘이건 뭔가 사기 치는 기분이라 찝찝하군.’

다른 이들에게 있어 예법은 그저 귀족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혹은 평민들과의 차이를 보여 주기 위한 격식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 예법 선생에게는 인생의 전부였다.

그것을 시골 출신인 14살짜리 청년이 약간의 지적만으로 관록과 기품을 몸으로 구현해 내자 기적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다.

물론 베오날드로선 사기 친 기분이라서 좀 찜찜했기에 그를 위로해 주었다.

우여곡절 끝에 예법 수업까지 끝났고, 시간은 흘러 어느덧 점심때.

점심 식사는 낮에 공무가 있거나 다른 볼일이 있을 수 있기에 가족이 모두 모이지 않았고, 각자 혹은 시간이 나는 이들끼리 모여서 먹었기에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후우~ 이제야 좀 마음 편히 있겠네. 알테리오, 아빠 없어서 외로웠지?”

삐이이잇!

이제부터 저녁때까지는 자유 시간. 성인식을 하지 않았기에 딱히 임무나 할 일이 있는 게 아닌지라, 저택 내 혹은 영지 내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하면 되었다.

물론 이미 무엇을 할지는 정해 놓은 그였다.

‘도서관! 도서관을 간다. 지식의 방주이자 요람! 한 시간짜리 감질나는 교육으로 못 얻은 정보를 보충하기 위해서!’

아직도 정보가 부족한 베오날드는 그것을 보충하기 위해 점심 식사 후 도서관으로 향하기로 했다.

그리고 같은 시각, 운동 부족인 주제에 격렬한 아침 운동을 한 것 때문에 근육통에 시달리는 랄트 도련님은 현재 끙끙대면서 침대에 누워 있는데, 그의 모친인 메이라 부인이 와서 그를 돌보고 있었다.

“괜찮니? 랄트? 정말이지! 그이도 너무하지. 저런 짐승 같은 잡종과 경쟁을 시키다니!”

“엄마아아아~”

“걱정 말렴. 저건 널 자극하기 위해서 데려온 잡종일 뿐이란다. 네 후계자 자리가 위협받을 일은 절대로 없어! 이 엄마만 믿으렴.”

“하지만 엄마아아, 여기서도 다 들리는걸요? 시종들이랑 집사들이 ‘드디어 캘러메인 백작가에 어울리는 후계자다.’라느니, ‘베오날드 도련님이 오셔서 다행이에요!’라느니, ‘그 깐깐한 벨 선생님이 만족하다니!’, ‘말리드 예법 선생님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대요!’라면서 그 커다란 녀석 이야기만 한단 말이에요.”

겉으로는 오만방자하게 행동하는 랄트라고 해서 모르진 않았다.

그래, 아무리 오만방자하다고 해 봐야 14살. 주변 사람들의 시선과 이야기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는 섬세한 나이대였다.

그동안엔 하인들이 아무리 중얼거려도 자신이 유일한 후계자였기에 상관이 없었지만, 이젠 압도적인 비교 대상이 생기다 보니 열등감이 폭발할 수밖에 없었다.

“괜찮아, 얘야! 저놈이 이상한 거다! 그리고 귀족이란 혼자서 모든 걸 다 하는 자가 아니란다. 그러니 모자라도 돼! 전통과 혈통이 가장 중요한 것이야! 그놈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가질 수 없는 걸 네가 가지고 있단 말이다!”

“하지만 엄마아… 걔 진짜 엄청 무서워. 아침에… 날 내려다보는데, 할아버지나 아버지보다 더한… 숨이 안 쉬어질 정도로 무서웠단 말이야.”

랄트 또한 아버지나 할아버지, 더 어릴 적에 자신을 축하하러 온 다른 귀족들이나 또 제국 수도에 가서 더 높은 귀족들은 물론 이 나라의 황제까지도 본 적이 있었다.

썩어도 준치라고, 그 경험 덕분에 오늘 쓰러진 자신을 걱정하듯 연기를 하는 베오날드의 눈빛 속에 너무나 차갑고 무시무시한 기운이 존재하는 걸 눈치챈 것이었다.

“그 눈! 안에 차갑고 공포스럽고! 무언가 거대한 게……! 제국 수도에서… 수도에서 아빠랑 할아버지를 적대하던 아저씨들이 보던 그 눈빛처럼… 무섭단 말이야!”

“진정하렴. 그리고 정신 차리렴! 괜찮아! 엄마도 있고! 엄마의 가족도 있단다. 그리고 그 반푼이가 그토록 강하다면 순혈인 너도 강해질 수 있단다! 그저 조금 늦은 것뿐이야!”

“…나도… 그놈처럼?”

“그래! 아니! 오히려 그놈보다 더! 네게도 가능성이 있어! 너에겐 캘러메인 백작가의 피도 있지만, 이 어머니의 고귀한 피도 흐르고 있단다! 그럼 그 천한 용병의 피를 절반 가진 놈보다 더 가능성이 있어! 시간이! 그저 시간이 조금 필요한 것뿐이란다! 그럼!”

그렇게 필사적으로 랄트를 위로하는 메이라 부인. 그녀의 말에 조금은 위안과 용기를 얻은 듯 덜덜 떨던 랄트는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그리고 자신이 14년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애송이였다는 것을 깨닫는 동시에 오늘 베오날드에게 얻은 굴욕과 그에게 압도당한 것을 떠올리면서 이대로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나도 할 수 있어… 할 수 있어? 진짜?”

“그럼! 이 엄마도 도와주마! 그러니 힘내렴! 너라면 14년쯤의 차이는 따라잡을 수 있을 거란다. 그 잡종보다 2배는 뛰어나니까!”

“어, 나! 해 볼게!”

그렇게 간신히 기운을 차리고 일어난 랄트의 눈빛은 오늘 오전과는 완전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메이라 부인은 남편의 의도대로 경쟁마 교육을 통해 아들이 한 걸음 성장한 것에 기뻐하면서도 베오날드라는 애송이의 역량이 자신의 생각을 자꾸 넘어서고 있는지라, 좀 더 신경을 써서 노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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