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다음 날, 오전 6시.
햇살이 창문으로 들어오고, 새들의 지저귐이 수면 중인 베오날드의 귀에 들려와 아침이라는 것을 알렸지만 그는 눈을 감은 채 가만히 누워 있었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들어오는 소리와 알테리오가 움직이는 기척이 느껴졌지만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삐이잇!
“일어났니? 알테리오. 자, 이거 먹으렴.”
삐이이잇!
어제 먹이까지 주며 친근감을 쌓은 덕분인지 베오날드를 지키던 알테리오는 얌전했다.
그리고 베오날드의 지척까지 온 인기척은 그대로 그의 귀에 대고 옥음으로 아침을 알렸다.
“일어날 시간입니다, 베오날드 도련님. 도련님?”
‘이거 정말 좋군. 좀 더 버텨서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만… 슬슬 일어나야겠지.’
양자가 된 첫날부터 안 좋은 인상을 심어 줄 순 없기에 베오날드는 이쯤에서 세인의 목소리를 즐기는 것을 그만두고 벌떡 일어났다.
“으음~ 좋은 아침이야.”
“일어나 계셨습니까?”
“아니, 깊은 수면의 심연 속에 잠겨 있었는데~ 여신의 목소리가 들려오더군. 그래서 딱 일어날 수 있었지.”
태연하게 세인을 여신으로 포장하면서 립서비스를 하는데, 그녀는 이런 유의 대화가 익숙하지 않은 듯 당황해서 뒤로 살짝 물러났다.
물론 느끼할 법한 소리이긴 했지만 외모가 개연성이라고, 이번 생의 육체는 단련을 통해서 탄탄하면서도 모친의 유전자 덕분에 잘생긴 외모에다 터무니없이 당당한 기품까지 얹어지니 전혀 이상하다는 느낌은 없었다.
“아무튼 그건 수련복인가?”
“예, 예.”
“얼른 입고 나가야겠군. 아~ 혹시 세인이 입혀 주는 건가? 대귀족의 저택에선 그런 경우도 있다고 들어서 말이야.”
“그런 일을 하려면 저 말고도 전속이 여럿 붙어야 합니다.”
“그건 정말 아쉽군. 알았네. 이리 주게.”
베오날드는 세인에게서 수련복을 받아서 곧바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세인의 안내를 받아서 저택을 내려가 연병장에 도착, 거기엔 이미 아침 단련을 위해 모여 있는 다른 기사와 병사들, 모두 합쳐서 약 1,000명이 모여 있었다.
베오날드는 눈치껏 그중 가장 맨 뒤의 열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굴러들어온 돌은 눈치를 잘 봐야 하는 법이지. 그나저나 백작가치곤 정규 병력이 너무 적군. 기사야 원래 찾기 힘드니 그렇다 쳐도…….’
전생에 자신도 백작가의 가주여서 그런지 자신의 집안과 비교할 수밖에 없었는데, 500년 전 자신이 막 백작가의 가주가 되었을 때에도 영지 직속군으로 95명의 기사와 1천의 기병, 3천의 보병을 이끌고 있었다.
‘…뭐, 난세라서 사람이 많이 죽었거나, 아니면 이 정도가 딱이라는 거겠지. 숫자는 용병이나 민병대로 채울 수 있으니 말이야.’
거기에 캘러메인 백작가의 영향 내에 있는 모든 가문에서 병력을 모으면 눈덩이처럼 불어나서 그들 모두 캘러메인의 이름으로 싸울 수 있는 것이었다.
‘요점은 역시 주변 가문보다 강하기만 하면 되니 남는 역량은 다른 곳으로 돌린 거겠지.’
베오날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백작가의 이 병력 숫자에 대해 납득했다.
군비란 결국 생산성 없이 그저 소모만 되는 비용이니 너무 많아도 영지 재정에 큰 부담을 주게 된다.
“저 사람이 베오날드 도련님인가?”
“랄트 도련님과 동갑이라는데… 전혀 그렇게 안 보이는데? 난 처음엔 어디서 파견 온 기사인 줄 알았어.”
“하지만 확실히 캘런 님과 닮긴 닮았군. 저 흑발에 청안… 캘런 님 아들이 맞아.”
새로운 인물인 자신에 대해서 떠드는 병사와 기사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베오날드는 들리지만 들리지 않는 척 표정 관리를 하며 가만히 서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상의를 탈의한 말로데브 경이 모습을 드러내는데, 노령에 가까웠지만 아직도 탄력 있고 육중한 근육이 터질 것처럼 불끈거리고 있었다.
‘도저히 노인이라곤 믿을 수 없군. 물론 상급 기사가 보통 괴물은 아니지.’
그렇게 연병장 단상 위에 선 그는 병사와 기사들을 주욱 살펴보더니 랄트가 없는 것을 알아차렸다.
“랄트 도련님은 아직인가? 베오날드 도련님은 이미 자리해 계신데.”
“죄, 죄송합니다. 금방 오실 겁니다.”
“됐다. 언제는 오신 적이 있더냐? 바로 시작을…….”
“자, 잠깐! 기다려! 나 왔어! 나 왔다고!”
그때, 멀리서 들려오는 다급한 목소리가 연병장을 가득 메웠다.
소리가 난 방향으로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는데, 거기엔 수련복을 입고서 체면도 잊고 허겁지겁 뛰어나오고 있는 랄트 도련님의 모습이 보였다.
그러면서 지각한 주제에 아주 당당히 맨 앞에 선 기사들의 대열 앞에 마치 대장인 듯 자리를 잡았다.
“…휴우~ 겨우겨우 왔네. 그 망할 반푼이 따위에게 질 수 없지. 한데 그놈은 어디에 있지? 아직도 산골인 줄 알고 잠들어 있나? 하하하핫!”
“베오날드 도련님은 저 뒤에 계십니다, 랄트 도련님.”
“뭐? 나보다 먼저 왔어?”
“예. 그것도 한참 전에 말이죠. 그리고 랄트 도련님, 거긴 기사들 훈련 대열이라서 따라가기 힘드실 겁니다. 그러니 저기 베오날드 님처럼 병사들 맨 뒷열로 가시지요.”
“윽! …아, 알았어.”
말데로브 경은 이 백작가의 숙장이며 유일한 상급 기사. 심지어 작위도 가지고 있기에 아무리 후계자의 아들인 랄트라고 한들 무시할 수 없었다.
그래도 심기가 불편한 건지 그는 투덜거리면서 베오날드의 옆에 가서 섰다.
그리고 말데로브 경의 지시 아래 본격적으로 아침 훈련을 시작했는데, 우선은 몸을 풀기 위한 체조를 한 이후에 곧바로 구보가 시작됐다.
병사들과 베오날드는 그대로 뛰어가는 한편, 기사들은 말데로브 경의 신호에 모두들 당장이라도 전장에 나갈 것 같은 갑주와 무구를 그대로 착용한 채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기사들의 훈련 메뉴는 역시 다르군.’
“빨리빨리 움직이지 못할까? 너희는 기사! 즉! 이 백작가의 검이자 방패이다! 나약한 검과 방패는 쓸모없다. 알았나? 더 날카롭고! 더 단단해지는 것이 우리 임무이자! 기사도다! 움직여! 란스터! 자네는 중급 기사로 승급한 주제에 지금 하급 기사들과 똑같이 가는 게 이상하다고 안 느끼나? 벌써 힘을 아끼려는 건가?”
말데로브 경의 호령과 함께 기사들은 자신들의 중무장을 다 걸친 채로 뛰기 시작했다.
다들 오러를 사용하면서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지만 그래도 말데로브 경은 아주 가혹하게 몰아치면서 그들을 저택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기사님들 쳐다볼 시간에 자신들이나 신경 써라! 저분들은 저래도 우리보다 강하기에 강한 훈련을 받는 것이니 말이다!”
“예!”
“도련님들도 이 훈련에 참여하신 이상 봐 드리지 않습니다. 이 꽉 깨물고 따라오십시오. 구보가 끝났다고 다 끝나는 게 아닙니다. 낙오하시면 두고 갈 겁니다.”
그리고 병사들을 인솔하는 지휘관은 베오날드와 랄트에게 다가와서 각오하라는 듯 엄포를 놓았다.
랄트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지만 베오날드는 여유롭게 고개를 끄덕이며 병사들의 구보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음~ 이건 너무 가벼운데?’
“하악… 하악… 하아악… 잠깐… 잠깐! 이거 어디까지 하는 거야? 하악…….”
‘…아, 이 친구, 딱 봐도 운동 부족이군.’
“하악… 하악…….”
영지의 치안을 상시 유지하고 전쟁을 대비하는 병사들인 만큼 기사들보단 못하지만 구보라고 해도 보통 사람들보다 더 많은 운동량을 가지는 게 어쩌면 당연했다.
물론 베오날드는 태어나면서부터 단련한 마나 호흡법과 검술 수련, 사냥 덕분에 그 운동량을 따라가는 데 무리가 없었지만, 그동안 배우는 것을 등한시하고 놀고먹기만 하던 도련님인 랄트는 금방 땀범벅이 되고 숨을 헐떡이면서 속도가 점점 느려졌다.
“기다… 기다려! 젠장! 기다리라고… 그학… 하악… 내가… 내가 왜 이런 걸… 하악… 쿠악!”
‘결국 한계에 달했나? 하긴 본래 운동 안 하던 놈이라면 수위를 바꿔야 하는데… 여기에 참여시킨 자체가 이상한 거긴 한데…….’
“젠장… 내가 왜 이런 걸… 젠장!”
‘음, 여기서 어떻게 해야 하나? 어설픈 우정 연기를 해야 하나? 아니면 버려두고 가야 하나? 으으음~ 일단은 멈춰야겠군.’
베오날드는 일단 지쳐서 엎어진 랄트의 곁으로 갔다.
무시하기엔 자신은 경쟁마 교육의 포지션이자, 양자로서 이제 형제가 되는 몸이었다.
행동 하나하나, 생각 하나하나 신중히 해야 하는 그로선 지금 어떻게 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지만, 답은 하나였다.
“괜찮으십니까? 형님?”
“이익… 씨이이익…….”
“일으켜 드리지요. 시작이 힘들 순 있습니다.”
“이거 놔! 너 따위 도움 필요 없어!”
‘오, 좋은 반응이고~ 그렇지. 귀족은 자존심이 꺾이면 시체지. 암, 이래야지. 이래야 말고~’
속으로는 대견하게 여기면서 베오날드는 일단 그의 손짓에 물러났다.
하지만 역시 전신의 힘이 빠져서 그런지 랄트는 일어나기 힘들어했는데, 베오날드가 내려다보는 형국인지라 더더욱 굴욕감은 커져만 갔다.
가쁜 호흡 때문에 괴로운 것도, 온몸이 무거운 것도, 땀으로 끈적이면서 짜증 나는 것도 모두 베오날드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젠장! 젠장! 다 이놈 때문에! 이놈 때문에에!’
‘하지만 능력이 없으면 그저 찌질한 놈일 뿐이지. 물론 고작 14살짜리고, 이제 막 뭔가 시작한 만큼 재능에 대해 판단하긴 이르지만 말이야.’
“이익… 이이이익! 고개 돌려!”
‘아, 내려다보는 게 불쾌했나 보군.’
랄트는 계속해서 올라오는 굴욕감에 짜증이 솟구쳤지만 일어날 수도 없고, 당장 저놈을 처리할 수 없어서 더더욱 큰 무력감까지 느꼈다.
생애 처음으로 느끼는 이 감정에 랄트는 어떻게 해서든 저놈을 이길 거라고 이 악물며 맹세했지만, 전생의 경험에 14년간 철저히 단련해 온 베오날드와 다르게 그동안 놀고먹고 다니기만 한 그가 무엇 하나 베오날드를 능가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리고 이후 여러 훈련들을 더 진행했지만 랄트는 구보로 진작 뻗어 버렸기 때문에 더 이상 참여하지 않고 앉아서 쉬면서 훈련하는 걸 지켜보기만 했다.
물론 베오날드는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병사들의 거친 훈련을 아무렇지 않게 소화했다.
“그럼 해산! 각자 씻고 정비 후 각자 업무에 들어가도록!”
“수고하셨습니다!”
아침부터 땀을 잔뜩 흘리고 난 뒤, 병사들과 기사들의 우렁찬 기합 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아침 훈련이 끝났다.
그렇게 돌아가려는데, 이제 좀 살 만한 건지 랄트가 베오날드에게 다가와 으르렁거렸다.
“젠장… 젠장, 두고 봐! 오늘은 이렇게 되었지만 나중에…….”
“그렇군요. 힘내십시오, 형님! 진정한 후계자가 되실 분이니 분발하셔야죠! 그럼 식사 때 뵙겠습니다.”
“젠자아아아앙!”
미소로 대답해 준 베오날드는 랄트를 두고서 세인과 함께 올라갔다.
그리고 갑작스러운 운동으로 전신의 근육들이 난리인 랄트는 아침밥이고 뭐고 그냥 씻고 자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가족들이 모두 모이는 아침 식사 자리를 빼먹으면 마치 자신의 자리를 빼앗길 것 같은 느낌에 이를 악물고서 씻으러 향했다.
그리고 저택에선 현재 렌겔 캘러메인 가주 대리와 랄트의 어머니인 메이라 부인이 함께 그것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음, 벌써부터 효과가 나오는 것 같군. 부인? 내 말이 맞지 않소?”
“애초에 이제 막 시작한 아이에게 너무 과한 게 아니옵니까? 저 천한 피가 섞인 것은 시골에서 뛰어놀던 들개 같은 것인데!”
“맞소. 일부러 랄트의 자존심을 자극하기 위한 것이지. 저 아이도 귀족가의 아이, 태어나면서 부여받은 것이 그냥 지켜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오. 부인도 알다시피 지금 난세잖소? 땅 한 쪼가리도 힘이 있으면 빼앗고, 힘이 없으면 뺏기는 그런 시대 말이오. 아무튼 오늘 저 아이가 깨달았으면 좋겠군.”
렌겔 가주 대리는 랄트가 자신의 뜻을 깨닫길 원하면서 그를 지켜보고 있었지만, 뒤에 있는 메이라 부인은 달랐다.
남편의 말이 일단은 옳아서 지금은 참고 있었지만 자신의 아들이 당한 굴욕을 마치 자신이 당한 것처럼 생각한 그녀는 반드시 이 굴욕을 저 베오날드에게 돌려주겠다고 생각하며 분노를 불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