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그렇게 양자로서의 인사를 마치고, 저녁 식사 자리에서도 베오날드는 대귀족 출신의 역량을 마음껏 드러내고 있었다.
무력은 감추더라도 이런 기품과 예절은 아낌없이 드러낼 수 있는 것은 한때 이곳 생활을 했던 어머니라는 핑계가 있어서였고, 주변에 있는 가신들에게 자신의 존재감을 새겨 넣어야 했기 때문이다.
“흠, 식사 예절에 대해서는 캘런에게 배운 것이냐?”
“예. 이곳에 온다고 하니 급하게 알려 주셨습니다. 하루에 열 번도 넘게 연습했지요.”
현재 베오날드의 뒤에는 혹시나 시골 출신인 그가 식사 예절에서 실수하면 지적하고 수정해 주기 위해서 메이드장과 집사장이 대기하고 있었지만, 베오날드는 그야말로 완벽하게 예의를 지키면서 기품 있게 식사를 하고 있었기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으며 오히려 당혹스러워하고 있었다.
‘…대체 뭐지? 이 도련님에게서 마치 대귀족 같은 품격이 느껴지다니……!’
‘이게 말이 되나? 심지어 스테이크는 일부러 가장 육질이 질긴 부위로 드렸는데… 저걸 접시 긁는 소리 하나 없이 잘라서 먹어?’
베오날드에게 굴욕을 선사해 주기 위해 메이라 부인의 입김을 받은 메이드장은 일부러 조리사에게 지시를 해서 베오날드의 식사에 수작을 부려 놓았지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감히 내게 수작질을 부릴 줄이야. 마나 호흡법이 아니었다면 큰일 날 뻔했군.’
나이프를 대자마자 느껴지는 고기의 질감에서 베오날드는 자신에게 수작을 부린 것을 바로 눈치챘다.
그에 그는 비밀로 해 둔 ‘기사’의 저력을 이용해서 소리 없이 스테이크를 베어 입에 집어넣었다.
‘하지만 어떤 의미로는 드디어 고향에 온 게 실감 나는 기분이야. 바로 이거지. 이상하게 몸과 마음이 평온해지는군. 후후후.’
“고기가 마음에 드나 보구나, 베오날드.”
“예. 역시 본래 있던 집과는 식사 레벨의 차이는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저도 모르게 심취해 버렸군요. 메이드장, 주방장에게 새로운 세상을 경험했다고 전해 주게.”
메이드장은 베오날드의 날카로운 단어 선택에 찔끔하며 진심 어린 경의를 담아서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식사를 마친 뒤, 베오날드는 집사장 텔런에게 저택에 대한 안내를 받기 시작했다.
자신이 머물 방과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영역, 거기에 각종 교육실과 출입 금지인 영역 등등… 주요한 곳부터 알려 주는 노집사였다.
“일단 중요한 곳은 여기까지입니다, 도련님. 그리고 내일부터는 본격적으로 랄트 도련님과 함께 여러 교육을 받으실 겁니다. 그 일정에 대해서는 따로 전속 메이드를 붙여서 알려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알겠네. 그리고 하나 물을 게 있는데, 알테리오는 내 방에서 머물게 해도 되나? 어차피 말들이 겁먹는지라 마구간에는 머물지 못할 테고, 아직 별도의 영역을 준비 안 한 것 같아서 말이야. 물론 구속을 해 두긴 하겠네. 이미 말데로브 경의 허락도 얻어 놨네.”
자신에게 주요한 협력자인 만큼 이름 정도는 팔아먹어도 문제없으리라 생각했다.
“말데로브 경의 허락이 있었다면… 저로선 달리 할 말이 없습니다.”
“좋네. 그럼 난 내 방으로 가서 짐을 풀지. 알테리오, 따라오너라.”
삐이익!
그렇게 텔런 집사장과 헤어져 알테리오와 함께 배정받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베오날드. 그래도 양자라서 그런지 침실치곤 방이 상당히 크고 화려했다.
고급스러운 세공과 장식이 된 가구, 침대는 혼자서 자는 용도가 맞는 건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거대했다.
“조촐하네.”
시골 촌놈이라면 본래 이 커다랗고 화려한 방의 모습에 감탄해야겠지만, 베오날드의 기준에선 심심한 방이었기에 그는 전혀 놀라지 않은 채 태연하게 짐을 풀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는 동안 매어 놓았던 알테리오의 목줄과 입마개를 풀어 주고 자유롭게 방 안에서 움직일 수 있게 해 주었다.
“많이 답답했지? 미안하다.”
삐이이잇!
“괜찮다고? 그러면 다행이네. 자, 알테리오, 밥 먹자.”
똑똑.
미리 가공해서 만들어 놓은 알테리오 전용 식사를 짐 속에서 꺼내 던져 주면서 먹는 걸 감상하는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베오날드가 문을 열자 거기엔 아주 오랜만에 그의 눈을 호강시킬 만한 아름다운 미녀 메이드가 서 있었다.
전생의 대륙 전체에서 고르고 고른 미녀들을 모두 섭렵한 베오날드 폰 노이멀. 그렇기에 그의 기준점은 상당히 높은 축이었는데 그것을 충족시킬 정도였다.
“베오날드 도련님이신지요? 저는 오늘부터 도련님의 전속 시중을 맡은 메이드, 세인이라고 합니다.”
“…오오!”
베오날드는 감탄하면서 자신을 세인이라 소개한 메이드를 바라보았다.
잡티 하나 없이 건강한 색을 띤 피부, 길게 늘어뜨린 색이 옅은 적발은 화려함을 좋아하는 베오날드의 취향 그 자체였으며, 그 속에 있는 에메랄드빛 눈동자와 또렷한 이목구비의 청초한 인상, 그 인상에 반역하듯 약 170센티미터 정도의 큰 키에 풍만한 몸매가 엄격한 미녀 판독기인 베오날드를 만족시키고 있었다.
“왜 그러시는지요? 무언가 문제가 있사옵니까? 도련님?”
“너무나 아름다워서 말을 순간 잊어버렸네. 알다시피 내가 시골뜨기라서… 깜짝 놀랐어.”
“그렇습니까? 그러면 곧바로 내일 일정에 대해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음, 농담에 태클도 안 거는 사무적인 타입인가? 하지만 그래도 아주 좋아.’
무심하게 자신의 말을 무시했지만, 미녀라면 모든 것이 용서가 되며 너그러워지는 베오날드였다.
귀족은 자신의 정원을 가꾸는 자. 당연히 거기에 아름다운 꽃은 필수다.
그 꽃은 때론 재능, 능력이기도 했지만 역시 아름다움이라는 단어와 가장 어울리는 것은 ‘미모’일 것이다.
‘이거 하나는 아주 마음에 드는군. 퀴퀴한 집사보단 역시 메이드지. 누구 수완인지 감사할 따름이군.’
“우선 내일 아침 오전 6시에 기상. 이후 30분까지 연병장에서 말데로브 경과 함께 체력 및 검술 단련의 시간을 가집니다. 그리고 8시에 백작님을 비롯한 일가와 아침 식사.”
그리고 베오날드가 생각하는 사이 내일 일정에 대해서 설명해 주는 세인이었다.
“9시부터 12시까지 예법과 각종 학문의 교육 시간을 가지며 12시부터 13시까지는 간단히 점심 식사, 그리고 오후엔 자유롭게 시간을 보내시면 되며 이후 7시에 다시 일가와 저녁 식사를 하고 마찬가지로 자유롭게 시간을 보낸 뒤에 취침 시간은 10시입니다.”
“자유 시간엔 어디까지 자유지?”
“금지 구역을 제외한 저택 내에서의 행동 혹은 영지 및 도시를 돌아다니는 것이 허용됩니다. 혹은 무언가 하실 때 보고만 해 주시면 대체로 허락이 되실 겁니다. 도련님, 그럼 내일 아침 뵙겠습니다.”
“아, 잠시만 기다리게.”
베오날드는 떠나려는 그녀를 붙잡고, 뒤에서 앉아 있던 알테리오를 불렀다.
삐익 소리를 내면서 나귀 크기의 알테리오가 다가오자 긴장한 세인이 몸을 움츠리는데, 베오날드는 그녀의 손에 알테리오의 먹이를 주면서 말했다.
“내일 나를 깨울 때 이 녀석이 분명 경계할 거니까… 지금 친해지는 게 좋을 것 같아.”
“예? 아, 그리폰과 같이 주무시는 건지요?”
“마구간에 이 녀석을 넣으면 밤새도록 말들이 불안 증세에 시달리며 잠도 못 잘걸? 차라리 내 곁에 두는 게 낫지. 아무튼 세인, 알테리오에게 먹이를 주고 쓰다듬어 줘 봐. 너무 무서워 말고~”
“아, 알겠습니다, 도련님.”
베오날드에게 먹이를 받은 세인은 조심스럽게 알테리오에게 그것을 내밀었다. 먹이를 본 알테리오는 천천히 다가가서 그것을 부리로 잘라 내면서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세인은 곧장 알테리오의 머리 쪽으로 손을 올리려 했지만, 아직 경계심이 풀리지 않았는지 알테리오는 금방 그녀를 위협했다.
꾸와아아아악!
“꺄!”
‘오~ 귀여운 소리.’
베오날드는 놀라서 뒤로 넘어지려는 그녀를 품에 안으며 달려드는 알테리오를 제지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그녀의 온기를 느끼고 감격에 빠졌다.
이번 생에 처음으로 느끼는 여성의 육체. 태어나서 곧장 마나 호흡법, 검술, 약학, 사냥 등등…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았기에 오래 참았던 그였다.
물론 더스티클록 영지에서도 하녀라든가 마을 처녀들이 있었지만 결국은 시골 레벨. 눈에 차는 여성이 없어서 자연히 관심도 생기지 않았다.
“알테리오, 진정해. 그녀는 너에게 해를 입힐 생각이 없어. 친해지고 싶은 거야.”
꾸우우… 삐이이이!
놀란 그녀를 꼬옥 안으면서 알테리오에게 말하는 베오날드. 사실 이것도 베오날드가 꾸민 계획이었다.
알테리오를 길들이는 것을 이용해서 그녀와의 접촉을 만들고 호감을 쌓는 것으로, 제대로 길들이게 할 생각이었다면 성급히 손을 내밀었을 때 말렸을 것이다.
“이런, 조금 성급했군. 시범이라도 보여 줘야 했는데. 세인, 괜찮나? 정 안 되면 사슬과 입마개를 해 놓을까?”
“아, 아닙니다, 도련님.”
갑작스러운 사고에 무뚝뚝한 모습이 조금은 풀리고, 얼굴이 살짝 빨개진 그녀를 보면서 귀엽다고 생각한 베오날드는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참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마음 같아선 이대로 침대로 데려가서 오늘 밤, 현생의 정열적인 첫 경험을 하고 싶었지만 간신히 참아 냈다.
“일단 다시 한번 시도해 보겠습니다. 이 정도로 질 수 없지요.”
‘오~ 근성 있는 타입이네. 메이드답지 않은걸?’
의지를 굳힌 건지 세인은 다시 일어나서 알테리오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굳은 표정으로 노려보는 느낌이라서 그런지 알테리오는 날개를 세우면서 경계하기 시작했는데, 베오날드는 그녀의 시야를 차단하며 조언을 해 주었다.
“일단 어깨랑 표정의 힘을 푸는 게 좋다고 생각해. 나부터 경계심을 풀어야 상대도 경계심을 풀지. 자, 여기 간식.”
“그렇군요. 해, 해 보겠습니다. 후우우~”
심호흡을 한 세인은 베오날드의 조언에 따라 긴장을 풀고 편한 표정으로 다시금 알테리오에게 먹이를 내밀었다.
그러자 이번에도 알테리오는 조심스럽게 다가와서 조금씩 먹이를 잘라 먹었고, 세인은 다 먹은 알테리오가 아쉬운 듯 손을 핥는 것까지 침착하게 기다렸다.
삐이이~
“이건 뭐죠?”
“양이 부족한가 보네. 원래 이 녀석의 식사 시간이었거든. 자, 여기 몇 개 더 줄게. 그리고 천천히 경계심을 풀면서 접촉을 늘려 봐.”
베오날드가 보는 아래 직접 먹이를 주던 세인은 조금씩 알테리오와의 거리를 좁혔고, 그렇게 약 30분간 먹이 공급을 하자 알테리오는 그녀에게 머리를 쓰다듬는 것을 허락하게 되었다.
“됐어요! 도련님! 아… 이게 그리폰의 깃털이구나.”
‘으음~ 아주 좋군!’
알테리오의 머리도 쓰다듬고, 깃털을 만지작거리면서 세인은 행복한 듯 웃었다.
그리고 그 모습이 더더욱 마음에 드는 베오날드였다.
그렇게 알테리오와의 접촉을 빌미로 그녀와의 거리감을 줄인 베오날드는 혹시 모른다는 이유로 그녀에게 알테리오용 간식을 몇 개 주고 돌려보냈다.
“만에 하나라는 말이 있으니까 말이지. 아무튼 잘 부탁하지.”
“예, 도련님. 정말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알테리오, 앞으로 잘 부탁해요. 내일 아침에 깨워 드리러 오겠습니다.”
삐이익!
그렇게 세인은 베오날드에게 예를 갖추고 물러났다.
긴장이 풀려서인지 무뚝뚝한 얼굴을 풀고 인사하는 모습에 베오날드는 절로 미소가 나왔다.
그리고 잠시 후, 여독을 풀기 위해 씻고 옷을 갈아입은 그는 앞으로의 생활을 기대하며 잠자리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