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그렇게 ‘노이멀 10식’을 뚫어 낸 이후, 가을, 겨울이 지나고 다시 한 해가 시작되자 캘러메인 영지에서 사람들이 베오날드를 맞이하러 왔다.
심지어 맞이하러 온 사람들 속엔 충격적인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영지 유일의 ‘상급 기사’인 말데로브 경이었다.
캘러메인 영지의 인물 관계도에 대해 사전에 교육받았던 베오날드도 영지의 최중요 인물이 자신을 맞이하러 오자 내심 당황했다.
‘와우… 왜 이렇게 높으신 분이 왔어?’
“모시러 왔습니다, 베오날드 도련님.”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니까… 말데로브 경이셨죠? 아니, 남작님으로 칭해야 하나?”
“하하핫, 저는 평생 기사로 살아온 몸입니다. 경이면 좋습니다.”
평온히 인사를 나누며 악수를 하지만, 서로 간에 긴장감이 강하게 맴돌았다.
숨겨 둔 카드는 가능한 한 많을수록 좋았기에 베오날드는 아직 자신이 기사라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았는데, 이렇게 갑자기 상급 기사나 되는 양반이 오면 빼도 박도 못하기 때문이었다.
악수를 하는 순간 이미 자신의 마나를 탐색하려는 듯 말데로브 경의 마나가 흘러들어 왔고, 베오날드는 어쩔 수 없이 그의 마나를 저항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호오? 설마설마했는데, 진짜일 줄이야.”
“예? 그게 무슨…….”
“베오날드 님은 ‘천연 기사’이십니다. 허허허! 캘러메인 백작님의 피가 더 크게 빛나겠군요.”
“천연… 기사?”
“예. 보통은 마나 호흡법으로 마나를 모아서 오러를 사용할 수 있는 게 기사이지만, 때론 선천적으로 그게 가능한 자들이 나오곤 합니다. 조상 중 마나를 자유자재로 쓰는 자의 피가 섞이거나 혹은 타고난 재능일 수 있죠. 아무튼 그렇게 갑자기 나오는 자들을 ‘천연 기사’라고 합니다.”
“아하~”
이미 다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지금 처음 안 것처럼 반응하는 베오날드. 어차피 까발려진 셈이니 그냥 이대로 밀고 가기로 했다.
그러면서도 시작부터 뭔가 꼬였다는 생각에 심란해하는데, 알테리오가 베오날드를 날개로 툭툭 건드렸다.
주인의 심기가 불편함을 알아챈 것이리라. 특이한 점은 마물의 성장 속도는 상상 이상으로 빠른 건지, 이젠 대형견 크기를 넘어서 나귀 정도까지 자라 있다는 거였다.
삐이익?
“어, 알테리오. 왔냐? 보아하니 짐은 다 실은 것 같네.”
삐이익!
알테리오의 몸엔 베오날드의 각종 짐 가방들이 매달려 있었다.
그동안 알테리오를 가르친 성과 중 하나로 무언가 몸에 실어 나르거나 탈 때를 대비한 훈련이었다.
나귀 정도 크기로 큰 지금, 탑승 훈련은 이미 조금씩 하고 있었다.
베오날드의 키와 체중이 동년배에 비해 압도적으로 커서 제대로 뛰어다니기 힘든 점이 문제였지만, 그 점은 좀 더 성장하면 해결될 것이다.
“오… 이 그리폰은 그때 백작님의 생일잔치 때 소동의 원인이었던 그건가 보군요. 이 정도로 늠름해졌을 줄이야.”
“키우는 데 꽤 고생했죠. 아무튼… 알테리오! 이 마차를 따라오면 돼. 알았지? 그럼 전 이만 가 볼게요! 아버님! 어머님!”
삐이이이!
그렇게 인사를 마치고 마차에 탑승하자 마차는 곧바로 출발했다.
알테리오는 울음소리를 내면서 마차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날진 못하지만 그리폰인 만큼 체력과 지구력이 남달라서인지 아주 여유롭게 따라오고 있었다.
오히려 마차의 말이 그리폰인 알테리오를 보고 놀라서 속도를 더 올리는 게 문제였기에 살짝 거리를 더 벌리라고 지시할 수밖에 없었다.
“설마하니 말이 겁을 먹어서 폭주할 줄이야. 후우~ 가면 알테리오 녀석에게 맛있는 걸 더 줘야겠네요.”
“그나저나 정말 대단하십니다. 그리폰을 결국 길들이는 데 성공한 셈인가요? 그것만으로도 도련님의 가치는 올라갈 겁니다. 게다가 ‘천연 기사’이기까지 하니 캘러메인 백작가에서도 놀라겠군요.”
“과찬이십니다. 그런데… 말데로브 경, 죄송하지만 제가 ‘천연 기사’인 것을 비밀로 해 주실 수 없겠습니까?”
“흠? 어째서요? 도련님의 가치가 오를 좋은 기회가 아닙니까?
“저는 지금 ‘경쟁마 교육’을 위해서 입양이 되는 겁니다. 그 목적이 중요하지요. 어느 정도 따라잡을 수 있는 한도 내에 있으면 사람은 도전과 투지의 의욕을 세우지만, 절대 이기는 것이 불가능한 존재라고 판단하게 되면 포기해 버립니다. ‘천연 기사’는 아마 그런 종류의 문제겠지요.”
베오날드의 논리는 지금 상황에서 매우 적절한 신의 한 수였다.
일단 상급 기사에게 자신이 오러를 사용할 수 있는 기사라는 걸 들켰지만 지금 이 핑계라면 비밀로 묶어 둘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더불어 랄트 도련님을 위하는 것처럼 보이기에 가문에 대한 충성심이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어서 이중으로 말데로브 경의 환심을 살 수 있었다.
“호오? 그런 기특한 생각을! 하나 도련님도 엄연히 이제 양자이기에 후계자의 자격이 생깁니다만?”
“하하하, 농담도 지나치십니다. 천한 용병의 피가 절반이 섞인 제가 어떻게 유서 깊은 캘러메인 백작가의 후계자 자리를 맡겠습니까? 설사 맡더라도 큰 피바람이 불 것이고, 지금 같은 난세에 그것은 영지민을 위한 일이 아닙니다.”
‘허어! 가주 대리님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 이유가 달리 있는 게 아니구나!’
14세에 맞지 않은 무(武)의 역량을 가지고 있고 ‘천연 기사’인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인데, 사려 깊고, 귀족계의 성질에 대해서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물론 그것이 완벽한 진심이라고는 믿지 않았지만, 저런 말을 생각한 것 자체가 보통이 아니라는 증거였기에 말데로브 경은 감탄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렇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역시 역사에 이름을 날릴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도 있습니다. 하하하, 물론 지금은 아니며, 캘러메인 백작가 안에서 그런 다툼은 벌이고 싶지 않습니다. 아, 그 전에 랄트 도련님의 교육이 먼저겠지만요.”
“허허허, 알겠습니다, 베오날드 도련님. 제 기사도에 걸고, 도련님이 ‘천연 기사’라는 사실은 도련님이 스스로 밝히시기 전까지 침묵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허허, 별말씀을요.”
남작의 작위를 받았지만 영지를 반납해 가면서 계속해서 기사로서 한 가문에 충성을 바쳤던 자의 맹세라면 믿을 만한 가치가 있었기에 베오날드는 그의 맹세를 믿고 안심하기로 한다.
그리고 말데로브 경은 베오날드가 상상 이상으로 걸물이라는 것을 판별하고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듯, 창밖을 달리는 기사들 중 자신의 가신을 불러서 몰래 지시를 내렸다.
‘음, 뭐지? 잘 안 들리는걸? 뭔가 꿍꿍이가 있나? 지금까지 한 질문과 답변에서 저 충심 가득한 기사의 심기를 거스를 만한 발언은 전혀 없었을 텐데?’
말데로브 같은 기사 타입은 500년 전에도 흔한 것으로, 비위를 맞춰 주기도 아주 쉬운 편에 속했다.
능력이 있지만 혈통의 중요성을 아는 태도, 영지의 안정과 평화, 그리고 자신도 그것에 기여하겠다는 비밀 맹세와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한 젊은이의 혈기를 보이는 모습까지. 사전에 답안지를 작성해 왔다고 할 만큼 완벽한 대답이었는데, 그의 태도가 묘하게 느껴졌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도련님. 하하하. 아무튼 영지에 도착하시면 다른 일 같은 건 없고, 곧바로 가주 대리님의 인도 아래 양자로 입양하게 되었다는 선언과 함께 이제는 ‘더스티클록’이 아니라 ‘베오날드 캘러메인’이 되시는 겁니다.”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거처는 본 건물로 해 드릴 것이고, 수련장 문제인데……. ‘천연 기사’이신 걸 감추실 수 있게 도와 드리려면 역시 ‘개인 수련장’을 쓰는 게 좋겠지요?”
“그래 주신다면 더 바랄 게 없습니다. 저 역시 혼자 수련하는 게 마음이 편하기도 하고, 또… 저를 납득 못하시는 분들도 있을 테니까요.”
아까 전에 전한 말이 무엇인지는 모르나 그래도 말데로브 경의 환심을 산 건 확실한 듯, 이런저런 상담을 해 주면서 빠르게 자신의 요구를 들어주는 그의 모습에 일단 안심이 되었다.
이제부터 전장이나 다름없는 곳에 가는데 이런 협력자의 존재는 매우 소중했으니 말이다.
‘적어도 내가 캘러메인 백작가에 척을 지지 않는 한 아군이 될 테니 아주 좋군.’
‘도저히 내가 지금 14살 도련님과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안 드는군. 마치 과거 백작님과 이야기하는 기분이야.’
말데로브 경은 생각에 잠긴 베오날드에게서 풍겨지는 분위기와 기품에 감탄하면서도 진심으로 안타까워했다.
저 정도의 재능과 능력을 가진 아이가 만약 절반의 혈통만 좋았더라면?
만약 저 아이가 지금 랄트 도련님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더라면?
캘러메인 백작가의 미래는 앞으로 100년은 빛났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어쩔 수 없는 일이야.’
하나 현실은 현실. 말데로브 경은 속으로는 안타까움을 토로하면서도 베오날드와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다가 어느덧 캘러메인 영지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리고 도시의 거리를 지나서 캘러메인 백작가의 저택에 도착한 베오날드는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렌겔 캘러메인 가주 대리와 기사들을 보았다.
“어서 오렴. 오느라 수고 많았다.”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가주 대리님.”
“가문의 일을 위해 부른 것인데 인사는 무슨. 아무튼 이 저택에 온 순간부턴 너는 캘러메인의 일원이며, 더 이상 더스티클록이 아닌 캘러메인의 성을 따르게 되는 것이다.”
“가문에 부끄러움이 되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사전에 미리 맞춰 놓은 듯한 예의와 겸양이 가득한 대화에 가주 대리의 뒤에 모여 있던 백작가의 가신들과 저택을 관리하는 자들은 깜짝 놀랐다. 그리고 14세로 보이지 않는 성숙한 외양에 늠름한 체구, 거기에 예의에 기품이 서려 있는 베오날드의 모습에 경악했다.
다들 조사한 정보에 의하면 그저 시골 출신의 힘 좀 쓰는 무뢰배의 이미지에 가까웠던 데다, 총명하다는 말은 립서비스인 줄로만 알았는데, 막상 백작과 마주하며 나누는 대화와 태도를 보니 정반대였던 것이다.
‘…이게 말이 되나? 저게 14살이라고?’
‘랄트 도련님이랑 너무 비교되는데?’
‘사전에 미리 연습한 거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저건 말이 안 돼. 아니, 옷자락이 흔들리지 않는다고? 저건 보통 연습으로 되는 게 아닐 텐데?’
‘왜 갑자기 그의 뒤에서 황도의 모습이 보이는 거지?’
같은 일도 수년을 하면 숙달이 되며 수십 년을 하면 달인이 된다.
그리고 대귀족으로서 60년을 보낸 베오날드라면 행동만으로 대귀족의 기품과 카리스마를 재현하기에 충분했다.
특히나 그는 항상 황제를 모시면서 그를 압도하고 휘둘러야 했고, 자신의 자리를 노리는 다른 귀족들을 짓눌러야 했기에 더더욱 날카로운 카리스마와 기품을 내기 위해서 엄청난 노력을 해 왔다.
‘말도 안 돼! 어째서 천것의 피가 흐르는 저놈에게! 내가… 내가!’
그리고 그 기품은 귀족으로서 지체가 높고 오만한 자일수록 더욱 강하게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메이라 부인은 베오날드의 기품을 마주하자 자신도 모르게 덜덜 떨면서 뒤로 물러났다는 사실에 큰 굴욕을 느꼈다.
간신히 마음을 다잡고 바라보려고 하는데, 가족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서 다가오는 베오날드가 보였다.
마치 거대한 포식자가 자신을 잡아먹으러 오는 것 같은 느낌에 도망치고 싶었지만, 고작 14살짜리에게 겁먹어선 안 된다는 오기로 버티며 그의 인사를 받았다.
“이제부터 잘 부탁드립니다, 어머님. 후계자이신 랄트 도련님을 형님으로 모시며 잘 보좌하겠습니다.”
“어, 어… 그래요. 잘 부탁해요.”
간신히 압박감을 견디면서 베오날드의 인사를 받은 메이라 부인이었지만, 가슴속엔 이미 크나큰 굴욕감이 새겨진 지 오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