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신도 쓸데가 있다-22화 (22/259)

[22화]

캘러메인 백작가, 응접실.

그리고 베오날드가 마지막 평화로운 시간을 보낼 무렵, 캘러메인 백작가에서는 예정대로 렌겔 가주 대리의 주최하에 주요 귀족들과 함께 후계자인 랄트에게 ‘경쟁마 교육’을 하는 일에 대해 토의하고 있었다.

참여자는 역시 캘러메인 백작 아래의 파벌 대표라고 할 수 있는 델마인 남작과 젤커드 자작, 그리고 이 영지 유일의 상급 기사이자 군 지휘관인 말데로브 경, 마탑에서 파견 나온 4급 마법사인 셀리나를 비롯해서 텔런 집사장, 에트랑 메이드장, 그리고 자신의 둘째 부인이자 지금은 정실인 메이라 부인까지 모두 모여 있었다.

“그래서, 내가 저번에 제안한 경쟁마 교육에 대해서는 다들 어떻게 생각하나? 랄트는 내년이면 성년이 되는 몸인데, 들리는 소문과 근래에 일으킨 사건 등등으로 봤을 때, 그 아이가 후계자로서 적합한 수준의 지식 혹은 무예, 기품, 예의를 가지고 있다고 보기에는 무리라고 생각하는데.”

“뭐, 그 말씀엔 전혀 이견이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마님?”

“크흠… 예.”

본래 메이라 부인은 경쟁마 교육 자체를 무산시키려고 했지만, 후계자인 랄트의 상태는 그들의 파벌인 델마인 남작이 보기에도 상태가 많이 안 좋았다.

보통은 지배당하는 입장에서 지배하는 자가 재능 없는 범재이거나 무능하면 파벌들에겐 좋은 상황이었지만, 랄트는 문제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최소한 귀족끼리의 체면과 룰은 지켜야 할 게 아닌가? 백작을 위해서 혈족들이 가지고 온 선물을 빼앗는다거나, 내년이면 성인인데 아직도 놀이터인 양 저택을 쏘다니며 사람들에게 함부로 행동하는 건 정말로 선을 넘어 버린 행동이었다.

그래서 델마인 남작은 일단 교육은 무조건 해야 한다고 메이라 부인을 설득한 것이었다.

“의외로군. 필시 반대할 줄 알았는데 말이지.”

“아닙니다. 저희 또한 랄트 도련님의 교육을 좀 더 강화해야 한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가? 허허허, 아무튼 그 대상으로는 마침 내 여동생인 캘런의 자식이 적합해 보이더군. 나이도 랄트와 같은데, 기량이 보통이 아니야. 홀로 산속의 곰이나 늑대를 사냥하거나 그리폰 새끼를 데려올 정도의 무위를 지니고 있고, 품위와 예의 모두 캘런이 잘 가르쳤는지 나도 놀랄 정도더군.”

“14살에 곰이랑 늑대를요? 말이 됩니까?”

“나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증거가 있는 데다, 직접 만나 보면 생각이 달라질 걸세. 도저히 14살이라곤 믿을 수 없는 모습이었으니 말이야. 아무튼 그렇게 뛰어난 혈족이니 랄트 곁에 두면 분명 큰 자극을 받을 걸세.”

렌겔 가주 대리의 말에 다른 귀족들은 미심쩍다는 표현을 했지만, 사실 이미 각자 조사를 통해서 베오날드의 프로필에 대해선 파악하고 있었다.

‘경쟁마 교육’을 하더라도 보통은 다른 인재를 추천하거나 혹은 자신들 파벌에 있는 사람을 밀어 넣고 싶었지만, 이번엔 도저히 무리였다.

‘세상에 저딴 14살짜리가 어디 있어? 괴물이 따로 없네.’

‘역시 썩어도 캘러메인의 피를 받은 자라는 건가? 젠장!’

“뭐, 다들 반대 의견은 없을 거라 생각하네. 랄트가 자극을 받으려면 이 정도로 압도적이어야 하니까. 근데 하나 더 문제는 그 아이의 ‘격’을 어느 정도 올려 줘야 랄트가 밑으로 보지 않을 터인지라……. 그렇지 않으면 일방적인 열등감만 커질 테니 말이야. 어차피 혈족이니 내 양자를 들이고 싶네만?”

“그건 절대 반대입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렌겔 가주 대리가 예상한 대로 ‘양자’로 들이는 것은 델마인 남작 측이 철저히 반대했다.

물론 교육 부분에서는 이견이 없었지만, 딱 봐도 보통 이상의 인재가 캘러메인 백작가에 들어가는 것을 어떻게든 막고자 함이었다.

그리고 메이라 부인은 당연히 자칫 잘못해서 저 베오날드라는 소년에게 후계자 자리를 빼앗길까 봐 걱정하고 있었고 말이다.

“그럼 어떻게 하면 좋겠소? 적어도 ‘급’이 맞아야 랄트도 자극을 받을 텐데? 가장 쉽고 빠른 방법 아니오?”

“다른 귀족 가문과 혼인시키는 방법도 있지 않습니까?”

“물론 그것도 있지. 하지만 우리 혈족이긴 해도 절반은 천한 용병의 피. 그에게 누가 딸을 내어 주겠나? 캘런 같은 경우 말고는 말이지. 우리 혈족이니 우리가 양자로 들이는 게 가장 깔끔하다고 보네만?”

“윽…….”

렌겔 가주 대리의 말은 지극히 합리적이고 정석적인 방법이었다.

천한 용병의 피가 섞여 있다는 점을 역이용하자, 델마인 남작 파벌은 순식간에 할 말을 잃었다.

그래서 그는 젤커드 자작 쪽으로 눈빛을 보내 봤지만, 그는 시선을 마주치지 않고 무시했다.

그러던 중 갑자기 한 사람이 손을 들었는데, 바로 이 영지의 유일한 상급 기사이자 군을 지휘하는 말데로브 경이었다.

“제가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가주 대리님.”

“말데로브 경이? 말씀해 보시오.”

“아이의 무재에 관심이 가는군요. 그리고 제게 딸 하나가 있기도 하고, 또 저는 일단 남작의 작위도 가지고 있으니 ‘격’으로 봤을 때도 어울릴 것 같기도 합니다.”

말데로브 경은 이 영지에 하나뿐인 상급 기사. 인간을 초월한 무위를 지닌 기사인 만큼 여러 곳에서 작위와 부귀영화를 미끼로 그를 모셔 가려는 시도도 많았다.

하나 그는 오직 캘러메인 백작가만을 충성스럽게 섬기는 것을 삶의 보람으로 삼았고, 남작의 작위와 영지를 받았지만 영지는 모두 캘러메인 백작에게 바친 것이었다.

그래서 기사이자 귀족, 두 카테고리를 만족하는 자이며 상급 기사의 가치가 높은 만큼 혼처로는 더할 나위 없는 곳이었다.

“14살에 그 정도 용맹을 가진 자라면 관심이 안 갈 수 없죠. 허허허, 게다가 캘러메인 백작님의 피를 가진 자 아닙니까? 그러니 어쩌면 ‘천연 기사’일지도 모르고 말이죠.”

“과한 칭찬은 고맙네만, 그 아이가 ‘천연 기사’인지는 보장할 수 없네. 나도 그 아이를 오래 본 게 아니니 말이야. 아무튼 듣던 중 좋은 소식이군. 말데로브 경의 집안과 혼사라니. 이거 내가 더 기뻐해야 할 일인…….”

“자, 잠시만! 잠시만요! 당신! 그런 혼사 자리라면 그런 천한 것보다는 우리 랄트와 맺어 주는 게 먼저 아닌가요?”

뜬금없이 좋은 제안이 들어와서 가주 대리가 좋아하던 찰나, 메이라 부인이 갑자기 찬물을 끼얹었다.

상급 기사와의 혼약으로 이어지는 건 이 백작 가문에 큰 이익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런 좋은 자리를 근본 없는 집안 아이에게 주는 건 너무나 아까운 일이었기에 반발한 것이었다.

“아니지, 랄트는 후계자니까 더 좋은 혼처를 찾아 줘야지. 안 그렇소, 부인?”

“맞습니다, 마님. 랄트 도련님은 차기 백작의 자리에 앉으셔야 할 분 아닙니까? 그러면 적어도 백작가 이상의 혼처를 찾아야지 않겠습니까? 물론 저 또한 영광이지만 말입니다.”

“아… 그…….”

메이라 부인은 태연하게 대답하는 남편과 말데로브 경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순간 발끈해서 일어나긴 했지만, 그들의 말대로 ‘경쟁마 교육’의 격을 위해 맺는 혼사와 가문의 후계자가 될 아이의 혼사는 레벨이 다른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워낙 지금 후계자 라이벌이 될지 모르는 문제로 인해 민감해진 바람에 괜히 잘못 끼어든 것이었다.

‘저 멍청한 년, 얌전히 있으면 중간은 가는 것을……. 그나저나 이거 좋지 않군. 양자로 들이는 게 훨씬 더 안전한 선택이 되었잖아?’

아무리 같은 편이지만 저런 우행은 한심하기 짝이 없다고 델마인 남작은 생각했다.

그러면서 랄트 도련님이 왜 그 모양인지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이렇게 되면 차라리 상급 기사와의 혈연을 막아야 했다.

지금 14살에 곰과 늑대를 사냥할 정도의 무골인 그놈이 혹시라도 저 ‘말데로브 경’의 마음에 들어서 마나 호흡법과 검술이라도 배웠다가는 백작가의 힘은 더 강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크흠! 하지만 그 아이는 아직 성년이 아닙니다, 가주 대리님. 그리고 아이의 행복도 생각하셔야죠, 말데로브 경. 본인들의 의사도 모르는 판국인데, 너무 성급하신 것 같습니다.”

“그러면 남작이 좋은 혼처를 알아봐 주겠소?”

“제 선에 그런 자리가 있으면 좋겠습니다만… 아쉽게도 없군요. 그러니 양자 건이 가장 합당하다고 뵈옵니다.”

‘…반대할 땐 언제고, 간교한 자 같으니!’

‘체면을 구겼지만 지금으로선 이게 최선이다.’

겉으로는 태연하게 웃고 있었지만, 렌겔 가주 대리와 델마인 남작은 속으로는 서로의 존재에 대해 껄끄러움을 느꼈다.

하지만 그래도 결국 델마인 남작은 상당한 파벌을 이끄는 귀족이며 힘이 있었기에 존중할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경쟁마 교육 건은 결국 베오날드를 양자로 들이는 것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

물론 이런 과정이 결정된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진행되는 것은 아니었다.

베오날드의 부모에게 이 소식이 전해진 것은 그 뒤로 한 달이 지나서였다.

그들은 자신의 아들을 백작가에서 양자로 삼으려 한다는 것에 처음엔 놀랐지만, 이내 백작의 생일잔치에 갔을 때 눈에 띄고 말았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하니? 오라버니… 그러니까 가주 대리님이 너를 양자로 삼으려고 한다는데?”

“음… 뭐, 귀족가에선 흔히 있는 일 아닌가요?”

“그야 흔히 있는 일이지만, 너무 태연한 거 아니니?”

“양자든 뭐든 제 부모님은 변하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어차피 이 제안… 거부할 수 없잖아요?”

“베오날드…….”

가주 대리의 명령은 사실상 백작의 명령이나 다름없었다.

이 시골 약소 영지의 힘으로는 저항한다는 생각 자체를 할 수 없는 일인 만큼 얌전히 베오날드를 양자로 보내야만 했다.

“나는 네가 너무 걱정되는구나. 이 시골에서만 살던 네가… 그 잔혹하고 무서운 귀족 집안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 거긴 무력만 강하다고 해서 되는 곳이 아닌… 뱀의 소굴이나 마찬가지인데…….”

‘그… 제가 전생에 그 뱀의 소굴의 지배자였습니다.’

히드라 문양을 사용하고, 간교하기 짝이 없는 ‘뱀’을 상징으로 삼은 노이멀 가문의 지배자.

백작가였던 노이멀 가문의 작위를 공작까지 끌어올린 베오날드에겐 그 뱀의 소굴이 원래 살던 곳이나 다름없었다.

“아무튼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여차하면 도망칠 테니까요. 모험가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죠. 알테리오도 있고.”

“아, 네 그리폰 말이지? 그나저나 위험하지 않니?”

“그래서 일단 제가 관리 안 할 때는 입마개도 하고 잘 묶어 놓고 있어요. 가끔 저 한쪽만 남은 날개로 발버둥 치는 게 문제이지만요. 아무튼 너무 걱정 마세요, 어머니.”

“그래. 그래도 네 동생들이 있으니… 나는 어떻게든 지낼 수 있겠구나. 다만 영지 사람들이 서운해할 것 같구나.”

의술을 무상으로 베풀어 주고, 약도 만들어 주고, 약초 재배 방법도 개발하고, 곰 같은 대형 사냥감도 너끈히 잡아 주던 이 작은 시골 영지의 영웅이 떠난다면 슬퍼하지 않을 자가 없으리라.

하지만 베오날드는 오히려 두근거리고 있었다.

‘드디어 이 시골 영지를 떠나는 건가!’

새로이 태어난 곳이자 썩 나쁘지 않은 휴가처였지만, 베오날드는 그래도 천성부터가 귀족인지라 결국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에 큰 기쁨을 느꼈다.

하지만 역시 아무것도 모르고 갈 수 없었기에 모친에게 아는 한도 내에서 캘러메인 백작가의 주요 인물과 정치 판도에 대해 설명해 달라고 했다.

“…이게 내가 아는 현 상태란다. 아마 조금의 차이는 있을 수 있다는 건 염두에 두렴.”

“아뇨. 근래에도 캘러메인 영지에 다니셨으니 의심할 이유는 없을 겁니다, 어머님. 그럼 전 알테리오 밥 주러 갈게요. 남은 시간 동안 할 일이 많네요.”

“그러렴.”

이야기가 끝나고, 베오날드는 알테리오의 밥을 주기 위해 어머니의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하나 그러는 사이에도 그의 머릿속에선 백작가에 대해 얻은 정보를 토대로 열심히 주판이 굴러가고 있었다.

이제 남은 건 백작가에서 자신을 데리러 오는 것을 기다리는 것뿐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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