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받아들이겠습니다.”
“오… 그런가?”
“다만 그 시기를 성인식 이후로 하지요. 지금 바로 아무 대비 없이 일을 시작하면 위험할 수 있습니다. 둘째 마님 측의 상황을 지켜보면서 천천히 움직여야 하고, 가신들과 다른 가문과도 이야기를 나누는 식으로 조심스럽게 진행하셔야 합니다.”
“오오오… 허허, 오히려 내가 한 수 배우는 느낌이군. 알았네. 그리하도록 하지.”
렌겔 가주 대리의 제안을 받아들인 베오날드는 그와 악수를 하고서 헤어졌다.
그리고 다음 날 백작의 생일잔치는 무사히 거행되었다.
레이온 자작과 베오날드는 예정대로 곰 가죽과 새끼 곰, 거기에 늑대 가죽을 비롯한 적절한 선물을 바쳐서 살짝 눈에 띄긴 했지만 금방 다른 귀족들의 화려한 선물에 가려져서 곱게 넘어갔고, 적당한 시점에서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어차피 우리가 오래 있어서 좋을 입장도 아니니 말이지. 휴우~ 이래서 근본도 없는 집안은 피곤해.’
“휴우~ 드디어 한숨 돌렸구나. 베오날드, 그나저나 너 혹시 가주 대리님과 무슨 말을 했었느냐? 랄트 도련님에게 빼앗긴 물건도 되찾아 오고…….”
“가주 대리님이 제대로 된 분이셨어요. 혈족에게 물건을 왜 뺏으면 안 되는지도 잘 아시니까요.”
“……?”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하는 레이온 자작을 보면서 베오날드는 그가 자작이라는 작위를 달고 있지만 제대로 된 귀족으로서의 교육과 ‘가문’의 문화를 모르는 초보 2대째 귀족님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
‘정보를 흘린 것도 흘린 거고, 왜 이렇게 여러 부분이 허당인 건지. 할아버지는 나름 걸물이었다고 했는데…….’
물론 아버지가 대단하다고 해서 반드시 아들도 대단해야 한다는 법은 없지만, 베오날드는 자신의 아버지인 레이온 자작에 대해서 복잡한 심경이 들었다.
아무튼 이제 잔치도 끝났고, 당장 내일 돌아가도 상관없게 된 상황에서 부친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베오날드에게 제안을 했다.
“아무튼 네 덕분에 정말 큰일 날 뻔한 고비를 넘겼구나. 어쨌든 내일 돌아가긴 하는데, 오기 힘든 곳이니 원한다면 도시에서 하루쯤 더 놀다가 와도 되는데 어떻게 할 테냐?”
“아뇨. 괜찮아요. 이 녀석을 돌봐야 하는데, 놀러 갈 새가 어디 있겠어요? 하하.”
삐이이익!
우리에서 베오날드에게 또다시 밥을 달라고 조르는 알테리오였다.
그렇게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무사히 백작의 생일잔치를 치르고 돌아가게 된 베오날드였다.
더불어 새로운 가족과 성과도 있어서 좋아했지만 마냥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닌 듯 백작의 저택 창문에서 누군가가 그를 무섭게 지켜보고 있었다.
“제스 경, 저… 아이가 베오날드라고 하는 아이인가요? 우리 랄트에게 모욕을 주고, 그이가 데려가서 독대를 했다던?”
거추장스러울 만큼 수많은 장식이 달린 화려한 백색의 드레스를 입은 중년 여성. 올려 묶은 화려한 금발 머리와 고고해 보이는 모습에서 보통 신분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는 베오날드에 대해 자신의 뒤에 무릎 꿇고 앉아 있는 기사 제스 경에게 물었다.
“예, 맞습니다, 메이라 마님.”
마님. 지체 높으신 분의 부인을 뜻하는 말이다.
백작은 이미 노령이고, 백작의 부인은 세상을 떠난 지 오래인지라 자연스럽게 이 ‘마님’이라는 호칭을 이어받을 자는 바로 현 가주 대리를 맡고 있는 렌겔 캘러메인의 부인인 그녀였다.
“그이와 무슨 이야기를 한지는 아무도 모르고?”
“예. 들으려고 했지만 아시다시피 가주 대리님이 쓰시는 집무실은 보안성이 워낙 뛰어나서…….”
“그나저나 우리 랄트랑 동갑이라고 했는데, 믿기지 않는 체구와 키군. 정말 14살이 맞나?”
“혹시나 싶어서 급히 사람을 보내 알아본 결과 맞습니다. 같은 해에 태어났으며 캘런 아가씨의 아들이 맞습니다.”
“후우우~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이런 변수가 생기다니…….”
메이라 부인은 인상을 찌푸리며 베오날드와 남편이 무슨 이야기를 했을지에 대해 상상했다.
일단 문제는 백작에게 줄 선물을 자기 것처럼 멋대로 강탈하러 다닌 자신의 아들 랄트에게 있었지만, 그녀는 그 행위에 대해선 전혀 문제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둘이 과연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에 대해 전혀 짐작 가는 바가 없었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한 거지? 이제 와서 뭘 생각하는 거람! 그 사람은!”
“가신 쪽에 붙여 둔 자의 말로는 아마 ‘경쟁마 교육’을 생각해 보고 있다고…….”
“경쟁마 교육… 즉, 저 아이를 랄트와 경쟁시킨다는 거야?”
“예. 그렇게 되려면 일단 ‘격’을 높여야 하니 아마 양자로 들이시거나 아니면 주요 휘하 귀족들 중 한 명과 혼인을 시키겠지요.”
“대체 그이는 왜 이런 짓을 저지르는 거지? 아니, 우리 랄트가 어디가 부족하다고!”
렌겔 가주 대리와 다르게 메이라 부인은 자식을 감싸면서 그가 허튼짓을 하고 있다고 여겼다.
부유한 남작가 집안에서 태어난 그녀는 가문의 이해관계를 위해 이곳 캘러메인 백작가에 정략결혼으로 시집와서 둘째 부인이 되었지만, 이미 첫째 부인의 아래 사내아이가 둘이나 있는 상황이라서 사실상 그냥 장식용 꽃, 혹은 가문 간의 계약서 취급이었다.
남의 집안이긴 했지만 그래도 귀중한 ‘계약서’인 만큼 먹고사는 데 지장은 없지만, 그렇다고 한들 ‘결혼 생활’이라는 것이 실현되지 않으면 결국 이곳은 타인의 집일 뿐이었다.
홀로 섬에 갇힌 꼴. 그나마 외로움을 달랠 존재라고는 자신의 본가에서 데려온 몇 명의 기사와 몇몇 시종들뿐. 하나 거기엔 가족이 없었다.
유일한 가족이라곤 오직 자신이 배 아파 낳은 아들 랄트뿐. 그러니 그녀가 아들을 감싸고도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 망할 년이 죽고, 드디어 내 시대가! 드디어 우리 랄트가 후계자가 되었는데… 또 무슨 짓거리를!”
“하지만 랄트 도련님의 평판이 날이 갈수록 별로 좋지 않습니다. 젤커드 자작의 파벌은 물론 저희 파벌인 델마인 남작 파벌 귀족들도 우려를 표할 정도입니다. 예법도 지키지 않고, 문무… 그 어느 쪽에도 집중하는 느낌이 없고, 그저 권위에 기대서 남을 핍박하기만…….”
“닥치세요. 아직 어리니 그럴 수 있죠! 차차 알아서 철이 들 겁니다!”
“하지만 내년이면 성년이 되십니다. 또 경우에 따라선 수도 아카데미로 보내질 수 있는 상황인데, 저래선…….”
“다 내가 알아서 할 거야! 그러니 당신은 저 망할 베오날드이니 뭐니 하는 잡종이나 조사해!”
문제점은 그녀의 가신인 제스 경에 의해서 이미 지적이 되고 있었지만 메이라 부인은 그 점을 전혀 개선하려 하지 않았다.
하나뿐인 혈육이자 가족을 아끼는 점도 있었지만, 이 저택에 오고서 단 한 번도 자유를 누리지 못한 그녀는 자신의 아집을 꺾지 않는 면이 컸다.
그리고 지금 그녀의 유일한 목표는 바로 아들을 후계자의 자리에 앉히고 이 감옥 같은 캘러메인 백작가를 지배하는 것이었다.
“기껏 기회가 와서 그것을 잡았고, 이후로 나온 모든 사내아이들을 처리했는데!”
“마님, 목소리가 크십니다. 아무리 이 방 주변에 마님의 가신과 시종들만 있다곤 하지만 목소리를 줄이시지요. 그 사안은 들키면 절대 안 되는 일입니다.”
“끄으응! 좋아. 아무튼… 후계자는 우리 랄트야. 근본도 없는 용병이랑 붙어먹은 년의 아들이 그 자리를 노리게 할 순 없어!”
“그래서 어떻게 하실 겁니까? 여태 하시던 것처럼 암살을……?”
“아니, 이미 ‘경쟁마 교육’을 하기로 마음먹었으니 지금 처리해 봐야 다른 상대를 구할 수도 있어요. 잘못하다간 더 상대하기 골치 아픈 적이 들어올 수도 있겠죠. 일단은 내버려 둬요. 우선 그이랑 대화하고, 또 델마인 남작과 다른 귀족들과 상담해 봐야겠으니. 내일 당장 전령을 보내도록 해요.”
“예!”
아들 사랑에 미쳐 있고, 독선적이고 고집은 세지만 그래도 머리까지 아주 멍청한 건 아니었다.
랄트의 후계자 자리를 지킨다는 대전제 안에서는 그녀는 최선을 다해 머리를 굴렸고, ‘후계자 교육 방식’ 면으로 대처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에 곧바로 전령을 보내서 다른 귀족들과 의견을 취합하고자 했다.
‘…하지만 과연 교육 방식을 막을 수 있을 것인가?’
제스 경은 속으로 그런 우려를 표하면서도 자신이 명령을 받고 조사해 본 베오날드에 대해 떠올렸다.
14세라곤 보이지 않는 외양, 그것도 나쁜 면이 아니라 오히려 현재 성인을 넘어서 한 사람 몫을 할 정도의 모습은 물론이고 행동에선 이상하게 알 수 없는 품위와 기품까지 흐르고 있었다.
‘어떤 의미로든 랄트 도련님에겐 자극이 되겠군.’
그 일이 있은 뒤로 방에 처박혀서 나오지 않는 도련님을 생각하며 제스 경은 이 일을 계기로 그가 좀 더 후계자다워지기를 바랐다.
절반은 저 메이라 부인의 피가 흐르고 있지만, 다른 절반은 렌겔 가주 대리의 피가 흐르고 있으니 자질은 어느 정도 있을 것이라 믿고 있었다.
***
몇 달 뒤, 더스티클록 영지.
백작의 생일잔치를 치르고 영지로 돌아온 베오날드의 일상은 다시 평화로워졌다.
마나 호흡법, 검술 단련, 약초 재배 및 약 제조, 그리고 영지민들의 병환을 봐주고, 시찰, 알테리오의 먹이 사냥, 추수와 사냥감 거두기를 비롯한 영지 일까지 어느새 베오날드의 손을 거치기 시작한 것이었다.
“알테리오! 쫓아!”
삐이이이익!
작고 조그맣던 알테리오는 쑥쑥 자라더니 대형견 사이즈가 되어서 베오날드의 지시에 따라 토끼를 쫓기 위해 달리고 있었다.
본래 인간보다 거대한 사이즈가 되는 그리폰인 만큼 빨리 자라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리라. 하나 태어날 때부터 장애를 가진 날개 한쪽 때문에 여전히 하늘은 날지 못했고, 다른 한쪽 날개를 접은 채 고양잇과 맹수처럼 달리면서 쫓아다녔다.
삐이이약!
“아이고, 실패했구나. 하지만!”
쐐애애애액!
알테리오는 사냥에 실패했지만, 그사이 베오날드는 지친 토끼를 향해 활을 쏴 맞혀서 토끼 사냥에 성공했다.
그러곤 다시 알테리오에게 지시를 내려서 그 토끼를 가져오라고 한 다음 화살을 회수한 뒤 알테리오에게 건네주었지만, 자신이 잡은 게 아니라는 걸 아는 건지 아니면 사냥에 실패한 게 미안한 건지 알테리오는 고개를 숙이고 실망하는 눈치였다.
삐이이이이…….
“괜찮다. 실패할 수 있는 거야. 처음부터 능숙할 순 없지. 자자, 먹으렴.”
결국은 몬스터라는 걸 아는 베오날드는 때로는 상냥하게 가르치면서도 알테리오가 사람을 덮치거나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게 교육시키는 데 열중했다.
영지민들이 두려워할 수 있기 때문에 특히나 인육이나 사람의 피에 대해선 거부감을 가지게 만들어야만 했다.
삐이?
“아니다. 생각을 좀 하느라 말이지. 아무튼 계속 사냥하자꾸나.”
삐이이!
“그래, 이번엔 잘할 수 있을 거다. 알테리오.”
잠깐 생각하느라 멈췄던 베오날드는 다시 알테리오와 함께 다른 사냥감을 찾기 위해 산속을 누비기 시작했다.
이제 이렇게 마음 편하게 움직일 수 있는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기에 베오날드는 가능한 한 할 수 있는 준비와 단련을 더 열심히 하자고 생각했다.
렌겔 가주 대리의 양자가 되면 또다시 피도 눈물도 없는 치열한 귀족의 정치판에 들어가야 할 테니 말이다.
‘마지막 휴식이라고 생각해야지. 후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