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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신도 쓸데가 있다-20화 (20/259)

[20화]

“자식 놈이 억지를 부려서 정말 미안하네. 다 내가 교육을 잘못시킨 탓일세.”

“아닙니다. 고개를 드십시오, 가주 대리님. 저같이 근본도 없는 시골 촌놈에게 너무나 과한 대처이십니다.”

“아닐세. 캘런의 아이면 우리 가족이지. 가족이기에 오히려 더욱더 철저히 해야 하네.”

‘그렇지. 아주 잘 알고 있어.’

베오날드는 속으로 렌겔 캘러메인의 행동에 대해 매우 만족했다.

이게 실제 가주 대리를 맡는 자의 대처인 것이다. 가문 내의 권력을 가지고 피를 나눈 가족끼리 싸울 수 있지만, 그렇더라도 일단 가주는 모든 혈족들의 결속과 지배를 위해서 노력해야만 했다.

아무리 강력한 가문이라도 내부에서 무너지는 것이 가장 무서운 일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나도… 후우~ 내부에서 무너졌지. 아무튼 좋은 대처야. 저놈 표정을 봐. 가주 대리인 아버지가 지금 근본도 없는 시골 귀족에게 사과도 모자라서 허리를 90도로 숙이는 걸 보니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겠지.’

“너도 어서 무례를 사과하도록 해라, 랄트.”

“그… 그게… 죄송합니다.”

백작가의 가주 대리인 아버지가 허리를 숙인 마당에 랄트라고 더 이상 위세와 권위를 방패로 삼을 수는 없었다.

그 또한 마찬가지로 아버지의 옆에서 허리를 숙이며 사죄했고, 베오날드는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손을 저으면서 자신도 예의를 갖춰서 대응했다.

“이러실 필요까진 없습니다, 가주 대리님. 그저 어린아이의 치기 아닙니까? 하하.”

“어린아이라……. 내 기억에 의하면 자네도 내 아들과 같은 나이로 알고 있네만? 후우~ 정말 부끄러울 따름일세. 한심한 놈 같으니……!”

렌겔 가주 대리는 자신의 아들을 싸늘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실망감을 감추지 않았다.

동시에 눈앞의 베오날드를 보자 부러움이 용솟음 쳤다.

같은 나이임에도 깍듯이 지키는 예의, 상식과 품격 있는 태도, 거기에 아직 어린 티가 조금 남아 있지만 자신의 배다른 여동생을 닮은 칠흑 같은 흑발에 깨끗한 청안을 가진 조각 같은 외모. 또한 큰 키와 다부진 체격까지. 자신의 아들과 압도적인 차이를 보이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딱 봐도 이 아이는 보물이다. 그것도 엄청난 보물. 다른 자들이 보기 전에 내가 발견해서 다행이군.’

가문을 운영하기 위해선 혈족의 관계도 중요하지만 그건 그래도 신뢰를 보증 수표로 깔고 있는 것이었고, 더 중요한 것은 역시 능력 있는 인재였다.

귀족 가문의 가주라면 무와 문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모아서 활용해야 하는 법. 뛰어난 병사, 뛰어난 문관 하나하나가 쌓여서 영지의 강함이 된다.

심지어 이 아이는 엄연히 가문의 피를 나눠 받은 혈족! 프리미엄까지 붙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너무 과한 경우 후계 구도를 해칠 가능성이 있어서 무조건 좋은 건 아니었지만, 현재 가뜩이나 부계에서 남성 혈족은 저기 뒤에 있는 랄트 하나뿐이었기에 더욱 귀중한 자원이었다.

“아무튼 이전에 란트가 뺏어 온 백작님께 드려야 할 선물도 모두 돌려주겠네. 본래 자네 집안의 것 아닌가? 아, 맞아.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하고 싶은데, 잠깐 시간을 내 줄 수 있겠느냐?”

“가주 대리님의 명이니 기꺼이 따르겠습니다.”

“그래, 따라오거라. 그리고 랄트, 넌 방에 돌아가서 오늘은 나오지 말고 있어라. 메이아 경에게 지키라고 할 것이니 허튼수작 부리지 말고.”

렌겔 캘러메인 가주 대리는 자신의 아들은 처벌로 방에 가두어 놓고, 베오날드를 자신의 집무실로 불러 집사로 하여금 차를 내오게 하고 단둘이 독대했다.

당장 내일이 백작의 생일날인데 이런 자리를 만드는 것 자체가 렌겔 캘러메인, 그가 베오날드를 얼마나 고평가하고 있는지에 대한 방증이었다.

“차는 어떤가?”

“시골 촌뜨기라 잘 모르겠습니다만… 으음~ 우선 첫 향은 진하네요. 그리고 가슴이 고양되는 느낌과 살짝 상쾌함으로 마무리… 좋군요.”

“마음에 들어 해서 다행이군.”

‘음, 이 맛과 향… 기억에 남은 것과 유사하군. 아마~ 대륙 남부에 있는 피얼릿이라는 잎인 것 같군. 약간의 각성 효과가 있는 것을 잔뜩 모아서 농축시켜서 각성제의 재료로 쓰곤 했는데… 지금 시대엔 이걸 차로 마신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군.’

‘캘런은 아들을 대체 어떻게 교육을 시킨 거지? 찻잔을 들고 마시는 것에서부터 품위가 느껴지는군. 랄트 녀석은 예의니 뭐니 하는 걸 배우기 싫다고 난리였는데…….’

서로 다른 생각을 하면서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베오날드는 렌겔 캘러메인 가주 대리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 건지 주판을 두드리기 시작했고, 렌겔 캘러메인은 차를 마시는 품격마저 멋있는 베오날드를 보며 연속으로 감탄하는 중이었다.

그렇게 잠깐의 생각을 마치고, 먼저 입을 연 것은 다시 캘러메인 백작이었다.

“정말이지 믿을 수 없군.”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자네가 14살이라는 게 말이야. 어딜 봐도 이미 성인, 아니 완숙된 품위를 갖추고 있어. 부러울 정도로 말이지.”

“전 그저 조금 빨랐을 뿐입니다. 분명 랄트 도련님도 저처럼… 아니, 더 능가하실 수 있을 겁니다.”

겸손히 자신을 포장하면서도 베오날드는 당연히 비뚤어진 그 랄트라는 애송이에겐 무리라고 생각했다.

물론 지금이라도 교육 방침을 바꾸면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생길 수 있겠지만, 이미 저렇게 오만하고 독선적이 되었으니 고치려면 엄청나게 고생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군. 이 가주 대리 양반은 상당히 멀쩡한 인간인데… 교육에 대해서 관여를 안 한 건가?’

호부 아래 견자 없다는 옛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닌데, 눈앞의 렌겔 가주 대리는 이성적이고 상황에 따라 과감히 머리 숙일 줄 아는 면도 있을 정도로 제대로 된 사람이었다.

한데 어떻게 이런 사람에게서 그런 아들이 나온 건지는 살짝 의문이었다.

‘둘째 부인의 자식이더라도 보통 사내놈들은 다 관리해야 할 텐데…….’

“그 랄트 녀석을 자네처럼이라. 후우~ 내가 태어날 때부터 관리했으면 모를까, 아쉽지만 저 아이가 태어난 뒤 난 곧바로 황제 폐하의 명으로 나온 소집령에 우리 영지의 군대를 이끌고 전쟁에 참여했네.”

‘아… 전쟁이었나?’

“애초에 본래 저 랄트는 독자(獨子)가 아니라 셋째 아들로, 첫째 부인에게 아들 둘이 더 있었고, 성년이 된 아이들이라 기사의 종자로 같이 참여했지.”

“그랬었군요.”

“그리고 운도 없이 전쟁에서 하필……. 적 기사단의 랜스 차징에 모조리 휩쓸렸고, 나는 우리 기사들의 희생으로 살았지만 아이들은 모두 적의 창에 꿰뚫려 죽어 버렸네. 그 뒤로 첫째 부인은 그 쇼크로 사망했지. 그래서 저 랄트 하나만이 유일한 독자가 된 거지. 물론 사정은 이게 전부가 아닐세. 후우~”

렌겔 가주 대리는 그동안 토로하지 못했던 가정사에 대해서 베오날드에게 전부 쏟아 내고 있었다.

“영지에 남으신 아버지를 대신해서 내가 제국 수도나 다른 곳으로 불려 가는 일도 많았지. 그리고 그 와중에도 나는 가문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을 했네.”

“어떤……?”

“뻔하지 않나? 혈족을 늘리는 일이지.”

“아아~”

결국 둘째 부인이 정실이 되었고, 자손이 사내아이 하나뿐인 건 또 불안한 일이었기에 그 뒤로도 셋째, 넷째 부인들을 계속 들여서 자손의 생산을 위해 노력했는데, 거기서 또 기묘한 일이 발생한다.

“문제는 랄트를 제외하고 그 뒤로는 이상하게 태어나는 사내아이들이 자꾸 죽어 나가더군. 질병, 사고 등등… 갖가지 일로 말이지. 후우우~”

“맙소사, 그걸 그럼 그냥 넘어가셨습니까?”

“그냥 넘어갈 리가 있나? 나도 나름 철저히 조사했고, 여러 수단을 동원했지만 결국 꼬리를 잡진 못했네. 하지만…….”

“배후로 짐작 가는 곳은 있으신 거죠? 가주 대리님께 더 이상 아들이 없으면 가장 이익을 보는 곳은 느낌이 올 테니까요.”

“오… 역시 통찰력이 보통이 아니군.”

‘이 정도는 쉬운 건데… 딱 봐도 둘째 부인이잖아.’

유일한 독자를 가지고 있는 둘째 부인.

필시 첫째 부인에게 장성한 두 아들이 자리 잡고 있었을 땐 그 야망을 꽁꽁 감추고 있었겠지만, 이후 전쟁이라는 변수로 두 아들과 첫째 부인까지 죽고 자신의 아이가 이 캘러메인 백작가의 유력한 후계자 후보가 되고 나자 가슴속에 있던 야망이 피어오른 것이리라.

‘흔히 있는 이야기이지.’

“그럼 보통은 외부에 꺼내지 않는 이 이야기를 내가 자네에게 한 이유도 알겠나?”

“으음… 모자란 식견으로 짐작만 해 보겠습니다만, 가주 대리님은 저를 양자로 들이실 생각이 아니신지요?”

“바로 그거일세!”

짝!

단번에 자신의 생각을 읽은 베오날드의 대답에 렌겔은 박수를 치면서 벌떡 일어섰다.

보면 볼수록 최적의 인재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딱 하나 아쉬운 건 왜 하필 저런 재능을 가진 아이가 본가가 아닌 외가, 그것도 근본 없는 용병에게 시집보낸 집에서 나왔냐는 점이었지만 지금은 찬물, 더운물 가릴 때가 아니었다.

“랄트의 상황은 자네도 알다시피 심각하네. 지금은 내가 가주 대리이자 차기 가주나 마찬가지이기에 어떻게든 손을 쓰고 있지만, 혹시라도 아버님과 내가 잘못되거나 사고가 터진다면 저대로 우리 가문의 가주가 되네.”

“그렇죠.”

“지금 저 상태론 끝장이지. 그래서 저 녀석에게 자극도 줄 겸 자네가 필요하네.”

“으음… 하지만 가신분들의 반대가 클 텐데요?”

“걱정 말게. 일단 명분으로는 랄트 녀석의 교육을 위한 경쟁마로 속일 생각일세.”

‘흔한 방법이네.’

너무 안정된 자리에 있어서 나태해진 후계자를 자극시키고 채찍질하기 위해 혈족 중 똑똑한 아이를 데려와서 양자로 삼아서 후계자 후보로 삼는 행위. 귀족 가문의 여러 노하우 중 하나였다.

확실히 지금 랄트의 상태는 베오날드가 봐도 심각한 수준이었기에 가신들도 ‘경쟁마 교육’을 위한 대상으로 쓴다는 데엔 딱히 반대할 명분이 없을 것이다.

내년이면 성년이 되기 때문에 더더욱 랄트의 상태를 고치지 않으면 가문의 위기인지라 아무리 근본 없는 용병의 피가 섞였다고 한들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린다고 보일 뿐이었다.

“물론 충분한 대가와 지원을 약속하지. 더불어서 정 랄트에게 자격이 없다면 자네가 우리 가문의 뒤를 이을 수 있도록 하겠네.”

“파격적이군요.”

“가주로서 가문을 더 중요시 여기는 건 당연하다. 대안이 없다면 나도 다른 대처를 준비하고 랄트에게 후계자의 자리를 주었겠지만, 둘째 부인의 미움을 받는 것을 감수할 정도로 더 뛰어난 혈족을 찾았다면 의미는 다르지. 아무튼 어떤가?”

“잠시만 생각할 시간을 주십시오.”

베오날드는 바로 주판을 튕기기 시작했다.

이 양자 제안, 어떻게 보면 기회이지만 어떻게 보면 스스로 불구덩이에 들어가는 위험천만한 길일 수 있다.

일단 자신은 독자적인 세력이 없는 가운데 무조건 여기 렌겔 가주 대리의 지원만을 믿고 모든 것을 조치해야 하는데, 결국 직접 대응해야 할 일이 많으며 특히 랄트의 모친인 둘째 마님이 자신을 가만두지 않으리라.

‘하지만 그렇다고 버리기엔 아까운 기회야.’

하나 반대로 생각하면 시골 영지에서 나갈 기회다.

그리고 가주 대리가 직접 제안한 만큼 일정 이상의 자금과 시설, 설비, 인원을 받거나 혹은 다른 기회를 만날 확률이 높아진다.

어떤 선택을 하든 메리트와 디메리트가 모두 존재하는 상황. 베오날드는 열심히 주판을 굴리며 계산을 했고, 최종 선택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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