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이, 이건? 그, 그리폰? 맞느냐? 위험종 몬스터 중 하나! 하늘을 날아서 내려와 소나 말, 양을 잡아먹고 도망치며 때론 인간도 습격하는 건데… 검은 늑대도 그렇고, 대체 너 무슨 짓을 한 거냐?”
“그… 그러니까 뭐랄까? 젊음의 혈기 같은 거라고 해야 할까요? 하하, 원래는 그리폰을 노리려고 했는데 말이죠.”
14세면 젊다고 말하기엔 어린 수준이었고, 전생과 합쳐서 베오날드의 나이는 또 이미 노년을 넘어선 수준이라서 어디에도 말이 맞지 않았지만 그의 변명을 들은 레이온 자작은 뭔가 말하기 어려운 표정으로 베오날드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폰을 노리려 했다고? 맙소사! 여신이시여! 네가 아무리 뛰어나다곤 해도 아직 어린데! 그리폰이라면 숙련된 모험가들도 함부로 못 잡는 것이다!”
“하하하… 뭐, 호기롭게 시도만 하려고 했는데, 아무튼 그래서 그건 못 잡았고 요놈만 주워서 도망쳐 왔어요. 이 검은 늑대들은 돌아오는 길에 습격당한 겸에 잡은 거고 말이죠.”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지 않느냐! 네가 죽으면 네 어미는…….”
“그래서 시도는 안 하고 진작 도망쳤다니까요. 아무튼 이 녀석에 대해선 비밀로 해 주세요. 제가 기를 테니까요.”
“기, 기르겠다고? 그리폰을? 아니, 오히려 백작님에게 바치는 게 낫지 않겠느냐? 위험할지도 모르고… 게다가 이 정도면 최고의 선물일 텐데…….”
날개 한쪽이 없어도 위험종인 그리폰. 그것도 살아 있는 새끼이니 가치는 웬만한 사냥감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이라 분명 백작에게 바치면 빼앗긴 곰 가죽 따위는 이미 상관없을 레벨이었다.
하지만 베오날드는 고개를 저으면서 부친의 의견을 부정했다.
“아니죠. 너무 귀한 걸 바치면 오히려 시샘받을 수 있고, 눈에 띕니다. 딱 이 정도가 좋아요. 시골 촌놈 출신인 우리가 구할 수 있는 한도이지요.”
“그… 그런가?”
“이렇든 저렇든 우리 가문은 어차피 미운 오리 새끼예요. 딱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선물이 좋아요. 아무튼 이놈은 제가 맡아서 키울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혹시 야생성을 안 잃어버리면 그땐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그… 네가 그런다면 그렇게 하도록 하지.”
베오날드의 의견이 합리성이 있다고 생각했는지 부친은 고개를 끄덕이며 금방 순응했다.
가끔 답답하긴 하지만 그래도 저 순순함 하나만큼은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베오날드였다.
괜히 부친의 권위니 뭐니 하면서 옳은 의견인데도 귀를 꽉 막은 채 듣지 않고 무시하는 인간들도 많았으니 말이다.
“그리고 또… 혹시 그 망할 도련님이라는 인간이 오거나 다른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 이 녀석에 대해선 비밀로… 아니, 그냥 눈속임을 할 겸 밖에서 다른 새라도 사 오는 게 좋겠네요. 제가 이 녀석을 감시할 테니 아버지, 부탁하겠습니다. 저는 늑대 가죽을 좀 더 깔끔하게 다듬을게요.”
“그래, 알았다! 금방 다녀오마.”
‘휴우~ 진짜 말 하나는 통해서 다행이야.’
그렇게 말 잘 듣는 아버지를 보내고, 베오날드는 다시 울어 대던 알테리오에게 밥을 주었다.
그리고 늑대 가죽을 손질하다가 잠시 후 아버지가 가져온 새를 알테리오가 자는 상자 위에 놓아서 위장으로 삼는 와중에 아버지는 또 다른 귀족들에게 인사드린다면서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래서 홀로 조용히 시간을 보내는데, 또 어디선가 갑자기 경박한 발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감지했다.
‘이 소리는? 아, 또 그놈인가?’
쿵! 쿵! 쿵!
주변 사람의 눈치를 전혀 보지 않는 저 경박한 발소리. 딱 들어도 누구인지 알 것 같았던 베오날드는 한숨을 푹 쉬고 곧바로 알테리오를 숨겼다.
늑대 가죽이야 까짓것 그냥 또 줘 버려도 되지만, 알테리오는 자신이 기르기로 한 만큼 가족이나 다름없었으니 절대 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왔군.’
쾅!
빠르게 손을 써서 감추고 대신 사 온 새를 돌보는 척하면서 기다리자, 아니나 다를까? 또다시 귀족가의 자식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태도로 문을 쾅! 박차고 들어온 랄트 캘러메인은 카나리아를 돌보고 있는 베오날드를 보고는 어리둥절해하면서 머리를 긁적였다.
“무슨 일이신지요?”
“음? 어라? 없나? 왜 없지?”
오만방자한 태도로 인사나 통성명도 없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무언가를 찾기만 할 뿐, 눈앞의 베오날드를 완전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는 랄트였다.
속으론 짜증이 올라왔지만 베오날드는 여유 있게 참아 내면서 랄트에게 물었다.
“뭘 찾으시는지요?”
“새끼 그리폰이 있다고 하던데? 어디 있어?”
‘…….’
아주 자기 것인 양 대놓고 찾는 태도도 어처구니없었지만, 대체 그 정보를 어디서 얻었는지부터가 의문이었다.
필시 마을에 들어오기 전부터 보이지 않게 철창 우리에 잘 감췄고, 주변의 기척까지 철저하게 신경 써 가며 알테리오가 밥 달라는 소리도 크게 나지 않게 밤낮을 가리지 않고 바로바로 먹이를 주었고, 이 저택에 올 때도 늑대 가죽만 보였지 잘 숨겨서 가져왔는데, 도대체 어디서 정보가 새어 나갔단 말인가?
‘아… 망할 아버지겠군. 새어 나갈 곳이 딱 거기뿐이야. 어쩔 수 없군.’
대체 어디서 입을 연 건지 모르겠지만 베오날드는 대강 예상이 갔다.
입이 가벼운 사람은 아닐 테지만, 혼자서 끙끙대다가 혼잣말을 한 것이 누군가의 귀에 들어갔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그야 있긴 합니다. 지금은 금방 먹이를 먹여서 재워 두었죠.”
존재 자체가 긴가민가하다면 배 째고 모른 척하겠지만, 저 태도를 보면 분명 알테리오의 존재를 확신하고 있었기에 숨겨 두었다는 걸 능숙하게 포장해서 변명하는 베오날드였다.
어차피 저 안하무인의 애송이는 제멋대로 막 헤집으면서 찾아내려고 할 게 뻔했으니 존재 자체는 밝힌 것이다.
“내놔. 할아버지 선물은 내 거잖아.”
얼마 전에 봤던 그 패턴으로 또다시 강탈하려고 억지를 부렸지만 베오날드는 이번만큼은 쉽게 내줄 생각이 없었다.
“그건 백작님께 드릴 선물이 아닙니다.”
“할아버지의 영지에서 나온 거면 내 거잖아.”
“애초에 그리폰은 백작님의 영지에 서식하는 종이 아닙니다. 말을 타고 하루 넘게 달려서 건너간 곳에서 우연히 구해 온 것이지요.”
“이이익!”
차분하게 말하는 베오날드의 논리에 막히자 랄트 캘러메인은 무섭게 베오날드를 노려보았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그 어떤 자도 자신을 거역한 적이 없었는데, 갑자기 이 이상한 놈이 자신을 거역하고 있는 것부터 화가 날 만했다.
“아무튼! 아무튼 내놔!”
‘…그렇지. 이게 14살이지. 그건 그렇다 쳐도 짜증 나는 건 어쩔 수 없군.’
그래도 잘 먹고 잘 자라서 잘 꾸며 놓았기에 멀쩡한 외모에 맞지 않게 징징대면서 억지를 쓰는 랄트였다.
베오날드는 그것을 보면서 징징거림이라곤 허락하지 않던 무자비한 자신의 생전 부친 벨릭스를 떠올리며 이 짜증 나는 소리를 어떻게 막을지 고민하는데, 그 와중에도 랄트는 자신의 징징거림을 무시하는 베오날드에게 한 번 더 엄포를 놓았다.
“안 그러면 할아버지에게 말해서 가만 안 두겠어! 시골 촌놈 주제에!”
“네. 확실히 시골 촌놈입니다만, 그래도 저는 엄연히 백작님의 혈족입니다?”
“그게 뭐 어쨌는데?”
“음, 교육을 못 받으셨나요? 장차 이 캘러메인 가문을 이끄셔야 하는 도련님은 수많은 사람들의 도움과 협력이 필요합니다. 아시다시피 이 백작가의 주변엔 백작가의 힘에 굴복한 자들도 있지만, 혈연(血緣)을 이어서 관계를 맺고 있는 귀족가들도 아주 많습니다.”
그렇다. 캘러메인 백작의 영향권 내에 있는 영지가 많은 것이지, 순수 캘러메인 백작가의 영지가 광대한 것은 아니다.
또한 사람을 쓰는 데 있어서 신뢰를 쌓기 위해선 오랜 시간이 걸리는데, 혈족은 그 신뢰를 일단 ‘피’로서 보장하며 같은 배를 탔을 확률이 높기에 반드시 마음을 잡아 놔야 하는 아군이었다.
‘물론 전생의 아들놈처럼, 가장 믿었는데 배신을 때린 놈도 있지만……. 가문의 운영은 결국 사람을 보는 눈과 혈족의 관리가 기본.’
“그래서 어쨌는데?”
“어쨌긴요. 아무리 시골 촌놈에 근본이 없고 쥐뿔도 없지만 엄연히 저도 백작님의 피를 나눠 받은 혈족입니다. 게다가 그리폰의 새끼라면 꽤 화제가 될 보물이죠. 자, 그럼 종합해 보죠. 가문의 위세를 이용해서 혈족의 물건을 합당한 이유 없이 빼앗는 차차기 후계자의 모습을 보면 다들 어떻게 생각할까요? 이 작은 새 한 마리 때문에 무엇을 잃을지 아십니까?”
“…뭐야, 그게?”
베오날드의 말을 제대로 이해 못한 것 같지만 그래도 그의 분위기와 위압감에 눌린 건지 랄트는 안하무인의 태도를 멈추고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원래부터가 키와 덩치의 차이도 있었지만, 품격은 행동과 언어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법이다.
“뭐냐고? 그게!”
대귀족으로서 차분히 압박하는 베오날드의 언변과 그 속에서 느껴지는 압력에 랄트는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계속 저항하려고 언성을 높이고 안하무인으로 굴었지만, 그래 봐야 베오날드에겐 병아리가 발버둥 치는 걸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는 칼날 같은 미소를 띤 채 풍선을 터뜨리듯 랄트의 앞에서 입을 열었다.
“자, 이다음은 백작님 혹은 도련님의 아버님께 여쭙고 오십시오. 시골 촌놈인 제가 가아암히~ 캘러메인 백작의 차차기 후계자이신 랄트 도련님을 교육할 입장은 아니니 말이죠.”
“씨이! 뭐어?”
“대신 답을 들은 다음에도 계속해서 원하신다면 얼마든지 이 그리폰 새끼를 드리지요. 제게 흐르는 캘러메인 백작님의 피를 걸고서 말이죠.”
“…좋아! 너 가만 안 둘 거야! 여기서 딱 기다려!”
“예예~ 도련님. 전 도망치지도, 숨지도 않습니다.”
랄트는 그렇게 씩씩대면서 방을 나갔고, 베오날드는 느긋하게 침대에 앉아서 또다시 잠에서 깬 알테리오에게 먹이를 먹였다.
아무리 자식 사랑이 대단한 아비나 조부라고 할지라도 제정신 박힌 가문을 지키는 가주라면 그의 행동이 얼마나 어리석은 건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이번에도 또 자식 사랑에 눈이 멀어서 의기양양하게 돌아오면… 이 가문은 더 이상 가치가 없다.’
혈족의 가치와 가솔의 중요성을 모를 정도로 눈이 흐려진 가주나 후계자가 있는 가문이라면 버려도 아쉬울 게 없었다.
이 백작가를 배의 선장이라고 볼 때, 그 혈족이 있는 분가나 혈연으로 연결된 다른 가문들은 선원 같은 존재였다.
선장이 제아무리 유능하다고 한들 혼자서 거대한 배를 몰 순 없듯이 선원들과의 협력 관계를 잘 이용해야만 했다.
그런데 만약 선장이라는 자가 자신의 권위와 힘을 생각해서 선원들이 소중히 여기는 보물을 빼앗았다는 소문이 난다고 생각해 보자. 그러면 자연스럽게 권위와 인망에 상처를 입고, 혈족 간에 신뢰가 깨져 버릴 가능성이 높았다.
게다가 저 유일한 독자(獨子)가 자신이 차차기 후계자라는 점을 이용해서 벌이는 패악질은 자신에게만이 처음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진행되었을 것이기에 더더욱 혈족 간의 신뢰의 사슬을 녹슬게 만들 것이다.
‘그러면 결국… 언젠가 작은 위기가 일어났을 때, 산산이 부서지겠지.’
그렇게 되면 백 년, 천 년 갈 것 같은 가문도 단 하루 만에 무너질 수 있다.
그런 생각을 하며 기다리자 이번엔 정숙하고 가벼운 발소리로 누군가가 이곳으로 오는 것이 들려왔고, 잠시 후 매우 정중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똑똑.
“안에 있는가?”
“예, 있습니다.”
덜컥.
문이 열리고 나타난 이는 자신의 아버지와 비슷한 나이대로 갈색 머리와 깔끔하게 기른 수염을 가진 중년 남성.
화려하지 않은 흑갈색의 옷을 입었으나 장신구는 꽤 화려한 것이 붙어 있어서 그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뒤엔 아까 전에 안하무인으로 날뛰었던 랄트 도련님이 인상을 찌푸린 채로 서 있었는데, 같이 온 중년 남성은 굳은 표정으로 베오날드에게 먼저 자신의 소개를 하였다.
“나는 렌겔 캘러메인. 캘러메인 백작님의 둘째 아들이자 그분의 후계자이며 현재 연로하신 아버님을 대신해서 영지의 모든 업무를 보고 있는 대리인이다.”
“예. 반갑습니다, 가주 대리님. 저는 레이온 자작의 첫째 아들 베오날드 더스티클록이라고 합니다.”
깔끔하게 자기소개를 주고받은 두 사람은 짧은 시간 동안 서로의 눈빛을 보며 상대를 읽으려고 했는데, 그때 갑자기 렌겔 캘러메인이 베오날드의 앞에서 90도로 허리를 숙이며 사죄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