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신도 쓸데가 있다-17화 (17/259)

[17화]

‘…어이가 없군.’

“아, 더스티클록 자작가에서 온 사람입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도련님.”

속으로 짜증 내는 것과 별개로 겉으로는 허리를 숙이고 손까지 비벼 가면서 비굴하게 소년을 대하는 베오날드였다.

처음부터 공작이 아니었고 백작가에서부터 시작한 그는 딱 봐도 지금의 자신보다 상위 귀족의 자제로 보이는 자를 대하는 방법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아! 그 시골뜨기네? 매년 쥐뿔도 없는데 용케도 오네?”

“쥐뿔도 없으니 오는 거 아니겠습니까? 조금이라도 백작가의 빛을 받아야 살 수 있으니 말이죠.”

“푸하핫! 너 말 되게 잘한다? 보기엔 딱딱하게 생겼는데!”

베오날드의 재치 있는 대답과 자기보다 크면서 알아서 굽실거리는 그 태도가 마음에 들었는지 소년은 제멋대로 떠들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앞으로 나와서 미리 가져다 놓은 백작의 생일 선물들을 뒤적거렸다.

천으로 잘 가려 놓았는데 뒤적거리자, 작은 나무 우리 안에서 자고 있던 새끼 곰 2마리가 깨어나더니 울어 댔다.

“오, 뭐야, 이거? 새끼 곰? 살아 있는 거네? 우와아~ 제법 신기한 걸 가져왔구나?”

“도련님, 그건 엄연히 백작님의 생신 선물입니다.”

“어? 그래? 하지만 괜찮아. 내가 가져도 할아버지는 뭐라고 안 해. 그러니 가져간다?”

‘…백작의 손자인가 보군. 아, 그러면 내 친척이 되는 건가?’

베오날드는 캘러메인 백작의 외손자, 이 안하무인의 소년과는 친척이 되겠지만 굳이 그것을 말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성인식 때 얼굴을 드러낼 때까지 조용히 있는 편이 좋았고, 거기에 이 예의 없고 오만방자한 꼬맹이의 태도를 보니 가까워져서 좋을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여기는 맨날 가죽뿐이야. 으음~ 이건 뭐야?”

“상처에 바르는 약입니다. 약초로 만들었지요.”

“시시해.”

소년은 베오날드가 선물용으로 정성 들여 만든 약을 보더니 시시하다는 듯 집어 던졌다.

고작해야 작은 케이스에 담긴 약일 뿐이지만 저거 하나를 만드는 데 많은 정성을 쏟았던 베오날드는 순간 움찔했지만 간신히 참아 냈다.

‘망할 자식이…….’

너무 오랜만에 자신을 무시하는 자를 만나서 그렇지, 전생에서도 이런 굴욕이 아예 없지는 않았었다.

그렇다곤 해도 자신이 정성스럽게 만든 약을 집어 던지니 가슴이 꽤 아팠지만, 일단 지금은 꾹 참고 이 망할 도련님의 얼굴을 기억해 두었다.

“우와아아! 이 곰 가죽! 엄청나다! 이거 나 할래! 내 방에 카펫으로 깔아야지!”

“도련님, 그것도 백작님께 드리려고 준비한 선물입니다만?”

“뭐 어쩌라고? 아까 말했잖아. 할아버지 건 내 거나 다름없다고! 그럼 간다!”

베오날드의 말을 무시한 소년은 그렇게 백작을 위해 준비한 선물을 제멋대로 털어서 나갔다.

이름도 듣지 못했지만 아무튼 저 안하무인에 무개념인 소년이 백작의 손자라는 걸 알았기에 나중에 볼 것이라 생각한 베오날드는 조용히 어질러진 방을 치우기 시작했다.

‘…이 빚은 반드시 갚아 주도록 하지. 그보다 이 망할 백작가는 대체 애들 교육을 어떻게 시키는 건지. 참 나~’

아주 어린아이도 아니고, 10대 중반 정도… 즉, 베오날드 또래이면서 이런 무개념 짓을 저지르는 것도 문제였지만, 공물로 가져온 것을 멋대로 털어 가는 저 버르장머리, 거기에 자신이 정성 들여서 만든 약을 무시하는 행위까지. 선이란 선은 이미 죄다 넘어 버린 꼬맹이였다.

그리고 잠시 후, 한차례 인사를 돌리고 온 레이온 자작에게 대충 친족이고 저택의 도련님인데 알 수 없는 꼬맹이가 멋대로 들어와서 깽판 치고 갔다는 것을 그대로 전했다.

“금발에 하얀 옷? 랄트 도련님이시구나! 그래서? 어떻게 했느냐?”

“딱 봐도 지체 높으신 도련님 같아서 그냥 가만히 내버려 뒀습니다.”

“휴우~ 그래, 잘했다. 지체 높은 정도가 아니라, 매우 유력한 차기 후계자 후보이니 말이다.”

‘…망했네.’

이어서 아버지는 베오날드가 만났던 소년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름은 랄트 캘러메인. 나이는 공교롭게도 베오날드와 동갑인 14세. 캘러메인 백작의 장남이자 현재 거의 차기 가주로 유력한 렌겔 캘러메인의 둘째 부인에게서 나온 독자(獨子)로, 독자이다 보니 가문에서 귀한 취급을 받고 있었으며 누구도 그 횡포를 말리거나 제지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작은 폭군이군요.”

“그렇지. 백작님이나 렌겔 님은 그래도 성인이 되면 나아질 거라고 하던데…….”

“사람은 천성보다는 환경과 교육이 만들죠.”

“너도 그리 생각하나 보구나. 후우우~ 정말 곤란하군. 백작님의 선물이 이렇게 털려 버렸으니 어쩐다?”

“그냥 사실대로 말하면 되지 않나요?”

“사실대로 말한다고 한들 창피만 당하겠지. 어쩐다~ 그래도 보석은 털리지 않은 게 다행이긴 한데…….”

아무리 도련님이라지만 역설적으로 어린애 하나 못 막아서 백작의 선물을 뺏겼다고 한다면 가뜩이나 꼬투리 잡을 구석을 노리고 있는데 잘 걸렸다며 이 벼락출세한 자작가 집안을 다들 비난할 것이다.

자신들보다 강한 자에겐 아무 말도 못하지만 약한 자가 약점을 드러내면 철저히 밟아 뭉개는 게 이 바닥 습성… 아니, 대부분의 인간이 가진 본성일 것이다.

그렇게 아버지는 끙끙대는 판국이었는데, 베오날드는 그동안 열심히 머릿속에서 주판을 굴리고 있었다.

‘으으음… 어떻게 할까? 이대로 그냥 무시받고 돌아가는 엔딩도 썩 나쁘진 않을 것 같은데. 아니면 좀 이르지만 데뷔할까?’

“음, 어쩐다. 급히 조달할 방법이 없을까? 끄으응~ 물건 사야 할 돈으로 선물을 따로 구해야 하나? 역시 부인과 같이 왔어야…….”

끙끙대는 아버지가 안쓰러웠던 베오날드는 주판을 튕기다가 결국 자신이 나서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보자, 백작님 생신이 3일 뒤였죠?”

“그렇다만? 뭔가 생각이 있느냐?”

“이렇게 된 이상 현장 조달하는 수밖에요. 모험가 길드 있는 방향이랑 무기류 파는 곳 좀 알려 주세요. 시간을 조금이라도 줄여야 하니까요. 그 정도는 아시죠?”

“아, 알았다.”

베오날드가 어떻게 할 생각인지 눈치챈 레이온 자작은 곧바로 이 도시의 구조에 대해서 알려 주었다.

그러자 베오날드는 곧장 자신의 돈과 선물로 준비한 의약품을 챙겨 들고 저택을 떠나 도심으로 향했다.

썩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그래도 시골 촌구석과는 다른 제대로 된 도시였기에 마음이 놓이는 기분을 느끼면서 그는 아버지가 알려 준 무구점부터 방문했다.

“어서 오십쇼~”

“가죽 갑옷 하나와 철 투구, 도끼 한 자루, 장검 하나, 그리고 단검 3개, 튼튼한 밧줄 두 묶음, 물통 하나와 부싯돌까지 빠르게 부탁하지. 가죽 갑옷은 징이 박혀 있으면 더 좋고, 투구는 완전히 얼굴을 가릴 수 있는 걸로 부탁하네. 급한 용무일세.”

“예? 아, 예. 아, 알겠습니다.”

느긋하게 있던 무구점 주인은 베오날드의 속사포 같은 말에 깜짝 놀라면서도 신속하게 준비하기 시작했다.

보통은 처음 보는 손님에게 뭔가 벗겨 먹을 생각을 하겠지만, 현재 캘러메인 백작의 생일잔치로 캘러메인 백작 휘하는 물론 축하하러 온 여러 귀족들이 모두 이 도시에 모여 있었고, 딱 봐도 외양부터가 귀티와 위압감이 서린 베오날드였기에 귀족이라는 걸 감지한 상인은 별 수작 안 부리고 그가 원하는 것들을 내주었다.

“음, 다행히 물건은 나쁘지 않군. 가격은?”

“으, 은화 8장입니다.”

“적절하군. 은화 10장. 2장은 팁이다.”

“아이고! 감사합니다요.”

필요한 장비류를 구한 베오날드는 그다음 이 도시에 있는 모험가 길드로 향했다.

모험가 길드. 몬스터 퇴치를 맡거나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영역을 탐험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며, 베오날드의 시대에도 존재했다.

물론 베오날드는 주로 의뢰를 하는 쪽이었지, 자신이 해결하는 쪽은 아니었기에 오자마자 일단 의뢰 게시판으로 향했다.

‘보자, 어디 좀 쓸 만한 몬스터가 없으려나?’

“저기, 손님, 의뢰를 하러 오셨습니까? 그렇다면 위로 올라가서 이야기하심은…….”

“아니, 그냥 잠깐 구경 좀 하고 있네. 용건이 있으면 바로 말하지.”

“예, 그러십시오.”

길드 사람으로 보이는 남자가 와서 말을 걸었지만 베오날드는 그것을 무시한 채 의뢰 게시판의 의뢰들과 주변에 표시해 놓은 지도를 바라보았다.

백작의 영지 주변의 주요 산과 숲, 강에 어떤 몬스터가 있고 없는지 서식지에 대해서 대략적으로 표시되어 있었고, 딱 봐도 주의 사항으로 적힌 강력한 몬스터도 있었다.

‘예상대로 오길 잘했군. 주요 위험 몬스터로는 아울베어, 그레이트 울프, 오크 로드 부락, 그리폰 둥지까지……. 음~ 조금은 무서운걸?’

500년 전에도 들어 본 중대형 몬스터들이 한가득이었는데, 각 영역은 기존 모험가들의 희생과 피로 위치가 표시되어 있었고, 그들의 영역으로는 가지 말라는 주의 사항도 붙어 있었다.

하나 베오날드는 위치를 확인하고 기억 속에 넣어 둔 다음 지체하지 않고 곧바로 사냥감을 선택해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폰 잡아야지.’

그리폰. 독수리의 날개, 앞발과 사자와 같은 맹수의 몸을 가진 생물.

주로 높은 산에 살며 기습적으로 강하해서 소나 말 같은 생물을 잡아먹는 걸로 유명했다.

다만 사는 곳이 워낙 높은 산인 데다 거리도 꽤 먼 곳이었는데, 베오날드가 이 생물을 선택한 이유는 매우 간단했다.

‘잡으면 가장 멋있겠지. 으으음~’

다른 모든 몬스터들도 만만치 않았지만 그래도 ‘멋’의 기준에서 따져 보면 역시 거대한 독수리의 머리와 늘씬하면서 근육질인 고양잇과 맹수의 몸통을 가진 그리폰만큼 멋이 흘러넘치는 것도 또 없으리라.

‘상상만 해도 끝내주는군.’

물론 잡는 난이도는 상상을 초월했지만 기왕 데뷔하는 무대라면 역시 최고로 멋진 것을 잡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베오날드였다.

평생을 귀족으로 살아온 그의 머릿속에는 나름 귀족의 품격과 멋, 그리고 명예에 대한 욕구로 가득해서 자신이 14세이며 너무 능력을 드러내지 말고 감춰야 한다는 사실을 순간적으로 깜빡 잊어버리고 말았다.

“…아, 맞다. 나 14살이었지.”

한껏 야망에 취해 있던 베오날드가 자신이 지금 14살에 가진 카드를 그동안 잘 숨겨 왔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산속 깊은 곳까지 와서 야영을 하려던 타이밍이었다.

“나 정도 되는 자가 이런 실수를!”

그래, 그 랄트라는 꼬맹이가 심기를 건드린 것부터 시작해서 오랫동안 참고 있었던 귀족으로서의 욕구까지 폭발하면서 순간적으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것이리라.

“그럼 그리폰은… 무리잖아! 젠장! 잡아도 무리라고! 그러면 하향 조정해야 하나? 끄으으응~ 그럼 14세에 기량이 적절한 몬스터가 뭘까? 젠장! 그보다… 너무 멀리 온 것 같은데…….”

너무 의욕에 찼던 머리가 식어서 정신이 들었을 땐 이미 산 깊은 곳까지 와 있었다.

그것도 그리폰의 서식지에 가까운 곳까지, 험한 산행로를 도끼와 검으로 뚫어 내고 와서 도착하니 이제야 떠오른 것이었다.

“으으음… 어쩐다? 후우우~”

한숨을 푸욱 쉰 베오날드는 오다가 잡아서 딱 알맞게 구워 낸 토끼 고기를 뜯으면서 어떻게 할지를 고민했다.

일단 자신의 외양과 기량이 14세를 벗어나긴 했지만 너무 화려한 건 잡으면 곤란할 거란 생각에 팔짱을 낀 채 고민하던 그는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 것을 감지했다.

“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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