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베오날드의 모친은 그로부터 정확하게 일주일 뒤, 젤커드 자작에게 선물을 보냈다.
그리고 베오날드는 한동안 검술 수련의 비중을 줄이고 밖으로 나가서 약초꾼과 사냥꾼들에게 기술을 배우는 일에 열중했다.
누군가가 자신을 감시하러 올 것이기 때문에 이때야말로 산에 대해 아주 잘 아는 그들의 지식과 기술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도련님, 야생동물도 조심하셔야 하지만, 무엇보다 조심하셔야 할 것은 몬스터입니다. 암흑신의 자손인 놈들은 언제 어디서 만날지 모르니까요.”
“하지만 우리 영지 근처엔 이렇다 할 몬스터 부락이 없지 않나? 고작해야 고블린 정도지.”
“그래도 방심하셔서는 안 됩니다요. 저희야 흔적이 보이면 바로 도망치지만요. 아무튼 덫은 이 정도면 됐습니다.”
“근데 정말 아쉽네. 대장간 같은 것만 있어도 좀 더 좋은 덫이나 도구를 만들 텐데.”
사냥꾼들이 쓰는 사냥 도구는 죄다 자연물에서 나온 것이거나 사냥의 부산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심지어 화살촉까지도 뼈이다 보니 베오날드는 한숨이 나올 지경이었다.
제럴 경 같은 기사들은 이미 철기와 판금 갑옷까지 입고 있는 시대인데, 이 영지가 얼마나 낙후된 건지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하하하, 저희 영지 같은 시골에 올 대장장이가 있겠습니까요? 정 그러시다면 도련님, 영주님에게 부탁해서 다음에 캘러메인 백작님의 영지에 가면 좀 사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요. 물론 좀 싸게 말이죠.”
“말은 해 볼게. 아, 잠깐만 이거… 약초인데 좀 캐 가야겠다.”
그렇게 오늘도 약초꾼과 사냥꾼에게 수업을 들은 베오날드는 내려오는 길에 약초를 잔뜩 캐서 가져왔다.
잘 말리는 게 중요했기에 저택 한구석에 판을 깔아서 직접 말려 놓고, 이미 마른 약초들은 분말로 만든 다음 석회석 가루와 섞어서 분말 형태의 상처에 뿌리는 약으로 만들기도 하였다.
이는 달여서 진액을 굳혀 다시 가루를 내서 먹는 약으로, 혹은 진액에 깨끗한 기름, 술 등등… 많은 재료를 섞어서 연고 형태로도 만드는 식으로 다양한 시제품을 만들어 내었다.
‘아, 이제야 본업 하는 느낌이 나네. 물론… 이건 아주 기초적이고 초보적인 약제이지만 말이지. 하하…….’
500년 전 베오날드 폰 노이멀은 연금술사로도 이름을 떨친 몸이다.
심지어 최고의 경지라는 납을 금으로 바꾸는 것도 성공했을 정도였다.
물론 비용은 천문학적이라서 가끔 황제를 위한 쇼의 용도로밖에 쓸 수 없는 것이 문제였지만, 연금술 학회에도 이름을 남길 만큼 굉장한 인물이었기에 이 정도는 아주 쉬운 일이었다.
‘그나저나 이 체펔이었나? 내 시대엔 달라스라고 불렀는데……. 아무튼 이 약초는 워낙 쓸 곳이 많은데 대량 재배 안 되려나? 좀 많이 있어야 다양한 실험을 하면서 더 좋은 약으로 개선하기도 하고, 다른 약을 만드는 데 많이 쓸 텐데 말이지.’
연금술사로서 지식과 경지는 높아서 약초의 효능과 사용법은 잘 알지만, 재배법은 농업의 영역이었기에 전혀 모르던 베오날드는 금방 양이 부족함을 깨달았다.
자신이 캐 와서 말리는 것도 좋았지만 그러자니 시간이 너무 아깝고 생산량도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농민에게 물어봐야 하나? 젠장! 뭐 하나 편하게 되는 게 없군.’
하지만 그래도 하는 것과 안 하는 것의 차이는 크다.
이런 작은 의약품 하나를 비축하고 안 하고의 차이가 죽을 사람을 살릴 수 있었다.
그것이 영지의 유지에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아는 베오날드는 가능한 한 많은 의약품을 확보하기 위한 방안을 차후에 더 생각해 보고자 했다.
***
며칠 뒤.
더스티클록 자작가는 워낙 깡촌이라서 이곳에서 나가서 캘러메인 영지로 갔다가 오는 이는 있어도 먼저 이곳에 찾아오는 이들은 없었다.
그래서 델마인 남작에게 명령을 받고 이곳 자작의 아들인 베오날드를 조사하러 온 기사, 월터 경은 침입을 할 방안이 떠오르지 않아 캘러메인 영지에서 떠돌이 상인 하나를 매수하여 잠깐 더스티클록 영지로 가자고 한 것이었다.
“저희야 돈 받고 가는 거지만… 기사님은 대체 뭐 하러 가시는 건지요?”
“묻지 말게. 나도 지금 많이 심란하네. 명령이라지만 정말이지 어이가 없어서…….”
떠돌이 상인의 작은 마차에 타고 있는 월터 경은 상인의 말에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올해 29세인 그는 간신히 25세에 마나를 깨우쳐서 하급 기사가 된 몸. 자신의 가문에 내려오는 마나 호흡법은 물론 영약이라 불리는 포션까지 마셔 가면서 깨우치려고 애써서 25세에 겨우 기사가 되었다.
‘10살짜리 애가 기사인지 조사해 오라는 명령을 내리다니……. 참 나,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래도 기사님이 있으니 몬스터 걱정은 안 해도 돼서 좋군요. 하하핫.”
“아무튼 가서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게. 그리고 나는 자네에게 고용된 용병이라는 거 잊지 말고. 알았나?”
“암,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떠돌이 상인과 함께 월터 경은 조심스럽게 더스티클록 영지 내부로 들어갔다.
용병으로 위장한 월터 경은 아예 진짜 용병이 쓰는 장비를 사서 챙겼기에 수상하게 여길 게 없었다.
“정말 시골이군요. 여기… 돈은 굴러갑니까? 끽해야 물물 교환이 전부일 것 같은데 말이죠.”
“…나도 그래서 오고 싶지 않았네.”
“일단 영주님 저택에 가 봐야겠군요. 물론 기사님의 부탁도 거길 가는 것이었지만 말이죠.”
“그러세.”
떠돌이 상인의 마차는 그대로 영주의 저택으로 향했고, 레이온 자작은 보통은 오지 않는 행상인의 방문에 반가워하며 즉시 영지 백성들에게 상인이 왔다는 통보를 넣음과 동시에 그 자신도 이곳에서 구하기 힘든 물건을 사기 위해 움직였다.
“자자, 천천히, 천천히 오십시오. 물건은 여럿 있습니다. 물물 교환도 받으니까 걱정 마십시오. 하하하, 자작님도 혹시 필요한 게 있으신지요?”
“혹시 장신구나 보석은 없나? 가능하면 선물용으로 보관하고 싶은데 말이지.”
“하하, 물론 있습니다요. 하하하핫.”
웅성웅성…….
간만에 행상인이 온 탓에 영지민들까지 몰려와서 북적북적해진 상인의 마차였다.
그 안에서 월터는 경비를 봐 주면서 레이온 자작의 아들을 찾기 위해 둘러보는 중이었다.
분명 이런 시골 촌구석의 10살 아이라면 외지에서 온 상인에게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
‘어디 보자… 어린 꼬맹이가 어디 있을까?’
“상인 아저씨, 이 유리병은 어디서 만든 겁니까?”
월터 경이 어린애를 찾는 사이, 한 청년이 상품으로 진열되어 있던 유리병을 꺼내어 상인에게 가격을 물었다.
검은 머리칼을 가진 곱상한 외모의 청년이긴 했지만 일단 입고 있는 옷은 흔한 작업복이었고, 키나 체구로 보아 절대로 10살로 보이지 않아서 그냥 저택의 하인 정도로 생각하고는 신경을 끄는 월터 경이었다.
“예? 그러니까… 캘러메인 영지에 있는 유리 장인이 만든 것이지요. 제가 직접 사서 가져온 겁니다.”
“으음, 가격이 얼마나 돼요?”
“개당 은화 3장입니다.”
“너무 비싼데. 캘러메인 영지에 직접 가서 사야 하나?”
“아이고, 보통은 캘러메인 백작님에게 진상되고 남은 것을 파는데, 이건 진상되는 놈을 산 겁니다.”
상인답게 교섭을 수월하게 하기 위해서 ‘살짝’ 진실 같은 거짓을 섞어서 집어넣는다.
어차피 이런 시골 영지의 청년 따위가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간파할 수 없으며, 차후 캘러메인 영지에 간다고 한들 이미 거래가 끝나고 난 뒤일 것이다.
또 애초에 영주 허락 없이 영지를 벗어나는 일도 불가능할 테고 말이다.
“음? 엄마아! 이거 확인 좀 해 주세요!”
“으음? 잉?”
하나 가격 교섭을 하던 중 청년이 뒤를 보며 갑자기 누군가를 불렀고, 더스티클록 자작 부인이 점점 가까워져 왔다.
캘러메인 백작의 딸 중 한 명인 그녀는 비록 이런 근본도 없는 용병 출신 귀족에게 시집왔지만, 그래도 분명 한때 캘러메인 백작의 딸로 저택에서 생활을 하였다.
얼굴 절반이 화상으로 흉측해진 그녀의 정체를 알아보지 못할 리도 없고 말이다.
“엄마, 이거 캘러메인 백작님 저택에 진상되는 거랑 같은 게 맞나요?”
“으음… 그렇지 않아 보이는데? 베오날드, 이걸 만드는 그 유리 장인의 집엔 나도 자주 가는 편이라 아는데…….”
“그럼 저 상인이 거짓말을 했다는 거네요?”
그러자 청년은 무서운 눈으로 상인을 바라보았다.
이런 종류의 가벼운 사기를 들키는 경우야 종종 있는 일이기에 그는 넉살을 떨면서 다른 상품을 꺼내는 척하려는데, 이상하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뭐지? 이, 일단은 자작 부인보고 엄마라고 하는 걸 보면 아들이라는 건데. 그럼 설마 이 청년이 그… 더스티클록 자작가의 후계자?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 느낌은?’
고작해야 갓 성인(15세) 정도로 보이는 어린 청년의 시선이 무서울 리 없을 텐데, 상인은 마치 뱀 앞의 개구리처럼 살이 떨리는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도저히 이성적으론 이해할 수 없었지만, 식은땀이 흐르는 것부터 시작해서 저 청년을 화나게 해선 안 된다고 상인의 감각과 본능이 외치고 있었다.
“과연…….”
“죄, 죄송합니다! 제가 물건도 물건이고! 사람을 잘못 봤습니다! 도, 도련님! 사죄의 뜻으로 그 유리병은 그냥 드리겠습니다.”
“아니, 하나 가지곤 소용없어.”
“그, 그러면 여, 여기! 세트로! 세트로 드리겠습니다. 이만큼 다 가져가십시오.”
유리병이 든 상자를 통째로 내밀면서 상인은 베오날드에게 계속 굽실거렸다.
목숨보다 소중한 건 이 세상에 없기 때문에 그는 큰 손해를 보더라도 지금 자신의 직감을 믿기로 한 것이다.
“정말 그래도 되나?”
“예, 물론이죠. 제가… 제가 잘못한 일이니까요. 하하하.”
사실은 속이 쓰릴 만큼 엄청난 손해였지만, 천만다행으로 베오날드의 눈빛이 많이 누그러지면서 자신을 짓누르던 압박감이 사라진 것에 상인은 안도했다.
드디어 연금술에 쓸 수 있는 도구가 확보된 것을 기뻐하며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뛰던 베오날드는 문득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다.
‘뭐지? 음? 아… 용병인가? 하지만 그렇다고 저런 시선을 보낼 일이 없는데……. 아, 아니면 저 떠돌이 상인의 친우 혹은 동료인가 보군.’
“음? 베오날드, 아무리 그가 잘못했어도 그건 좀 아닌 것 같다만? 그냥 돌려주는 게 낫지 않겠느냐? 그래도 이런 곳까지 찾아와 주신 분인데…….”
“아이고! 아닙니다, 나리! 제가! 제가 무조건 잘못했고, 드리고 싶어서 드리는 겁니다! 그러니! 꼭 도련님에게 주십시오. 괜찮습니다요!”
레이온 자작은 베오날드가 마치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상인의 것을 갈취한 것으로 보여 돌려주라고 말했지만, 상인은 기겁하면서 그런 레이온 자작을 말렸다.
베오날드는 순간적으로 감정이 새어 나올 뻔했지만 아무튼 연금술 도구가 될 유리병을 얻은 것에 만족하며 병이 든 상자를 가지고 자신의 수련실로 향했다.
하나 그렇게 투닥거리는 바람에 자신을 바라보던 용병의 존재, 월터 경을 머릿속에서 지워 버리고 말았다.
‘…저게 10살이라고? 믿기지가 않는… 아! 아니지. 선대 더스티클록 자작을 생각하면 무리도 아니지. 뭐니 뭐니 해도 2미터가 넘는 키에 근육질이었고, 용병 업계에서도 소문이 날 정도로 어릴 때 성장이 빨랐다고 했으니……. 아무튼 예상했던 것과 너무 다르니 조사를 해 봐야겠군.’
기사의 가능성에 대해선 몰랐지만 10살짜리라 볼 수 없는 체구와 아까 전 상인을 압박하던 눈빛이 묘했던지라 조사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 월터 경은 저택과 그를 유심히 관찰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