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신도 쓸데가 있다-12화 (12/259)

[12화]

베오날드가 잠깐 생각하느라 대치하는 동안, 엔시아 경은 지혈을 하며 고통을 참고 있는 갈슨 경에게 조용히 말했다.

“갈슨 경, 도망치십시오. 저자는 제가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닙니다.”

“끄으으음! 하지만 어디로 도망치란 말인가?”

“다리는 멀쩡하시죠? 제가 정면으로 달려들 테니, 그사이에 옆으로 빠져나가시지요.”

“그게… 될까? 오히려 그러다 죽을 것 같은데……. 대체 저런 괴물이 갑자기 어디서 나온 거지? 저런 위압감, 상급 기사 수준인데…….”

“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곳에 있을 인재가 아닌데……. 아무튼 남작님께 이 사실을 알려야 합니다.”

갈슨 경과 엔시아 경 둘 다 눈앞에 나타난 미지의 기사를 보며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상급 기사 정도라면 이미 대귀족들과 황실이 가만둘 리가 없었다.

그냥 하급 기사들만 해도 차원이 다른 전투 병기들인데, 중급, 상급 기사는 전장의 판도를 바꿀 레벨이었기 때문이다.

‘음, 옆의 노친네는 둘째 치고, 저 여기사는 죽이기엔 아까운데~ 으으음~’

생전 수많은 처와 첩, 노예들을 거느렸던 호색가이면서도 또다시 희귀한 것을 보면 수집하고 싶어 하는 성향은 그대로 가지고 있는 베오날드인지라 엔시아 경을 보며 갈등 중이었다.

원래 계획은 그냥 싹 죽이고 입 닫아 버리는 것이었는데, 희귀한 걸 보니 마음이 동했던 것이다.

‘외모도 아주 나쁜 건 아니고, 저건 저것대로 수수한 맛이 있어서 갖고 싶은데… 흐음~ 일단 제안이라도 해 볼까?’

“옵니다! 갈슨 경! 부디 무운을!”

“알았네!”

엔시아 경이 먼저 앞으로 몸을 날렸고, 베오날드는 그에 맞서기 위해 똑같이 오러를 끌어 올리며 달려갔다.

그녀의 뒤로 갈슨 경이 거의 동시에 따라오는 것을 발견한 베오날드는 딱 봐도 어떤 속셈인지 눈치챘다.

‘뻔한 수를……. 수준 차이가 좀 덜 나야 그런 걸 당해 주지. 애초에 생각이 둘로 나뉘어 있으니 공격이 뻔해지잖아.’

물론 수준 차이 때문에 엔시아 경의 공격이 보이기도 했지만, 뒤에 따라오는 갈슨 경에게 신경이 쏠린 나머지 공격이 너무 크고 뻔한 게 문제였다.

방침은 나누더라도 전투에 나선 이상은 그것에 집중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 그들의 실책이라 할 수 있었다.

“컥……!”

“잡았다.”

투웅!

그렇기에 베오날드는 단 한 동작이면 충분했다.

검 손잡이를 엔시아 경의 가슴에 찔러 넣어서 밀쳐 내고, 그런 다음 몸을 돌려서 옆으로 빠져나가려는 갈슨 경의 목을 내려쳤다.

물 흐르는 듯한 깔끔한 검술. 도망치는 것에 모든 신경을 집중한 갈슨 경은 그대로 머리와 몸이 분리된 채로 땅을 굴렀으며, 뒤로 밀쳐진 엔시아 경은 다시 자세를 잡았지만 이미 상황은 끝난 거나 마찬가지였다.

“이제 일대일이네? 아무튼… 계속할 텐가? 일단은 투항하는 게 어때?”

“거절합니다. 기사 된 자, 최소한 주군의 명예는 지켜야 하는 법이니…….”

“그럼 주군의 명예도 지킬 수 있게 해 주면 투항하겠나? 애초에 기사가 야간에 침입해서 암살을 하는 자체가 명예를 깎아 먹는 일이지만, 그건 안 들키면 그만이니까~”

“무슨 생각이십니까?”

“널 갖고 싶다.”

베오날드는 한 점의 부끄러움이나 망설임 없는 표정으로 엔시아 경에게 대놓고 말했다.

그녀는 당황한 듯 놀라 물러섰지만 베오날드는 즐겁다는 듯 미소 짓고 있었다.

아주 오랜만에 자신의 ‘취미’ 생활을 즐길 기회가 온 것이었다.

“제정신인지요?”

“제정신이지. 죽이기엔 아까운 인재이기도 하고, 아직 젊은데… 이런 곳에서 암살로 명예를 더럽힌 채 죽고 싶지도 않잖아. 기사라면 모름지기 정의가 교차하는 전장에서 신념을 걸고 싸우다 명예롭게 죽어야 하는 법. 아니면 저것처럼 시체로 구를 텐가?”

“…….”

엔시아 경은 목과 오른팔이 잘린 채로 길바닥에 널브러진 갈슨 경의 시신을 바라보았다.

생명이 끊어진 시신. 분명 눈앞의 남자는 마음만 먹으면 자신을 그렇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죽음의 공포와 기사로서의 명예와 자존심, 그리고 델마인 남작의 보복이 머릿속을 흔드는지라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고민이 된다면 차후에 승인해도 되는데… 다만 며칠 정도는 감금 생활을 해야겠지만, 그러고도 거부한다면 몰래 조용히 떠나게 해 주지. 어떤가? 아니면 지금 명예라곤 없이 시체가 되든가?”

“…거부합니다.”

“그래. 그럼 아쉽군.”

그 말을 끝으로 보랏빛 섬광이 엔시아 경의 목을 갈랐고, 그녀의 육체는 선 채로 목이 땅에 굴러떨어졌다.

아쉽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대의 의사까지 꺾거나 인성을 짓밟아서 굴복시키는 건 좋아하지 않았다.

취미는 어디까지나 취미로 남아야 아름다운 법. 게다가 전생의 부친인 벨릭스가 여성 문제에 관해서 워낙 추잡스러운 모습을 보여 주었기에 절제하는 법을 배운 덕분이었다.

“…이제부터가 문제군.”

싸움은 손쉽게 끝났지만 본격적인 일은 이제부터였다.

죽은 시체들은 모아서 정리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는데, 문제는 역시 핏자국들을 지우는 일이었다.

저택 밖의 것들은 그나마 흙만 갈아엎으면 해결되었지만, 정문과 자신의 수련실 앞에서 죽은 시체들로 인해 바닥에 핏자국이 진하게 남은 게 문제였다.

“젠장! 연금술 설비만 있었으면 약품으로 해결할 수 있는데! 제길! 망할 깡촌!”

자신의 특기를 살릴 수 없는 상황에 분개하며 베오날드는 번거로운 방법을 쓸 수밖에 없었다.

다만 그들이 입고 있는 갑옷과 무구, 돈은 모두 회수해서 자신의 수련실에 만들어 둔 비밀 공간 안에 숨겨 두었고, 결국 완벽하게 핏자국을 지우지 못하기에 같이 온 병사가 아닌 도적들이 무단으로 저택에 침입한 것으로 연출하고, 나머지 시신은 멀리 가지고 가서 묻어 버렸다.

‘혼자 하려니 손이 너무 많이 가는군. 제길!’

자그마치 17명, 아니 도적 4명분을 뺀다고 치면 13명분의 시신을 치우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심지어 도적들 같은 경우 한 번 잡혀 왔던 놈들이라서 신원을 바꾸기 위해 영지에 오지 않은 병사와 옷까지 갈아입혀 놔야 했기에 2배로 짜증이 났다.

하지만 이러지 않으면 부모님을 속일 수 없었기에 베오날드는 짜증을 참으며 계속 움직였다.

‘마나 호흡법 수련해 놓길… 정말 잘했다.’

갓난아기 시절부터 마나 호흡법을 수련하지 않았더라면 아침 해가 뜨고도 모두 다 처리 못해서 아등바등했을 테지만, 그렇지 않았기에 순식간에 처리를 완료했다.

연출된 도적들의 시체를 놔두고 베오날드는 얼굴을 가린 채 제럴 경, 갈슨 경, 엔시아 경의 머리와 소지품 몇 가지를 챙겨서 제럴 경의 영지로 향했다.

‘일단 줄 건 줘야지. 행방불명이 되면 막 찾느니 뭐니 하면서 괜히 이 영지를 들쑤시고 다닐 테니 말이야.’

“누구냐? 당장 멈추고 신원을 밝혀라!”

“돌려줄 물건이 있어서 왔다. 받아라. 너희 주인이다.”

“이, 이건……? 제, 제럴 경의? 그리고 이건? 델마인 남작 측의 기사인… 에, 엔시아 경과 갈슨 경? 자, 잠깐! 거기 서! 멈춰라!”

그리고 제럴 경의 저택에서 야간 근무를 서는 병사에게 수급과 소지품을 건네준 베오날드는 바람처럼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이걸로 시끄러운 일은 모두 이 영지로 몰릴 것이다.

도적이 잠깐 왔다 간 일보단 역시 가주를 잃고, 기사 가문으로서 후계자를 잃은 이 제럴 경의 ‘영지’를 누가 차지하느냐를 가지고 또 영지 없는 기사들의 신경전이 시작될 테니 말이다.

‘이제 돌아가서 저택 쪽 정리만 하면 되겠군.’

베오날드는 만족해하며 돌아갔다.

그리고 아침 해가 뜨자마자 잠시 저택 밖으로 보냈던 하인들에게 일부러 남겨 둔 도적들의 시신을 보여 주면서 자신이 그들을 밖으로 내보낸 이유를 납득시켜 주었다.

“과, 과연 도련님. 저희가 그것도 몰라뵈었습니다. 하지만 사전에 이야기해 주셨어도…….”

“괜한 희생을 만들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특히나 얼마 전에 도적들에게 시달린 이후이니 말이야. 아무튼 빨리 현장을 정리해라.”

“예! 도련님. 그런데 이것들을 모두 도련님이 처리하셨습니까?”

“5년 내내 검을 휘둘렀으니 이 정도는 해야지. 아무튼 빨리 정리하도록.”

결국 하인들은 베오날드의 말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현장을 제대로 치우기 시작했고, 베오날드는 부모님들이 돌아올 때까지 어제 얻은 전리품을 정리했다.

소지품을 건네주었지만 제럴 경의 경우 그저 가문의 인장과 두 사람은 갑옷의 일부만 주었기에 17명분의 무장과 소지품의 양이 꽤 많았던 것이다.

‘이것들은 나중에 몰래 다른 영지로 가서 팔아야겠군.’

철제 무기와 병사들이 입던 사슬 갑옷과 기사 둘이 입던 판금 갑옷 모두를 팔면 꽤 가격이 나올 법했다.

직접 철괴로 만들면 마음 편하게 팔 수 있겠지만, 이곳엔 대장간조차도 없어서 결국 통째로 가져가야 하는 만큼 갑옷의 출처에 대해 들키지 않기 위해선 적어도 캘러메인 백작가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다른 영지로 가야만 했다.

‘이건 나중에 생각하고… 일단은 한숨 자고, 부모님부터 맞이할까?’

어젯밤 내내 싸우고 달리고 한 만큼 베오날드는 조금 지친 상태였기에 수면을 취하기로 했다.

이후 해가 정오를 지나서 오후가 되었을 무렵, 어제 캘러메인 영지로 급히 떠났던 베오날드의 부모가 돌아왔다.

두 사람은 저택에 도적들이 들어왔다는 소식과 그들을 베오날드가 처치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

“네가 이 도적들을 처치했다고? 망할 놈들! 우리가 캘러메인 영지에 간 사이에……!”

“예. 하지만 다행히 하인들을 대피시키고, 들어온 것을 제가 각개 격파했습니다.”

“맙소사! 허어! 하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이런 무모한 짓을 하다니!”

“아버님이 안 계시면 이 영지의 주인은 접니다. 제가 안 지키면 백성들이 고통받으니까요. 이때를 위해서 5년간 검을 연마한 게 아니겠습니까? 귀족의 의무이지요.”

사람 좋고 순박한 레이온 자작은 당차게 말하는 베오날드의 말에 더 이상 반박하지 않고 100퍼센트 신뢰하며 넘어가 버렸다.

하지만 역시 어머니 쪽, 레이온 자작을 대피시키기 위해 거짓말로 캘러메인 영지로 가게 했던 그녀에겐 집무실에서 다시금 진실 되게 설명을 해야만 했다.

“…제럴 경은 물론이고 델마인 남작 아래에 있던 갈슨 경과 엔시아 경까지 왔었다고?”

“예. 그리고 우리 영지를 약탈하던 그 도적들도 제럴 경의 수하들이었던 것 같아요.”

“맙소사……!”

도적에 이어서 3명의 하급 기사가 자신들을 죽이러 왔다는 충격적인 진실에 베오날드의 모친은 아연실색했다.

자신들은 그저 조용히 이 영지에서 살고 있고 탐낼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외부에서 공격이 올 줄은 상상도 못한 것이리라.

“내가 너무 안일했던 것 같구나. 후우우~ 내일 당장이라도 조치를 취해야겠다.”

‘그렇지. 이래야 정상이지.’

‘그보다… 살인을 하고도 아무렇지 않아 하는 건 역시 할아버님을 닮은 탓일까?’

보통 사람이라면 10살짜리가 살육을 한 것에 대해 비정상적이라고 느끼겠지만, 베오날드의 모친은 자신의 아버지인 캘러메인 백작이 어린 시절부터 잔혹하고 자비 없는 모습을 보여 주었기에 그의 피를 받았다는 생각을 해서인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 베오날드가 이를 알면 자신이 500년은 더 먼저라고 반박했을 테지만, 생각을 알 수 없으니 그냥 넘어갔다.

그리고 베오날드의 모친은 다른 질문을 그에게 건넸다.

“후우~ 그런데 베오날드, 그 ‘마나’는 언제… 깨우친 거니?”

“얼마 되지 않았어요. 아니, 이미 깨우치고 있었지만 자각한 것은 어머님이 알려 주시고 난 이후예요.”

“그렇구나. 설마 베오날드… 네가 천연 기사일 줄이야.”

‘전생에 배웠다고 해 봐야 이야기가 복잡해지니까 저걸로 넘어가야지. 게다가 그걸 아는 순간 나는 부모님의 자식이 아니라 남이 되어 버릴 수도 있으니…….’

자신은 베오날드 폰 노이멀이었지만 지금은 베오날드 더스티클록이기도 했다.

상냥함과 다정함으로 자신을 길러 준 부모에 대해선 귀족으로서는 좋은 평가를 내리지 않았지만, 인간이자 자식으로서는 좋은 부모라는 것을 철저히 느끼고 있었다.

애초에 그렇기 때문에 지금 자신이 밤새도록 뛰어다니면서 그들을 지키기 위해 싸운 것이었다.

“아무래도… 여신께서 너에게 엄청난 선물을 내려 주신 것 같구나.”

“어쩌면 부모님에게 내려 주신 걸지도 모르죠.”

베오날드는 자신을 이곳에 보낸 여신에 대해 생각하며 넉살 좋게 모친의 말에 대답했고, 그녀와 이 일을 비밀로 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앞으로는 일이 있을 때 상의하기로 다짐하였다.

그리고 이번 일로 인해 얻은 것이 있다면, 아직 10살이지만 가족의 일에 대해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발언권이라고 생각하는 베오날드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