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드디어 왔군. 기다리느라 졸려 죽는 줄 알았네. 어디 볼까?’
손님 맞을 준비를 하느라 바빴던 베오날드는 저택에 유유히 잠입하는 제럴 경과 도적들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기사로 보이는 2명은 따로 움직여서 먼저 2층으로 가기 위해 벽을 타고 올라가는 것까지 확인한 뒤에야 움직이기 시작했다.
‘예상대로 흩어져서 잠입하는군. 정석이고, 또 전투력이 남아돈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당연한 일이지. 그리고 혹시나 있을 도망로 차단과 도둑질도 겸하는 건가?’
그들이 흩어진 것은 베오날드의 예상대로였다.
그리고 낮에 사전 준비를 좀 한 덕분에 대응은 바로 시작할 수 있었다.
곧바로 검을 뽑아 든 베오날드는 건물 바깥쪽으로 뛰어내리면서 몰래 저택 안에 들어오려던 도적 하나를 그대로 베어 냈다.
“이거 뭐…….”
‘시간 없다.’
그리고 아닌 밤중에 기습을 받은 병사와 도적들이 놀라는 사이, 오러를 끌어 올린 그는 단숨에 몸을 돌려 병사와 도적 다섯을 베어 냈다.
피를 털어 내고 숫자를 확인한 베오날드는 지체 없이 움직였다.
‘일단 여기 5명. 다음!’
그다음은 저택 바깥을 빠르게 돌았고, 이번엔 다른 방향의 창문을 열고서 들어가려는 4명을 발견했다.
그들은 아직 베오날드를 발견하지 못한 듯 작은 촛불 하나에 의존하여 문을 열려고 하는 중이었다.
“제기랄, 무슨 놈의 창문이 이렇게……. 잘 안 보여서 미치겠네. 좀 더 가까이 대 봐.”
“우리도 그냥 문으로 갈 걸 그랬나?”
“둘 다 시끄러워. 조용히 하고 따기나… 어? 저거?”
“뭔데?”
병사와 도적과는 다르게 베오날드는 마나를 깨우쳤기에 이 야밤에도 시야에 제약이 크지 않았다.
보랏빛 잔상이 자신들을 향해 달려오는 걸 발견한 순간, 이미 베오날드의 검은 그들의 목을 베어 낸 지 오래였다.
‘이걸로 아홉. 다음!’
숫자만 확인하고 베오날드는 빠르게 또 달렸다.
이제 더 이상 저택 외곽에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걸로 보아 남은 인원은 모두 저택 내부에 침입한 듯했다. 그는 빠르게 내부로 들어간 흔적의 뒤를 쫓았다.
그러자 보인 것은 제럴 경과 그의 병사 5명으로, 안에서 아무런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자 이상하게 생각하는 모습이었다.
“뭐지? 왜 아무도 순찰을 안 돌지? 아무리 시골이라지만 자작의 영지인데… 불침번 하나도 안 세우나?”
“뭐, 인력이 부족해서 그럴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아니야. 심지어 저택 외부 경비도 없었어. 제아무리 그 자작이 생각 없는 놈이라곤 해도……! 조심해!”
‘잡았다.’
발소리를 죽이면서 달려왔지만, 역시 마나를 느끼는 제럴 경은 베오날드의 오러를 느끼고 곧바로 병사들에게 경고했다. 하지만 베오날드가 더 빨랐다.
그는 보랏빛 섬광처럼 날아가 제럴 경의 말에 따라 움직이려던 병사들 4명의 머리를 동시에 베어 버려 비명도 못 지르게 만들었다.
그리고 다섯 번째를 베려는 순간, 푸른빛 오러를 두른 검이 그의 앞을 막아섰다.
“히이익!”
“제길! 네놈! 정체가 뭐냐?”
‘시답지 않은 걸 묻고 있네.’
채앵! 푹!
베오날드는 제럴 경의 말을 무시하고 막아 낸 검을 쳐 낸 다음 곧바로 병사의 목숨을 끊어 버렸다.
가장 먼저 제럴 경을 기습으로 죽일까 고민했지만 그러면 다른 병사들이 멘탈 터져서 모두 도망칠 테고, 소란스러워지기 때문에 굳이 병사들부터 노린 것이었다.
‘또 내가… 대(對) 기사전이 처음이거든.’
전생엔 군림하는 대귀족으로서 직접 기사와 싸울 일이 아예 없었고, 이번이 기사와 싸우는 첫 경험이니 만큼 다른 변수를 모조리 차단하고자 한 것이었다.
결국 병사들을 다 처리한 베오날드는 드디어 제럴 경에게 시선을 주었다.
어두운 밤이지만 그의 몸을 감싼 보랏빛 오러가 잔상을 남기는 게 보일 정도로 우아하면서도 기품 넘치는 동작으로 베오날드는 예를 갖추어 그에게 인사를 했다.
“이 늦은 밤에 다시금 인사드릴 수 있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제럴 경. 제 이름은 베오날드 더스티클록, 이 영지의 주인 레이온 더스티클록 자작의 아들이자 후계자입니다. 낮에는 추태를 보여서 정말 죄송했습니다.”
“뭐, 뭐라고?”
제럴 경은 자기소개를 하는 베오날드를 믿을 수 없다는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그가 믿을 수 없는 것도 무리가 아닌 게 베오날드라 하면 오늘 낮에 자신의 앞에서 추하게 넘어져 버린 그 허우대만 큰 10살 소년이었기 때문이다.
‘말도 안 돼!’
한데 지금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은 도저히 10살 소년의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날카롭고 차가웠으며, 전신에 진하게 흐르는 보랏빛 오러는 못해도 중급, 아니 상급 기사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과 비슷했다.
고작 10살짜리 상급 기사라는, 도저히 말도 안 되는 존재가 눈앞에 서 있는 것을 이성은 인정하려 하지 않았지만, 몇 번이고 자신의 감각으로 전해져 오는 저 존재감은 틀림없는 현실이었다.
‘…대체 뭐냐고? 레이온 자작의 아들이! 고작 10살짜리가 상급 기사라고? 내가 지금 헛것을 보는 것인지? 이게… 이게 현실이란 말인가?’
하지만 자신의 육체와 뇌의 판단은 매우 정직했다.
상급 기사급 오러가 흘러나오는 것에 몸은 떨렸고,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실을 마주한 그는 공포에 떨기 시작했지만 놈은 현실이라는 듯 발소리를 내며 자신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아무튼 남의 영지는 물론 저택에 무단으로 들어오신 대가는 무엇인지 아시죠? 죽어도 할 말이 없다는 거죠.”
“…자, 잠깐만! 잠깐만 기다리게. 이건… 이건 뭔가 잘못된… 으으윽!”
‘황실 기사단 아류 노이멀 일식(一式)-살무사’.
보랏빛 궤적이 초승달을 그리면서 제럴 경에게 날아갔다.
그는 자신의 검에 오러를 실어서 그것을 튕겨 내려고 했지만 검이 닿기 직전, 갑자기 휘둘러지던 궤적에서 벗어나 직선을 그리며 독사처럼 날아간 검이 제럴 경의 목을 꿰뚫었다.
“무, 무슨 이런…….”
‘음, 나름 실전에도 쓸 만하군.’
“컥! 어어억!”
목에서 분수처럼 흐르는 피를 본능적으로 막기 위해 검을 놓친 제럴 경은 그대로 땅에 주저앉아 버렸다.
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신성력이나 포션이 아닌 이상 이 상처는 치유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전쟁 같은 상황도 아니고, 상급 기사급 적을 만날 거라 생각지 못했기에 그런 것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컥! 콜록! 콜록! 어떻게… 어떻게 이런 일이…….”
“운이 없던 거라고 생각해라. 인간이 태풍이나 산사태, 홍수를 만났다고 한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거와 같은 이치이지.”
“안 돼. 나는… 컥! 컥! 이런 곳에서… 어억… 죽을 순…….”
철퍽!
하나 이미 저택 바닥에 작은 웅덩이가 생길 만큼 출혈이 심각했던 제럴 경은 더 이상 의식을 붙들 수 없었고, 결국 그는 자신의 피 웅덩이에 쓰러져 그대로 숨을 거두었다.
베오날드는 제럴 경의 죽음을 확인할 가치도 없다는 듯 몸을 돌려서 2층으로 향했다.
이 정도 시간이면 이미 2층으로 잠입한 기사들은 자신의 부모가 잠든 침실에 도달하고도 남았겠지만, 그들은 결코 자신의 부모를 죽일 수 없을 것이다.
‘왜냐면 부모님은 여기 없거든.’
씨익.
도저히 혼자서 이 저택에서 부모님을 지키면서 싸우기는 무리라고 여긴 베오날드는 어머니를 설득하여 캘러메인 영지로 향하게 만든 것이었다.
어머니를 설득하는 방법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어머니, 캘러메인 백작가에서 급한 연락이 왔다는 핑계로 지금 당장 아버지를 모시고 잠시 이곳을 떠나 주실 수 없을까요?’
‘그게 무슨 소리니? 어머?’
‘시간이 매우 촉박해요. 자칫하면 큰일 날 수 있습니다.’
그 방법이란 바로 마나를 끌어 올려 보랏빛 오러를 보여 주는 것이었다.
재능을 가진 이가 마나 호흡법을 단련해야만 얻을 수 있는 기사의 상징. 모친은 그것을 보고 순간 놀랐지만, 곧바로 베오날드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
이미 제럴 경을 만날 때 10살 아이 같지 않은 현명함을 보여 주었기에 그녀는 베오날드의 말대로 했고, 그 덕분에 저택의 병사들도 싹 치울 수 있었다.
‘망할 하인 놈들, 사람이 가라고 하면 잔말 말고 나갈 것이지, 왜 그리 질문이 많은 건지.’
그리고 하인들에게는 오늘 밤 잠시만 나가 있어 달라고 한 덕분에 희생을 최대한 줄일 수 있었다.
이유를 제대로 설명 못한 것 때문에 다소 강압적으로 말해야 했지만 말이다.
“젠장! 대체 영주가 어디에 있는 거야? 엔시아 경, 그대는 발견했나?”
“저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건… 여기 이중 잠금으로 된 방 하나뿐입니다.”
“거참, 시골뜨기 주제에 조심성이 되게 많군. 일단은 열어 보게나.”
2층으로 가자, 아무도 없는 방들을 열심히 뒤지면서 부모님을 찾는 기사 둘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아직도 상황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감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역시 이중 잠금이 된 두꺼운 철문으로 입구를 막고 있는 베오날드의 수련실 덕분이었다.
누가 봐도 아주 중요한 것을 숨기고 있다고 생각될 정도로 두꺼운 철문으로 막아 놓았으니 오해하기 딱 좋았다.
‘…내 수련실의 잠금장치가 저렇게 쓸모 있을 줄이야. 아무튼 그럼…….’
베오날드는 검을 들고, 심호흡을 한 다음 순식간에 마나를 끌어 올려 자신의 수련실 문을 열려고 낑낑대는 둘을 향해 노이멀 가문의 검술을 펼쳤다.
‘황실 기사단 아류 노이멀 육식(六式)-아나콘다’.
검에서 흘러나온 보랏빛 오러가 뱀처럼 굽이치면서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한참 철문에서 낑낑대던 둘은 마나를 느끼고 즉각 반응했지만 피하는 것은 다른 이야기였다.
엔시아 경은 아슬아슬하게 피했지만 갈슨 경은 오른팔이 베였다. 둘은 자신들을 공격한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오러가 날아온 쪽을 바라보았다.
“으윽!”
“누구냐? 감히 이런 비겁한 기습을?”
“…아니, 이 어두운 야밤에 남의 집에 몰래 들어온 도둑놈 같은 행보는 명예로운 행동이고? 어라?”
베오날드는 지극히 당연한 답변을 해 주면서 그들에게 다가갔다.
일단 갈슨 경은 오른팔이 베인 상태에서 지금 지혈하기도 바빠 사실상 적수가 아닌 상황. 엔시아 경만이 자신을 노려보았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그는 엔시아 경을 보고 놀란 눈치였다.
“여기사라고? 이거 상당히 놀랍군.”
“그게 어쨌다는 거냐?”
“…희귀한 걸 봤으니 놀라는 게 당연하지. 안 그런가?”
500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다지 문명과 사회가 발전하지 않고 오히려 후퇴한 상황이기에 여성의 사회 참여는 제약된 이 세상. 당연히 기사, 군인들은 대부분 남성이었기에 여기사를 보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마나 호흡법을 익혀서 마나를 깨우치고, 전투력을 가지면 기사라고 인정해 주기에 성별은 상관없었지만, 대부분의 기사나 귀족 가문에서는 여자는 남의 집으로 시집보내기에 전수해 줄 이유가 없는 것이었다.
“혹시 천연 기사인가?”
‘천연 기사’. 마나 호흡법 없이 자연적으로 마나를 모으는 체질이어서 각성한 타입.
보통 집안에 이종족의 피가 섞인 경우에 나타나는 현상이었지만, 엔시아 경은 고개를 저으며 부인했다.
“마나 호흡법은 부친께서 알려 주신 것이다.”
“흔치 않지만 그런 경우가 있지. 집안에 사내아이가 없는 경우도 있으니 말이야. 하지만 그 자랑스러운 부친이 알려 주신 기술로 기사가 되었으면서 불명예스러운 짓이라니. 부친의 얼굴에 먹칠하고 있군.”
“닥쳐라!”
베오날드의 술수에 완전히 넘어간 엔시아는 검을 뽑아 들고 그를 노려보았다.
역시 기사 놈들은 단세포라는 생각을 하며, 베오날드도 마찬가지로 검을 들고 자세를 잡은 다음 그녀를 어떻게 할지 머릿속으로 주판을 굴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