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신도 쓸데가 있다-9화 (9/259)

[9화]

“흐으음… 제럴 경이 일을 실패한 모양이군.”

“정말 죄송합니다, 남작님. 이유는 아시다시피… 갑자기 난입한 ‘방랑 기사’ 때문에…….”

“변명은 듣고 싶지 않네. 중요한 건 실패했느냐, 성공했느냐 둘 중 하나일 뿐이니 말이지. 안 그러나?”

2미터에 가까운 키에 비대한 몸을 가진 중년 남성인 델마인 남작은 심드렁한 얼굴로 전령인 안델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리고 자신의 아래를 보면서 슬쩍 질문을 던지는데, 거기엔 허름한 거적때기를 걸치고 손과 발이 사슬로 묶인 깡마른 남성 둘이 엎드린 채로 델마인 남작에게 깔려 의자가 되어 있었다.

“그, 그렇습니다. 나리…….”

“마, 마… 맞습니다… 남작님.”

이들은 델마인 남작의 명령을 거역하거나 혹은 반역을 꾀한 자들로, 잡아 와서 이렇게 의자로 삼은 것이었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자세를 유지하려고 하지만 벌써 몇 시간째 거구인 델마인 남작의 아래에 깔려 있었기에 손발이 계속 떨리고 있었다.

“으으윽!”

하지만 그들은 이 자세를 결코 풀 수 없었다.

이 자세를 푸는 순간 그들의 목숨은 끝장나는 것이며 가족과 아이들은 영주의 하인이 되거나 노예가 되어 다른 지방으로 팔려 나갈 것이다.

“물론 제럴 경은 아주 귀중한 인력이니 이런 꼴은 안 당하겠지만… 끌끌, 아무튼 그래서 내 힘이 필요하다는 거군. 음, 현명한 선택이야. 자존심이나 본인의 평가가 깎일지언정 결과를 얻겠다는 판단. 역시 우리 영지에서 오랫동안 일한 기사다워. 껄껄껄.”

“그, 그러시다면……?”

“갈슨 경과 엔시아 경을 보내 주도록 하지. 둘 다 하급 기사이지만 제럴 경보다는 강할 거고, 둘을 포함해서 셋이면 그런 근본 없는 벼락 귀족의 영지쯤은 아무 문제없겠지.”

말이 하급 기사이지, 마나를 모으고 ‘오러’를 사용할 수 있기에 일반 병사 100명보다 월등히 강한 존재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기사가 전혀 없는 영지라면 단숨에 먹잇감이 될 것이 분명했다.

“물론 조용히 처리해야 하네. 내가 배후라는 건 당연히 비밀이고, 그리고 이번엔 방랑 기사니 뭐니 하는 핑계는 통하지 않을 걸세. 내가 이번에 기회를 다시 주는 건 결과를 위해서 리스크를 짊어지는 태도 때문이지, 이해를 한 것이 아니니 말이야.”

“예, 그리 전하겠습니다! 남작님!”

고개를 조아린 안델은 남작의 말을 전하기 위해 즉시 영지로 돌아갔다.

그리고 델마인 남작은 곧바로 파견할 기사들을 부르기 위해 사람을 보냈고 몇 시간 뒤, 그의 집무실로 판금 갑옷을 입고 허리에 검을 차고 등에 창을 멘 두 기사가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남작님.”

회색빛 머리칼에 수염을 기른 중년 기사가 갈슨 경, 갈색 단발머리를 한 20대 중반의 여기사가 엔시아 경이었다.

둘 다 델마인 남작의 가신으로 오러를 사용하는 기사들이었다.

둘은 오자마자 남작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예를 차렸다.

“명령하신 고블린 토벌은 거의 마쳤고, 놈들의 본거지만 소각하면 끝날 예정입니다, 남작님.”

“좋아. 아주 잘하고 있군. 하나 부른 이유는 그것 때문이 아니다. 내가 늘~ 아니꼽게 생각하던 더스티클록 자작에 대해 알고 있나?”

“물론입니다. 근본도 없는 천한 용병 주제에 전쟁에서 운이 좋아서 귀족이 된 가문이죠.”

갈슨 경이 대답을 하자 흡족한 듯 미소 짓는 델마인 남작이었다.

이들도 거의 몇 대에 걸쳐서 기사 혹은 가신들로서 영지를 위해 일하고 전쟁에 참여해서 공훈을 세웠는데, 갈슨 경은 작은 영지, 엔시아 경은 자신의 봉토도 없어서 급여를 받고 일하는 신세였다.

그런데 고작 돈에 불려 와서 일이나 하는 용병 따위가 작위라니, 시선이 고울 리 없었다.

“좋은 대답이야. 아무튼 그 근본 없는 벼락 귀족을 처리하기 위해 제럴 경에게 지시했는데, 아무래도 일이 조금 틀어진 모양이다. 그래서 내게 대가를 지불할 터이니 도와 달라고 하더군.”

“제럴 경이라면 기사로선 별로지만 잔머리는 좋아서 충분히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말이죠.”

“갈슨 경, 자네 말대로 제럴 경의 재주는 충분했지만 이번엔 운이 따라 주지 않은 모양이다. 그러니 둘이 그를 도와서 해결해 주길 바란다.”

“허허허, 그런 일이라면 제게만 맡겨 주시면 될 것을…….”

“혹시 모른다. 이번에 또 방해가 나타날 수 있으니, 엔시아까지 부른 거다. 나도 이딴 문제로 기사를 둘이나 쓰고 싶진 않았다.”

은근슬쩍 옆에 있는 엔시아 경을 견제하는 갈슨이었다.

일단 자신보다 어린 기사라서 그런 것도 있었지만, 여성의 몸으로 기사를 하고 있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었다.

“…….”

같은 주군 아래에 있어도 성별, 나이, 직위 등등 여러 이유로 시샘과 질투, 견제는 상시 있는 것이었다.

하나 엔시아 경은 이런 일이 하루 이틀이 아니라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듣고만 있을 뿐이었다.

“아무튼 그러니 둘은 곧바로 제럴 경의 저택으로 향하도록. 엔시아 경, 고블린 토벌은 라우켈 경비대장에게 지시를 내리겠다. 지금 즉시 제럴 경의 저택으로 가라.”

“예, 알겠습니다.”

“아, 잠깐…….”

“무슨 일이십니까?”

나가려던 중 갑자기 델마인 남작이 다시 부르자 두 기사는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았다.

남작이 의자로 쓰고 있던 남자 중 하나가 기력이 다해서 땅에 엎어져 있었다.

제아무리 의지가 있다고 한들 육체의 한계를 벗어날 순 없는 법이었다.

남작은 마치 물건이 부서진 양 그 남자를 발로 툭툭 차면서 기사들에게 말했다.

“가는 길에 이 부서진 ‘의자’도 처리해 주게. 그리고 감옥에 가둬 놓은 다른 놈을 갖다 주고. 당연히 사후 조치도 말이지. 아! 경비대장에게 같이 전하면 되겠군.”

“옙! 남작님.”

“그동안은 이 친구에 앉아 있을 텐데, 그사이에 죽을 수 있으니 2명으로.”

“물론입니다. 하핫.”

이런 일이 일상인 듯 갈슨 경은 웃으면서 기진맥진한 죄수를 질질 끌고 남작의 집무실을 나갔다.

그리고 아주 잠깐의 휴식을 맛본 다른 죄인은 이제 혼자서 거구인 델마인 남작를 받쳐야 됐다.

그는 기진맥진해서 끌려가는 이를 슬쩍 보고는 빨리 자신과 이 무게를 나눌 다른 죄인이 오길 바랄 뿐이었다.

***

며칠 뒤, 더스티클록 자작 영지.

베오날드의 일과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워낙 총명해서 어머니의 수업도 잘 따라갔고, 검술 수련에 매진하는 게 전부였다.

아버지의 제안으로 최근 기마술 수련을 시작했지만 기마술은 진작 경험이 있었기에 아주 능숙하게 말을 타는 모습을 보여 주자 가끔 확인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래도 빼먹을 수 없는 게 있으니 영지 순찰이었다.

정말 볼 거 없는 시골의 농지, 그리고 몇몇 집은 사냥꾼들의 것인지 동물 가죽을 말리거나 해체하고 있는 풍경이 자주 보였다.

주로 사냥과 농사를 병행하는 이 작은 영지를 돌아다니면서 레이온 자작은 베오날드에게 이것저것 알려 주었다.

“힘들지 않느냐? 말을 다루는 걸 배웠다곤 해도 오랫동안 타면 힘들 수 있는데…….”

“괜찮습니다, 아버지.”

“오오… 그것참 다행이구나. 하지만 언제든 힘들면 말하렴, 베오날드.”

“예, 아버지.”

“물론 힘들 만큼 큰 땅은 아니지만……. 그래도 작아도 소중한 우리 가문의 땅이란다. 그리고 너는 가주로서 이 땅을 지키고 백성들을 보호해야 할 의무를…….”

‘물론 아들에게 멀쩡한 교육을 하는 건 알고 있지만, 이거 듣기가 참 묘하군. 아무튼 온 김에 이거저것 봐 둔 다음에 지도나 다시 만들어야겠군. 대체 뭘 어쩌려고 그따위로 만든 건지. 참 내~’

아버지인 레이온 자작의 말이 잘못된 것은 아니었지만 베오날드의 기준에선 너무 비현실적인 이상론이었기에 듣기가 좀 괴로웠다.

하지만 딱히 반론해 봐야 좋지 않을 이야기였기에 그냥 어머니의 집무실에 있던 지도나 자신이 새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주변 풍경과 거리를 머릿속에 기억해 두었다.

“나, 나리! 나리!”

“뭔가? 갑자기 무슨 일이지?”

그렇게 영지를 돌아다니던 중 저택에서 일하는 하인이 베오날드와 레이온 자작이 있는 곳으로 급히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레이온 자작과 베오날드는 움직임을 멈추고 그를 기다렸다. 달려온 하인은 숨을 헐떡이면서도 용건을 말했다.

“그, 그게, ‘제럴 경’이 지금 저택에 찾아왔습니다.”

“제럴 경이? 무슨 일로?”

“자,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 도적 패거리들 같은 자들을 끌고 온 걸 보면 아마 그 문제 같습니다.”

“알았네. 내 지금 바로 가지. 베오날드, 손님이 오셨으니 돌아가자꾸나.”

손님이라는 말에 레이온 자작과 베오날드는 곧바로 기수를 돌려 저택으로 돌아갔다.

레이온 자작은 ‘무슨 용건으로 왔을까?’라고 혼잣말을 하며 태평한 얼굴로 고민했지만, 베오날드는 뭔가 심상치 않은 느낌을 받고 있었다.

‘제럴 경이라면 어머니의 교육 때 들었어. 여기서 남쪽에 있는 이웃 영지, 우리보다 아주 살짝 큰 영지의 주인. 그리고 오랫동안 캘러메인 백작가 아래에서 일해 온 하급 기사이며 백작 아래 델마인 남작 파벌의 인간. 그래서 이 더스티클록 가문을 절대 좋아할 수 없는 자이지. 그자가 먼저 도적들을 데리고 왔다? 이거 참~’

확인할 필요도 없이 그 제럴 경이 딱 도적들의 배후일 거라는 예상이 들었다.

아닐 가능성도 존재하지만, 그렇게 생각할 근거가 따로 발견되지 않는 이상 거의 확정적이었다.

‘예외는 정말 어쩔 수 없는 사안 때문에 오는 것뿐인데……. 그런 일은 아닌 것 같아.’

고작 도적 문제로 싫어하는 귀족의 영지를 친히 방문하는 건 자존심이 없거나 다른 숨겨 놓은 속셈이 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데, 제럴 경이 이 촌구석 영지에 욕심부릴 것은 오직 ‘자작’의 작위 하나 외엔 없었다.

‘다시 생각해 보니 영주의 가신인 파울과 샨테가 일개 도적들과 손잡고 배신하기엔 근거가 부족하군. 그 도적놈들이 인질과 돈을 그냥 먹튀할 가능성이 있으니까……. 뒤에 제럴 경이 보증을 서 준다면 이야기가 다르지. 아무튼 일단은 경계하면서 지켜볼까?’

“다 왔다. 베오날드, 속도를 줄이거라.”

“예, 아버님.”

그렇게 생각을 하는 사이 둘은 금방 저택에 도달했고, 레이온 자작은 하인에게 말을 맡기고 곧장 손님을 맞으러 저택 내부로 향했다.

그사이 베오날드는 자신이 말을 집어넣겠다고 한 다음 말 2마리를 마구간에 넣고서 슬쩍 바깥 상황부터 살펴보았다.

‘일단은 수행원으로 온 게 병사 다섯. 저건 내가 처리할 때 도망친 도적 둘… 먼저 들어온 아버지에게 시선이 가 있던 덕분에 날 못 알아본 건가? 하긴 그때가 밤이었으니 모를 수밖에… 아니면 설마 근본도 없는 용병 혈통의 아들내미가 기사라곤 상상도 할 수 없었거나. 흠… 그리고 보자, 주변에 뭔가 데리고 온 게 없나?’

일단 직접 데려온 병사 쪽은 아무런 이상이 보이지 않았다.

만약에 무언가 수작을 부리려 했다면 필시 병력을 더 데리고 왔을 터. 그러니 베오날드는 신중하게 주변을 둘러보면서 무언가 있나 살펴보았지만, 역시 저택 주변만 보는 시야로는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이거 나가서 찾는 게 빠를 것 같은데…….’

“도, 도련님, 여기서 이러고 계시면 안 됩니다. 손님이 오셨으니 올라가서 인사드리셔야지요. 아무리 아직 성인이 아니시지만… 아, 아무튼 얼른 올라가십시오.”

‘어쩔 수 없지. 귀족으로서 손님맞이는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니 말이야.’

하인이 온 탓에 더 이상 주변 수색을 하지 못하게 된 베오날드는 아쉬워하며 저택으로 돌아갔다.

다만 그래도 대비할 건 해야 한다는 생각에 그는 하인에게 옷을 갈아입고 간다는 핑계를 대고 자신의 수련실로 향했다.

거기엔 예전에 도적들의 본거지와 샨테, 파울의 집을 털어 모아 둔 무기와 각종 도구가 숨겨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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