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자신의 영지가 아닌 다른 ‘베노피스’ 영지일 거라고 생각해 보려 해도 ‘간신’이라는 키워드와 합쳐지면 결국 자신밖에 없었다.
아니면 자신의 뒤를 이은 누군가가 자신보다 더한 짓을 해서 그 이름을 물려받았다고 생각해 보려 했지만, 자신이 죽은 시점에 이미 베노피스 영지는 약탈과 파괴로 멸망할 운명이었고, 금지된 땅으로 정해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결국 과거에 이 분열을 초래한 ‘대전쟁’의 원인이 되는 ‘이름 없는 간신’은 베오날드 폰 노이멀 자신이라는 걸 다시금 확인하는데, 간신이라는 점은 맞지만 교단 놈들이 자신의 행적을 너무 과도하게 부풀려서 후세에 전하고 있는 게 화가 났다.
‘…망할 교단 새끼들, 아무리 내가 아니꼬워도 그렇지, 내가 헌금한 돈이 얼만데 나를 이런 식으로 대접해? 하긴 그 새끼들은 늘 그랬어. 융통성이라곤 하나도 없이! 그냥 주는 것만 낼름 받아 처먹고! 돌아오는 건 하나도 없고!’
베오날드 폰 노이멀 공작은 생전에 ‘교단’과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다.
일단 과거 제국의 의료 시스템은 모두 ‘신성력’을 위주로 한 ‘교단’이 독점하고 있었는데, 베오날드가 연금술과 의학으로 황제의 병환을 완화시키는 바람에 교단이 제국 황실에서 차지하고 있던 영역을 침략당했으며 그 이후 다양한 사건으로 분쟁이 있었기에 교단과는 거의 척을 진 상황이었다.
‘그래도 나는 나름 관계 개선을 해 보려고 했는데……. 하여간 쪼잔한 새끼들 같으니! 여신관도 좀 보내 달라고 하니까 안 보내고! 젠장! 가만두지 않을 테다!’
“베오날드? 어디 안 좋니?”
“아, 아뇨. 괜찮습니다, 어머님! 조금 생각을 정리하느라 멍 때렸습니다. 한 번에 많이 알려고 하니… 하하하.”
“그러니? 내가 의욕이 과했구나. 외양의 성장이 아무리 빨라도 아직 10살인데……. 아무튼 차를 마시러 가자꾸나.”
자애로운 어머니의 배려와 사랑을 느끼면서 베오날드는 그녀를 따라서 티타임을 가졌다.
찻잎은 그렇게 좋은 것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마음 편히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
전생에도 주지육림에 온갖 사치를 다 했지만, 이렇게 마음 편하게 차를 나누는 것은 너무나 오랜만이었다.
자신의 저택에서 갖는 티타임 하나도 마음 편히 못할 정도로 거대한 가문을 통솔하는 가주의 책임은 막강했으니 말이다.
‘과연 시장이 반찬이라는 것과 같은 이치인가? 별거 아닌 찻잎이지만 분위기와 상황만 바뀌었는데, 맛이 변할 줄이야.’
‘우리 아들에게도 캘러메인 가문의 피가 확실히 흐르고 있구나. 어쩜~ 저리 우아한지.’
차의 맛이 예상치도 못하게 좋아서인지 베오날드는 자신이 지금 10살 아이라는 것을 순간적으로 잊어버린 채로 그것을 음미했고, 대귀족의 기품과 자세가 여과 없이 나오자 모친은 베오날드를 보면서 깜짝 놀라기도 했지만 혈통 덕이라 생각하면서 즐거워할 뿐이었다.
그리고 지금 베오날드의 머릿속에는 아직도 아까 전 어머니가 해 준 이야기와 교단에 대한 내용이 요동치고 있어서 신경 쓰고 있지 않았다.
어차피 차 한 잔 마시는 걸 가지고 특별히 뭘 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것에 신경 쓰기보단 지금은 혼란스러운 머리를 진정시켜야 했다.
‘교단이라. 500년이 지난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상당히 세력이 강성할 것 같은데. 500년 전에는 나와 눈도 못 마주치던 것들이었지만 그건 내 영지와 내가 이끄는 다른 귀족들의 세력이 강력해서였지.’
정국을 주름잡은 것뿐만 아니라, 베오날드 폰 노이멀 공작의 세력은 그야말로 막강했다.
애초에 장기 집권을 위해선 다른 귀족들의 세력보다 압도적인 무력이 받쳐 줘야만 가능한 것. 거기에 황제를 쥐고 있으니 황실 기사단과 근위대까지 포함시킬 수 있어서 베오날드의 군대에게 감히 대항할 자는 없었다.
‘…아무튼 지금 상당히 골치 아픈데 말이… 음? 엄마는 왜 저래? 내가 뭐 이상한 짓을… 설마? 차 마시는 걸 보고 뭔가 낌새를 차린 건가?’
‘정말 좋은 아이지만 그러니 더 가슴이 아프구나.’
베오날드가 생각에 너무 잠겨서 그녀가 바라본다는 사실을 이제야 떠올린 것과 반대로 모친은 총명함과 기품, 거기에 오만하지 않고 노력에 열중하는 집중력 등등… 모든 자질이 우수하게 보이면 보일수록 이 시골 벼락 귀족의 아들로 태어나게 한 것이 슬퍼졌다.
나름 이 지역의 명문가인 백작가의 핏줄이긴 하지만 모친은 화상을 입고, 부친은 근본도 없는 벼락 귀족. 그것이 어쩌면 이 아이가 가진 재능과 찬란한 미래로 향하는 길을 방해할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공포가 문득 떠오른 그녀는 너무나 사랑스러운 아들에게 미안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음? 눈물? 뭐지? 내가 뭘 잘못한 건 아닌 것 같은데?’
“가엾은 아이…….”
“어머님, 왜 그러세요? 제가 뭘 잘못한 건가요?”
“아니, 너는 잘못되지 않았단다. 그저… 엄마가 미안할 뿐이야. 네가 앞으로 겪을 고난을 생각하면…….”
“어머님, 슬퍼 마십시오. 황태자 전하든, 대귀족님의 자식이든 인간은 누구나 태어나면서 고난이 주어집니다. 그리고 언제나 희망을 가지고 그 고난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죠. 그것이 진짜 삶입니다. 게다가 제겐 이렇게나 훌륭한 부모님이 계시니 그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합니다.”
최대한 어수룩하게 위로를 해 보려고 한 거지만, 아무리 그래도 10살짜리의 입에서 나오기 힘든 언변이 흘러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 베오날드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어머니가 가슴 아파하는 것을 놔둘 수 없었기에 위로를 한 다음 눈물이 멈출 때까지 그녀의 품에 안겨 있었다.
***
‘제럴 가문’의 영지.
제럴 가문. 오랫동안 캘러메인 백작의 기사로서 일해 왔지만 아직 작위는 받지 못한 채 ‘하급 기사’로서 작은 영지를 받아 운영하고 있는 가문이었다.
그래도 오랫동안 백작가에 헌신한 덕분인지 완전 시골인 더스티클록 자작가보다는 살짝 큰 영지였지만, 그래 봐야 도긴개긴. 마을에 딱 역참이 되는 여관 하나와 상점 몇 개가 있을 정도만큼만 우월했다.
그리고 현재 이곳 영지의 주인으로 건장한 체격에 인상이 험악한 케지르 제럴 경은 눈앞에 엎드려 있는 2명의 도적이 말한 내용을 곱씹다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웬 ‘오러’를 사용하는 방랑 기사가 나타나서 너희를 모두 죽이고 납치한 영지민들을 데리고 돌아갔다? 그리고 파울 놈이랑 샨테 놈도 영지에서 사라졌다고?”
“예, 예! 저희가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제럴 경. 정말 억울합니다.”
“젠장, 대체 어떤 놈이 방해를 한 거지? 젠장! 젠장!”
쿵!
케지르 제럴 경은 인상을 찌푸리면서 분을 못 이긴 듯 의자 팔걸이를 주먹으로 후려쳤다.
그가 바로 더스티클록 가문의 영지에 도적들을 보내고 파울과 샨테를 포섭한 배후였다.
몇 대에 걸쳐서 봉사한 자신의 가문은 아직도 ‘하급 기사’에 머물고 있는데, 저 벼락 귀족은 일개 용병에서 단숨에 자작이 되어 버린 것이 아니꼬웠던 것이다.
그런 시선을 가진 것은 비단 제럴 경뿐만 아니라 캘러메인 백작가 아래의 다른 가신들도 마찬가지였다. 그에 다들 제럴 경에게 처리하도록 지시하고 절대 실패하지 않을 작전을 짰는데, 예상 밖의 방해로 실패해 버린 것이었다.
“…고작 시골 벼락 귀족 하나 처리 못할 줄이야! 이러면 내 입장이… 곤란해지는데!”
‘그 촌구석 영지 하나 빼앗아 봐야 괜히 전선만 관리하기 까다롭지. 다만 근본도 없는 용병 놈이 귀족입네 하는 꼴은 볼 수 없으니, 제럴 경이 알아서 처리하시오. 그 땅은 제럴 경에게 줄 테니……. 하나 확실히 해야 할 거요. 안 그러면 하급 기사로 남는 건 경의 가문에서 이제 경이 마지막이 될 것이오.’
‘젠장! 이렇게 되면 내 입지가… 큭!’
제럴 가문은 현재 가주의 아이들이 가문에 내려오는 마나 호흡법을 열심히 수련하고 있음에도 체내에 마나를 전혀 모으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마나 호흡법 자체가 잡스러운 것이라서 그것이 문제일 수 있지만, 지금까지는 그래도 어떻게든 마나를 깨우쳐서 오러를 사용할 수 있게 되어서 백작가의 ‘하급 기사’ 자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한데 후계자가 될 아이들이 전혀 마나를 깨우치지 못하자 기사 자격이 박탈될까 전전긍긍하는 중이었다.
‘젠장! 그래서 이번에 저 망할 더스티클록 자작을 처리하고 내가… 우리 제럴 가문이 그 자리를 차지하려고 했는데!’
원래는 더스티클록 자작의 시조가 작위를 얻은 그 전쟁이 끝나면 오랫동안 캘러메인 백작가를 위해 봉사한 제럴 가문이 작위를 받을 예정이었다.
하지만 하필 그때, 적의 공격으로 위험에 처한 백작을 그 망할 용병이 구해 주었고, 그로 인해 백작은 ‘더스티클록’이라는 가문명을 직접 내리고 자작으로 명한 것이었다.
“아무튼 빨리… 내가 죽기 전에 작위를 얻어야 해. 그래야 우리 가문이 산다!”
똑같이 영지를 가지고 있더라도, 작위를 받은 가문이 되는 것과 기사 가문으로 남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작위를 받은 가문이 된다는 것은 이 지역을 주름잡는 캘러메인 백작가의 인정을 받아서 가문으로 존속할 수 있다는 뜻이었고, 기사의 자리는 ‘오러’를 사용할 수 있느냐, 없느냐로 갈리기 때문에 불분명한 것이었다.
그래서 케지르 제럴 경은 자신의 가문을 존속시키기 위해 더스티클록 자작가를 없앨 계획을 짜고 실행했는데, 대실패한 것이었다.
“젠장, 도대체 그 기사는 어디서 나타난 거야? 그 얼굴 태워 먹은 자작 부인이 불렀나? 아냐. 그럴 리 없어. 기껏해야 병사 몇 명 정도나 가능하지, 기사를 보냈다간 백작의 다른 부인들과 자식들이 가만히 있지 않겠지.”
이 근방을 모두 통솔하는 백작답게, 정략결혼과 개인적인 첩실까지 들인 것을 합치면 부인이 모두 9명이었다.
그중 5명은 첩이니 뺀다고 쳐도, 남은 4명의 부인들이 이미 버림패로 쓴 딸에게 신경 쓴다는 걸 알면 그를 달달 들볶고, 자신들의 가문에 알려서 백작의 머리를 아프게 할 터였다.
“아무튼 이제 어떻게 하지? 젠장! 다시 같은 짓을 하려고 해도… 안에 내통자가 없으면 무리인데!”
이번 계획은 레이온 더스티클록 자작의 가신인 파울과 샨테의 협조가 있었기에 가능했는데, 그들이 사라지니 이제 다시 똑같은 짓은 못하게 될 터였다.
이렇게 된 이상 남은 건 직접적인 무력행사를 하든가, 아니면 윗선의 귀족에게 손을 빌리는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무력행사를 할까? 마나 호흡법도 몰라서 오러 하나 못 쓰는 벼락 귀족 놈을 처리하는 건 어렵지 않을 것 같은데……. 하지만 그러려면 판을 다시 짜야 하는데…….’
그래도 다 같은 캘러메인 백작가의 수하들인 만큼 무턱대고 전투를 걸 수는 없으니, 다른 계략을 생각해 보는 케지르 제럴 경이었다.
자신에게 남은 시간은 없었기에 빠르게 해결할 방안을 떠올리기 위해 노력했지만, 자신이 단독으로 할 수 있는 일은 한정적이었고 직접적으로 움직여야 해서 위험부담도 너무나 컸다.
‘하지만 이미 짜 놓은 계획이 어긋난 이상, 위험부담을 지어야 한다. 이번 일이 실패하면 우리 가문은… 끝. 기사도 만들어 내지 못하는 이상 다시 평민으로 돌아가 농사를 짓거나 전투 기술을 가지고 용병 생활을 하겠지.’
물론 수대에 걸쳐 모은 재산이 약간이나마 있어서 그걸 밑천 삼아 다른 사업을 하거나 상단을 차리는 것도 가능은 했지만, 제럴 경에겐 그런 지식은 전혀 없었다.
할 수 있는 건 결국 용병 일일 것이고, 현재 대전쟁으로 혼란스러운 대륙의 어느 전쟁터에서 쓸쓸히 죽게 될 것이 뻔했다.
‘…그렇다고 혼자서 과감한 도박을 할 필요는 없지. 차라리 약간의 수고와 비용을 쓰더라도 빌릴 수 있는 힘을 빌리는 게 맞다.’
제럴 경은 곧바로 서랍에서 빈 서찰을 한 장 꺼내어 무언가를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작성을 마치고 밀랍으로 봉인한 뒤, 자신의 옆에 대기하고 있던 가신에게 그것을 넘겼다.
“…안델, 이 서찰을 곧장 델마인 남작가로 가서 전해라.”
델마인 남작가.
캘러메인 백작가 아래의 두 기둥 중 하나로 백작의 셋째 부인의 처가이기도 했는데, 그곳의 주인인 델마인 남작은 ‘델마인 파벌’의 중심에 있는 인물이자 제럴 경을 가신으로 부리는 자였다.
즉, 제럴 경은 지금 이 엉클어진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주인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하오나 괜찮으시겠습니까? 경에 대한 남작님의 평가가 떨어질지 모릅니다만?”
“사용할 수 있는 것을 괜히 아끼다가 가문을 잃는 것보단 낫다. 금전적 비용이 뇌물로 좀 깨지더라도 지금은 가문이 우선이다.”
“알겠습니다, 제럴 경.”
다소 무능하다는 평을 받을지언정 이대로 가문이 사라지는 것보단 나을 것이라 판단한 제럴 경이었고, 그의 가신인 안델은 곧바로 저택을 나서서 델마인 남작가로 향했다.
그리고 이틀 뒤, 안델은 델마인 남작의 성에 도달했다.
다소 작은 크기였지만 그래도 성벽으로 둘러진 성이 영지에 지어진 시점에서 델마인 남작의 영지가 얼마나 중요한 땅인지 알 수 있었고, 그 안에 있는 거대한 저택이 남작의 위상을 증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