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그로부터 2주 뒤.
방 하나를 레이온 자작이 직접 공사를 해서 치우고 안에 가벼운 무장들과 또 검술 수련책 몇 권과 단련 기구 몇 개를 들여놓으면서 수련실은 빠르게 완성됐다.
이중 잠금 구조로 된 문에 환기는 창문으로 할 수 있게 되어 있었고, 목검을 비롯해서 진검까지 놔두고, 체구엔 좀 안 맞고 낡았지만 기사들이 단련용으로 쓰는 사슬 갑옷 조끼와 팔다리에 채우는 족쇄도 있었다. 말하지 않았는데도 베오날드가 원하는 것이 싹 다 있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모친은 베오날드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유능한 것 같았다.
“그… 아직 베오날드는 5살인데, 이런 것까진 필요 없지 않을까? 게다가 진검을 놔두다니……. 혹시라도 가지고 놀다가 다치면…….”
“당신도 이젠 엄연히 기사잖아요. 이 정도 단련 도구는 기본이에요.”
‘그렇지. 기본이지. 암, 그렇고말고~ 아무튼 외가는 제대로 된 귀족 가문이라서 정말 다행이군. 좋은 물건은 아니라고 하지만 어쨌든 책을 비롯해서 단련용 도구를 모두 보내 줬으니 말이지. 어쩌면 보험 같은 건가? 아니면 은혜 베풀기? 아니, 상관없지. 지금 필요한 것을 얻었으니 상관없다!’
과정이 어떻든 간에 베오날드에겐 홀로 고독히 수련할 수 있는 장소만 있으면 그걸로 족했다.
그리고 혹시라도 검술 수련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유모가 하는 교육을 성실히 받는 척하면서 본격적으로 검술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이제야 검술을 시작할 수 있겠군. 후우~”
베오날드가 지식으로 가지고 있는 검술은 총 세 가지.
빼돌리는 데 정말정말 고생했던 ‘황실 기사단 검법’과 ‘황가 전승 검법’, 그리고 기존의 노이멀 가문 출신의 황실 기사단 인원들이 은퇴해서 가문에 전달하고 개선하여 전해지는 황실 기사단 아류 검법, 속칭 ‘아류-노이멀 가문 검법’이 있었다.
‘아류라도 나름 밥값을 하는 물건이었지.’
그중 아류-노이멀 가문 검법은 베오날드의 선조들이 핵심은 훔치지 못했고, 그래서 조각조각으로 모은 황실 기사단 검법을 다듬은 것으로 말 그대로 아류였다.
그러나 결국 베오날드 대에 이르러서 공작으로 승격하고 2대 황제에 걸쳐서 집권한 덕분에 본격적으로 황실 기사단 검법과 마나 수련법을 비롯해 황가(皇家)의 비전 검법을 훔칠 수 있었던 것이었다.
하나는 가주의 기본 소양이며, 다른 둘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세계 최고의 보물인 만큼 구결 하나하나, 동작 하나하나까지 모두 빠짐없이 기억하는 베오날드였다.
‘으음… 그냥 들었을 때만 해도 좋았는데, 이젠 직접 익히게 될 줄이야. 아주 신나는군.’
감동에 젖은 베오날드는 곧바로 마나를 끌어 올려 수행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시작은 먼저 ‘아류-노이멀 검법’. 조각 모음을 했다지만 그래도 선조들이 오랫동안 개선했기에 노이멀 가문의 체질과 성향에 가장 알맞게 개조된 검법이었다.
강맹하고 패도적인 황실 기사단 검법과 황가 전승 검법과 다르게 유연하고, 비겁한 허수를 많이 섞는다던가?
정통 검사들이나 기사들이 보면 기겁할 만한 기술을 많이 쓰는 검법으로 무인의 긍지 같은 게 없는 노이멀 가문에서 만들어진 검법이라 할 수 있었다.
“황실 기사단 아류 검법 노이멀 일식(一式)-살무사!”
횡으로 휘둘러지던 검이 베오날드가 의식을 집중하자 그대로 위력적인 찌르기로 변화해서 들어갔다.
‘뱀’의 이미지. 노이멀 가문은 오래전부터 ‘뱀’과 인연이 깊었다고 전해지며 그래서 가문의 문장도 다수의 뱀 머리를 가진 신화 속의 생물 히드라였다.
그렇다 보니 자연히 개발된 검법의 이름은 모두 ‘뱀’에서 딴 것이었다.
‘대체 뱀이 어때서…….’
남들은 불길하다거나 간교하다고 하지만 노이멀 가문은 오히려 자랑스러워하는 상징이었다.
“후우~ 보는 건 많이 봤는데… 직접 하는 건 또 신기하군. 후우우~ 게다가 역시! 이 정도 소모는 있어야지 몸에 부담이 가지!”
단순히 휘두르고 뛰는 걸 넘어서 식(式)을 펼치니 몸이 뜨거워지기 시작한 것에 만족하며 베오날드는 곧바로 순조롭게 수행에 집중했다.
그리고 이중으로 쳐진 잠금 덕분에 안심할 수 있게 된 그는 검술과 휴식을 반복하면서 빠르게 기량을 길러 갔다.
정치판과 영지 운영에만 열중하던 그에게 무(武)의 길은 생소한 것이었지만, 그래도 신체가 활성화되고 젊음을 느낄 수 있다는 건 매우 기분 좋은 일이었다.
과거 저택에 있을 때 좀 똑똑하답시고 곧바로 지옥 같은 교육관에 갇혀서 강제 교습을 받을 땐 정말이지 지옥에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마 연금술을 발견해서 다행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가주 베오날드는 존재하지도 않았으리라.
***
5년 뒤.
“후우~ 시간이란 참 안 가는 듯하면서도 빨리 간다니까~”
개인 수련실을 받은 베오날드는 그렇게 어느덧 10살이 되었다.
여전히 부모들은 사랑으로 베오날드를 보살폈지만 그래도 수련실 덕분에 큰 방해 없이 이곳에서 마나 수련법과 검술을 연마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에 방해되지 않도록 이제 학문에 대해선 어리숙한 티를 벗고, 곧바로 유모의 교육을 졸업해 버렸다.
“죄송합니다, 도련님. 저희로선 더 이상 가르쳐 드릴 것이 없습니다. 외부에서 새로 교사를 알아보지 않는 이상은…….”
‘흠, 이 정도 가지고……. 아무튼 수련할 시간이 늘어나는 건 좋군.’
수련실은 기초 설계대로 육중한 철제문으로 이중 잠금을 해서 누구도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게 되어 있었고, 나중엔 아예 미리 식사를 다 챙겨 와 오로지 수련에 몰두할 수 있었다.
그는 한 분야에서 이미 대성을 한 자답게 어떻게 해야 성공하는지를 가차 없이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성과는 확실히 나타난 것일까? 10살 소년이라곤 믿을 수 없는 키와 체격을 가진 베오날드가 오늘도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후우우…….”
키 약 170센티미터, 체중 약 68킬로그램. 도저히 10살 소년으로 보이지 않는 진한 검은 머리칼에 푸른 눈을 한 미소년은 사슬 갑옷과 그 위에 하드 레더를 한 번 더 껴입고는 계속해서 땀을 흘리며 ‘황실 기사단 검법 아류-노이멀식’을 연마하고 있었다.
‘내가 무예(武藝)를 너무 우습게 봤어. 이거 형(形)만 익히는 건 쉽지만 완전히 진의에 닿는 건 되게 어렵네. 특히 나는 연금술사라 도저히 그 추상적인 깨달음을 얻기 어려운 것 같아. 젠장!’
연금술은 이성과 합리, 그리고 반응의 학문이다.
약품에 원소, 마력을 넣으면 작용해야 할 반응이 곧장 튀어나와서 바로 결과를 내 준다.
소금에 물을 넣으면 소금물, 설탕을 물에 넣으면 설탕물. 이렇다 보니 확실한 것을 좋아하는 베오날드였다.
하지만 이 ‘무예’라는 것은 결국 깨달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그 개념은 매우 추상적이기도 했고, 기술을 익힐 때까지 계속 반복해 가며 경험과 수련을 해야 하는 점에서 정말 비효율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어차피 똑같아. 결국 연금술도 최적의 수식과 결과를 찾을 때까지 끝없는 실험을 하고 시행착오를 겪는 것처럼 이것도 그렇게 될 때까지 수련을 해야 해. 아무튼 황실 기사단 검법의 찌꺼기로 만든 노이멀 가문의 검법을 마스터할 때까지 절대 다른 검법엔 손대지 말자.’
오기가 생긴 베오날드는 지난 5년간 계속해서 노이멀 가문의 검법만 집요하게 팠다.
대귀족의 자존심, 엄연히 황가 전승 검법까지 모두 손에 넣은 노이멀 가문 역사상 최고의 가주인 자신이 자신의 가문 검법 하나를 제대로 못해서 쩔쩔매는 것을 납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애를 먹어도 황실 기사단 검법이나 황가 전승 검법에서 막혀야지! 고작! 고작! 백작가에서 머물던 그 무능한 인간들이 개선하고 조각 모음해서 만든 ‘아류’인 노이멀 가문 검법에 막혀서 도망칠 순 없지!’
철그럭! 철컥! 철컥!
그렇게 계속해서 노이멀 가문의 검법을 연마하던 중 밖에서 수련실의 이중 잠금장치를 여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왔군.’
베오날드는 당장 수련을 멈추고, 몸에 부하를 주기 위해 덧입었던 체인 메일과 가죽 갑옷 등등… 쇳덩어리들을 모두 제거해서 순식간에 자리에 놔두고는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이를 맞이했다.
“뭐야? 영감님 아냐? 무슨 일이야?”
“저녁 시간이옵니다, 베오날드 도련님. 주인님과 안주인님께서 같이 식사하시자고…….”
아무리 수련실에 음식을 들고 들어가도, 여건이 되면 부모님과 식사를 하는 건 당연했다.
아직도 이 화목한 가정에 대해서는 느낌이 이상하긴 했지만, 생전 즐겨 보지 못한 것이기에 그는 가능한 한 지금의 가족들과의 시간을 소중히 하고자 한 것이었다.
“어, 벌써 그렇게 되었나? 수련하면 시간 가는 줄 몰라서 말이지. 후우우~ 마무리 몸풀기만 하고 바로 내려갈게. 몸의 근육을 풀어 줘야 하거든…….”
연금술을 공부하면서 의학에도 밝아진 터라 베오날드는 운동 뒤에 해야 할 일들을 잘 알고 있었다.
“예, 도련님. 욕실에 씻을 준비를 해 두었으니 하고 오시면 됩니다.”
‘그 큰 물통 하나만 있던 거 말이지? 마구간에서만 보던 물건이라 처음엔 놀랐지. 하하하.’
욕실에 있는 것은 달랑 큰 물통 하나와 2~3개의 비누, 그리고 안 쓰는 천으로 만든 비누 거품을 내기 위한 조잡한 타월뿐이었다.
옛날 자신이 즐기던 거대한 욕탕을 잠시 상상하던 베오날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피식 한숨을 쉬고는 물바가지를 끼얹으며 비누로 칠한 몸을 깨끗이 씻었다.
그리고 나와서 준비된 옷을 갈아입고, 곧바로 식당으로 향하자 그곳에선 이미 부모님들이 먼저 식사 중이었다.
“어머, 베오날드 왔니?”
“예, 어머님. 죄송합니다. 씻느라 늦었습니다.”
“그나저나 베오날드, 너 참… 빨리 크는구나. 하하. 성년식까진 5년이나 남았는데, 누가 봐도 성인으로 보일 정도라니…….”
레이온 자작은 이제 10살밖에 되지 않은 베오날드의 성장을 보면서 처음엔 기묘함을 느꼈지만, 선대 가주이자 시조였던 자신의 아버지가 거구의 체구를 가졌던 것을 생각해 내고는 그쪽 영향 혹은 진짜 귀족인 외가 쪽의 영향을 받아서 그럴 거라고 합리화하며 금방 납득해 버렸다.
‘그러고 보면 아버님도 성장이 빠르다고 했었던가? 으음… 그 유전이라 생각하면…….’
“이게 다 아버님과 어머님의 보살핌 덕분이죠. 세상엔 배부르게 먹지 못하는 이들도 많은데… 저는 10년간 배를 곯지도 않고, 또한 충분히 단련할 수 있었으니 다를 수밖에요.”
“베오날드, 아무리 그래도 넌 아직 10살이란다. 너무 그렇게 빨리 어른스러워지려고 하지 않아도 돼. 그러니 편하게 엄마~ 아빠~ 라고 하렴. 나중엔 하고 싶어도 못할 거란다.”
베오날드의 빠른 성장이 좀 기묘하긴 했지만 그래도 가정은 아주 화목했다.
한데 레이온 자작은 무언가 근심거리가 있는지 영 식사에 집중 못하고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눈치가 빠른 베오날드는 굳이 묻지 않고는 식사를 일찍 하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먹었습니다. 그러면 전 먼저 올라가서 계속 수련할게요. 엄마, 아빠.”
“응. 너무 무리하진 말렴. 베오날드.”
“예에~”
하지만 베오날드는 올라가지 않고 벽 뒤로 숨어서 부모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베오날드가 먼저 올라간 것으로 생각한 두 사람은 동시에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한숨을 살짝 쉬면서 본격적으로 근심거리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후우~ 오늘 또 그 망할 도적놈들이 마을을 습격했소. 이걸로 벌써 세 번째, 납치된 영지민만 14명이요.”
“방비를 더 하겠다고 하시지 않았나요?”
“하긴 했소. 최초에 파울 형… 크흠! 아니, 파울과 샨테에게 마을 방비를 더 탄탄히 하고, 경계를 강화하라고 했는데… 놈들이 어떻게 된 건지 벌써 그걸 뚫고 세 번이나……. 후우~ 진짜 잠도 오지 않을 지경이오. 이 작은 영지에 대체 뭘 그리 노릴 게 있다고…….”
“정말 걱정이네요. 아니면 아버님께 이야기해서 병사를 빌려 달라고 해 볼까요?”
어머님의 외가 측은 그래도 나름 이 지역에서 힘이 있는 귀족인 캘러메인 백작가였고, 결국 이 시골 영지도 본래 그들의 소유였기에 병사를 요청할 만한 사안이었다.
하지만 레이온 자작은 고개를 저으며 그것을 반대했다.
“상대는 도적놈들이오. 고작 그런 놈들을 상대로 힘을 빌려 달라고 하면 내 평가가 어떻게 되겠소? 상대 규모는 고작해야 20명 정도밖에 안 된단 말이오.”
“하지만 그 20명이… 탈영 혹은 패잔병이나 기사 출신이라면 또 다를 수 있는데…….”
“아무튼 사안이 심각한 만큼 아예 토벌대를 조직해서 처리할까 생각 중이긴 하오. 놈들이 식량만이 아니라 사람을 납치한 걸 보면 분명 이 부근에 본거지를 두고 있을 가능성이 높소. 그러니 당분간 못 돌아올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산적, 도적놈들의 출몰이야 이런 시골 영지라면 늘 앓고 있는 문제였다.
탈영병이나 패잔병, 혹은 전쟁에서 패배해 영지를 잃은 기사들이 무법자로서 산적, 도적이 되는 일은 부지기수였으니 말이다.
영지 간의 전쟁이나 분쟁은 통일 제국 시대에도 넘쳐 나던 일들이었다.
‘20명 규모에게 세 번이나 털려? 어지간히 무능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인데…….’
베오날드는 대귀족의 시선으로 아버지를 평가하길 근본은 없지만 그래도 성실하고 근면하며 책임감 있는 인간으로 이런 작은 영지의 영주로서는 아주 적합한 인물이었다.
게다가 선대가 용병이었기에 나름 체계화된 전투 기술과 기마술은 물론 전투 지휘 및 진지 구축 등등, 군사학 지식은 물려받아서 어중이떠중이 병사나 산적 같은 자들 정도는 충분히 상대할 수 있는 자였다.
‘이 영지가 작다곤 해도… 어머니의 서류를 보면 마을의 장정들로 이루어진 민병까지 합치면 병력이 약 60명. 거기에 목책까지 쌓고, 감시 체계까지 갖추면 놈들은 오히려 물러나야 정상인데… 그렇다면 답은 하나군.’
적들이 강한 것도 아니고, 영주의 성정 문제도 아니며, 충분한 조치를 취했고, 그렇다고 병력이 부족한 것도 아니라면 답은 하나뿐이었다.
‘내부자의 배신.’
내통자의 존재, 즉 내부에 배신자가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자신이 평가를 잘못 내린 거라고밖에 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아버지인 레이온 자작에 대해 잘못 볼 요소는 전혀 없었다.
아무튼 베오날드는 아버지가 원정을 나간다는 이야기를 듣자, 더 큰 위협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였다.
‘내통자가 있을 가능성이 있는데… 그놈과 함께 밖을 나간다? 그러다 자작이 죽으면?’
이 작은 시골 영지는 그대로 보호자를 잃는 거나 마찬가지이니 도적과 산적들에게 유린당하고 영지민들은 대부분 노예로 팔려 나갈 것이다.
‘…그렇게 되면?’
베오날드는 이제 귀족의 혈통이라는 최소한의 가치도 잃어버리고, 유랑자에서부터 모든 것을 시작해야 할 판국.
그는 이 상황을 두고 볼 수 없었기에 머리를 벅벅 긁으면서 자신이 움직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