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야금 뜯는 천제가수-146화 (144/148)

#146

월드 투어(7)

유럽에 도착한 김세준의 첫 공연은 독일이었다.

독일 베를린에서의 이틀 동안의 공연 그리고 프랑스 파리에서의 이틀 동안의 공연을 마무리한 후, 그가 향한 곳은 영국 런던이었다.

“드디어 왔네.”

잔에 담긴 와인이 가볍게 찰랑거렸고, 김세준이 진한 미소를 머금었다.

호텔 프래지던트 룸 창문 너머로 보이는 거대한 스타디움.

웸블리 스타디움.

영국 축구의 성지임과 동시에 유럽 대중음악의 성지.

영국에서 가장 큰 경기장으로 총 무려 구만 명의 관객을 모을 수 있는 스타디움.

그가 오래전부터 꿈꿨던 무대였다.

대중음악의 역사에서 전설적인 무대가 저기서 얼마나 많이 탄생했던가.

퀸, 마이클 잭슨, 마돈나, U2 등등.

대중음악 역사의 한 획을 그은 전설들의 사상 최고의 무대가 탄생한 장소가 바로 저곳이었다.

“그땐 반쯤은 농담이었는데.”

김세준이 자조 섞인 웃음을 지으며 몇 년 전을 회상한다.

이해진과 하동준에게 넌지시 뱉은 말.

자신은 언젠가 이곳에서 공연할 거라는 발언.

기껏 한국에서 이름 막 날리던 가수가 내뱉기엔 너무 허무맹랑한 말.

만약 누군가 들었다면 콧방귀를 끼고 비웃음을 한껏 날렸으리라.

네가 비욘세, 마이클 잭슨, 퀸, 에이미 같은 가수들처럼 저기서 공연을 할 수 있겠냐고.

그게 가능하겠냐고.

“가능했지.”

양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김세준이 약간은 거만한 자세로 창밖을 내려다봤다.

회귀라는 초월적인 경험을 해본 그에게 웸블리 스타디움 공연은 그나마 현실적이었다.

불가능이라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고, 자신의 원대한 소망을 언젠간 이루리라고 어렴풋한 믿음이 있었다.

그 믿음을 따라 나아가다 보니 어느새 도착한 스타디움.

“생각보다 빨리 왔지.”

자신의 성공 가도.

스스로 생각해도 빠르게 달려온 지난 날들이었다.

데뷔부터 시작해, 음원 차트 1위. 국내 신인상. 해외 활동 시작부터 해외 최정상의 가수로 등극하고 마침내 월드 투어까지.

거침없이 달려온 자신의 삶.

숨 가쁘게 달려온 이런 성공에 나름 불안감을 느끼기도 했다.

이 모든 게 꿈은 아닐지, 눈 떠보면 병원에서 일어나는 건 아닐까.

아니면, 빠르게 비상한 것처럼 언젠간 빠르게 추락하는 건 아닐까.

자신이 누리고 있는 이 영광과 명예가 한 줌의 모래처럼 갑자기 사라질까 두려웠고 무섭기도 했다.

“월드 투어가 끝나면 조금 휴식을 가질까...”

‘The melody of you and me’는 그동안 행보의 화룡점정을 찍는 마침표였다.

그동안은 언제 자신이 잊히고, 가야금이 잊힐까 두려워 마침표 없이 쉼표만 미친 듯이 찍으며 이어왔다.

하지만 이제 그런 불안감 따윈 느낄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해진 가야금과 김세준의 이름.

얼굴에 은은한 미소를 머금으며 김세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월드 투어가 끝나면, 예은이와 단둘이 여행이라도 가야지.

월드 투어를 돌며 눈여겨봤던 관광지들을 이예은과 오붓하게 천천히, 지금처럼 숨 가쁘게 아닌 느긋하고 편안하게 구경해야겠다.

자신이 그런 휴식기를 가져도, 이제 사람들은 자신을 잊지 않을 테니까.

***

김세준이 런던에 도착한 이튿날 뒤.

웸블리 스타디움.

축구 경기장의 성지에 9만 명의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축구 경기의 성지라고 불리는 만큼, 굵직한 경기만 열리는 장소.

FA컵 결승, 리그컵 결승. 국제 경기.

덕분에 이곳이 전석 매진되는 모습은 그다지 보기 드문 모습이 아니다.

또한, 이곳을 찾는 이들의 얼굴에 흥분과 기대감이 가득 찬 모습도.

하지만 축구 팬들과 김세준의 팬들의 큰 차이점은 지금이 아니라 귀가할 때 나타나리라.

모두가 만족스러울 수 없는 축구 경기와 달리, 김세준의 공연은 모두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지어질 테니까.

“세준!”

그리고 무대 뒤, 공연을 앞두고 정신없이 바쁜 김세준을 향해 한 여성이 다가왔다.

““에이미!”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본 김세준이 반가운 목소리로 외쳤다.

그가 이번 영국을 위해 섭외한 게스트.

영국을 자랑하는 수많은 가수.

비틀즈부터 시작해, 퀸, 오아시스 같은 굵직한 전설들.

그리고 그런 전설들의 뒤를 이어 새롭게 전설을 써 내려가고 있는 현역 가수.

에이미.

작년에 촬영했던 ‘포기너 버스킹’에서의 우연히 만나 꾸준히 인연을 이어가고 있는 여가수.

먼 미래엔 앞서 언급한 대가수들과 나란히 전설로 취급받는 디바.

“게스트로 와줘서 고마워요. 에이미.”

김세준이 그녀를 가볍게 안으며 볼 키스로 인사하자, 에이미도 살가운 목소리로 화답했다.

“오히려 초청해줘서 고마워요. 세준.”

가볍게 살짝 포옹하고, 떨어진 뒤 에이미가 웃음과 함께 몸을 빙그르르 한 바퀴 돌았다.

“저 어떤가요?”

30대 여성이지만 소녀 같은 순수한 모습.

김세준이 웃음과 함께 가볍게 박수하며 진심 어린 감탄을 뱉었다.

“아름다워요. 정말 잘 어울리는데요?”

칭찬이 만족스러운지 함박웃음을 지으며 에이미가 치마 양 끝을 잡고 올리며 허리를 굽혔다.

“고마워라. 근데 확실히 조금 어색하기도 하죠?”

“아뇨! 아뇨! 정말 잘 어울려요. 진심이에요.”

이어진 에이미의 말에 김세준이 손사래를 치며 강하게 부정했다.

연노랑 색의 치마와 은색의 자수가 수놓아진 흰색 저고리의 한복을 입었고, 금색 머리카락은 매혹적인 빨간색 비녀로 고정해 머리 위로 틀어 올렸다.

전통적인 한국의 미를 내뿜는 그녀였고, 서양인인 그녀지만 그 모습은 그가 본 어떤 에이미보다 아름다웠다.

에이미의 출중한 외모도 한몫했겠지만, 한복의 단아함이 그녀의 우아함과 고혹적인 매력을 더욱 부각시켰다.

‘요즘 없어서 못 판다지?’

자신의 인기와 더불어 나날이 늘어가는 한복의 인기.

요즘은 만드는 즉시 족족 팔려나가 없어서 못 팔 지경이라고 한다.

한국을 놀러 온 외국인들이 한복을 입고 구경하는 모습도 국내에선 심심치 않게 보인다는 말이 들려오고, 한국인들 사이에서도 명절이나 결혼식 때나 입던 한복의 사용이 요즘 급증했다는 기사도 봤었다.

그가 사회에 얼마나 큰 영향력을 미치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가 한복과 가야금이었다.

“마음에 무척 들어요. 그래미 어워드 때 에드 케인을 내심 부러웠거든요.”

에이미가 말하며 힐끔 김세준의 가야금으로 시선을 돌린다.

작은 탐욕이 담긴 눈빛.

그 시선을 읽은 김세준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설마 가야금까지 배운다고 하는 건 아니겠지?

뭐 배운다고 하면 자신이 성심성의껏 가르칠 의향은 충분히 있다.

이미 완벽하고 눈부신 가수인 그녀가 굳이 가야금을 배울지 확실하진 않지만.

“세준 씨!”

그때 멀리서 자신을 찾는 목소리에 김세준이 에이미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인다.

“그러면 있다 봐요. 에이미.”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에이미가 먼저 돌아섰고, 김세준도 자신을 찾는 목소리를 향해 발걸음을 돌렸다.

***

오후 5시.

웸블리 스타디움 관객석이 빠짐없이 가득 찼고, 스타디움 중앙에 마련한 거대한 스테이지를 바라보며 기대 가득한 눈빛을 보냈다.

“후우...”

백스테이지에서 한숨과 함께 김세준이 정신을 가다듬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월드 투어.

영국을 마지막으로 유럽 투어도 끝이 난다.

남은 곳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아메리카 대륙과 한국.

“암전! 암전해주시고, 세준 씨!”

무대 총괄책임자의 말에 김세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대 위가 어두워지자, 그가 발걸음을 옮겨 그곳으로 향했다.

김세준의 등장을 예상한 관객들의 커다란 함성.

그 함성을 들으며 무대 중앙에 도착하고, 그가 올라가자 화려한 조명이 다시 불빛을 내뿜었다.

꺄아아아악!

그의 모습이 보이자 자지러지는 비명을 내지르는 관객들.

환한 웃음과 함께 김세준이 천천히 관객석을 훑었고, 이내 속으로 감탄을 내뱉었다.

‘와... 많이 늘었는데?’

일본에서 처음 시작한 월드 투어.

그리고 그때 자신을 감동하게 한 몇몇 관객들의 복장.

고운 한복을 입고 콘서트를 찾아온 사람들.

그 사람들이 일본 때와 비교해 눈에 띄게 많아졌다.

모든 팬이 입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 단아한 매력이 곳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중이었다.

“안녕하세요. 김세준입니다!”

허리를 숙이며 인사로 포문을 연 그.

“먼저 영국 팬들을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정말 기쁩니다. 그리고 영국 대중음악의 성지인 이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공연할 수 있다는 점도 진심으로 기쁘고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김세준의 한 마디, 한 마디가 터질 때마다 환호성을 내뱉는 관객들이었고, 가볍게 오프닝 멘트를 마무리한 그가 이내 가야금 앞에 앉았다.

영국에서의 첫 무대.

어떤 곡을 할까 고민이 많았다.

자신의 곡도 좋지만, 뭐랄까 이번엔 조금 더 특별하게 무대를 시작하고 싶은 마음.

제법 길어진 고민이었고, 그 고민을 해결해준 건 자신의 첫 번째 수제자, 메들린이었다.

그녀가 ‘갓 텔런트’에서 보여준 무대.

영국의 전설적인 밴드이자 보이그룹으로 아직도 해체한 지 40년이 훌쩍 넘었지만, 대중음악에 끼치는 영향력이 지대한 그룹.

영국의 자랑이자, 역대 가수를 뽑을 때 항상 상위권을 차지하는 가수.

그들의 노래를 가야금으로 리메이크하여 부른 메들린.

‘내가 하지 말란 법도 없잖아?’

문득 떠오르는 아이디어.

영국, 대중음악의 성지인 이곳에서, 영국의 전설적인 밴드의 곡을 편곡하여 첫 무대를 꾸민다?

의미와 감동.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는 기가 막힌 생각.

다른 사람들한테도 조언을 구했고, 모두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그의 아이디어에 찬성했다.

“후우...”

한숨과 함께 가야금의 좌단에 손을 올렸고, 연주자들과 눈빛을 교환한다.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

그들의 눈빛을 확인한 김세준이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렸고, 관객들의 기대감 속에 MR이 흘러나왔다.

***

“...!”

곡 소개도 없이 시작한 첫 무대.

어떤 노래를 연주할까 기대감 가득하던 관객들은 익숙하면서도 낯선 멜로디에 눈을 크게 떴다.

자신들이 기대하고 있던 김세준의 멜로디는 아니다.

하지만 영국 사람들이라면 모를 수 없는 멜로디.

자신들의 자랑이자 아직도 그리운 전설적인 밴드의 멜로디.

그들의 마지막 앨범 타이틀 곡.

그 노래의 선율이 가야금으로 연주되어 관객들의 귓가에 울리고 있었다.

꺄아아아아악!

처음엔 어리둥절했던 관객들이 어떤 노래인지를 깨닫고 천지가 진동할만한 환호성을 내뱉었다.

이미 이런 환호성에 익숙한 김세준조차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뜰 정도의 커다란 함성.

이미 매들린이 한 번 세상에 보여준 노래이지만, 고작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연주되는 것과 이곳에서 연주되는 건 의미가 천지 차이.

그가 왜 이 노래를 연주하는지 그 의미를 여실히 알고 있는 관객들이다.

영국 대중음악의 성지에서, 영국 대중음악의 자랑이자 전설인 그들의 노래를 연주하는 김세준.

그가 보여주는 커다란 존경심.

어찌 열광하지 않을 수 있을까.

흥분에 가득 찼던 관객들.

하지만 이내 울리는 멜로디에 그 흥분을 가라앉힌다.

심금을 울리는 잔잔한 멜로디.

가야금의 음색으로 새롭게 울리는 전설적인 명곡.

원곡처럼 부드럽고, 포근한 멜로디와 음색.

고작 첫 무대이지만.

이 한 무대만으로도 오늘 이곳에 온 9만 명의 관객들.

그들을 모두 감동하게 한 김세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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