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야금 뜯는 천제가수-144화 (142/148)

#144

월드 투어(5)

“우아...”

비행기에서 나오자마자 느껴지는 열기에 김세준이 혀를 내둘렀다.

탑승교 창밖으로 아지랑이가 일렁이는 풍경이 오늘 기온이 얼마나 뜨거운지 간접적으로 알려줬다.

나온 지 10초 만에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을 소매로 훑으며 발걸음을 옮겼고, 그의 뒤를 이어 비행기를 빠져나온 수호와 세현도 한 발자국 떼자마자 얼굴을 팍 찌푸렸다.

한국과 달리 습하지 않고 건조한 공기가 그들을 휘감았고, 숨이 턱턱 막혔다.

“엄청 덥네.”

그나마 더위를 잘 참는 수호는 그렇게 낮게 중얼거리는 게 끝이었지만, 더위라면 학을 떼는 세현은 죽을상이었다.

“형. 세현아. 오늘 최고 기온 사십이도래요. 이따가 오후 2시쯤에.”

“와...”

“진짜로...?”

김세준도 놀랐지만, 세현은 얼굴이 파래질 정도.

“사람이 사는 게 가능한 기온인가...”

낮게 중얼거린 세현이었고, 그 말을 들은 김세준이 피식 웃었다.

저런 의구심이 들 정도로 엄청난 날씨.

난생처음 겪어보는 더위지만, 덕분에 자신이 어디에 왔는지 깨닫게 했다.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대중문화 행사는 물론 해외 언론의 취재도 쉽게 허용하지 않던 나라.

은둔의 왕국, 사우디아라비아.

‘처음 와보는 곳이라, 뭔가 설레네.’

기분이 들뜬다.

그동안 다녔던 다른 국가들과 달리 이곳은 그도 살아생전 처음 와보는 낯선 장소.

호기심과 설렘. 그리고 동시에 걱정이 반쯤 뒤섞인 기분이었다.

요즘은 그래도 나아지긴 했지만, 사우디아라비아는 원래 대중문화의 지옥이라고 봐도 무방한 나라였으니까.

‘듣고 엄청 놀랐지...’

정수연이 알려줬을 땐, 몰라 감흥이 없었지만.

나중에 알게 되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가 사우디아라비아 스타디움에 입성한 최초의 가수라는 영광스러운 타이틀을 달게 됐다는 걸.

영광스러운 타이틀을 얻게 된 건, 그의 인기도 있지만, 타이밍도 좋았다.

그가 인기를 얻은 시점이 조금만 더 일렀으면, 아무리 날고 기는 가수라고 해도 이곳에서 공연은 불가능했을 테니까.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나라였던 사우디아라비아.

2017년까지만 해도 경기장이나 공연장 등 공공장소에 여성이 출입할 수 없었다.

거기에 남녀를 불문하고 공공장소에서 춤추는 것도 금지였고, 호텔 숙박업소에 남녀가 함께 투숙하려면 반드시 혼인 증명서가 있어야 했던 곳이다.

공연하기에 악조건은 모두 갖추고 있었고, 덕분에 그 어떤 가수도 이곳에서 공연을 펼칠 수 없었다.

최근 정치적 행보가 바뀌며 국가 스텐스가 달라졌기에 가능한 일.

덕분에 명예로운 타이틀을 얻게 된 그였다.

“아... 이제야 좀 살 것 같네.”

탑승교를 넘어와 공항 내부로 들어선 공연단.

피부에 느껴지는 시원한 공기에 일제히 얼굴에 미소를 머금었다.

수호는 양팔을 벌리며 현대문명의 이기를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중이었다.

옆에 있던 세현이 부끄러운지 말려 금방 멈추긴 했지만.

공항 내부로 들어선 공연단의 모든 입국처리는 순식간에 진행됐다.

여권 심사와 수화물 심사를 비롯한 모든 심사를 마치고 게이트를 빠져나가기 전.

김세준의 얼굴에 작은 기대감이 실렸다.

“난 외국 공연 가면 이때가 가장 설레더라.”

“형도요? 저도 그런데.”

“저도요.”

김세준의 말에 수호와 세현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연예인의 존재의미. 팬.

그리고 지금이 머나먼 타국의 팬들을 처음으로 만나는 순간이었다.

이역만리에서도 자신을 좋아하고 사랑해주는 고마운 사람들.

벌써 몇 번이나 경험해봤지만, 항상 설레고 가슴 벅찬 감동이 밀려오는 순간.

이내 문이 열리고, 게이트 밖으로 빠져나오자 다시 한번 진한 감동을 느꼈다.

그가 나오자마자 환호성을 내뱉는 그의 팬.

이국적인 광경.

그동안 다른 국가를 다니면서 이국적인 모습은 많이 봐왔지만.

이곳은 그 어떤 나라에서도 보지 못한 상당히 이국적인 풍경이었다.

한쪽엔 중동 특유의 피부색을 가진 남성들이 모여 있었고, 그 반대편엔 이슬람 여성의 전통복장인 히잡과 이비야를 쓴 여성들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손에 들린 한국어와 아랍어로 적힌 플랜카드와 각종 굿즈들.

꺄아아아악!

짧게 그들을 훑었고, 동시에 그들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온다.

여태껏 보지 못한 풍경 속, 그동안 숱하게 봐왔던 반응.

김세준이 환한 웃음으로 그들의 환대에 답하며, 몇몇 팬들에게 사인을 해주고, 사진을 찍었다.

수호와 세현도 자신들을 반기는 B.ONE의 팬들에게 다가가 팬서비스를 해주며 환대에 보답했다.

“아, 여기다가요?”

김세준이 영어로 묻자, 남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염이 거무죽죽한 남성의 얼굴에 설렘이 꽃피웠고, 발을 동동 굴렀다.

한국에서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큰 팬덤을 만든 그.

그런 그의 팬덤은 해외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고, 다른 아이돌들과 달리 남성 팬에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오... 이건?’

그리고 그가 건넨 앨범을 보고 의외라는 듯 작은 감탄을 속으로 뱉었다.

자신의 앨범은 아니지만, 인기에 힘입어 발매한 한정판 앨범.

설마 해외에서 이 앨범을 가지고 있는 팬을 보게 될 줄이야.

“You`re a really good singer.”

김세준이 사인하자 남자가 수줍게 말하자, 김세준이 함박웃음과 함께 감사를 표했다.

“땡큐.”

그와 사진까지 찍고 다른 팬에게 다가가기 전, 김세준이 힐끔 세현을 쪽을 쳐다봤다.

‘역시...’

세현이 사인하고 있는 앨범.

자신이 방금 사인한 앨범과 똑같은 앨범이다.

‘이거 게스트를 색다르게 불렀어야 했나?’

만약 그들을 게스트로 불렀으면, 이들에게 더 큰 감동을 심어줄 수도 있었을 텐데.

아쉽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시간.

김세준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려 눈앞의 팬을 바라봤다.

시간은 없었고, 자신을 기다리는 팬은 많았다.

1초도 허투루 쓰고 싶지 않았다.

***

“고생하셨습니다!”

“고생하셨어요.”

“수고했어.”

그날 저녁. 예약한 호텔에 도착한 김세준과 수호와 세현.

세 사람이 한 방에 모여 가볍게 샴페인을 터트렸다.

처음 중국에서부터 시작된 일종의 작은 파티.

중국과 일본, 동남아 각 나라의 처음 도착할 때마다 이렇게 모여 샴페인 혹은 맥주를 터트리며 첫날밤을 보낸 게 사우디아라비아에서도 이어졌다.

“형. 오늘 공항에서 전 제대로 소외감 느낀 거 알죠?”

가볍게 첫 모금을 마신 뒤, 수호가 능글맞은 목소리로 묻는다.

“알지. 나도 놀랐어.”

“어? 뭐가요?”

진작에 눈치챈 김세준과 달리 아무것도 모르던 세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수호가 왜 소외감을 느꼈지?

“몰랐어? 하긴. 세현이 넌 모를 수도 있겠다.”

가끔은 번뜩이긴 하지만, 눈치라곤 쥐뿔만큼도 없는 친구.

그런 맹한 점과 착한 성격이 맞물려 오히려 장점이긴 하지만.

“너하고 세준이 형. 함께 참여한 앨범 있잖아.”

“응? 그게 한두 가진가?”

손가락을 접으며 골몰히 생각하는 세현.

김세준이 귀여운 동생의 모습에 피식 웃곤 입을 열었다.

“태조 이성계 OST 앨범 말이야. 아까 사인하던데, 몰랐어?”

“아... 그냥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줄 알았어요.”

세현이 낮게 탄식 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니 아까 공항에서 은근 태조 이성계 OST 앨범을 가진 팬들이 많았던 것 같기도 하고.

김세준이 샴페인으로 다시 목을 축이며 살짝 미소지었다.

‘인터넷으로 진작에 접하긴 했지만, 실감은 못 했지.’

세계 최고의 OTT인 플릭스 중동 지역에서 태조 이성계가 1위를 한동안 차지했다는 기사를 작년에 본 적 있었다.

한동안 대한민국에서도 제법 화제가 됐던 이야기.

김세준도 OST 참여자로서 제법 보람찬 감정을 느꼈었고, 뿌듯했다.

하지만, 그 당시엔 감히 생각지도 못했던 중동 지역 공연이었고, 금세 잊어버린 소문이었다.

“원래 우리나라 사극이 중동 지역에서 인기가 많다고 들었어요.”

“하긴 뭐... 옛날부터 유명한 건 많이 유명했지.”

시대를 풍미한 명작들.

고주몽과 대장금 같은 명작 사극이 옛날에 중동에서 큰 인기를 끌기도 했었지.

태조 이성계 또한 저 둘과 비교해서 꿀리지 않을 정도로 대단한 작품이었고, 어찌 보면 중동에서의 흥행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형이 이곳에서 최초로 공연하게 된 이유 중 하나일 걸요? 태조 이성계가.”

“음... 그렇기도 하지.”

김세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호의 말에 긍정했다.

“뭐, 게다가 형이 한복 입는 것도 마음에 들었을 거고, 형 공연이 워낙 노래 위주잖아요? 춤 같은 것도 없고. 근데 이제 또 노래도 유명해지고, 형이 OST로 불은 드라마도 국민 드라마까지 됐으니. 생각해보니 형보다 제격인 사람이 없네요?”

제법 장황하게 말을 내뱉은 수호가 씩 웃는다.

김세준의 또 다른 트레이드 마크인 한복은 노출에 민감한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제법 만족스러운 복장일 터.

게다가 그의 주된 노래도 화려하고, 귀가 터질듯한 노래가 아닌 잔잔하고 부드러운 감성의 노래인 점도 보수적인 국가에선 흡족할 만하다.

거기에 더해 태조 이성계의 OST를 부른 가수.

이제 막 문화 개방에 첫걸음을 내디딘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이보다 적격한 가수가 또 있나 싶을 정도다.

“내일도 잘 부탁한다.”

“예. 형.”

“저도 잘 부탁해요.”

수호와 술이 약해 벌써 얼굴이 벌게진 세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

이틀 후.

사우디아라비아 측에서도 기념비적인 오늘.

수도인 리야드의 랜드마크에서 오늘을 축복하고, 김세준의 공연을 기념하기 위한 하나의 이벤트가 열렸다.

태극기와 김세준의 사진을 리야드 중심부의 상징적인 건물인, 킹덤 타워와 올리야 타워. 그리고 알 파이살리야 타워에 크게 내걸었다.

수도 어디에서도 한눈에 보이는 태극기와 김세준의 사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이번 공연이 어떤 의미인지, 또 김세준이 얼마나 큰 인기를 끄는지 보여주는 거대한 퍼포먼스였다.

그리고 그가 공연을 펼칠 킹파드 인터내셔널 스타디움.

그곳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모여 발 디딜 틈도 없었다.

약 6만 7천 명이 들어갈 수 있는 스타디움.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티켓팅을 시작한 지 채 2분이 지나지 않아 모든 자리가 매진된 공연장.

특히 다른 지역과 달리 이곳에 모인 이들에겐 오늘의 공연이 더욱 특별했다.

다른 지역 사람들도 마찬가지지만.

이들에겐 유독 더욱 크게 와 닿는 말인 언제 또 볼 수 있을지 모르는 공연.

김세준의 공연이 아니라 해외 가수의 공연이 언제 다시 금지되어도 이상하지 않았으니까.

그러기에 유독 더욱 설레고 들뜬 표정의 사람들이었다.

무더운 날씨지만, 공연장이 오픈하기 전부터 모여 줄을 서며 기대감을 숨기지 않은 관객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에겐 억겁처럼 느껴졌을 기나긴 시간이 지났고, 그나마 더위가 슬슬 가시기 시작할 시간인 오후 5시.

사우디아라비아의 첫 해외 가수 스타디움 공연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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