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야금 뜯는 천제가수-142화 (140/148)

#142

월드 투어(3)

“후우...”

5만 명의 관객이 모인 도쿄돔에 백스테이지.

그래미 어워드때 입었던 푸른 빛이 도는 한복.

그 복장을 착용한 김세준이 한숨과 함께 열 손가락의 근육을 풀었다.

그리고 자신의 뒤에 나열한 수십 명의 사람을 향해 설렘이 가득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여러분. 첫 시작입니다. 실수해도 괜찮으니까. 너무 긴장하지 말고, 즐기면서. 재밌게 잘 해봅시다.”

함께 월드 투어를 진행할 연주자들이 그의 말에 작은 미소로 화답했다.

“실수해도 계약금은 그대로 주시는 거죠?”

이 중에서 가장 연륜이 많은 40대 초반의 남성. 거문고 연주자 박창석의 농담에 다들 피식 웃음을 짓는다.

“실수 100번을 해도 계약금은 변하지 않으니까. 즐기면서!”

긴장을 풀어주려는 그의 의도에 맞게 김세준도 일부러 과장되게 말했고, 동시에 스텝이 다가와 공연 시작을 알렸다.

“올라갑시다!”

김세준이 큰 목소리로 외쳤고, 그의 뒤를 따라 가지각색의 악기를 든 연주자들이 발걸음을 옮겼다.

자신의 이름을 내건 월드 투어의 첫 발걸음.

한 발자국씩 옮길 때마다 관객들의 설렌 목소리가 점점 커진다.

긴장과 흥분으로 새어 나오는 땀을 한복에 쓱 닦고, 무대 위로 발걸음을 옮기는 그 순간.

“...!”

5만 명의 관객이 일제히 지르는 환호성.

무대 위, 탁 트인 시야에서 보이는 풍경.

수십억을 줘도 못 보는, 가수들만이 느낄 수 있는 특권.

그 풍경이 눈에 들어오자 긴장이 사르르 녹고 입가에 진한 미소가 그려진다.

그의 뒤를 따라 올라오던 연주자들도 그 풍경을 잠깐 넋을 잃고 바라보다 연장자인 이태석의 지휘 아래 재빨리 자신들의 자리로 향했다.

“아아... 안녕하세요! 김세준입니다!”

일본어로 내뱉는 짧은 인사.

그 인사에 관객들의 화답은 언제 그렇듯 커다란 환호성이었다.

오프닝 멘트를 뱉으며 김세준이 천천히 무대 위를 거닐었다.

그리고 그런 김세준의 시선에 들어오는 흐뭇한 광경.

형형색색의 고운 한복을 차려입은 몇몇 팬들의 모습.

익히 들어 알고 있긴 했다.

자신의 팬들에게 한복이 하나의 굿즈가 되어가고 있다는 걸.

만만치 않은 한복의 가격을 떠올리면 그들에게 부담 주는 거 같아, 불편하기도 했지만.

내심 마음 한쪽으로는 흐뭇하고 뿌듯하기도 했다.

게다가 자신이 강요한 것도 아니고, 그저 그들이 한복의 멋에 빠져들면서 자연스럽게 생긴 문화.

그런 문화를 자신이 억지로 강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 몇몇 팬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김세준이 문득 한 장면을 상상했다.

자신의 콘서트에 온 관객들 모두가 한복을 입고 자신의 공연을 관람하는 상상.

‘와우...’

상상만 했음에도 절로 터져 나오는 장관이었다.

미소과 함께 오프닝 멘트를 마무리한 김세준이 도쿄돔 천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천장에 가로막혀 보이진 않지만, 오늘은 구름 한 점 없는 푸르른 날씨.

그리고 돔 내부에 가득 찬 싱그러운 봄기운이 완연한 공기.

마음을 몽글몽글하게 만드는 선선하고 포근한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온다.

‘이런 날씨에 딱 어울리는 노래지.’

안 그래도 요즘, 작년과 똑같이 한국 음원 차트에서 매섭게 치솟고 올라오고 있다.

첫 미니앨범 타이틀 곡이자, 자신의 든든한 연금 같은 곡.

봄바람.

한국처럼 사계절이 뚜렷한 비슷한 기후를 가진 나라인 일본.

한국에서 봄을 대하는 감정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냥 산책만 해도 절로 기분이 좋아지게 만드는 계절.

그런 감정이 고스란히 담긴 노래.

발매 당시 일본에선 무명에 가까운 노래였지만, 김세준의 이름이 점점 알려질수록 덩달아 사람들의 귀를 매료시킨 명곡이었다.

그 증거로, 김세준이 첫 곡으로 ‘봄바람’을 소개하자 관객들이 흥분한 목소리로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본 김세준이 가야금 앞에 앉았고, 그의 뒤에 나열한 연주자들을 향해 눈빛을 보냈다.

김세준의 시선에 연주자들이 각자 악기에 손을 올리며 준비를 맞췄고, 동시에 거대한 스피커에서 뿜어져 나오는 봄바람의 MR.

그리고 이날을 위해 지난 석 달간 합을 맞춰 온 연주자들의 악기가 동시에 선율을 내뿜었다.

가야금과 거문고. 산조대금의 음색이 조화를 이루며 부드럽게 울린다.

봄의 기운이 물씬 풍기는 멜로디.

이어서 해금과 비파가 음색의 깊이를 더해주며 추가되자, 관객들이 입을 틀어막으며 진한 감탄을 내뱉었다.

음원으론 숱하게 들은 명곡이지만, 라이브로는 처음 들어보는 곡.

쌀쌀한 한 겨울에 들어도 절로 봄이 생각나는 명곡을, 봄기운이 완연한 날씨에 들으니 가슴이 간질간질하며 실소가 육성으로 터져 나온다.

꽃향기 가득 품은 봄바람에

모두가 눈을 감고, 걸음을 멈췄죠.

그대 향기 가득 담긴 봄바람에

나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죠.

그리고 국악의 아름다운 조화에 화룡점정을 찍는 김세준의 목소리.

꺄아악아악!

작은 실소를 짓던 관중들이 오늘 처음으로 듣는 그의 노랫말에 기쁨 섞인 비명을 내질렀다.

봄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는 게

꽃잎인지, 내 마음인지 알 수 없네요.

바람을 안주 삼아

잔디밭에서 한 잔 어때요?

노래를 부르던 김세준이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바로 지금.

자신이 이번 무대를 위해 준비한 이벤트가 시작할 차례.

콘서트에서 흔히 사용되는 무대 장치이지만.

오늘 이벤트를 맞이하는 팬들의 감정은 남다를 게 분명했다.

“어라?”

김세준의 무대를 바라보던 한 관객의 작은 탄성.

무대 옆에 있는 청소기 같은 기계.

그 기계를 스텝들이 만지작거리더니, 이내 거기서 무언가가 뿜어져 터져 나왔다.

“...!”

하늘 높이 날아간 분홍색의 물체.

이내 그 물체가 천장에서 훑어져 무대와 무대 주변 관객석을 향해 살랑살랑 떨어져 내려왔다.

분홍색 꽃비의 향연.

많은 콘서트에서 사용하는 진부한 무대 장치.

하지만 오늘 공연에 찾아온 이들은 그 화려함과 아름다움에 입을 쩍 벌리고 감탄을 토해냈다.

봄기운이 완연한 날씨. 봄기운이 완연한 노래.

거기에 떨어져 내려오는 꽃비의 향연은 한 번 더 봄에 가득 취하게 만들었다.

생화가 아닌 라텍스 재질의 조화.

향기가 없는 게 당연하지만, 그 아름다움에 너무 취해서일까?

봄 향기가 코끝을 스치고 지나가는 듯했다.

“너무 이쁘다...”

꽃잎 하나를 손바닥으로 받은 한 관객이 낮게 중얼거렸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꽃비의 향연.

이 작은 꽃잎 하나도 무척 아름답지만, 그녀가 내뱉은 말의 대상은 이 꽃이 아닌 김세준이었다.

꽃들이 비처럼 내려오는 무대 가운데서 한복을 입고 가야금을 뜯는 남자.

만화나 드라마에서나 보던 장면.

그 장면이 현실로 이루어졌고, 봄비 한가운데서 가야금을 뜯는 그의 모습은 어떤 만화나 영화 주인공들보다 훨씬 아름답고 품위가 넘쳐흘렀다.

거대한 백 스크린에 잡힌 그 모습을 관객들이 열광하며 핸드폰을 들어 사진찍기 바빴고, 꽃잎을 받은 여성도 이내 핸드폰을 꺼내 김세준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냈다.

첫 무대부터 진한 아름다움을 선사하는 그.

간신히 성공한 티켓팅의 보람을 첫 무대부터 여실히 느끼는 관객들이었다.

***

봄바람이 끝나고, 무대 위에 가득 쌓인 꽃가루를 치우기 위해 잠깐 멈춘 공연.

그 사이, 무대 위에서 관객들과 짧은 소통을 하는 김세준.

“혹시, 삼 년 전, 아시안 뮤직 어워드에 오셨던 분 있나요? 그때 저 공연했었는데.”

처음 일본에서 공연했던 추억을 팬들과 공유하는 그.

김세준 말 한마디 한마디에 관객들이 열광하고 있을 때.

첫 무대에 꽃잎을 들고 감탄을 내뱉은 관객이 그의 말에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때 방송으로 무대를 보던 그녀.

당시엔 웬 이상한 가수가 나온다고 속으로 크게 불만을 터트렸었는데.

그땐 몰랐다.

자신이 김세준의 이렇게 큰 팬이 될 줄은.

아시안 뮤직 어워드때 보여준 무대의 충격.

불만을 토해내던 자신을 초라하게 만들었다.

그때부터 조금씩 김세준이란 가수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냥 작은 관심일 뿐이었다.

아이돌을 좋아하던 자신이었고, 김세준은 아이돌과 다르게 보기만 해도 흐뭇한 맴버들간의 캐미도 없으며, 눈길을 끄는 화려한 안무도 없었으니까.

금방 식을 거라고 생각했던 관심.

하지만 예상과 달리 김세준을 향한 자신의 관심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미국에서의 활동과 거기서 거둔 큰 성공.

그리고 그 성공의 밑바탕이 된 그의 명곡들.

자신의 마음을 녹여주고 위로해주는 그의 노래는 화려한 안무도, 맴버들간의 캐미도 없었지만.

사람의 마음을 찡하게 울리는 감동이 있었고, 깊은 여운이 있었다.

그리고 그가 미국에서 승승장구할 때마다 덩달아 뿌듯해지는 자신.

같은 국적의 사람은 아니지만, 동양인이 동양의 전통 악기와 전통 옷을 입고 활약하는 모습은, 같은 아시안으로서 자부심을 느끼게 했다.

그가 연주하는 가야금과 비슷한 악기가 일본에도 있으며, 그가 입고 활동하는 한복과 비슷한 의복이 일본에 있으니까.

그를 통해 느끼는 대리만족.

일본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도 그를 통해 대리만족하는 팬들이 많으리라.

비록 온전히 자신들의 문화는 아니지만, 비슷하다는 것만으로도 자부심을 느끼게 만드는 그의 활약.

내심 바라본다.

자신들의 전통 악기도 언젠간 가야금처럼 그 명성이 널리 알려지기를.

***

무대 위 청소가 얼추 끝나자, 이어지는 공연.

이미 세상에 그 가치가 입증된 명곡 릴레이에 관객석은 지진이라도 난 듯 큰 호응을 했고, 김세준 또한 관객들의 모습에 더욱 흥이나 무대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어느덧 공연이 중간 막바지에 이르렀고. 김세준이 관객들과 소통하는 사이, 콘서트 내내 무대를 지키던 몇몇 연주자들이 슬그머니 자리를 비운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힐끔 보며 김세준이 슬며시 마른 미소를 그렸다.

저들의 빈자리를 채울 새로운 세션.

그들이 등장할 차례.

이번 일본 콘서트를 위해 그가 준비한 또 하나의 이벤트.

“다음 노래는, 제 정규앨범 ‘별무리’ 수록곡인 별과 함께입니다.”

별무리.

이진아가 피쳐링한 노래로 정규앨범에 9번째 트랙.

비록 타이틀은 아니나 수록곡 하나하나가 명곡이란 소리를 듣는 김세준의 정규앨범.

이미 일본 팬들에게도 유명한 노래였고, 자연스럽게 큰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김세준이 다음 무대를 소개하고 있을 때, 백스테이지는 혼란스러웠다.

“빨리! 앞으로! 시간 다 됐어요!”

무대에서 내려온 연주자들을 대신하여 올라갈 세션들.

그들이 무대 위로 올라갈 채비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다행히, 그들이 올라가기 전, 무사히 끝난 준비.

4명의 여성이 서로를 바라보며 긴장감에 떨고 있을 때.

스텝이 신호를 줬다.

“지금! 지금 나가세요!”

등을 떠미는 스텝의 손에 악기를 꼬아 쥐고 무대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그들이 올라오자 김세준이 환한 미소를 머금었고, 동시에 일본 관객석에선 경악 섞인 감탄이 터져 나왔다.

그들의 존재.

자신이 한 번쯤은 해보고 싶었던 공연.

그리고 동시에 김세준이 일본 팬들을 위해 준비한 하나의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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