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
두 번째 어워드(5)
떨리는 발걸음으로 시상대 위로 향했다.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지만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풀썩 주저앉을 거 같았다.
긴장이 풀려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다리.
두근거리는 심장.
속으론 이 상황이 꿈이 아니길 끊임없이 되뇌었다.
꿈이면 정말 깨고 싶지 않은 꿈.
스테이플스 센터에 모인 2만 명의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려 있고, 화려한 조명이 자신만을 위하여 빛나는 듯한 기분.
“축하합니다. 세준.”
시상을 맡은 세계적인 영화배우 윌슨이 아름다운 미소와 함께 트로피와 꽃다발을 건넸다.
양손으로 조심히 받아들고, 김세준이 살짝 허리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차분한 미소와 함께 윌슨이 뒤로 물러서고, 시상대에 홀로 선 김세준.
‘하아...’
고개를 숙이자 그래미 어워즈 트로피 특유의 모습이 보인다.
금색으로 만들어진 축음기.
그리고 그 트로피에 새겨진 글자.
영어로 적힌 김세준이란 이름.
순간 가슴이 뜨거워지면서 왈칵 눈물을 쏟을 뻔했다.
“후우... 감사합니다.”
벅차오르는 감정을 가라앉히며 김세준이 마이크에 대고 첫 마디를 열었다.
“음... 일단 이 상을 주신 그래미 어워즈 관계자분들에게 감사합니다. 작년엔 저기 앉아서 구경만 하고 있었는데.”
김세준이 손가락으로 에드 케인의 옆자리를 가리키며 넌지시 미소짓자 좌중들도 그를 따라 웃는다.
“그땐, 아무도 예상 못 했겠죠. 저 남자가 이 자리에 올라올 거라고.”
다들 고개를 끄덕인다.
누가 알았을까. 고작 1년 뒤에 동양에서 온 무명의 남자가 저 시상대에 올라 상을 받는다?
당시 누군가한테 말을 꺼냈으면 잔뜩 비웃음을 살 이야기였다.
“제가 이 자리에 올라올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 팬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하고, 작년부터 올해까지 저를 도와준 동료분들에게도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에드 케인과 에이미를 넌지시 바라보자, 그들이 흡족한 미소와 함께 시선을 맞춘다.
가볍게 박수하며 진심으로 기뻐하는 그들의 모습이 눈빛에 들어왔다.
비단 저들만이 아닌, 그동안 자신을 도와준 이들이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간다.
이해진과 하동준. 이주성, 강유나, 이진아, 장준. 세현과 수호와 정수연. 폴 에드워드와 조지 에드워드. 그리고 이예은.
지금 기억나는 사람들만 10명 남짓.
미처 떠오르지 않는 이들까지 포함하여 자신을 도와준 수십 명에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꼈다.
“더 하고 싶은 말이 많고, 감사를 전해야 할 사람들이 많지만 이만 여기서 끝내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김세준이 크게 허리를 숙이자 쏟아지는 함성과 박수.
고개를 든 김세준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벡스테이지로 향했고, 무대 뒤편에서 대기하던 스텝들도 그를 향해 축하를 건넸다.
그들의 축하에 일일이 감사를 표하고, 자리로 돌아오자 에드 케인이 너스레를 떨며 그를 반겼다.
“축하해! 기분이 어때?”
“고맙다. 당연히 좋지. 뭔가 얼떨떨하고.”
트로피를 괜히 만지작거리자 금속 특유의 차가운 감촉이 느껴진다.
시원하니 기분이 좋았다.
헤픈 웃음을 지으며 좋아하는 친구를 보며 에드 케인이 능글맞은 표정으론 그를 툭 쳤다.
“벌써 그렇게 좋아하면 안 돼. 아직 많이 남았다고.”
오늘 김세준이 후보로 오른 상은 무려 다섯 개.
아직 네 개의 상이 그 주인이 가려지지 않았다.
김칫국을 한 사발 들이키는 에드 케인이었고, 김세준이 피식 웃었다.
후보에 오르긴 했지만, 받을지는 미지수.
솔직히 여기까지 온 이상 모든 상을 휩쓸고 싶은 마음이 당연하지만.
세상만사에 자신의 마음처럼 되는 일이 있던가.
“내가 받을 거 같아?”
김세준이 넌지시 묻자, 에드 케인이 호탕한 웃음을 터트린다.
항상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던 친구의 사람다운 면을 본 거 같아 귀엽게 느껴졌다.
“아마도? 내 개인적인 감이지만.”
어깨를 으쓱하며 내뱉는 에드 케인.
김세준이 뭐가 맥 빠지는 답에 고개를 돌려 무대를 바라봤고, 에드 케인이 넌지시 웃었다.
***
“세준, 잠깐만. 나 이제 슬슬 준비하러 가야 해서.”
그래미 어워즈 1부가 끝나고 2부가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을 때, 에드 케인이 엉거주춤 일어났다.
“아, 곧 네 무대 차례구나.”
“응. 기대하라고.”
의기양양한 미소를 짓는 에드 케인을 보며 김세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에드 케인. 비록 작년과 올해는 비교적 부진하긴 했지만, 저렇게 자신만만한 모습이 전혀 이상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김세준이 내년에 행할 월드투어도 진작에 소화한 대단한 가수이니까.
“당연하지. 잘하고 와.”
“넌 기절할지도 몰라.”
“응?”
알 수 없는 말에 반문했지만, 에드 케인은 미묘한 미소만 짓고 발걸음을 옮겼다.
“또 무슨 꿍꿍이야?”
항상 사람들의 기대를 뛰어넘는 무대와 노래를 선보이는 그.
그런 그가 내뱉었기에 더욱 커지는 기대감.
두근거리는 심장과 함께 무대를 바라봤고, 두 번의 공연이 끝나자 에드 케인이 무대 위로 올라왔다.
“...!”
그리고 소년 같은 천진무구한 표정을 지으며 올라오는 자신의 친구.
그 친구를 보며 김세준의 두 눈이 놀라 커졌고, 관객석에선 미친 듯한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꺄아아아악!
에드 케인의 인기도 있지만, 환호성에 담긴 의미는 단순히 그를 환영하는 게 아니었다.
오늘 고운 한복을 입고 온 에드 케인.
무대에선 당연히 다른 의상을 입을 줄 알았는데, 예상과 달리 한복을 고스란히 입고 나온 그.
그것만으로도 제법 놀랐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욱 시선을 사로잡고 깜짝 놀라게 만든 건, 그가 들고나온 하나의 악기.
가야금.
자신이 아닌 에드 케인의 손에 들려 나온 가야금의 존재를 보고 놀란 사람들.
김세준도 놀랐고, 관객들도 놀랐다.
‘아까 말한 게 이 뜻이었어?’
문뜩 그가 자리를 떠나기 전 내뱉은 말이 떠오른다.
기대하라는 말.
얼굴에 잔뜩 미소가 그려진다.
기대 이상의 퍼포먼스 아닌가.
그가 등장함과 동시에 카메라 몇 대가 김세준의 얼굴을 찍었다.
가야금과 김세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
무대에 오른 건 에드 케인이지만, 당연히 김세준을 향한 시선도 뜨거울 수밖에 없었다.
마치 카메라와 사람들이 묻는 거 같다.
언제 에드 케인에게 가야금을 알려줬냐고.
하지만 자신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그의 퍼포먼스.
‘언제 연습한 거야?’
그에게 가야금을 알려준 적도, 가야금을 선물해준 적도 없다.
그가 가야금에 큰 관심이 있던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기쁜 마음을 참을 수 없어 얼굴에 잔뜩 미소가 그려졌다.
에드 케인과 시선을 마주치자 그가 씨익 웃으며 얼굴로 묻는다.
놀랐냐? 재밌지? 어때?
그런 그를 보며 김세준이 엄지를 치켜든 다음 큰 박수를 한다.
진심으로 고맙고, 놀랍다.
매들린 바넷.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이곳에서 가야금을 연주한다면 그녀가 처음이리라 생각했다.
그것도 아주 먼 미래에 있을 법한 일.
하지만 보기 좋게 틀린 자신의 예상.
설마 자신을 제외하고 가야금을 처음으로 연주하는 게 에드 케인일 줄이야.
입에서 육성으로 웃음이 흘러나왔다.
언제 또 가야금을 구매하고 연습한 건지.
뿌듯하고, 벅찬 감정.
자신도 이런데 이 무대를 보고 있을 국민은 어떤 심정일까.
자신들의 전통악기를 세계적인 외국인 가수가 연주한다니.
아마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할 풍경이리라.
한복을 입고 온 것만으로도 국내 투어는 만석이리라 생각했는데.
생각을 정정해야 할 판이다.
이제 에드 케인의 콘서트는 1분만 늦어도 표를 구하지 못하리라.
끝날 기미가 안 보였던 관객들의 환호성이 끝나고, 에드 케인이 가야금 앞에 앉았다.
그에게서 보이는 김세준의 모습.
한복과 가야금.
김세준에겐 한 몸처럼 느껴지던 전통의 미가 외국인인 에드 케인에게도 썩 잘 어울린다.
약간은 이질적이나, 그 이질적인 모습마저 아름답게 느껴진다.
잠시 후, 무대 위에 흘러나오는 노래는 그가 올해 발매한 곡인 ‘Forever’.
무대를 바라보는 수천만 명의 기대 속에서 에드 케인이 가야금을 뜯기 시작했다.
“오...”
그의 연주에 김세준이 진심으로 감탄을 내뱉었다.
사적인 감정을 제외하고도 썩 나쁘지 않게 하는 그.
오히려 공식적인 무대가 처음이라는 걸 고려한다면 잘한다고 봐도 무방한 수준.
원곡인 ‘Forever’는 에드 케인의 기타 연주가 돋보이는 곡.
제법 강렬한 기타의 음색과 전자음이 섞인 트렌디한 음악.
그 노래를 편곡하고, 기타의 음색 대신 가야금의 가락을 집어넣었다.
원곡은 제법 빠른 박자였지만, 지금은 사뭇 서정적이고 느릿느릿한 리듬.
부드럽게 울리는 가야금의 선율이 관객들과 시청자들의 귀를 사로잡았다.
“잘하네.”
첫 연주인만큼 조금 아쉬운 면도 있지만 그건 자신이기에 보이는 부분.
명인의 시점이 아닌, 단순히 관객의 시점에서 본다면 손색없는 연주였다.
누군가한테 배운진 몰라도, 제법 잘 배운 티가 난다.
“아...”
그렇게 에드 케인의 연주를 흐뭇하게 바라보던 김세준이 갑자기 자신도 모르게 탄식을 뱉었고, 눈가에 눈물이 맺힌다.
자신이 상을 받은 것 이상으로 기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지금이었다.
가야금.
한국인만 알기엔 너무 매력적인 음색이었고, 소수만 연주하기엔 너무 아까운 악기였다.
자신의 모든 삶을 받쳤다. 그렇게 말해도 전혀 과언이 아닌 가야금.
그런 가야금이 이곳에서 다른 이의 손에 연주된다는 걸 두 눈으로 목격하자 참을 수 없는 감격이 치밀어오른다.
복받쳐 오르는 감동에 고개를 숙이고 재빨리 눈가를 닦는다.
“후우...”
깊게 숨을 내뱉고 마음을 가다듬고 에드 케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중간에 실수 한번 없이 완벽히 무대를 마친 그.
뜨거운 박수와 함성에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한 에드 케인이 잠시 후 김세준의 옆으로 다가왔다.
“어때?”
자신만만한 미소와 함께 묻는 에드 케인을 향해 김세준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잘했어. 언제 준비한 거야?”
“꽤 됐어. 알잖아. 내가 가야금에 제법 관심 있던 거.”
그건 진작 알고 있었지만...
첫 만남부터 가야금에 대한 지대한 호기심을 표하던 그다.
하지만 무려 그래미 어워즈 공연에서 가야금을 연주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진짜 고마워. 감동이었어.”
“됐어. 내가 기절할 거라고 했지?”
김세준의 진심 어린 감사가 민망한 듯 에드 케인이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물었고, 김세준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정말 기절초풍하는 줄 알았다.
“아, 근데 가야금 누구한테 배운 거야? 잘하던데?”
“응? 안 배웠는데? 그냥 독학했어.”
“허...”
에드 케인의 대답에 김세준이 육성으로 감탄을 뱉었다.
가야금을 독학했다고?
말이 되는 소린가?
확실히 천재는 천재인가 보다.
스승도 없이 저 정도로 연주하다니.
김세준이 놀라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을 때, 에드 케인이 아! 하고 탄식을 뱉었다.
“아, 엄밀히 따지면 독학은 아니지.”
“응? 무슨 말이야?”
김세준의 되물음.
그 되물음에 에드 케인이 넌지시 미소지으며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켰다.
“너. 너한테 배운 거네. 네 미튜브. 거기에 올라온 강의보고 연습했거든. 잘 해놨더라. 초보자가 봐도 이해하기 쉽고, 따라 하기 쉽게.”
“...!”
에드 케인의 말에 김세준이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인다.
아...
눈물이 왈칵 쏟아질 거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