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
두 번째 어워드(3)
거울을 보며 옷매무시를 가다듬곤,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네.”
남자들의 흔한 착각과 허세가 아닌 진심으로 썩 괜찮은 모양새.
오늘 같은 날에 딱 어울리는, 기품있고 품위 있는 옷차림이었다.
금색 자수가 수 놓인 푸른 빛의 반소매 쾌자.
그리고 그 안에 입은 흰색 저고리.
흰색과 푸른색의 조화가 사뭇 잘 어울렸고, 금색의 자수가 귀티를 더해준다.
전체적으로 깔끔하고, 청량한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고운 한복.
오늘을 위해서 한복 장인인 박혜자 선생님께 부탁드려 제작한 옷이었다.
“형님. 시간 다 됐습니다.”
“응. 가자.”
거울을 보며 자아도취에 취해있을 때, 이주성이 들어와 그에게 시간을 알렸고, 진중한 목소리로 답한 김세준이 가야금을 챙겨 들곤 그를 따라 나왔다.
오늘은 드디어 그가 한 해 동안 이뤘던 노력의 결실을 보는 날.
오늘을 기점으로 당분간 미국과 한국 시상식으로 일정이 가득 찼고, 첫 시작은 그래미 어워드였다.
이주성이 운전하는 벤을 타고 향하는 곳은 작년에 이미 한 번 가봤던 곳.
LA에 있는 각종 스포츠팀에 홈구장이자, 2000년대 이후로 거의 매번 그래미 어워드를 열었던 스테이플스 센터였다.
차량을 타고 가는 도중, 힐끔 창문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문득 떠오르는 작년 이맘때의 기억.
에드 케인과 함께 차를 타고 봤던 풍경들.
추억 속 그때과 별반 다르지 않은 창밖의 모습이었다.
똑같은 거리와 똑같은 빌딩들.
고양되고 흥분된 표정으로 길거리를 거닐며 스테이플스 센터로 향하는 관객들.
모든 게 그대로지만 딱 하나 변한 건.
그 풍경을 보는 자신.
그때를 떠올리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온다.
고작 1년이 지났지만, 훨씬 달라진 자신의 위상.
그래미 어워드를 하나의 기회로 삼았던 작년과 달리, 올해 자신은 이 자리에 초청받는 게 당연한 사람이 되었다.
‘풋풋했네.’
작년의 다짐을 떠올리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래미 어워드를 통해 세상에 이름을 알리겠다는 당찬 포부를 가졌던 1년 전의 자신.
지금 돌이켜 보면 풋풋할 따름이었다.
“형님. 거의 다 도착했습니다.”
이주성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시선을 앞으로 돌리자 레드 카펫과 그 입구가 보인다.
그리고 펜스 너머로 모인 기자들과 팬들과 경찰로 인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는 그 주변.
차가 멈추자, 김세준이 깊게 심호흡을 한번 하고 문이 열리는 걸 기다렸다.
이내 먼저 내린 이주성이, 밖에서 문을 열어주고, 그가 차 바깥으로 발걸음을 내딛는 순간.
꺄아아아아악!
그의 귓가를 때리는 어마어마한 환호성.
“...!”
담장 너머 있는 사람들의 표정.
열광과 환희로 가득 찬 그들의 얼굴.
그리고 자신을 찍어대는 수십 개의 카메라.
작년과 비교했을 때 확연히 달라진 저들의 태도.
그땐 자신은 뒷전이었고, 에드 케인에게만 쏠리던 그들의 시선은 명확히 알려줬었다.
자신은 조연이었고, 들러리였다는 걸.
김세준이 어깨를 펴고, 바닥에 깔린 레드 카펫을 당당히 밟는다.
오늘 그는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이 시상식에 주인공 중 한 명이었다.
***
포토존에서 사진을 찍고, 들어오자 눈에 들어오는 화려한 내부.
그리고 그 화려한 내부 모습보다 더 눈에 들어오는 건 사람들.
오늘 경쟁자이기도 하며 동업자이기도 한, 그리고 그들을 정말 좋아하는 한 팬으로서 신기한 마음을 가지며 주변을 둘러볼 때.
“세준!”
자신을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
“응?”
고개를 돌리자, 수많은 스타가 모인 이곳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한 사람이 보였다.
“에드?”
놀란 목소리로 그를 불렀고, 에드 케인이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양팔을 벌렸다.
“어때?”
“허어...”
예상하지 못한 깜짝 서프라이즈.
양복이 아닌 자신처럼 한복을 입고 있는 그.
저고리에, 반소매 쾌자에 바지까지.
아주 제대로 갖춰 입었다.
어두운 남색 계열의 쾌자. 자신처럼 금색으로 수놓아진 한복이 그와 썩 잘 어울린다.
“뭐야?”
자신의 질문에 에드 케인이 어깨를 으쓱했다.
“기억 안 나? 작년 네가 입은 거 보고 나도 달라고 했었는데?”
“아...”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기억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스쳐 지나가는 말로 그랬던 거 같은데.
그게 진심일 줄은 몰랐지.
“네가 도통 말이 없길래 내가 스스로 장만했지. 어때? 괜찮지 않아?”
“어. 잘 어울리는데?”
흐뭇한 표정으로 물어보는 에드 케인을 향해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진짜 이 자리에 그가 한복을 입고 올 줄이야.
한국에서 한바탕 난리 나겠네.
한국인도 아닌 외국인, 그것도 세계적인 가수.
그런 남자가 그래미 어워드란 유서 깊은 시상식에 한복을 입고 참여했다?
축하해. 에드.
넌 앞으로 한국 공연은 무조건 만석일 거다.
“테일러는 잘 지내지?”
“응. 안 그래도 안부 전해달라고 하더라.”
김세준과 에드 케인.
작년에 제법 화제가 된 둘의 조합.
그런 두 사람이, 눈에 띄는 옷을 입고 같이 있자 시선들이 쏠린다.
작년까진 에드 케인에게 쏠렸던 시선이, 이번엔 김세준에게 대부분 쏠려 있지만.
“시선이 따가운데?”
에드 케인을 귀를 향해 낮게 속삭이자, 그가 피식 웃었다.
“뭐, 그런 일이 있었으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 아, 저기 에이미 있던데 에이미나 보러 갈래?”
“오. 가자.”
에드 케인이 턱으로 까닥거렸고, 김세준이 반색했다.
에이미.
세계 최고의 디바. 그리고 동시에 자신이 이 위치까지 올 수 있게 만들어준 큰 조력자.
그녀와의 듀엣이 화제가 되어 미국 진출이 순조롭게 이루어지지 않았나.
고맙고, 감사한 사람 중 한 명.
“에이미!”
에드 케인이 멀리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에이미를 큰 목소리로 부르자,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김세준과 에드 케인을 발견하자 얼굴에 반가움이 잔뜩 묻어나왔다.
“오! 에드. 세준.”
따뜻한 미소와 함께 두 팔을 벌린 뒤, 가벼운 포옹으로 케인을 반기는 그녀.
김세준과도 똑같이 가볍게 포옹한 뒤, 미소와 함께 두 사람을 천천히 훑었다.
“옷이 멋진데요?”
“감사합니다. 에이미도 멋져요.”
붉은 랩어라운드 드레스를 입은 그녀의 모습.
그녀 특유의 금발과 붉은색의 조화는 고혹적이며 매혹적이었다.
삼십 대 특유의 농밀함이 느껴지는 그녀.
“고마워요. 근데 정말 멋져요. 작년에도 입고 왔던 그 옷인가요?”
“네. 맞습니다.”
“기억나요. 그때도 눈이 갔었는데. 에드가 작년 당신을 보고 따라 했군요.”
살짝 흘기는 에이미의 시선에 에드 케인이 배시시 웃는다.
“이해 가요... 저도 살짝 욕심이 나네요...”
한복을 향해 욕심을 내비치는 그녀. 김세준이 놀람과 동시에 재빨리 입을 열었다.
“조만간 제가 선물로 드리죠.”
에이미가 한복 입은 모습.
그녀의 큰 팬으로서 꼭 보고 싶은 장면이었다.
“에이미. 이 친구 말 믿지 마요. 저도 작년에 이 말 믿고 기다렸지만, 연락 한 통 없었습니다.”
에드 케인의 심통에 김세준이 난처한 웃음을, 에이미가 환한 웃음을 지었다.
“근데 정말 아름답네요. 특히... 세준은 뭐랄까... 잘 표현은 못 하겠지만 축하해요. 올해 베스트 드레서는 당신이 될 거 같네요.”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그녀의 칭찬에 김세준이 작은 미소와 함께 가볍게 허리를 숙였다.
“오. 세준 저기 봐.”
그리고 허리를 올리자 에드 케인이 그의 어깨를 가볍게 툭 치곤 턱으로 까딱거렸다.
턱이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옮기자, 자신을 째려보는 뜨거운 눈빛이 보인다.
“등 뒤가 따가운 이유가 저기 있었네.”
자신을 노려보는 한 무리.
마룬즈의 맴버들 그리고 올해의 앨범상 후보로 오른 가수들이었다.
뭐, 저들의 심정이 이해 안 가는 건 아니지만.
내가 주도해서 벌인 일도 아니고, 나도 모르게 일어난 일.
저렇게 노골적으로 악의를 내비치니 불쾌한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소개해줄까?”
애드 케인이 능글맞게 웃으며 입을 열었고, 김세준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친해져서 나쁠 게 없을 사람들이지만.
굳이 이런 상황에 친해질 필요는 없었다.
“오해가 제법 있는 거 같으니까. 나중에 풀면 되겠지.”
그가 그래미 어워드 올해의 앨범상에 노미네이트가 되고, 한동안 세간에 돌았던 소문.
김세준과 그의 소속사가 미국 레코딩 아카데미에 거액의 금액을 로비했다는 찌라시.
놀라 급히 정수연을 찾아 사실 여부를 물었고, 정수연은 맹세코 그럴 일 벌인 적 없다며 양손을 내저었다.
재빨리 오피셜을 내고, 언론들에 정정자료를 요청했지만.
이미 그 소문을 사실처럼 믿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저들 또한 자신을 그런 시선으로 보고 있는 게 분명했다.
돈으로 그래미 어워드를 매수한 더러운 가수.
억울하지만, 뭐 어쩌겠어.
자신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사람들도 있는 법.
그런 자들에게 일일이 해명하고 억울함을 토로하는 건 너무 피곤한 일 아닌가.
“아냐. 아 맞다. 나 먼저 갈게. 나 준비해야 해서. 에이미.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김세준의 말에 에이미와 에드 케인이 고개를 끄덕인다.
오늘 그래미 어워드의 영광스러운 첫 무대.
그 무대를 맡은 주인공이 김세준이었다.
***
화려한 폭죽이 터지며 그래미 어워드의 서막을 알렸다.
관객들의 뜨거운 환호성과 폭죽이 터지는 소리를 백스테이지에서 들으며 김세준이 긴 한숨을 내뱉었다.
“후우우...”
“후우우...”
그리고 그런 김세준의 루틴을 따라하는 수십 명의 사람.
김세준의 뒤에 나열하며 각자의 악기를 들고 얼굴에 긴장이 잔뜩 서려 있었다.
“긴장 풀어요. 앞으로 이런 공연 수두룩하게 해야 할 텐데.”
김세준이 고개를 뒤로 돌려 그들을 향해 장난스럽게 내뱉었다.
오늘 공연을 위해, 그가 섭외한 인물들.
한국에서 출발해 이틀 전 이곳에 도착한 이들.
그의 단독콘서트 때, 큰 도움을 줬던 국악단이었다.
그의 인맥을 총동원하며 급조했던 그 국악단.
그 국악단을 이 자리에 다시 불렀고, 흔쾌히 수락해준 그들.
콘서트처럼 긴 무대를 꾸미는 게 아닌데도, 머나먼 타국까지 와준 그들이었다.
‘뭐, 내년엔 미국이 아니라 전 세계를 같이 돌겠지만.’
점점 윤곽이 잡혀가는 그의 내년 월드 투어.
그 월드 투어에도 당연히 섭외했고, 아직 모든 이들의 일정이 조율된 건 아니지만.
아마 한 명도 빠짐없이 같이 다니게 되리라.
“저희 먼저 나가 있을게요!”
“네! 잘 부탁드립니다!”
스텝의 신호에 국악단이 김세준과 파이팅을 외치곤 무대 위로 향한다.
관객 석에선 거대한 천막으로 가려져 있는 스테이지.
그 천막이 걷히면서 전주가 흐르고 자신이 무대 위로 올라가는 구성.
분주히 움직이는 국악단이 있는 무대를 보는 김세준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그려졌다.
세계 최고의 시상식에서 펼치는 온전한 자신의 무대.
비록 많은 논란이 있지만, 세계 최고의 시상식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이곳.
이곳에서 노래를 부르는 꿈을 회귀하기 전 얼마나 많이 꿨던가.
수십 수백 번을 꿨고, 그때마다 노래는 달랐고, 관객들도 달랐지만.
바로 이곳, 그래미 어워드.
이 무대에 올라 온전히 자신의 공연을 펼치는 모습은 수십 수백 번의 꿈에서도 단 한 번도 변하지 않았다.
스테이지를 가렸던 천막이 펼쳐지고, 국악단이 동시에 연주를 시작한다.
“후우...”
깊은숨을 다시 한번 내뱉고, 그가 백스테이지에서 무대 위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수십 수백 번을 꿈꿨던 몽상.
이제 몽상이 아니라 현실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