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
컴백홈(3)
이예은과 함께 밤을 보내고 다음 날.
김세준은 그리운 두 사람을 만나러 향했다.
정수연 덕분에 둘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녀로는 채울 수 없던 특별한 감정이 있다.
데뷔 때부터 자신의 등을 든든히 지켜준 그들에게만 느낄 수 있는 거목 같은 든든함.
제2의 부모님이라고 불러도 무방한 관계였기에 한국에 들어오면 꼭 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예약한 일식당의 프라이빗룸으로 가자, 먼저 도착한 그들이 자신을 반겼다.
“세준아. 왔어?”
“월드 스타 왔구나!”
“예. 사장님. 부사장님. 잘 지내셨어요?”
이해진의 점잖은 인사와 그에 상반되는 하동준의 경쾌한 인사말.
6개월 만에 만나도 여전한 두 사람의 모습에 김세준이 슬며시 미소지었다.
이해진과 하동준도 그를 보며 진한 미소를 지었고, 그 미소에 담긴 오만가지 감정이 절로 느껴졌다.
그리움과 반가움. 대견함과 흡족함.
자신들이 키운 최대 걸작.
그리고 동시에 자신들의 회사를 지금에 위치까지 키워준 아티스트.
자리에서 일어나며 이해진과 하동준이 차례대로 그와 악수했다.
“얼굴이 많이 변했네. 미국에서 좋은 거 많이 먹었나 보다?”
“좋은 거긴요. 미국에서 제일 고생한 게 음식 문제였는데요.”
하동준의 가벼운 농담에 가볍게 웃음을 터트리고 이내 세 사람이 자리에 앉았고, 이내 음식을 주문했다.
“하여간 잘 왔어. 고생했다. 그리고 축하한다.”
많은 의미가 함축된 이해진의 말에 김세준이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이내 종업원이 들어오자, 코스 요리로 주문을 한 뒤, 김세준이 두 사람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두 분은 잘 지내셨어요?”
“우리? 우리야, 잘 지냈지. 덕분에.”
이해진이 넥타이를 살짝 풀며 낮게 웃었고, 하동준도 옆에서 웃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뭘 했다고요.”
멋쩍은 미소 함께 겸손 떨었지만, 이해진과 하동준에겐 가당치도 않았다.
“준이가 네 덕분에 떴으니까.”
“진짜 고맙다. 덕분에 우리도 큰 짐 하나 덜었어.”
‘소외된 자의 슬픔’을 피쳐링한 장준.
자신들의 아픈 손가락이었던 그가, 드디어 빛을 보기 시작했다.
그동안 무명인 그가 해외에 얼굴을 알렸고 한국에선 요즘 폭발적인 인기를 끄는 중이다.
“방송국에서 너 대신 준이를 많이 섭외하는 거 알아?”
“아. 준이한테 이야기 들었어요.”
방송국에서 김세준은 단연코 섭외 1순위.
하지만 해외 활동에 전념하느라 그동안 한국에 들어오지도 않던 그다.
섭외할 가능성은 하늘의 별 따기처럼 낮았고, 그런 방송국에서 아쉬운 대로 택한 사람이 장준이었다.
“대박 났지. 우리도 몰랐다. 준이가 그렇게 예능감이 넘칠 줄은.”
회 한 점을 집어 들며 하동준이 흡족한 웃음을 지었다.
미국에서 돌아온 후, 처음 나간 방송에서부터 숨기고 있던 예능감을 내뿜은 그.
거기에 더해, 빼어난 외모와 화제성까지.
단숨에 방송국의 1픽으로 자리 잡았고, 그동안의 무명 생활의 서러움을 털어내듯 엄청난 인기를 구사하는 중이었다.
“오늘 원래 준이도 부를까 했는데. 스케줄 때문에.”
“준이는 뭐, 나중에 보면 되죠. 아, 준이도 내년에 앨범 낸다면서요?”
“응. 내년 초쯤에.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지.”
하동준의 대답에 김세준의 얼굴에 진한 미소가 피어오른다.
드디어, 자신의 친구가 빛을 봤고.
내년. 자신의 친구는 더할 나위 없이 큰 인기를 구사하리라.
장준에게 얼핏 들은 앨범 컨셉.
회귀하기 전, 장준의 오랜 무명 생활을 끝냈던 명반과 똑같은 컨셉이었다.
무명 시절일 때에도 대한민국을 뒤흔들었던 명반.
그 명반이 지금 장준을 통해 나온다면, 어떤 파급력을 가질까.
달라질 미래를 떠올리자 얼굴에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아, 그래서 그런데. 준이는 너한테 부담될까 봐 이야기 못 하고 있던데. 혹시 준이 다음 앨범 도와줄 생각 있어?”
“아...”
이해진이 넌지시 그에게 물었다.
내년. 김세준의 원대한 프로젝트를 알기에 말 꺼내기가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그런 우려와 달리 이해진의 요청에 김세준은 환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입니까? 당연히 도와줘야죠.”
“시간 괜찮겠어?”
“예. 뭐. 조금 빡세지긴 하겠지만, 큰 무리는 없을 겁니다.”
“그래. 준이한테는 내가 말해둘게. 고맙다.”
이해진의 진심 어린 감사에 김세준이 낮게 중얼거렸다.
‘제가 고맙죠.’
내년 장준의 앨범.
회귀하기 전, 자신이 정말 좋아하고 사랑했던 노래로 가득한 명반.
그 명반에 참여한다는 사실이 얼마나 기쁜지 저들은 모를 터.
게다가, 성공이 보장되는 앨범이다.
팬으로서, 가수로서 여러모로 자신이 더 고마울 따름이었다.
“아, 예은이는 만났어?”
“예. 어제 만났습니다. 같이 밥 먹었어요.”
“장거리가 이렇게 애틋해. 귀국하자마자 피곤할 텐데.”
하동준의 능글맞은 말에 김세준이 민망한 미소를 지었다.
“예은이도 일본에서 확실히 자리 잡았고. 커플이 다 잘되니까 보기 좋아.”
“감사합니다. 사장님이랑 부사장님이 고생 많이 하신 거 압니다.”
“됐어. 우리가 무슨. 가수들이 고생하는 거지.”
이해진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맥주로 입을 축였다.
대수롭지 않게 내뱉은 말이지만, 저 한 마디를 뱉는 사람이 얼마 없다는 걸 알기에 새삼 다시 한번 존경심을 느낀다.
잘 되면 남의 덕이고, 못 되면 자신의 탓.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아. 그나저나 예은이하고는 언제까지 비밀연애할 거야?”
“예?”
하동준의 뜬금없는 말.
언제까지라니.
당연히 들키기 전까지지.
“평생 안 들키고 잘 사귀면 좋긴 한데. 그러는 게 쉽지도 않고. 해진이랑은 이미 이야기해봤는데, 둘만 괜찮으면 미리 공개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아서.”
“흐음... 괜찮을까요?”
김세준이 턱을 어루만지며 진중한 목소리로 되물었고, 이해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최악은 면하자는 거지. 끝까지 비밀연애하다가 발각돼서 팬들한테 배신감 심어줄 바에는, 이게 나으니까. 게다가 너나 예은이나 아이돌보단 아티스트적인 면모가 강해서, 유사 연애 감정을 느끼는 팬들도 별로 없고.”
“예은이도요?”
노래도 노래지만, 외모가 이 세상 외모가 아닌 예은이인데.
그런 그녀를 보고 유사 연애 감정을 안 느낀다고?
“솔직히, 아직은 있긴 한데. 앞으로의 방향성은 그래. 예은이도 그걸 원하고. 그리고 연애 사실을 공개하면 그런 방향성이 좀 더 확고해지겠지.”
“아...”
“그리고 너도 그렇고, 예은이도 그렇고. 바르고 선한 이미지가 많아서 오히려 좋아할 사람이 더 많을지도 몰라.”
김세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편하긴 하겠지...’
그동안 큰 제약이 있던 이예은과의 만남.
한 번 크게 데일 뻔한 이후로, 더욱더 조심스럽게 만났고 그 흔하디흔한, 밥, 커피, 영화관 데이트도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예은이랑 이야기해보겠습니다.”
“그래. 잘 생각해봐. 뭐 공개 연애가 꼭 단점만 있는 건 아니니까.”
***
이해진과 하동준을 만나 회포를 푼 다음 날.
제2의 부모님을 만났고, 이제는 진짜 부모님을 만나러 갈 시간.
다만, 그동안 홀로 갔던 그 길이 오늘은 제법 북적거린다.
“어떡해. 오빠...”
뒷좌석에 앉은 이예은의 떨리는 목소리와 그런 그녀를 보며 핸들을 잡은 이주성이 웃음을 터트린다.
“난 모르겠다.”
“괜찮아. 예은아. 편하게 생각해.”
“어떻게 편하게 생각해요... 아, 청심환 챙겨 왔나?”
당장 울음을 터트릴 거 같은 목소리와 함께 가방을 뒤적거리는 그녀.
베이지색 롱 원피스를 입은 단아한 외적인 모습과 달리 행동은 허둥지둥.
그런 귀여운 그녀의 행동을 보던 김세준이 고개를 앞으로 돌린다.
“어. 저기. 저기서 좌회전해서 들어가면 돼.”
“예.”
이주성과 이예은.
자신과 제일 가까운 두 사람.
이주성이야 진작에 부모님도 알고 있던 최측근이고, 이예은과의 연애 사실은 몇 달 전, 부모님에게 넌지시 알렸다.
그리고 이번에 한국으로 들어온다고 하자, 부모님이 꺼낸 말.
이주성과 이예은도 함께 내려오면 좋겠다는 권유에 김세준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주성이야 부모님에게 한 번쯤 소개해주고 싶은 진국인 동생이.
그리고 이예은은 부모님에게 자랑하고 싶게 만드는 여자친구였으니까.
“으아...”
뒷좌석에 앉은 이예은의 앓는 소리와 동시에 도착한 집.
이예은이 재빨리 거울을 꺼내 머리를 가다듬고, 연하게 한 화장을 확인했다.
이주성은 트렁크에 실은 선물용 과일 상자를 꺼냈다.
“어서 와요!”
“반가워요!”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어머님. 아버님.”
‘내가 올 땐 집에서 꼼짝없이 있으시더니.’
대문까지 마중 나온 부모님을 보며 김세준이 허탈한 웃음을 터트린다.
“아이고. 뭘 이런 걸 다 사 왔어요.”
“아닙니다.”
“아이고, 예은 씨. 먼 길 오느라 고생했어요. 내가 진짜 팬입니다.”
“감사합니다. 아버님...”
“들어와요. 얼른 들어와. 안사람이 두 사람 환영한다고 음식을 거나하게 차렸어요. 입에 잘 맞을 거야.”
흐뭇한 미소로 두 사람을 반기며, 자신은 본 척도 하지 않고 이예은과 이주성만 챙기는 부모님.
6개월 만에 만남.
감동적이리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이렇게 푸대접을 받을지도 몰랐는데.
“저도 왔어요.”
“그래. 잘 왔다. 넌 인마. 손님이 이런 걸 들고 있으면 네가 들고 와야지.”
괜히 말 꺼냈다가 핀잔만 들었다.
김창용과 박진숙의 환대와 함께 집 안으로 들어섰고, 이예은이 바로 보이는 사진을 보며 작은 미소를 머금었다.
‘귀엽네...’
조막만 한 손으로 가야금을 앞에 두고 찍은 어린 김세준의 사진.
그리고 그 옆에 걸린, 청소년의 김세준과 성인 김세준의 사진들.
그 모든 사진에 김세준과 함께 찍힌 유일한 물건 가야금.
그의 인생에 왜 가야금을 빼놓을 수 없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사진을 구경한 뒤, 손을 씻고 부엌으로 향하자 그들을 반기는 진수성찬.
“와...”
이예은이 진심 어린 탄식을 뱉었고, 이주성의 눈에도 감탄이 맺혔다.
“두 사람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네요.”
“아니에요. 어머님. 진짜 맛있겠는데요?”
이주성의 넉살에 박진숙이 입가를 가리며 웃었고, 이내 시작된 식사.
반찬 하나를 집어 든 이주성과 이예은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랬다.
“진짜 맛있어요.”
“고마워요. 많이 먹어요. 부족하지 않게 했으니까.”
잘 먹는 두 사람을 흐뭇하게 바라본 김창용이 이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사실, 세준이한테 두 사람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세준이가 많이 의지하고 많이 기대는 사람이라고.”
고기를 먹던 김세준이 부끄러워 고개를 푹 숙인다.
“부모 된 도리로서, 자식이 신세를 지는 분들한테 밥이라도 한 끼 대접하고 싶어서 초대했어요. 너무 먼 길 불러서 미안해요. 우리가 직접 갔어야 했는데.”
“아, 아닙니다. 아버님. 당연히 저희가 와야죠. 그리고 세준이 형이 저희에게 신세 지는 거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저희가 받으면 받았죠.”
“네. 맞아요. 저희가 더 많은 신세를 졌는데요.”
이주성의 말을 이예은이 거든다.
부모님 앞이라고 내뱉는 말이 아닌 진심 어린 말.
그 진심을 알아차린 걸까.
박진숙과 김창용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맺어졌다.
“그래요. 어찌 됐든 오늘 와줘서 고마워요.”
그리고 이어진 식사.
이예은에게 불편하지 않다고 말하면 거짓말.
하지만 김창용과 박진숙의 배려 넘치는 모습에 정말 오랜만에 가정의 포근함을 느꼈다.
왜 김세준이 배려가 넘치고, 선한 사람인지 여실히 느끼게 해주는 두 사람.
저런 모습을 보고 자랐으니, 그럴 수밖에.
비록 오늘 초면이고, 본 지 세 시간도 안 됐지만.
그 짧은 시간에 느껴지는 어른의 품격.
“예은 씨. 있다가 밥 먹고 사인 좀 부탁할게요.”
“예. 아버님.”
눈을 찡긋거리며 내뱉는 김창용의 이예은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지 않는 작은 유머까지.
화목한 가정.
흔히 사람들이 꿈꾸는 가정이 눈앞에 있었다.
그런 김세준의 가족을 보며 이예은이 피식 웃음을 짓는다.
김세준이 어제 넌지시 이야기해준 공개 연애.
만약 그와 헤어지더라도 자신의 인생에서 그를 지울 수 없다는 뜻.
헤어질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사람의 감정이라는 게 얄궂을 만큼 순식간에 돌변하기도 하니까.
그래도 지금 느껴지는 감정은, 그와의 헤어짐이 자신의 인생에 오점은 되지 않으리란 확신.
“오빠.”
“응?”
이예은이 김세준을 불렀고, 김세준이 밥을 오물거리다가 고개를 돌렸다.
“우리. 공개해요. 연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