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
컴백홈(2)
인천국제공항을 떠나 곧바로 집으로 향한 김세준.
“고생하셨습니다. 형님. 그럼 푹 쉬세요.”
“고마워. 너도 푹 쉬고. 아, 3일 뒤에 알지?”
“네.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래. 그때 보자. 조심히 들어가.”
이주성의 대답에 만족스러운 미소와 함께 김세준이 집으로 들어갔다.
“후우. 얼마 만에 집이야?”
집으로 들어오자 자신을 반기는 익숙한 향기.
6개월이란 시간은 집안 곳곳에 새겨진 그 향기가 빠지기엔 부족한 시간이었을까.
라벤더 향의 방향제가 현관에서부터 은은하게 풍긴다.
그리고 회사에서 관리해준 탓인지, 사람 손길이 닿은 듯한 내부가 눈에 띈다.
깔끔하게 정리된 신발장부터,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한 거실 바닥과 가구들.
자신이 떠나기 전, 그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며 포근하고 편안한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집이 좋긴 좋아.”
직업이 직업인지라, 워낙 바쁘게 돌아다니는 그지만, 태생은 집돌이.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씻겠다고 한 다짐이 무색하게 오자마자 캐리어를 내팽개치고 소파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이거지.”
등에서 느껴지는 푹신한 촉감에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5성급 호텔에서 6개월을 머물렀어도 느끼지 못한 편안함.
자신의 등과 한 몸이라도 된 듯 푹신하게 받쳐주는 이 느낌.
방금까지만 해도 피로감을 느끼지 않았는데.
거짓말처럼 집에 도착하자 몸과 정신이 노곤해지고 몽롱해진다.
점점 무거워지는 눈꺼풀.
그 눈꺼풀은 김세준이 거부하지 않고 온전히 받아들였다.
내일 있을 일정 따위를 걱정할 이유가 없는, 정말 오랜만에 취하는 숙면이었다.
“으음...”
김세준이 눈을 뜬 건 해가 지고 어둑어둑해진 밤.
눈을 비비고 소파에서 일어난 김세준이 멍하니 주변을 둘러본다.
“응?”
그리고 잠들기 전과는 달라진 주변 풍경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팽개친 캐리어가 구석에 고이 놔두고, 자신의 몸을 덮고 있는 이불.
그리고 부엌에 켜진 불빛과 사람의 인기척. 허기진 배를 자극하는 고소한 냄새까지.
‘꿈을 꾸는 건가?’
아직도 잠에 취해 멍한 정신을 깨우기 위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이불을 치우고 발걸음을 옮겨 부엌으로 향하자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한 여인의 뒷모습이 보인다.
앞치마를 입고, 머리를 질끈 묶은 뒷모습.
뒷모습이지만 그녀의 정체를 단번에 알아챈 김세준이 놀란 목소리로 외쳤다.
“예은아?”
“어? 오빠. 일찍 일어났네요. 준비 다 되면 깨우려고 했는데.”
김세준의 외침에 이예은이 몸을 돌려 싱그러운 웃음을 지었다.
반년 만에 만나는 여자친구.
정신이 확 들고, 이내 그가 그녀에게 달려가 와락 끌어안았다.
“오빠! 불! 불! 불 앞에서 이러면...”
김세준의 포옹에 이예은이 놀라 외쳤지만, 자신을 꼭 끌어안는 그를 이내 아무런 말 없이 끌어안았다.
“보고 싶었어요. 오빠.”
김세준의 어깨에 기대어 중얼거리는 그녀였고, 김세준도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반년 동안 보고 싶어 미치는 줄 알았다.
***
“근데, 어떻게 된 거야? 우리 내일 만나기로 했잖아.”
오랜 포옹을 마치고, 식탁 앞에 앉은 김세준이 찌개의 간을 보는 이예은을 향해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응. 맛있다. 음... 서프라이즈죠?”
불을 끄고, 찌개를 식탁 위 받침대에 올려놓으며 이예은이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지었다.
“몰래 찾아왔는데, 벨을 눌러도 대답이 없어서 그냥 열고 들어왔어요.”
벨 소리를 못 들을 정도로 잠들었었구나.
자신의 숙면에 놀라고 숨겨진 비밀에 또 한 번 놀란다.
“비밀번호는 어떻게 알고?”
“오빠 매니저가 제 친오빠잖아요. 집에 온 오빠랑 이야기하고, 바로 왔어요.”
아...
맞네. 주성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납득한 김세준을 향해 이예은이 민망한 웃음을 지었다.
“차린 건 많이 없지만, 많이 드세요. 아, 그리고 너무 기대하진 마세요. 오빠처럼 잘하진 못해요.”
“아니야. 일부러 한식 한 거지? 고마워. 잘 먹을게.”
된장찌개와 따뜻한 밥. 그리고 김치와 다른 밑반찬들.
거창한 음식은 아니나, 오랜 타지 생활로 한식을 그리워하던 김세준에게 딱 알맞은 음식.
“맛있네.”
“입에 맞아요? 다행이다.”
국문 한 숟갈을 맛본 김세준의 칭찬에 이예은이 손뼉을 마주치며 좋아했다.
“저, 이불이랑 캐리어 정리해준 것도 예은이 네가 해준 거지? 깨우지 그랬어.”
“너무 곤히 자고 있어서 못 깨웠어요.”
배시시 웃으며 답하는 그녀.
잠든 자신을 깨우지 않고, 저녁까지 해주는 착한 여자친구.
소소한 감동과 함께 미안한 마음이 절로 들었다.
예은이라고 안 피곤하고, 안 쉬고 싶었을까.
자신이 바쁘게 달려간 그 시간 동안 그녀라고 놀고 있던 게 아니다.
자신이 미국으로 떠난 시기와 비슷하게 일본 활동을 시작했고,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바쁘게 활동했다.
그 결과 일본에서 큰 성공을 거두며 얼마 전에 첫 일본 콘서트까지 성황리에 끝마쳤고, 고작 이틀 전에 휴식기를 가진 그녀다.
아직 채 피로가 다 풀리지도 않았을 터. 그런 와중에 자신을 보러 한걸음에 달려오고, 자신을 배려해주는 너무 고맙고 이쁜 마음.
그 마음에 감동해 은은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김세준.
“오빠? 왜 그렇게 느끼하게 봐요?”
그녀의 장난기 가득한 말에 순간 흠칫하곤, 헛기침하며 고개를 돌린다.
“응? 아. 아니야...”
“장난이에요. 잘생겼어요.”
김세준의 입가에 묻은 밥풀을 떼어주며 이예은이 말하자, 그의 얼굴이 붉어졌다.
“왜 또 얼굴은 빨개져요. 아, 맞다. 오빠. 진짜 축하해요. 얼굴 보고 다시 말해주고 싶었어요.”
미국에서의 대성공. 두 개의 음반이 연달아 대박을 낸 김세준.
이미 영상통화로 진심 어린 축하를 해준 그녀가 다시 한번 진심으로 축하를 건넸다.
월드 스타.
그 이름이 이제 전혀 어색하지 않은 사람.
부럽고 동시에 자랑스럽다.
“예은이 너도 축하해. 일본에서 인기 엄청 많다며?”
“아니에요. 이제 막 이름 조금 알려진 건데...”
그녀의 칭찬에 질세라 김세준도 흐뭇한 미소로 그녀를 바라본다.
자신의 활약 덕분에 국내에선 묻힌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그녀가 일본에서 보여준 성과도 절대 가볍지 않다.
아마 자신이 없었으면 올해 연예계는 그녀의 이야기로 뜨거웠을 정도로.
잠깐이지만 일본 음원 차트 1위도 했으며, 각종 방송에 출연해 얼굴을 널리 알렸다.
광고도 찍으며 길거리 한복판에 얼굴이 걸리기도 했으며, 무엇보다 한국에서도 열어본 적 없는 단독콘서트를 작은 규모지만 일본에서 먼저 열 정도였으니까.
반년 만에 이룬 성과라곤 믿기 힘들 정도.
덕분에 이해진과 하동준의 입꼬리가 귀 끝까지 걸렸으며, 이주성도 미국 내내 흐뭇한 미소로 핸드폰을 보던 날이 많았다.
“첫 콘서트 꼭 가고 싶었는데 아쉽네... 첫 콘서트 한 소감은 어때?”
“와... 오빠. 저 그때 다시 청심환 먹었어요. 심장이 다시 쿵쾅거리면서 미치는 줄 알았어요. 막 무대에 올라가는데...”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자 상기된 얼굴로 장황하게 말을 뱉는 그녀.
그녀의 기분을 누구보다 잘 아는 김세준이 흐뭇한 표정으로 장황하게 내뱉는 그녀의 말을 경청한다.
첫 콘서트의 감동과 떨림은 아마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하겠지.
“1500명이긴 했지만, 진짜 좋았어요. 아, 오빤. 이제 올해는 어떻게 한 대요? 다시 미국으로 가요?”
자신의 추억담을 내뱉은 뒤, 이예은이 김세준을 넌지시 바라본다.
아마 다시 미국으로 가겠지.
이 짧고 꿈 같은 시간이 끝나면 언제 또 볼 수 있을까.
그나마 다행인 건 이제 곧 연말이라, 각종 시상식이 있어 거기서라도 볼 수 있다는 점.
“아마, 미국으로 가서 연말 전까진 그냥 소소하게 활동할 거 같은데? 내년에 큰 프로젝트 하나가 있어서. 그거 준비도 하고.”
“프로젝트요... 아! 맞다! 오빠 월드 투어!”
새까맣게 까먹고 있었다.
자신의 남자친구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응. 그거 준비도 하고, 그리고... 연말에 시상식 공연 준비도 하고 그러겠지.”
작년에 에드 케인의 무대를 도와주는 조연으로 참여했던 시상식 무대.
아직 확정은 아니지만, 올해에도 참여하는 건 거의 기정사실이었다.
“오빠. 솔직하게 말해줘요. 상 받을 거 같아요?”
그리고 이예은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넌지시 묻는다.
아직 논하기엔 이르긴 하지만, 이예은은 알고 있다.
그가 분명 올해 연말에 있을 거대한 행사를 의식하고 있으리라는 걸.
올 한 해 가장 뛰어난 성과를 거둔 가수.
그런 성적을 거둔 만큼 의식이 되고, 기대감이 생기겠지.
실제로 국내 언론도 그의 수상 가능성을 두고 벌써 기사를 쓰기 시작할 정도였다.
작년에 그가 참석했던 그래미 어워즈.
단순히 조연으로 참가했던 그가, 이번엔 과연 주인공이 될 수 있을지에 대한 설레발을 내비치면서.
그녀의 물음에 김세준이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응. 난 자신 있어.”
여자친구 앞이라고 내뱉는 흔한 허세가 아니다.
올해 자신보다 더 많은 감동을 선사해준 가수는 없다고 자부할 수 있다.
만약 자신이 수상하지 못한다면 그건 음악적인 문제가 아니리라.
“근데 아마 앨범상은 못 받겠지.”
“응? 왜요?”
“난 올해 EP 앨범 냈잖아. 앨범상은 EP 앨범은 받기 힘들 거야.”
“아...”
김세준의 아쉬움 가득한 말투에 이예은도 고개를 끄덕인다.
올해의 앨범상.
그래미 어워즈에서 가장 권위 있는 부문이자, 본상 4부문 중에 가장 이목이 쏠리는 상.
그만큼 많은 논란이 되기도 하지만, 그래미 어워즈에 주인공은 이 상의 수상자라고 말할 수 있다.
‘아쉽네...’
그 상을 떠올리며 김세준이 씁쓸한 미소를 짓는다.
올 한해. 가장 뛰어난 활약을 펼친 그지만 받을 가능성이 가장 희박한 상.
2000년대에 들어서, 올해의 앨범상을 받은 가수들의 공통점.
자신처럼 미니앨범이 아닌 정규앨범을 발매한 가수들이었다.
아쉽지만, 이해 가는 대목.
올해의 앨범상인데 EP 앨범에 주는 건 영 그림이 안 살긴 하지.
게다가 다른 본상들은 수상 가능성이 크고, 그래미 어워즈는 노미네이트만 되도 영광인 시상식이 아닌가.
욕심을 가라앉히고 마지막 한 숟갈을 뜨며 밥 한 공기를 깔끔하게 비웠다.
“진짜 잘 먹었어. 설거지는 내가 할게. 쉬고 있어. 예은아.”
“네. 잘 먹었습니다.”
김세준이 설거짓거리를 들고 싱크대로 향했고, 이예은은 식탁에 앉아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왜 거기서 그러고 있어?”
등 뒤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김세준이 고개를 돌려 물었고, 이예은이 작은 미소를 짓는다.
“그냥 좋아서요.”
싱거운 대답.
피식 웃으며 김세준이 이내 빠르게 설거지를 마무리했다.
늦은 밤이다.
파파라치가 걱정되긴 하지만, 그녀를 홀로 집으로 보낼 순 없는 일.
고무장갑을 벗으며 김세준이 조심스럽게 운을 떼었다.
“예은아. 데려다줄게.”
느릿느릿한 발걸음으로 차 키를 챙기러 가는 김세준.
힐끔 그녀의 눈치를 보는 모습에 이예은이 엉큼한 웃음을 터트렸다.
“진짜로요?”
다리를 꼬고, 블라우스 상의 단추 하나를 풀며 도발하는 이예은.
김세준이 그런 그녀의 모습에 신음을 삼키며 달려들었다.
6개월 만의 만난 연인.
고작 저녁 한 끼로, 두 사람 그리움이 해소될 리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