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야금 뜯는 천제가수-127화 (127/148)

#127

소외된 자의 아픔(11)

“오셨어요?”

“네. 잘 잤어요? 주성 씨도 반가워요.”

위너 브라더스와 최종 미팅이 있는 날.

오전에 그의 호텔로 찾아온 정수연이 살가운 목소리로 두 사람을 반겼다.

진작에 출발 준비를 마치고 정수연이 오길 기다리고 있던 두 사람.

원래에는 위너 브라더스가 마련한 장소에서 만나기로 했지만, 할 말이 있다며 이른 시간부터 찾아온 그녀였다.

“하실 말씀이 있다고요?”

“네. 세준 씨 향후 활동계획 보고랄까? 아, 고마워요.”

이주성이 건네준 커피를 받아들며 미소짓는 그녀.

괜스레 기분 좋아 보이는 그녀였고, 그 모습과 함께 그녀가 내뱉은 말이 깊은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보고라뇨. 제가 상관도 아닌데.”

“한 회사의 대표 입장에선 돈 벌어다 주면 상관이죠.”

역시나. 오늘 그녀의 기분은 최고조다.

“시간이 없으니 빨리 설명할게요. 일단 핵심은. 내년 세준 씨의 활동을 하나로 정의합니다. 월드 투어. 내년엔 월드 투어를 진행해보죠.”

“...!”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호로록 마시던 김세준이 그녀의 말에 입천장을 덴 것처럼 화들짝 놀란다.

아침부터 훅 들어오는 몸쪽 꽉 찬 직구.

커피를 마신 것보다 정신이 확 깬다.

“월드 투어라...”

자신이 봐도 불가능한 영역은 아니다.

미튜브 구독자, 뮤직비디오 조회 수, 음원 차트 순위.

모든 지표가 월드 투어를 무리 없이 소화해낼 만한 가수라는 걸 보여준다.

“세준 씨 공연 많이 좋아하죠? 무대체질이기도 하고. 근데 그동안 이름값에 비하면 공연 횟수가 너무 적어요.”

구구절절 옳은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급격하게 성장한 자신. 그런 빠른 성장은 자신이 소소한 공연을 펼칠 시간을 주지 않았다.

그러기에 처음으로 이름을 걸고 펼쳤던 단독콘서트조차 화려하기 짝이 없지 않았나.

“내년엔 그 아쉬움을 다 털어 내보죠. 정확한 일정과 장소는 미정이지만, 작은 규모로 펼칠 생각은 없어요.”

“작은 규모가 아니라면, 어느 정도를 생각하고 계신 겁니까?”

기대가 되는 그녀의 말. 김세준이 앞으로 고개를 숙이며 기대감을 내비쳤고, 정수연이 의미심장하게 웃는다.

“일단 모든 공연장은 스타디움으로 예약할 생각이에요. 예를 들어, 한국은 잠실올림픽주경기장, 그리고 영국은 웸블리.”

그녀의 말에 김세준이 턱을 매만지며 작은 감탄을 흘렸다.

한국에서 최대 규모. 그리고 유럽 공연장의 성지라고 봐도 무방한 스타디움.

1년 전까지만 해도, 자신에겐 아직 일렀던 장소.

하지만 지금은 자신의 이름값이 저 명소들의 이름에 부족하지 않다고 느꼈다.

그리고 동시에 머릿속으로 재생되는 장면.

수만 명 앞에서 공연을 펼치는 자신의 모습.

몇 번 경험해본 일이지만, 아직도 생각만 하면 가슴이 설레고 두근거린다.

게다가 이번엔, 한국이 아닌 세계.

공연 때마다 각기 다른 인종과 국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자신에게 열광하는 모습.

상상만 해도 희열로 몸이 부르르 떨린다.

“좋네요...”

마른 미소와 함께 답한 김세준이었고, 정수연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물론 월드 투어가 대규모 프로젝트라 아직 명확히 정해진 건 없어요. 어떻게 진행될지 아직 몰라요.”

“네. 하지만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그동안 함께 해온 정수연의 능력을 고려한다면 기대감을 가져도 괜찮으리라.

단순한 한 마디에 담긴 그의 신뢰감.

그 신뢰감이 기분 좋은지 정수연이 살짝 웃음을 터트린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대표님.”

“네. 저도 잘 부탁해요. 세준 씨.”

세계 최고라는 같은 꿈을 가진 동업자.

어느새 김세준과 정수연에겐 깊은 유대감이 형성되어 있었다.

***

“형님. 고생하셨습니다. 그 혹시... 스티븐 어땠습니까?”

지하주차장으로 내려온 김세준을 보며 이주성이 발을 동동 구르며 호들갑을 떨었다.

‘Going Home’을 소재로 영화를 제작하려는 위너 브라더스와 최종 미팅이 있고 내려온 그.

그 미팅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온 김세준을 향해 이주성이 부러운 눈빛을 한가득 보냈다.

상업영화는 물론, 소규모 극장까지 찾아가 독립영화도 챙겨보는 영화광.

그런 그에게 스티븐이란 전설적인 영화감독은 그의 마음속에서 김세준과 함께 가장 존경하는 인물 1위를 다투는 사람.

김세준을 회의실까지 보필하며 먼발치에서 얼핏 보기만 했을 뿐인데도 가슴이 두근거렸는데.

가까이에서 못 본 게 천추의 한이다.

일만 아니라면 당장 달려가 사인이라도 받고 싶었지만, 자신에게 허락된 선은 딱 거기까지.

회의실까지 들어가지도 못하고 창문을 열린 문틈 사이로 얼핏 본 게 자신에게 허락된 전부였다.

“확실히 포스가 있더라. 거장들은 다르긴 다른가 봐.”

그답지 않게 호들갑을 떠는 이주성을 보며 김세준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자신의 호들갑을 깨달은 이주성이 머리를 긁적이며 부끄러운 기색을 표했다.

산만 한 덩치에 맞지 않은 귀여운 모습.

김세준이 가방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그에게 건넸다.

“네가 그렇게 아쉬워하는 건 처음 보더라.”

“이건 뭡니까?”

그가 건네준 종이를 받은 이주성의 눈동자가 커졌다.

A4 용지의 적힌 유려한 싸인.

그리고 싸인 밑에 적힌 자신에게 좋아해 줘서 감사하다는 스티븐의 말.

“형님...”

“싸인 밖에 못 받아줘서 미안해. 다음엔 같이 사진도 찍어달라고 부탁해볼게.”

“어떻게 알고...”

“그렇게 설레하는 모습 처음 봤다니까? 그리고 너랑 나랑 알고 지낸 게 몇 년인데. 네가 영화광이란 걸 내가 아직도 모를까 봐? 대충 짐작하고 있었지.”

대수롭지 않게 내뱉는 그였지만, 이주성이 받은 감동은 상상 이상이었다.

오랫동안 엎치락뒤치락했던 순위가 확고해지는 순간.

그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 1순위가 김세준으로 확정되었다.

“아. 됐어. 징그럽게 뭘 그렇게 쳐다봐. 자꾸. 얼른 가자. 늦겠다.”

부담스럽게 쳐다보는 이주성을 향해 김세준이 손을 휘저었다.

곰 같은 덩치의 사내가 촉촉한 눈망울로 쳐다보는 모습.

그가 좋아하니 감동적이긴 하지만...

계속 보기엔 좀 괴롭다.

“예. 알겠습니다!”

큰 목소리로 대답한 이주성이 문을 열어준 뒤 운전석으로 향했고, 잠시 후 출발했다.

뒷좌석에 앉은 김세준이 핸드폰을 꺼내 미튜브에 접속했다.

“역시...”

미튜브에 접속해 확인한 동영상.

그 동영상에 달린 댓글과 좋아요, 예상대로 사람들의 반응이 폭발적이다.

칭찬과 놀람이 묻어나오는 반응을 보니 미소가 저절로 지어졌다.

자신과 매들린이 출연한 카풀노래방 클립 영상.

저번 영상처럼 진한 감동을 주는 공연은 아니지만, 어린 나이에 아픔을 가진 매들린이란 어린 소녀의 노래.

신이 내린 재능을 가진 그녀의 노래는 단숨에 사람들의 마음을 홀렸다.

“다들 군침을 흘리고 있겠네.”

재능이 충만한 어린 소녀. 외모도 아직은 앳된 티가 가득하지만, 눈썰미 좋은 사람들은 진작 알아봤겠지.

저 외모가 시간이 조금 흐른다면 남성들의 마음을 뒤흔들 빼어난 미모가 될 거라는 걸.

아마 지금쯤, 매니지먼트에선 앞다투어 그녀에게 캐스팅 제의를 보낼 게 확실하다.

마음 같아선 타임 멜로디를 만든 회사를 선택해서 먼 미래의 꽃길을 그녀가 걷길 원하지만.

“그건 매들린의 자유지.”

또 모른다. 그녀가 지금 다른 선택을 해서, 타임 멜로디 때보다 더 큰 성공을 거둘지도.

고개를 끄덕이며, 김세준이 미튜브에 다른 단어를 검색한다.

검색하고 난 뒤, 우후죽순 떠오르는 동영상.

그 동영상을 보자 입가에 진한 미소가 새겨졌다.

김세준이 검색한 단어는 ‘Gayageum’.

몇 년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던 풍경이 미튜브에 떠올랐다.

그전엔, 동양인들의 연주로 가득했던 미튜브. 하지만 지금은 각기 다른 피부색과 국적을 가진 연주자들의 모습이 보인다.

어설픈 연주로, 자신들의 가야금 연주를 기록하는 일반인들의 모습.

대중화를 꿈꿨던 가야금 명인으로서 가슴이 몽클해지는 장면.

가슴 먹먹한 감동.

그 감동과 함께 김세준이 다음 미튜브 업로드 영상을 떠올렸다.

다음에 올라갈 영상은 자신을 보고 가야금을 시작한 저들을 위한 무료 강습.

가야금 명인이 자신이 하나부터 열까지 쉽게 알려주는 가야금 연주법.

“흐음...”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김세준이 기분 좋은 고민에 빠진다.

어떻게 저들에게 최대한 쉽고, 간편하게 알려줄지.

후학을 양성하는 선배의 마음.

오랜만에 느껴보는 들뜬 설렘이었다.

***

자신이 묶는 호텔 근처 카페.

그곳에서 김세준은 오랜만에 만난 반가운 얼굴을 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먼저 와 있던 그를 향해 두 사람도 반가운 발걸음으로 빠르게 다가온다.

“형! 이게 얼마 만이에요!”

“수호야! 세현아!”

B.ONE의 맴버인 수호와 세현. 콘서트를 위해 미국으로 온 그들이었고, 바쁜 와중에서도 서로 시간을 맞춰 같이 점심을 먹기로 한 세 사람이었다.

“잘 지냈어?”

“그럼요! 뭐, 형은 물어보지 않아도 엄청 잘 지내겠죠?”

수호가 호들갑을 떨며 김세준을 부러움과 존경심이 섞인 표정으로 쳐다봤다.

세계에 울리는 그의 노래.

가수로서 부럽지 않다면 거짓말이고, 한국인으로서 존경심이 안 든다면 그것도 거짓말이리라.

거짓말 없이 지금 한국은 김세준에 관한 이야기로 한없이 뜨겁다.

가야금이란 전통 악기를 세상에 널리 알리게 한 장본인.

빌보드 차트 1위. 세계 각종 나라 음원 차트 1위 등등

들려오는 소식마다, 가슴 뜨겁게 만드는 이야기일 뿐이다.

그리고 그런 전설을 써 내려가면서도 잡음 하나 들려오지 않는 구설수.

이런 가수가 사랑받지 않는 것도 이상하리라.

이제 각종 연예인과 스포츠 스타들을 넘어, 두유노클럽에 수장자리까지 차지할 정도였다.

“맞다. 콘서트 축하해.”

“감사합니다.”

김세준의 축하를 세현이 멋쩍게 받아들였다.

B.ONE의 미국 공연. 분명 큰 성과이긴 하지만 앞에 있는 가수에 비하면 빛이 바랜다.

자신들의 이번 워싱턴 공연의 관객은 3500명.

그리고 다른 미국 주요 도시들에서 행할 공연도 비슷비슷한 숫자다.

처음 미국에 왔을 때보다 훨씬 커다란 팬덤을 가지게 됐지만.

아직은 만족 못 할 숫자.

반면 눈앞에 있는 남자를 보라.

미튜브 뮤직비디오 조회 수가 10억이다. 10억.

자신들이 발매한 모든 뮤직비디오 조회 수를 합쳐도 나올까 싶은 조회 수.

그런 김세준을 보는 세현의 눈빛이 묘하게 아쉬움으로 가득 찼다.

“형. 한국은 언제 돌아가요?”

“음... 아마 연말 전엔 돌아갈 거야. 그리고 연말에 한국 시상식하고, 다시 미국 시상식에 참여할 거 같은데?”

그의 말에 수호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유명해진 건 좋지만, 나만의 작은 가수로 남아 있는 것도 좋았는데.

비록 자신이 그의 존재를 알았을 때도, 떠오르는 샛별이긴 했지만, 지금에 비하면야.

“아 그러네. 시상식이 있구나. 축하해요. 형. 뭐 안 봐도 뻔한 비디오 아니겠어요?”

수호가 얄궂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본다.

작년 한 해. 김세준이 모든 상을 휩쓸었고, 올해도 크게 달라지지 않으리라.

“됐어. 아직 모르는데.”

김세준이 너스레를 떨었고, 진동벨이 울리자 커피를 가지러 자리에서 일어났고, 잠시 후 돌아와 그들에게 커피를 나눠줬다.

김세준이 건넨 커피를 받으며 수호가 넌지시 그를 불렀다.

“형.”

“응?”

“도와주실 거죠?”

주어가 없지만 뭘 말하는지 단번에 이해한다.

이번 그들의 콘서트. 게스트로 참여해달라는 말이리라.

김세준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일정만 미리 말해줘. 시간 빼놓을 테니까.”

김세준의 답에 두 사람이 진심으로 기뻐하며 그에게 깊은 감사를 표했다.

“고마워요. 형!”

“진짜 감사합니다...”

“됐어. 우리 사이에 무슨.”

좋아하는 두 사람을 보며 김세준이 손사래를 치고 속으로 작은 웃음을 지었다.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

내년 자신의 월드 투어 첫 번째 게스트가 확정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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