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
소외된 자의 아픔(9)
매들린은 이른 아침부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자마자 자신의 핸드폰을 확인했다.
“오늘이 맞지?”
자신이 김세준에게 보낸 SNS DM(Direct Massage).
단순한 응원 문자였다. 자신이 가야금을 들고 찍은 사진과 함께.
당신의 노래가 큰 힘이 됐으며, 당신을 보고 자신도 가야금을 시작했다는 팬심으로 보낸 문자.
답장은 기대하지도 않았다. 팔로워만 수백만 명이 되는 그에게 쏟아지는 DM은 하루에도 수천, 수만 개는 될 테니까.
그냥 자신의 팬심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뿐.
그 이외에 마음은 없었다.
“기적이 일어났지...”
일주일 전, 그날은 그녀에게 3번의 기적이 찾아온 날이었다.
첫 번째는 그에게 온 답장.
‘Thank you’라는 짧은 답이지만, 보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손이 부들부들 떨리며 들고 있던 핸드폰을 침대에 떨어트렸다.
거칠게 호흡을 가다듬으면서 다시 그에게 답을 보냈다. 그냥 읽어줘서 고맙고, 당신처럼 꼭 아름답게 가야금을 연주하겠다는 답장을.
그리고 이어진 두 번째 기적.
거기서 끝날 줄 알았던 그와의 대화. 하지만 그날 새벽 내내 이어진 그와의 담화.
그가 왜 자신의 메시지를 무시하지 않고 끝까지 답해줬는지는 아직도 모른다.
팬서비스? 아니면 그의 소소한 취미?
혹은 자신을 그냥 가지고 노는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선망하던 연예인과의 대화는 한여름 밤의 꿈처럼 달콤한 시간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대화는 동이 트기 전까지 끝나지 않았다.
처음엔 사소한 안부와 그에 관한 질문투성이이었던 이야기는 어느새 그녀의 이야기로 바뀌어있었다.
학교에서 당한 왕따. 그로 인한 아픔. 그리고 김세준과 가야금이 주던 위로.
DM이지만 진심을 담아 보낸 메시지.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주며 머리를 쓰다듬듯 포근히 위로했다.
그의 위로에 진심으로 감사함을 느끼며 대화를 마무리하려 할 때.
그녀에게 마지막 기적이 찾아왔다.
일주일 후 오늘. 카풀 노래방에 게스트로 참가해줄 수 있냐는 그의 제안.
어안이 벙벙하고 믿기지 않았다. 꿈이라면 깨고 싶지 않은 너무 달콤한 꿈.
매들린이 자신의 손으로 젖살이 통통한 볼을 꼬집었고, 순간 화끈한 고통이 느껴지며 작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진...진짜야?”
혹여 그의 마음이라도 바뀔까 재빨리 답장을 보내고,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눈 후 끝난 김세준과의 DM.
친구에게 한껏 자랑할 만한 엄청난 기적이었다.
비록 자신의 이 마음을 자랑할 친구가 없긴 했지만.
그런 자신의 서글픈 현실이 전혀 슬프지 않을 정도로, 너무 커다란 행복.
그 행복을 만끽하며 지낸 일주일.
그리고 사흘 전, 카풀 노래방에서 온 스텝들이 자신의 부모님과 이야기하는 걸 엿봤다.
매들린에게 이야기를 진작 들었지만, 설마 진짜 오리라곤 반신반의하던 그녀의 부모님.
소스라치게 놀랐지만 이내 두 사람은 흔쾌히 방문을 허락했다.
딸의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누가 딸의 고통을 위로해줬는지도 잘 알고 있다.
그런 은인의 방문을 누가 감히 거절할까.
드디어 오늘. 김세준이 자신의 집에 방문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실감하며 매들린이 아래층으로 내려가며 큰 목소리로 외쳤다.
“엄마! 일어나요! 준비해야죠! 할 일이 너무 많아요!”
***
김세준이 발걸음을 향한 곳은, 주택가에 자리 잡은 한 집이었다.
평범한 미국식 주택.
풀 에드워드의 거대한 자택이 아닌, 그냥 작은 잔디밭이 있고, 주택 옆엔 차고가 있는 그런 집.
2층으로 이루어졌으며, 조금 오래된 흔적이 있으나 전체적으로 깔끔한 분위기였다.
“여기인가요?”
“네. 맞는 거 같아요.”
주소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고든의 물음에 김세준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일단 보내준 주소는 여기가 맞긴 한데...
슬쩍 방송 스텝들을 향해 눈빛을 보내니 그들도 고개를 끄덕인다.
사전에 이야기한 장소가 맞았다는 뜻.
그들의 눈빛을 읽자 다시 한번 심장이 두근거린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가볍게 문을 두들겼다.
“계십니까?”
“네! 잠시만요.”
김세준의 목소리에 안에서 활기찬 답변이 들려온다.
이내 우당탕한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집의 문이 활짝 열린다.
부모로 보이는 듯한 중년 부부. 그리고 부부 사이에서 설레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숙녀.
“꺄아아악!”
그리고 김세준의 모습을 보자마자 매들린이 환희 섞인 비명을 내질렀다.
발을 동동 구르며 어머니 뒤에 가서 자신의 그 작은 몸을 숨기며 부끄러워했고, 양 볼이 붉게 상기되어 김세준을 힐끔힐끔 쳐다봤다.
“반갑습니다. 김세준입니다.”
“크레이그 고든이에요.”
부모에게 인사를 한 김세준이 어머니 뒤에 숨은 요조숙녀에게 작은 미소를 지었다.
“매들린? 반가워.”
“반...반가워요. 매들린이에요...”
매들린이 고개를 푹 숙이곤 기어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오기 전까지만 해도 어떤 이야기를 할지 머릿속에 가득했는데. 막상 만나니 머리가 새하얘진다.
그런 매들린을 보고 피식 웃으며 김세준이 부모의 안내에 따라 집 안으로 향했다.
집 내부도 외관과 분위기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래됐지만, 잘 관리한 깔끔한 내부.
넓은 거실은 단란한 가족 특유의 포근한 분위기가 가득 담겨 있었다.
“집이 훌륭하네요.”
“어머. 고마워요.”
슬쩍 둘러본 김세준의 칭찬에 메들린의 어머니가 입을 가리며 미소지었다.
요 며칠간 자신을 괴롭히며 쥐 잡듯 자신을 닦달하던 딸의 성화.
먼지 한 톨 안 남게 깨끗이 청소한 보람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고든 또한 김세준의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거렸고, 이내 매들린이 고이 품에 안고 있는 가야금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오. 이 악기를 여기서 볼 줄은 몰랐는데요?”
“제 보물이에요.”
동경하던 연예인을 만나 긴장 가득했던 매들린이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이내 고든이 능숙하게 그녀에게 질문을 이어나갔다.
어떻게, 세준을 알게 됐고, 오늘 게스트로 참가하게 됐는지.
그렇게 고든과 매들린이 대담을 이어나가는 사이, 김세준은 그녀를 보며 작은 미소를 지었다.
매들린이 기적이라고 생각했던 일주일 전.
그날은 김세준에게도 기적 같은 날이었다.
매들린 바넷.
지금은 연약한 소녀의 모습이 다분하지만, 몇 년 후엔 그 모습이 완전히 달라진다.
훗날, 미국에 혜성처럼 등장하는 걸그룹, 타임 멜로디.
데뷔하자마자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여자 아이돌로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워나갔고, 새로운 역사를 써 내려갔다.
당시 모든 걸그룹들의 선망이자 롤모델이었던 그룹.
매들린 바넷은, 그 타임 멜로디란 그룹의 리드보컬로 주축이자 핵심이었다.
남심과 여심을 가리지 않고 홀리는 빼어난 외모. 수준급의 노래와 춤.
과장 조금 보태서 매들린 바넷이 타임 멜로디의 전부였다고 봐도 무방했던 가수.
그런 그녀를 아이돌 덕후인 김세준이 안 빠져들었다면 거짓말일 터.
그녀가 데뷔하자마자 팬으로서 깊은 사랑에 빠졌다.
한국은 레드이스, 외국은 타임 멜로디.
그의 최애였던 걸그룹들.
그런 그녀와 동명이인에게 온 DM.
우연히 본 그 메시지를 처음엔 그냥 신기하게 여겼다. 그녀와 동명이인인 사람이 한 둘이 아닐 테니까.
그런 신기한 마음에 보낸 답장. 그러다 보게 된 그녀의 사진.
비슷했다.
젖살이 통통하고, 안경으로 인해 확신할 순 없어도 그녀의 얼굴이 얼핏얼핏 보였다.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계속 보낸 답장.
그리고 알게 된 그녀의 아픔.
그때 확신했다.
자신이 아는 매들린 바넷도 똑같은 과거를 방송에서 고백했었으니까.
‘소름 돋았지.’
한때 자신이 정말 좋아했던 사람.
그 사람의 유년시절하고 메시지를 주고받는 감정은 뭐라 형용할 수 없을 만큼 기묘했다.
거기에 그녀가 자신의 팬이 된 것도, 더 나아가 가야금을 배우겠다며 가야금을 들고 있는 사진을 찍어 보낸 것도.
걸그룹의 역사를 뒤흔들, 그녀에게 자신이 큰 영향을 끼쳤다는 게 뿌듯하고 감동적이었다.
그리고 그때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한 가지 아이디어가 그녀를 게스트로 초대하는 것이었다.
회귀하기 전, 단 한 번도 실물을 본 적 없던 그녀.
그런 그녀를 유년시절이라도 보고 싶단 욕심도 있었지만.
더 큰 이유는 약간은 뒤틀린 역사.
아마 회귀하기 전, 유년시절의 그녀는 가야금이란 악기의 존재도 몰랐으리라.
고작 악기 하나를 알게 된 작은 차이. 하지만 김세준과 가야금에 있어 그 차이는 작지 않았다.
특히, 가야금이란 악기의 한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김세준에겐.
“SNS로 맺어진 인연이라. 신기하네요. 그럼, 세준 오늘의 최종 목적지는 여기서 매들린이랑 같이 노래하는 건가요?”
생각하는 사이, 어느새 끝난 두 사람의 대담.
고든의 얼굴엔 제법 흡족한 미소가 가득했다.
저번 출연했을 때하고 비교하면 소소한 방송.
하지만 특이한 둘의 만남과 그녀의 가슴 아픈 과거는 썩 괜찮은 방송 소재였다.
거기에 그때처럼 진한 감동과 충격을 전해주는 공연은 아니더라도 김세준과 일반인의 듀엣은 편안하고 부드러운 분위기가 물씬 풍길 거고, 그럭저럭 그림은 제법 이쁘게 나올 듯싶었다.
‘그래도 조금 아쉽긴 하지.’
그때 비하면 화제성이 부족하긴 하니까.
“네. 그런 거죠. 아, 매들린. 내 노래 중에 가장 좋아하는 노래가 뭐예요?”
“소외된 자의 아픔이요.”
“혹시, 연주할 줄 알아요?”
김세준의 질문에 매들린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가야금을 구매한 지 이제 고작 일주일.
현 하나 뜯는 것도 어설프기 짝이 없는데, 곡 하나를 연주할 깜냥이 될 리가 있나.
그녀의 말에 김세준이 싱긋 웃곤, 자신의 가야금을 꺼내어들었다.
“그럼 합주는 다음 기회에 하고, 오늘은 같이 노래만 부를까요?”
매들린의 얼굴이 다시 붉게 상기되고, 호흡이 가빠졌다.
“그...그래도 될까요?”
선망하던 가수하고의 듀엣.
팬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꿈꿔왔던 순간.
그 순간이 그녀에게 찾아왔고, 그건 김세준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매들린이랑 듀엣이라니...’
회귀하기 전이라면, 평생 추억하면서 살아갈 인생의 자랑거리였겠지.
모든 준비를 마친 두 사람.
두 사람이 거실 한가운데 자리를 잡고, 그를 둘러싼 채 다른 이들이 은은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김세준과 매들린.
나란히 앉아 숨을 가다듬는 두 사람의 분위기가 사뭇 잘 어울렸다.
그리고 서로의 눈빛을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두 사람.
이내 김세준이 손이 천천히 가야금을 뜯었고, 가야금의 청량한 소리가 집 안에 울려 퍼졌다.
‘오랜만에 들어도...’
고든이 그가 연주를 시작하자 자신의 팔을 문질렀다.
약 두세 달 만의 듣는 그의 라이브 연주.
긴 시간도 아닌데 또 들으니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저 악기가 참...’
가야금이란 저 악기.
다른 악기하고 다른 특유의 응어리진 듯한 감정이 있다.
비단 자신만 느끼는 게 아닌지, 다른 스텝들도 얼굴에 비슷한 감정이 서려 있었다.
그런 김세준의 독주에 소름이 돋은 것도 잠시.
이어서 매들린이 그 작은 입술을 달싹거리며 노랫말을 흥얼거렸고.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고든은 자신의 몸에 다시 큰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
이번 방송.
자신의 예상보다 훨씬 큰 반항과 화제를 불러일으키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