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야금 뜯는 천제가수-124화 (124/148)

#124

소외된 자의 아픔(8)

정수연이 위너 브라더스의 제안서를 들고 온 지 일주일 후.

김세준은 아침에 자신의 호텔 방을 나가기 전, 핸드폰을 들여다보곤 진한 웃음을 지었다.

정수연이 보내준 깔끔하게 정리된 자료.

전 세계 음악 차트에서 그의 이번 앨범이 어떤 성장을 기록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그래프와 글자들.

워드 파일로 보내준 그 자료에 적힌 여러 개의 그래프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높게 치솟고 있었다.

“한국 1위. 미국 1위. 중국 2위, 일본 4위. 프랑스 2위. 영국 1위...”

새 앨범을 발매한 지 일주일이 훌쩍 지난 지금 전 세계를 강타한 엄청난 흥행.

수많은 나라에서 높은 순위를 기록하고 있는 그의 음반.

타이틀 곡인 ‘소외된 자의 아픔’과 ‘소외된 자의 슬픔’이 사이좋게 1, 2위를 차지한 국가도 여럿 보인다.

흐뭇한 미소와 함께 정수연이 보내준 자료를 조금 더 아래로 내리자, 이번 앨범에 대한 평론가들의 글도 첨부되어 있었다.

“평론가들도 평이 좋고.”

링크된 URL을 타고 들어가니, 실소가 터져 나왔다.

김세준을 원 히트 원더라고 대차게 깠던 평론가들도 태도를 바꾸고 그를 칭찬하기 바쁘다.

‘Going Home’ 때에는 운이 좋아서, 신선해서, 동양인이라서. 각종 이유를 만들며 그의 성공을 폄하했던 사람들.

하지만 이번에도 반박할 수 없는 큰 성공을 거두자,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이 틀렸음을 순순히 인정했다.

“김세준은... 평범한 가수와 다르다. 그의 노래에 담긴 사람들의 마음을 치료하는 예술적인 감각은 대중음악의 새로운 지표를 열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사랑이란 포괄적인 감정을 다채롭게 소화하여...”

한 평론가의 글을 소리 내어 읽던 김세준이 이내 몸이 오그라드는 걸 느끼며 핸드폰을 껐다.

“오그라들게도 썼네.”

다른 평론들도 비슷비슷한 내용.

그 내용을 요약하면 그냥 대중성과 예술성을 둘 다 잡았다는 소리다.

“뻔한 주제가 아닌, 우리 사회가 외면하던 문제를 적나라하게 들어내며 사회 비판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

피식 웃음이 나온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고, 해몽 한 번 거창하다.

“사회 비판은 아니지...”

난 딱히 사회에 불만이 있지도 않은데.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김세준이 혀를 내둘렀다.

그때, 그의 핸드폰으로 온 이주성의 메시지.

출발 준비가 다 되었다는 매니저의 연락에 김세준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

김세준이 향한 곳은 뉴욕.

세계 경제, 문화, 패션의 중심지로 세계의 수도라는 이명을 가진 도시.

많은 사람이 미국의 수도라고 착각할 만큼, 큰 도시이자 UN 본부가 있는 세계 외교의 중심지.

“오...”

창밖으로 보이는 거대한 빌딩.

자유의 여신상과 함께 뉴욕을 상징하는 마천루.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의 모습이 얼핏 보이자 김세준이 작게 감탄을 토해낸다.

“형님. 곧 도착합니다.”

“응. 알겠어.”

벤을 운전하는 이주성의 말에 김세준이 매무시를 가다듬는다.

그가 뉴욕에 온 이유. 방송 촬영과 한 여성 때문이었다.

‘내가 아는 그 사람이 맞을까?’

그 여자를 떠올리자 마음이 콩닥거린다.

들뜬 김세준을 태운 자동차가 멈춘 곳은 거대한 빌딩 앞이었다.

인산인해를 이루는 사람들과 촬영용 장비로 인해 혼잡해 보이는 곳.

방송 스텝들의 분주한 발걸음과 고성이 오가고, 방송용 장비로 길거리를 가득 채운 장소.

그리고 가장 시선을 끄는 건 카풀노래방의 로고가 그려진 자동차.

그곳에 김세준이 벤에서 내려 모습을 드러내자 정신없이 움직이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동 그에게 꽂혔다.

“...”

고함을 내지르던 중년 남성도 순간 입을 다물고 무거운 짐을 옮기던 젊은 청년도 들고 있던 짐을 바닥에 내려놓고 그를 바라봤다.

순식간에 달라지는 분위기.

그 분위기를 감지한 김세준이 마른 미소를 지었다.

저번에 왔을 때하곤 전혀 다른 사람들의 시선.

약 두 달 전에 출연했던 자신.

불과 두 달 전의 일이지만, 그때하곤 전혀 달라진 자신의 위상.

그땐 막 미국에서 비상하려던 동양의 무명 가수.

지금은 전 세계가 주목하는 연예인 중의 연예인.

그 달라진 무게가 지금 사람들의 시선으로도 여실히 느껴진다.

처음 미국에 왔을 땐, 자신을 전혀 못 알아보던 일반인들도, 지금은 자신을 보며 입을 틀어막는다.

“세준! 왔어요?”

“고든. 잘 지냈어요?”

김세준이 등장하고 생긴 침묵을 깬 건, 이 쇼의 주인 크레이그 고든이었다.

푸짐한 몸을 이끌고 김세준에게 다가와 함박웃음을 짓는다.

살갑게 반기면서도, 고든이 김세준을 기묘한 시선으로 훑었다.

“아. 이렇게 빨리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네요.”

두 달.

방송으로 치면 고작 8회.

그 짧은 기간 동안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그.

그가 보통 가수가 아니라는 건, 직감했지만. 자신의 직감보다 훨씬 더 대단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섭외를 받아줘서 고마워요.”

“카풀 노래방이면 당연히 와야죠.”

이젠 자신들이 섭외를 받아줘서 고맙다고 말해야 할 정도.

그땐 그의 회사 대표가 감독에게 꽤 큰 금액을 로비하며 간신히 출연하지 않았나.

그 기억을 떠올린 고든이 혀를 내둘렀다.

이번 김세준 출연료가 그때 로비한 금액의 배 이상이었다.

“곧 있으면 준비 끝날 거예요. 안에서 잠깐 기다리고 있으면 될 거예요.”

안으로 손짓하는 고든을 향해 김세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등 뒤로 쏟아지는 선망 어린 시선.

김세준의 매니저인 이주성이 그 시선을 느끼며 작은 미소를 머금었다.

고작 매니저인 자신이지만 어깨가 들썩인다. 그의 매니저라는 게 한없이 자랑스러웠다.

***

“카풀 노래방, 오늘의 게스트는 얼마 전에 봤던 분이죠? 요즘 미국은 물론 전 세계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주인공입니다! 어서 와요. 세준!”

“반가워요. 고든.”

고든의 오프닝 멘트와 함께 김세준이 차에 탑승했다.

저번 방송과 달리 처음부터 같이 차를 타고 출발한다.

“세준. 먼저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어요. 그때 방송. 알죠? 얼마나 대박 났는지.”

“제가 고맙죠. 방송에 나온 이후로 제 노래도 큰 인기를 끌었으니까요.”

고든과 김세준이 서로를 바라보며 흡족한 미소를 짓는다.

서로에게 윈윈이 된 그때의 방송.

카풀 노래방은 역대 최고 시청률과 미튜브 클립이 역대 최고 조회 수를 기록했고, 개념 있는 방송이란 칭송을 받았다.

김세준은 부정할 수 없이, 카풀 노래방 이후로 본격적으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으니까.

카풀 노래방이 그를 다시 섭외한 이유도, 그때의 좋은 기억이 아직 선명하기 때문이리라.

“아 그리고 음반 발매 축하드려요. 엄청난 인기죠? 뮤직비디오 조회 수가 벌써 팔천만을 넘겼다고 들었습니다.”

팔천만. 70억을 넘기는 누적 조회 수에 비하면 아직 미미한 숫자.

하지만 발매한 지 고작 2주밖에 안 된 시기를 떠올리면 엄청난 숫자.

게다가 그가 이번에 발매한 뮤직비디오는 2개.

각각의 조회 수를 합치면 벌써 1억을 훌쩍 넘겨 2억을 바라보는 숫자다.

“네. 많이들 봐주셔서 너무 감사하죠.”

“그럼 첫 노래는 그 화제의 노래로 들어볼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이 노래가 매우 좋더라고요.”

고든이 웃음과 함께 튼 노래는 그와 장준이 부른 ‘소외된 자의 슬픔’.

타이틀 곡 중 하나로, 조지가 작곡한 ‘소외된 자의 아픔’ 못지않은 사랑을 받는 곡.

음원 차트 1위가 ‘소외된 자의 아픔’이라면, 2위는 ‘소외된 자의 슬픔’이 차지하고 있고, 어떤 음원 차트에선 오히려 ‘소외된 자의 아픔’을 재끼고 1위를 차지하기도 할 정도로 사랑받는 곡.

“오늘 방송에 왜 피쳐링 하신 남자분은 같이 안 나왔어요. 이 남자분을 보고 사랑에 빠진 여성들이 그렇게 많은데.”

노래의 인트로가 흘러나오자 고든이 장준을 언급한다.

뮤직비디오의 주인공이자, 노래 피쳐링을 맡은 장준.

김세준의 예상대로 미국에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뚜렷한 이목구비. 선이 굵은 잘생긴 미남. 큰 키에서 뿜어져 나오는 훈훈한 분위기.

그리고 귀를 녹아내릴 듯한 감미로운 미성.

순식간에 미국은 물론 세계에 그 존재감을 각인시킨 장준이었고, 무명 생활의 서러움을 청산하듯 쏟아지는 스케줄을 소화하느라 여념이 없다.

“요즘 저보다 더 바쁠걸요?”

김세준이 너스레를 떨었고, 고든이 통쾌한 웃음을 터트린다.

그리고 김세준의 노래가 자동차를 가득 채운다.

At that time, that day. (그때, 그 날의)

Your cold eyes, (차가웠던 당신의 눈동자가)

You don't know how much if it hurt. (얼마나 아팠는지 몰라요.)

“와우...”

고든이 웃음을 멈추고 진심 어린 감탄을 뱉었다.

잔잔한 멜로디. 그리고 속삭이듯 내뱉는 김세준의 목소리가 수십 번을 넘게 들었음에도 질리지 않는다.

작게 고개를 까닥이곤, 핸들을 만지작거리며 노래에 빠져드는 그.

Time goes by (세월이 흘러도)

The feelings of that time to time (그때의 감정은)

It'll be for the rest of my life. (평생 남아 있겠죠.)

누군가에게 받은 상처를 나지막이 고백하는 노래.

누군가에겐 가족일 수도 있으며, 누군가에겐 연인, 혹은 친구에게 받은 상처를 고백하며 슬퍼하는 노래.

그게 장준이 작곡한 ‘소외된 자의 슬픔’이었다.

피아노와 바이올린 첼로.

원곡은 세 악기의 삼중주였던 노래.

거기에 가야금의 음색을 추가하고 사중주로 바꾼다.

서정적이고, 느릿느릿하게 울려 퍼지는 악기들의 음색.

그렇기에 그 박자에 맞춰 천천히 음색에 빠져드는 노래.

A scar that can't be fixed even if you go to the hospital (병원에 가도 고칠 수 없는 상처)

I'll keep it forever. (평생 간직할 거예요.)

Don't be sad again. (두 번 다시 슬프지 않게)

그리고 장준의 파트.

그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서정적인 음색에 입혀지자 노래의 주인인 김세준도 소름이 돋는다.

가히 장준의 인생 곡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잘 어울리는 노래.

이런 노래를 뺐었다는 죄책감도 들지만, 자신이 아니었다면 평생 빛을 보지 못했을 노래다.

‘나중에 리메이크해서 줘야지.’

시간이 흐르면, 그에게 솔로 곡으로 줘야겠단 생각을 하며 자신의 죄책감을 덜어낸다.

“미쳤어요. 미쳤어.”

그리고 이어진 두 남자의 화음.

감미로운 두 사람의 목소리와 서정적인 곡의 분위기.

고든이 자신의 어깨를 쓸어내리며 탄성을 뱉었다.

“고마워요. 시청자들을 대신해서 인사하죠. 이런 명곡을 발매해줘서 정말 고마워요.”

고든의 인사말.

평소 과장되게 이야기하는 그지만, 지금 내뱉는 말은 진심이었다.

스스로 자신이 유쾌하고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세상에 상처 하나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까.

자신 또한 말 못 할 상처가 많은 사람.

그런 자신을 위로해주고, 대변하듯 울리는 김세준의 노래.

진심으로 고마웠다.

“좋게 들어주시니 제가 다 좋죠.”

김세준의 인사와 함께 다시 시작된 촬영.

그의 앨범 수록곡들과 발매 한지 시간이 흐른 노래들을 들으며 계속된 드라이브는 방송 시작한 지 2시간이 지나자 목적지에 도착했다.

뉴욕 롱아일랜드 주택가.

그냥 미국의 흔한 주택가인 이곳이 오늘 김세준의 목적지였다.

“자, 이곳이 오늘 세준의 목적지죠?”

한 집 앞에서 멈춰 차에서 내리고 고든이 밝은 목소리로 말했고, 김세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번 방송처럼 특별한 공연을 펼칠 계획이 아니다.

어쩌면 그때의 방송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실망할지도 모를 일.

하지만, 자신의 예상이 맞았다면 오늘 방송이 진정한 가치를 인정받는 건 오늘이 아니다.

훗날. 먼 훗날 시간이 흐르면.

오늘 방송의 진정한 가치를 사람들이 알게 되리라.

그때를 떠올리며 김세준이 작은 미소와 부픈 가슴을 가지고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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