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야금 뜯는 천제가수-120화 (120/148)

#120

소외된 자의 아픔(4)

장준이 만든 노래.

김세준이 생각했던 아픔과 슬픔이 가득 담겨 있는 곡.

‘이런 노래가 있었어?’

피아노의 느리고 서정적인 음색이 매력적인 곡.

거기에 바이올린과 첼로의 부드러운 울림이 가미된 노래.

감정에 치우치지 않은 절제된 슬픔을 표현하며 가슴을 먹먹하게 만드는 멜로디.

트랜디한 느낌 없이 오히려 올드한 감성이 담긴 곡이지만, 김세준이 생각했던 곡의 분위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왜 준이가 이런 명곡을 감춰뒀지?’

자신의 기억 속엔 없는 노래.

분명 자신의 추억이 잘못되진 않았을 거다. 모든 노래를 선명하게 기억하는 건 아니지만, 이런 선율은 들어본 적이 없다.

듣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으며, 취기가 순식간에 날아갈 정도의 명곡.

‘내가 이런 노래를 듣고 잊고 있었다고? 말이 안 되지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고, 그렇다면 답은 하나.

장준이 이 노래를 먼 훗날까지 발매하지 않고 꼭꼭 싸매고 있다는 뜻이다.

자신이 회귀한 시점은 지금부터 약 20년 전 뒤.

무려 20년이 넘는 그 오랜 시간 동안 이런 명곡을 발매하지 않고 홀로 간직하다니.

이해할 수 없는 시선을 장준을 바라보며 김세준이 마른침을 삼켰다.

자신의 새로운 앨범 컨셉에 딱 맞는 곡의 분위기.

당장 앨범에 집어넣고 싶은 강한 욕심이 생기면서도, 내심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

이런 노래를 고작 수록곡으로 사용해도 될까?

EP 앨범이 아닌, 정규 앨범에 집어넣어도 타이틀 곡을 차지할만한 퀄리티다.

굳이 자신뿐만 아니라, 어떤 가수든 듣는 순간 욕심을 낼만 한 명곡.

이런 곡을 선뜻 내준 장준에게 고마우면서도 머릿속엔 의구심이 피어올랐다.

장준은 운이 없는 가수지, 무능력한 가수가 아니다.

그 또한 이 노래가 얼마나 매력적인지 잘 알고 있을 터.

하물며 곡을 만든 원작자다. 자신 같은 이 곡을 세간에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을 텐데.

그런 곡을 20년 동안 발매하지 않았고, 이제 와선 내 앨범에 넣어준다고?

“어때?”

어느새 노래가 끝나고, 장준이 넌지시 물었다.

만면에 피어오르는 그의 미소. 딱 봐도 곡의 자신감이 가득 담겨 있는 모습.

김세준이 반쯤 남은 맥주를 입에 들이부었다.

“진짜 좋은데... 근데 이 노래, 나 줘도 괜찮아? 내가 너라면 아까울 거 같은데. 솔직히 남 주기 아까운 노래야.”

김세준의 물음에 장준의 얼굴에 씁쓸함이 번졌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어. 어차피 난 이 노래 평생 못 낼 거 같다.”

“...왜?”

즐겁고 화기애애하던 분위기가 돌변하여 순식간에 무거워지며 장준이 소주를 단숨에 들이켜곤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내가 너한테 말했지? 우리 가족 이야기.”

“응. 말했지.”

회귀하기 전엔 세간에 널리 알려진 풍문이지만, 지금은 아직 비밀로 간직되고 있는 그의 가족사.

이해진과 하동준만 알고 있던 그의 가족사를 장준은 얼마 전 김세준에게도 털어놓았다.

아버님이 현직 고위 장관.

김세준이 북한으로 공연을 갔을 때 만났던 장태석.

그가 대한민국 문화체육부 장관이자, 장준의 아버지였다.

숨겨야 할 비밀은 아니지만, 썩 좋은 관계는 아닌 듯한 부자지간.

“그 노래. 우리 가족 생각하면서 만든 노래야...”

“...!”

장준의 고백에 김세준이 아무 말 없이 맥주잔을 들었고, 이내 두 사람이 잔을 부딪쳤다.

자신의 이번 앨범 주제.

소외된 자의 아픔.

그 주제에 딱 맞는 장준의 노래.

그가 이 노래를 만들 때 어떤 생각을 했는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내가 우리 가족한테 내놓은 자식 취급당하면서 살아왔거든. 그때 그 감정 떠올리면서 작곡한 노래야. 솔직히 만들자마자 아, 이거다. 이 노래다. 그런 생각은 들었거든?”

옛 기억을 떠올리며 자조 섞인 웃음을 짓는 장준.

조지 에드워드하곤 다른 소외된 아픔을 간직한 그.

김세준이 무어라 그를 위로할 말을 떠올리다가, 마땅한 답안이 떠오르지 않아 그저 동의하는 말을 내뱉었다.

“그렇겠지.”

“하지만 차마 나 스스로 이 곡을 내지는 못하겠더라. 쪽팔리잖아. 우리 집안 콩가루라는 거 세상에 자랑할 것도 아니고.”

“...”

“근데 웃긴 게 또 뭐냐면 남 주기엔 너무 아까워.”

“이해한다.”

자신이어도 그런 심정이었으리라. 게다가 이 노래를 가장 잘 살린 가수는 장준 스스로이기도 했고.

“미국 오면서 대충 이번 네 앨범 컨셉을 듣고, 딱 이 노래가 떠올랐어. 아, 이 노래. 세준이 이번 앨범에 잘 어울리겠다. 뭐 그땐 네가 곡 때문에 골머리 아파하는 줄 몰랐으니까, 그냥 그렇게 생각하고 말았는데. 골머리 아파한다 하니까 들려준 거야. 너만 좋으면 이 노래. 네 앨범에 넣자고.”

“난 진짜 좋은데 넌 괜찮겠어? 남 주기 아깝다며? 그리고 발매하는 것도 꺼려진다며.”

김세준의 물음에 장준이 피식 웃음을 터트린다.

“내가 너한테 설마 아끼겠냐. 네가 그동안 해준 게 얼만데. 그리고 그냥 내 이름으로 이 곡을 발매하는 게 싫은 거야.”

장준의 말에 절로 지어지는 웃음.

넝쿨째 굴러온 호박 아닌가.

그것도 심지어 윤기가 반짝반짝 흐르는 거대한 호박.

‘장준 노래 중에서 가장 좋은 거 같은데.’

개인적 취향이지만, 수십 수백 번 들었던 장준의 수십 개의 곡 중 가장 자신의 취향에 맞는 노래.

그런 곡을 아무런 대가도 없이 공짜로 받았다.

게다가 장준의 상황을 생각하면 더욱 커지는 곡의 가치.

아마 그는 누군가 그에게 억 단위를 불렀어도 쉽게 곡을 내놓지 않았으리라.

“고맙다. 준아.”

“됐어. 오글거려.”

자신이 오늘 낮에 한 말을 웃으며 고스란히 되돌려주는 장준.

김세준이 장준의 말에 머쓱하게 뒤통수를 긁적였고, 이내 두 사람이 마지막 소주 한 잔을 털어 넘겼다.

***

장준과 술을 마시며 곡을 건네받은 지 이틀 후.

김세준과 장준은 조지 에드워드를 찾아갔다.

장준의 곡이 무척 마음에 들긴 하지만, 이번 앨범의 메인 프로듀서의 허락은 어쨌거나 받아야 하니까.

“아, 준아. 보고 놀라면 안 된다. 민폐니까.”

“응? 뭘 놀라? 아, 서양 얘들 발육이 남달라서? 16살인데 한 30살처럼 보이나?”

조지 에드워드의 정체를 모르는 그.

김세준이 그의 집 대문 앞에 서서 넌지시 일렀지만, 장준은 눈치채지 못하고 장난스럽게 받아쳤다.

“아니... 그런 건 아닌데, 됐어. 그냥 들어가면 알게 될 거야.”

자신의 입으로 내뱉기엔 조지에게 실례되는 거 같아 김세준이 제대로 설명하려는 걸 멈추고 앞장서 안으로 향했다.

장관 집 아들인 장준이 보기에도 입이 쩍 벌어지는 호화로운 저택.

놀란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는 장준을 데리고 정원을 지나쳐 문 앞으로 향하자 폴 에드워드가 그들을 반겼다.

“오. 이 친구가 자네 새로운 파트너인가?”

“예. 제 친구이기도 하고요.”

“장준이라고 합니다.”

“반갑네. 폴 에드워드네.”

이젠 은퇴한 거목.

폴 에드워드가 건넨 손을 보며 장준이 자신의 손을 옷에 비비더니 조심스럽게 맞잡았다.

“조지는요?”

“안에 있다네. 들어가지. 할 이야기가 많은 거 같은데.”

손짓으로 안내하는 에드워드를 따라 집으로 들어갔고, 장준이 김세준의 귓가에 놀란 목소리로 속삭였다.

“와... 포스 장난 아닌데? 진짜 70 넘은 노인 맞아?”

장준의 속삭임에 절로 새어 나오는 웃음.

자신 또한 폴 에드워드를 실제로 보고 그의 외적인 모습에 감탄을 뱉어냈으니까.

“저 사람의 손자면... 야. 안 봐도 훤히 보이는데?”

“설레발 치지 마.”

이어진 장준의 말에 김세준이 굳은 목소리로 타박했고, 장준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구시렁거렸다.

그러나 자택 안으로 들어가 거실에서 그들을 반기는 조지 에드워드를 보며 장준은 자신이 오두방정을 떨었다는 걸 순순히 인정했다.

야리야리한 체구와 얼굴엔 선글라스를 쓰고, 한 손엔 지팡이를 짚고 있는 한 소년.

“조지 에드워드예요.”

“... 장준입니다.”

장준이 자신의 경박함을 속으로 타박하며 조지가 내민 고사린 같은 손을 붙잡았다.

“아! 장준이라면 그 세준 씨 첫 정규 앨범에 참여했던 분이죠? 그 나보다 빛날 너를 피쳐링하신.”

“절 아십니까?”

조지의 말에 장준이 눈을 휘둥그레 떴고, 조지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럼요. 그 노래 정말 좋았어요. 곡 자체도 좋았지만, 두 사람의 호흡이 진짜 아름다웠어요. 피쳐링에 참여한 다른 가수들에 비해 발매한 곡이 별로 없어서 아쉬웠는데. 이렇게 뵙게 되니 좋네요.”

“좋게 들어주셨다니 감사합니다.”

장준이 진심으로 감동에 빠진 눈빛으로 조지를 바라봤다.

한국에서도 자신을 알아보는 팬이 많지 않은데, 머나먼 타국인 이곳에서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아, 그리고 이 분이 만든 곡을 수록곡으로 넣으신다고요?”

조지의 물음에 진한 감동에 빠진 장준을 대신해 김세준이 입을 열었다.

“예. 전 좋은데 조지의 판단은 어떨지 확인해야 하니까 찾아왔습니다.”

“세준이 좋으면 제 판단은 괜찮은데.”

“그래도 이번 앨범 프로듀선데 그럴 순 없죠.”

자신을 존중해주는 김세준의 말이 고마운지 조지가 큰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들어볼까요?”

조지 에드워드의 말에 다들 거실에 마련된 의자에 앉았고, 탁자 위에 장준이 자신의 핸드폰을 올려놓았다.

“틀겠습니다.”

장준의 굳은 목소리에 조지의 표정이 돌변했다.

선글라스를 끼어 제대로 얼굴 반쯤이 보이지 않았음에도 순진무구해 보였던 그의 표정이 사뭇 진지하게 변했다.

거장의 핏줄. 거기에 메인 프로듀서라는 직책.

어린 나이이지만 곡에 관한 판단을 허투루 하지 않겠다는 작은 다짐마저 엿보이는 앳된 얼굴.

하지만 이내 흘러나오는 멜로디에 그의 굳은 표정은 무너져 내렸다.

곡을 듣자마자 절로 지어지는 미소.

이미 김세준은 곡을 흡족해했기에 반대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곡이 별로라면 작곡자가 눈앞에 있더라도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런 자신의 생각을 부질없게 만드는 곡의 퀄리티.

노래가 끝나자 조지 에드워드가 감탄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너무 좋은데요?”

옆에서 같이 듣고 있던 폴 에드워드도 고개를 끄덕였다.

거장인 그가 듣기에도 나무랄 데 없는 노래.

이번 김세준의 앨범 주제와 잘 어울리는 곡의 분위기.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기다리던 장준이 조지의 답에 한시름 놓았다는 듯 크게 한숨을 내뱉었다.

“흐음... 근데 수록곡이라고요?”

“네. 타이틀 곡은 조지의 곡으로 해야죠.”

뭔가 아쉽다는 듯 신음을 삼키며 조지의 말.

김세준도 이해 가는 그의 심정.

단순히 수록곡으로 삼기엔 너무 아까운 곡이다.

욕심 같아선 자신의 다음 앨범 타이틀 곡으로 삼고 싶을 정도로.

김세준의 답변에 조지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뇨. 이 노래. 수록곡으로 삼기엔 아까워요.”

조지의 답변에 김세준과 장준의 얼굴에 놀라움이 스쳤고.

이어진 조지의 말에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노래. 타이틀로 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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