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
소외된 자의 아픔(3)
“세준아!”
“장준. 오랜만이다.”
호텔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들어온 장준과 이주성.
장준이 김세준을 보더니 함박웃음을 지으며 격하게 그를 반겼다.
김세준 또한 오랜만에 보는 친구의 얼굴에 진심으로 반가운 기색을 끼쳤다.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내던 불알친구는 아니지만, 근래 들어 가장 자신과 합이 잘 맞는 동갑내기 친구.
“이야. 월드 스타 아니야? 사인 좀 해주세요.”
“비행기 탈 만했나 보네. 장난칠 기운도 있고.”
“뭐 미국은 어렸을 때도 종종 와봐서.”
장준의 집안을 떠올린 김세준이 고개를 끄덕였고, 장준이 호텔을 천천히 둘러보며 감탄을 내뱉었다.
“월드 스타는 이런 곳에서 묶는구나?”
능글맞은 미소와 함께 내뱉은 그가 이내 푹신한 가죽 의자에 털썩 앉았고, 김세준이 피식 웃었다.
“오글거리게 왜 그래?”
“월드 스타란 말이 오글거리시나요? 월드 스타 씨?”
유치한 장준의 장난에 김세준이 이주성을 향해 손짓했다.
“주성아. 얘 내쫓아. 우리 피쳐링 다시 구한다.”
김세준의 말에 이주성이 고개를 끄덕이곤 다가가자 장준이 식겁하더니 양손을 재빨리 내저었다.
“미안해. 미안하다고. 안돼. 나 버리지 마. 이 기회가 어떤 기횐데.”
“어떤 기회는 무슨. 그냥 피쳐링인데 뭐.”
“피쳐링이 그냥 피쳐링이냐? 예전에 내가 했을 때랑은 다르지. 네가 지금 한국에 안 온 지 오래돼서 모르나 본데, 너 지금 한국에서 인기 장난 아니야.”
“한국에서만 많은 건 아닐걸?”
김세준의 약간은 거만한 말에 장준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월드 스타 맞잖아요?”
“징하다 징해. 뭐 대충 주성이한텐 들었지?”
“어. 솔직히 엄청 놀랬다. 폴 에드워드의 손자이긴 하지만 16살이 메인 프로듀서라니. 근데 또 노래는 그 나이가 만든 거 같지 않게 엄청 좋다고 하고. 뭐가 뭔지 모르겠다.”
혀를 내두르며 말하는 장준.
예전부터 알았지만, 자신의 친구는 평범함하곤 궤가 다른 사람이었다.
“타이틀곡 있다 들려줄게. 아직 가이드이긴 한데 괜히 에드워드의 손자가 아니야. 아, 그리고 준이 네가 피쳐링할 곡은 아직 안 나왔어.”
김세준이 머리를 긁적이며 난처한 말투로 내뱉었다.
가수를 불러놓고 아직 곡도 만들지 않은 자신의 자태가 썩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다.
“괜찮아. 어차피 한가했어. 사장님도 휴가 겸으로 생각하고 가라고 했고. 아... 그래서 그것 때문에 할 말이 있는데...”
“응? 뭔데?”
장준이 잠깐 고개를 숙이고 골똘히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지금 할 이야긴 아니고. 일단 그러면 당장 내가 할 일은 없지?”
“응. 앞으로 한 삼사일은?”
그의 말에 장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흡족한 미소를 띠었다.
“좋네. 그러면 나 내일은 어디 다녀온다.”
“어디?”
“네가 갔던 곳. 방송으로 보니까 직접 가보고 싶어지더라. 뭐 천천히 다른 곳도 구경도 하고.”
“아...”
한국 전쟁 기념관을 뜻하는 장준의 말.
비단 장준뿐만 아니라 방송 이후 많은 한국인이 방문한 장소.
그전에도 유명한 곳이긴 했지만, 방송 이후엔 워싱턴을 방문한 한국인들에게 필수코스로 자리 잡았다.
“오늘은 좀 쉬고. 아, 내 방은 옆방이지?”
“응. 가서 좀 쉬어. 있다가 밤에 술이나 한잔하자.”
“그래. 고생해.”
장준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이주성이 그의 캐리어를 들고 방 밖으로 나갔다.
장준이 그의 뒤를 따라 걸으며 문밖으로 나가기 직전, 몸을 돌려 김세준을 바라봤다.
“아, 맞다. 세준아.”
“응?”
“고마워.”
진심이 담긴 장준의 말 한마디.
다른 유명 가수들을 부를 수 있음에도 자신을 불러준 그의 마음이 고마워 던진 한마디에 김세준이 피식 웃으며 답했다.
“오글거려.”
***
“어때요? 괜찮죠?”
“네. 괜찮은 정도가 아닌데요?”
“마음에 드신 거 같아 다행이네요. 무명 작곡가 사용하던 걸 저희가 인수해서 새롭게 꾸며봤어요. 인테리어도 세로하고. 장비도 싹 교체하고.”
정수연의 의기양양한 목소리였고, 주변을 둘러본 김세준이 진심으로 감탄했다.
오랜만에 만난 장준과 배포를 풀고, 그가 향한 곳은 SY 엔터테인먼트가 마련해준 작업실 및 녹음실.
그리 넓은 공간은 아니나, 김세준이 이번 앨범을 준비하기엔 충분했다.
녹음에 필요한 장비 모두 최고급이었고, 깔끔하며 잘 정돈된 녹음실.
“세준 씨가 작업 시작하기 전에 완공돼서 다행이네요. 세준 씨가 잘 활용했으면 좋겠네요.”
“감사합니다, 대표님.”
정수연이 내색하진 않았으나, 그녀가 마련한 이 장소는 오로지 김세준을 위해 만들어진 곳이다.
지금 미국에 와 있는 SY 엔터테인먼트 소속 가수는 김세준 하나뿐.
게다가 만들어진 시기도 그가 미국에 도착하여 활동하기 시작할 때쯤.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자신을 위하여 정수연이 준비해 놓은 게 분명했다.
마치 새로운 장난감을 만난 아이처럼 주변을 설레는 눈빛으로 둘러보던 김세준.
그런 김세준을 정수연이 뿌듯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넌지시 입을 열었다.
“기대가 많아요. 이번 앨범은 또 얼마나 좋을지.”
“그 기대에 부응해야죠.”
“저만 기대하고 있는 거 아닌 거 알죠?”
정수연의 물음에 김세준이 슬며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 세계에 히트 친 노래인 ‘Going Home’.
발매 이후 팬덤이 급격히 늘어나며 동서를 막론하고 그의 팬이 된 수많은 사람.
아직도 그 열기가 채 식지 않으며 빌보드 차트 1위를 찍은 인기를 실감하고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 정수연이 은근슬쩍 뿌린 찌라시.
김세준이 올해 하반기에 다음 앨범을 낸다는 세간에 도는 소문.
그의 목소리와 가야금의 매력에 매료된 사람들을 흥분하게 만들기 충분했고, 큰 기대감을 가지게 했다.
“아, 맞다. 그리고 그 장준 씨 미국 왔다면서요?”
“네. 지금은 호텔에 있어요.”
“흐음....”
김세준이 앨범 피쳐링을 위해 부른 장준.
정수연이 뭔가 탐탁지 않은 듯 길게 신음을 내뱉었다.
SY 엔터테인먼트의 자랑인 B.ONE도 거절하고 부른 가수.
한국에도 알려지지 않은 보물이라는 그의 말에 나름대로 기대를 잔뜩 가지고 있었는데.
장준에게 예의가 아닌 건 알지만, 기대에 못 미치는 이름에 조금 허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장준의 실력이 자신의 예상보다 영 꽝은 아니라는 것 정도?
아니, 솔직히 실력과 외모만 보자면 제법 놀랐다.
특히 김세준과 함께 부른 노래에선 둘의 호흡이 제법 꽤 괜찮기도 했고.
김세준처럼 그를 ‘보석’이라 칭할 정도로 고평가를 하는 건 아니지만, 히트곡 하나 없는 사람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 가수이긴 했다.
‘그 이름값이 너무 아쉽지...’
월드 스타가 될지, 원 히트 원더가 될지 중요한 갈림길 사이에 선 김세준.
실패하면, 지금까지 그가 쌓아온 모든 게 수포가 될 수 있는 중요한 대목인데...
지금의 그에겐 차라리 무명의 실력자보다, 실력은 부족하지만 유명한 가수의 피쳐링이 더 도움이 될 텐데.
김세준의 선택에 쉽게 의구심이 풀리지 않는 그녀였고, 김세준이 그녀의 불안감을 읽으며 피식 웃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에휴... 그래요. 믿어야지. 전 이만 가볼게요. 세준 씨는? 이왕 온 김에 작업하고 가실래요?”
“네.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습니다.”
“알겠어요. 필요한 거 있으면 연락 줘요.”
김세준의 대답에 살짝 미소지은 정수연이 이내 문을 열고 건물 밖으로 빠져나갔고, 그녀를 문밖까지 배웅한 김세준이 다시 들어와 컴퓨터 앞, 의자에 앉았다.
“한가롭게 놀 시간이 없어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눈빛에 의욕을 불태우는 그.
이번 EP 앨범에 들어갈 곡은 총 네 곡.
그중 타이틀은 조지 에드워드가 맡았으니, 자신이 책임져야 할 노래는 세 곡이다.
“타이틀에 맞추고 싶은데...”
‘소외된 자의 아픔’.
타이틀 곡 제목임과 동시에 앨범의 제목.
이번 앨범에 들어갈 다른 수록곡들도 이와 비슷한 주제를 가진 노래들로 만들고 싶었다.
조지 에드워드가 자신의 신체적 장애 때문에 소외된 아픔을 작곡한 것처럼.
“일단, 하나는 돈이겠지.”
수록곡들을 타이틀에 맞추겠다는 생각을 하자마자 가장 먼저 떠오른 아이디어.
돈 때문에 무시 받고 소외된 자들의 아픔.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없어서 고통받는 사람들이야 숱하게 볼 수 있지 않나.
그런 그들의 아픔과 슬픔을 위로할 노래가 하나.
“또 하나는... 분위기를 조금 가벼운 곡으로 해서 외모.”
세상에 무수한 모솔들을 위로할 또 하나의 수록곡.
이번 ‘소외된 자의 아픔’은 꽤 무겁고 묵직한 작품.
하지만 모든 수록곡이 그런 분위기를 유지하는 것보단 하나쯤은 가볍고 경쾌한 분위기를 풍기는 것도 썩 괜찮아 보였다.
“문제는 마지막 하난데...”
마지막 자리를 두고 쉽게 떠오르지 않는 아이디어.
굳이 네 곡의 집착할 필요는 없지만, 세 곡은 뭔가 아쉽다.
애초, 처음엔 EP 앨범이 아닌 정규앨범을 제작하려고 했던 그.
주변 상황과 시간의 촉박함 때문에 EP 앨범으로 계획을 변경했지만, 진한 아쉬움이 남는 건 사실.
그런 와중에 곡의 개수마저 줄인다?
김세준의 욕심에 가당치도 않은 말이었고, 어떻게든 최소 네 곡을 발매할 생각인 그였다.
“뭐, 일단 하면 뭐라도 떠오르겠지.”
촉박한 시간이긴 하나, 다급 해한다고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는 그.
살짝 웃으며 애써 마음을 내려놓고, 김세준이 이내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일단 떠오른 악상부터 해결할 심산이었다.
***
작업실에서 한참을 보낸 김세준이 호텔로 돌아와 향한 곳은 자신의 방이 아닌, 옆 방이자 장준이 묶는 곳이었다.
“뭐해?”
“어. 왔냐? 그냥 쉬고 있었지.”
호텔 키로 문을 열고 들어가자, 침대에 누워 있던 장준이 벌떡 일어났다.
“주성 씨는?”
“피곤하다네. 우리 둘이 먹자.”
들고 온 비닐봉지를 흔들며 김세준이 말했고, 장준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술은?”
“소주 하고 맥주,”
“좋네. 안주는?”
“치킨.”
“너무 좋네.”
흡족한 미소와 함께 장준이 탁자 위에 있던 잡동사니를 치우며 자리를 마련했고 김세준이 그 위에 가져온 술과 음식을 차렸다.
이내 시작된 술자리는 평범한 사내놈들의 술자리였다.
농담과 웃음이 끊이지 않고, 사소한 주제를 진지하게 토론하는 흔한 청년들의 대화.
5성급 호텔에서 이루어지는 조촐한 술자리는 밤늦게 가지 이어졌고, 얼큰히 취한 두 사람.
“하아... 마지막 한 곡이 문제라고?”
“응. 뭐 떠오르는 게 없네.”
근황을 물으며 시작된 술자리. 어느새 김세준의 이번 앨범으로 주제가 바뀌었고, 장준이 김세준의 말에 자신의 머리를 쓸어넘겼다.
“야. 세준아...”
“응?”
“이거 한 번만 들어줄래?”
“응? 뭔데?”
장준이 술 취한 눈동자로 자신의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이거... 내가 작곡한 거거든? 엄청 옛날에. 그동안 어디 내놓지 못했는데, 이번 앨범 컨셉 듣고 딱 떠오른 곡이야. 예전에 내가 비슷한 생각을 하면서 만든 노래거든.”
“좋지. 들려줘.”
김세준이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으나 마음속으론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한때, 그의 큰 팬이었던 자신.
그가 발매한 모든 노래를 들었고, 자신의 기억 속엔 이번 앨범과 어울리는 그의 곡은 없었다.
‘뭐라고 거절하지?’
속으로 친구의 마음을 안 상하게 어떻게 거절할까 고민하는 도중, 이내 장준이 노래를 틀었고 김세준의 두 눈동자가 급격히 커졌다.
“...!”
처음 들어보는 노래.
장준의 모든 곡을 들어본 김세준이 생전 처음 들어보는 멜로디.
얼큰히 취한 술기운이 멜로디에 녹아내리고, 김세준이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노래에 집중했다.
그냥 듣는 순간부터, 이 노래라는 직감이 뇌리에 꽂힌다.
이번 앨범 컨셉과 비슷한 주제를 생각하며 만들었다는 장준의 말이 거짓이 아닌지 무거운 분위기의 멜로디.
‘딱 내가 생각하던 느낌.’
자신이 어렴풋하게 떠올리던 곡의 분위기가 제대로 담긴 곡.
‘하아...’
귀가를 만지작거리는 장준의 곡에 김세준이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한국에 알려지지 않는 자신만 아는 보석?
참 거만한 말이었네.
자신도 장준이 가진 진정한 가치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