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
Going Home(5)
“안녕하세요. 한국에서 온 가수인 김세준입니다.”
김세준이 그들에게 허리를 숙이며 진심이 담긴 인사를 보낸다.
김세준의 인사에 의자에 앉아 있는 노병들의 얼굴에 포근한 미소가 생겼다.
한국.
그들의 청춘과 젊음을 바친 나라.
비록 자신들의 조국은 아닐지라도, 소식을 들을 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뭉클해지는 나라.
“반갑습니다.”
제일 중앙에 앉아 있는 얼굴에 검버섯이 가득한 노인이 환한 웃음과 함께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주름이 자글자글하고, 혈색 없는 미소이지만 그 어느 웃음보다 아름다운 미소.
김세준을 바라보는 노인들의 얼굴엔 자부심과 긍지가 가득 서려 있었다.
그들이 목숨을 바친 이유가 지금 눈앞에 있었으니까.
“제가 이렇게 은인분들을 보러 올 수 있었던 것도, 다 여러분들의 숭고한 희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김세준이 그들에게 조금 가까이 다가갔다.
그들의 뒤에 있는 화강암 석벽에 새겨진 글자가 눈에 밟혔다.
FREEDOM IS NOT FREE.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
이들의 앞에서 보니 더욱 뼈에 사무치는 글자.
자신의 자유는 저들은 물론, 전쟁에서 죽은 군인들의 희생 위에 세워진 것.
글자를 먹먹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김세준이 다시 그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저희를 위해 희생하신 여러분들에게 다시 한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말과 함께 김세준이 그들에게 깊은 존경심을 표했다.
천천히 몸을 숙이며 15명의 노인에게 큰절을 올린다.
“...!”
미국에선 보기 힘든 인사법에 주변에 있던 ‘The Late Show’의 스텝들과 크레이그 고든의 눈에 놀라움이 서렸다.
그리고 카메라를 들고 있는 남성이 그런 김세준과 15명의 노인의 모습을 고스란히 담는다.
꽤나 인상 깊은 장면.
방송을 보는 시청자들에게도 큰 감동을 줄 게 분명했다.
“안녕하세요.”
그리고 김세준이 큰절을 올리자 그동안 조용히 입을 다물고 눈치를 보던 고든이 앞으로 나섰다.
명색의 이 쇼의 진행자.
분위기가 자신이 쉽게 끼어들 수 없는 고상한 분위기이지만 계속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 있을 순 없었기에.
“오늘, 저희에 초대에 응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이제 점점 잊혀 가는 늙은이들을 기억해주고 불러주신 게 오히려 더 감사할 따름이죠.”
따뜻한 미소와 함께 내뱉은 노인의 말에 순간 고든의 눈빛에 죄스러움과 당혹감이 서렸다.
미국이 군인에 대한 예우와 대접이 훌륭하다 하더라도, 전쟁이 끝난 지도 벌써 반백 년이 훌쩍 넘은 시간.
실제로 자신을 포함하여 아직도 그들의 희생을 기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
작은 뼈가 담겨 있는 그들의 말.
고든이 고개를 살짝 숙이며 속죄한다.
“예. 민주주의에서 살아가는 시민으로서 죄스럽습니다.”
“아닙니다. 그래도 이렇게 저희를 추억하셔서 이런 자리를 마련해주신 점이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다른 노인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대표로 말을 뱉은 자의 의견에 동의한다.
“살 날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어요. 이렇게 추억해주고, 기억해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울 뿐입니다.”
“한 가지 아쉬운 건, 다른 친구들도 이 모습을 봤으면 좋았을 텐데. 그게 좀 아쉽네요...”
한 노인의 말에 숙연해지는 분위기.
“늦게 찾아 뵈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김세준이 다시 한번 진심을 담아 고개를 숙였다.
실제로 자신이 더 빨리 왔더라면 이 모습을 보며 좋아할 노병들이 조금 더 있지 않았을까.
“됐어요. 내가 천국 가서 알려줄게요. 오늘 어떤 기분이었는지.”
한 노인의 농담에 다른 노인들은 웃음을 터트렸지만, 김세준과 고든을 비롯한 스텝들은 수위 높은 그들의 농에 웃음을 터트리지 못했다.
숙연해진 분위기.
고든이 일부러 밝은 목소리로 입을 열며 분위기를 환기했다.
“다들 오늘 오신 이 친구가 어떤 친구인진 알고 계시죠?”
“아까 가수라고 소개했지요.”
한 노인의 답에 고든이 싱긋 웃고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럼 저는요?”
“알죠. 영국인이자 연예인.”
“예. 그리고 오늘 저희가 진행하는 쇼가 The Late Show의 카풀 노래방이고, 오늘의 목적지가 이곳, 한국 전쟁 기념관이었습니다. 여기서 여러분들을 모시고 세준이 여러분들에게 노래를 바치고 싶다고 했죠.”
고든의 소개에 노인들의 얼굴에 기대감과 흡족함이 서린다.
그리고 고든이 그들과 이야기하는 사이, 세준이 가야금을 꺼내곤 그들 앞에 세팅하기 시작했다.
엠프와 연결하고, 조율을 확인하는 그.
그런 김세준을 향해 흥미로운 눈빛을 보내는 사람들.
오늘 단순히 한국 전쟁 기념관을 구경하러 온 관광객들도 어느새 발걸음을 멈추고 그들을 둘러싸고 있었다.
“저 악기가 뭔지 아시나요?”
고든의 물음에 노인들이 고개를 가로젓는다.
“음. 처음 보는 악기지만, 왠지 한국 전통 악기일 거 같네요.”
“예. 맞습니다. 한국 전통 악기인 가야금이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세준은 저 가야금을 누구보다 아름답게 연주하는 연주자이자 가수죠.”
고든의 소개에 김세준이 민망한 웃음을 짓곤 모든 준비가 끝나자 그에게 눈빛을 보냈다.
김세준의 눈빛을 읽은 고든이 한 발자국 물러섰고, 김세준이 마이크를 확인한 후 입을 열었다.
“제가 이렇게 가야금을 연주할 수 있는 것도, 다 당신들이 있기에 가능했습니다. 비록 보잘것없는 연주이지만 한국을 위해 청춘을 바치신 여러분들에게 작게나마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인사와 함께 김세준이 깊은숨을 들이셨고, 동시에 스텝들 사이에서 3명의 남자가 앞으로 나온다.
김세준의 옆으로 다가와 노병들에게 허리를 크게 숙여 인사하고, 김세준과 시선을 마주치는 이들.
오늘 이 공연을 위해 ‘The Late Show’에서 준비한 사람들.
거문고와 트럼펫, 그리고 마지막으로 클라리넷의 연주자.
‘Going Home’에 들어가는 메인 세션이 모두 모였다.
‘제일 떨리네...’
그들이 다가오고 무대가 코앞으로 다가오자 두근거리는 가슴.
4만 명 앞에서 펼쳤던 콘서트보다 더 떨리는 지금이었다.
관객 수가 아닌, 관객이 가진 삶의 무게.
그 무게가 그 어느 때보다 무거운 관객들이기에.
그 어떤 관객들 앞에서도 한심한 무대를 선보이면 안 되지만, 오늘 저들 앞에선 특히 더 훌륭한 무대를 선보여야 했다.
오늘 저들 앞에서 보이는 자신의 모습이 저들이 청춘을 바친 이유였으니까.
다시 한번 크게 숨을 들이켜고 김세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김세준의 모습에 다른 연주자들이 눈빛을 빛냈고.
이내 시작되는 노래.
북과 드럼의 웅장한 소리가 들려오며 곡의 도입부를 알린다.
흥미롭게 그들을 지켜보던 노병들의 얼굴이 진지해지고 추억으로 빨려 들어간다.
듣기만 해도 무거워지는 분위기.
그리고 이내 연주되는 김세준의 가야금과 트럼펫.
애절하고 잔잔한 두 악기의 음색과 타악기의 두터운 소리가 합쳐 비극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거기에 김세준의 독특하지만 울림 있는 목소리가 한국 전쟁 기념관에 울려 퍼졌다.
Mom. (엄마.)
They say people are heroes who don't feel afraid of us.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영웅이래요.)
We're scarier than anyone else. (누구보다 무서운 게 저희인데 말이죠.)
Mom, how scared would she be to think of me? (엄마. 저를 떠올리실 엄마의 마음은 얼마나 두려울까요?)
“...!”
김세준의 목소리에 노병들은 물론 지켜보던 사람들의 얼굴에 침통함이 흐른다.
애절한 목소리와 애절한 악기의 소리.
거기에 애절한 가사와 애절한 장소.
모든 게 슬프고 가슴 아픈 지금.
사람들의 시선이 이 무대를 누구보다 가장 가슴 아프게 들을 노병들의 얼굴로 향한다.
그저 김세준의 무대를 묵묵히 지켜보는 노인들. 주름이 깊게 파인 그들의 얼굴을 봐도 어떤 감정인지 감히 짐작할 수 없었다.
How's my brother? (동생은 잘 있나요?)
What about your neighbors? (이웃집 친구들은요?)
What about all my memories? (내 모든 아련한 추억들은요?)
마치, 군인이 집에 있는 어머니한테 편지를 쓰는 듯한 가사. 비극적인 분위기인 곡과 어울리는 노랫말이었고, 단어 하나하나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다.
Mom. I'm going home now. (엄마. 이제 집에 갈게요.)
But don't be surprised. (근데 놀라지 말아요.)
I believe you will welcome me no matter what I look like. (내가 어떤 모습이든 당신은 저를 반길 거라 믿어요.)
Please don't be sad. (부디 슬퍼 말아요.)
Going home, (집으로 돌아갈게요.)
가야금의 독주.
애잔한 그 선율에 맞춰 울리는 김세준의 목소리.
알 수 없었던 노병들의 얼굴에 미묘한 변화가 생겼다.
이젠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그들의 눈.
그 눈에서 흘러나오는 눈물.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이 담긴 뜨거운 눈물이 그들의 눈가에서 흘러나온다.
눈물을 흘려본 게 언제가 마지막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처음 눈물 흘린 전우를 따라 어느새 촉촉해지는 다른 노병들의 눈가.
늙는다는 것에 또 다른 말은 죽음에 가까워진다는 것.
이제 자신들의 시간은 하루하루가 흐를수록 죽음이 코앞으로 엄습하는 나이.
그렇기에 지금 와서 죽음이 두렵다는 감정은 들지 않지만.
그때엔 달랐다.
누구보다 빛났던 자신들의 청춘.
하고 싶은 것도 많았고, 항상 밝게 빛날 거라 여겼던 자신의 젊음.
그때 경험했던 죽음은 섬뜩하고 무서웠다.
어제 같이 웃던 전우가 싸늘하게 식어가고.
자신의 총에 맞은 적들이 붉은 선혈을 흘리며 쓰러져가는 모습.
아직도 생생한 그때의 기억.
그동안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던 자신들의 아픔을 위로하는 김세준의 노래.
You're coming over the horizon. (지평선 너머 당신이 오고 있어요.)
To our home. (우리의 집으로.)
Your face that was smiling brightly. (환하게 웃던 당신의 얼굴.)
doesn't look blocked by the coffin anymore. (이젠 관에 막혀 보이지 않네요.)
노래의 끝이 다가오자, 김세준의 마음이 씁쓸해졌다.
눈앞에 있는 이 무대의 관객들인 노병.
‘내가 감히 저들의 아픔을 공감할 순 없겠지.’
자신은 경험해보지 못한 지옥 같은 그때의 순간.
공감한다고 어찌 내뱉을 수 있을까.
하지만 그래도 감히 조심스럽게 말을 하자면 그들의 아픔을 이해할 순 있으리라.
그렇기에 준비한 노래였고, 저들이 조금이나마 위로받길 원했다.
그런 김세준의 마음이 통한 걸까.
어느새 노병들의 얼굴에서 눈물이 하염없이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
자신들이 살린 한 민족의 후손이 이렇게 장성하여 자신들을 위해 노래 부른다.
은퇴한 군인으로서 그 어느 순간보다 뿌듯하고 보람을 느낀다.
그리고 그런 노병들과 김세준의 무대를 바라보던 고든의 눈가에 짙은 만족감이 서린다.
감동적이고 진한 여운이 담긴 무대.
‘최고 조회수가 1억이었나?’
미튜브에 올라간 자신들의 영상 최고 조회 수는 에이미가 나온 영상으로 1억을 기록했다.
토크 쇼로는 전무후무할 기록이라 여겼던 조회수.
하지만 오늘 그의 날카로운 직감이 발휘됐다.
오늘 이 촬영.
방영하고 미튜브에 올리기만 한다면.
앞으로 깰 수 없을 거라 여겼던 기록을 가뿐히 넘기게 될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