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
포기너 버스킹(10)
예술가의 고향에서 예술가를 추모하는 노래가 울려 퍼진다.
그 묘한 감정의 기류에 빠져든 관객들이 자신도 모르게 노래에 집중하며 요환의 감정에 동조되었다.
원래에도 수준급의 실력을 구사했던 요환의 노래.
거기에 그에게 더욱 특별한 사연이 가미되면서 노래의 감정이 절정에 이르렀다.
마치 사크레쾨르 성당 안처럼 순식간에 그들을 둘러싼 분위기가 엄숙해진다.
분명 멜로디는 그다지 엄숙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또한, 서정적인 템포의 곡이긴 하지만 이 정도로 무겁게 느껴질 만한 곡도 아니다.
그냥 적당히 분위기 있는 곡.
멜로디와 리듬만 보자면 딱 그 정도의 노래였지만, 요환의 목소리가 곡을 한층 더 숙연하게 만든다.
아무 말 없이 그저 요환의 노래에 집중하던 사람들.
그리고 그런 요환이 목소리를 멈추고, 이내 김세준이 마이크에 대고 입을 열었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내 마음.
애써 글에 담아 그대에게 전하려고 해도
전할 수 없는 내 치기 어린 감정.
‘역시..’
김세준의 목소리가 울리자, 궁금증을 가지고 찾아왔던 여성이 슬며시 미소지었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그의 라이브.
그가 왜 여기서 버스킹을 하는지 순간 의아했지만, 무수한 카메라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에서 하는 방송인가 추측하고, 다시 그의 노래에 빠져들었다.
무대는 다르지만, 그 특유의 목소리는 여전하다. 그리고 이름은 모르지만, 김세준보다 먼저 이 노래를 부르던 한 남자.
그 남자가 가지고 있던 감정을 김세준이 고스란히 이어받는다.
아련한 그리움이 느껴지는 그들의 노래.
소중한 사람을 잃어본 사람이 있다면 누구나 지금 그의 감정에 공감하리라.
‘전하지 못한 편지’의 노래가 점점 고조될수록, 여자의 마음에 흡족함이 서린다.
처음엔 사람들이 몰려 있기에, 그리고 그다음엔 김세준의 가야금 소리가 들려서 찾아오긴 했지만 노래 자체의 퀄리티도 상당했다.
특히, 김세준과 같이 노래 부르는 저 사람.
이 노래에 무슨 특별한 사연이라도 있는지 곡에 담아 부르는 감정이 보통이 아니다.
김세준의 감정전달력이 뛰어난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곡 하나만 봤을 땐 그의 감정을 넘어설 수가 없을 정도였다.
‘좋네.’
그냥 휴가를 맞이하여 찾아온 자신의 마음속 고향.
영감을 얻기 위해, 오랜만에 방문한 이곳에서 예상하지 못한 멋진 공연을 보게 됐다.
관객들을 사로잡는 그들의 버스킹을 보니 자신도 의욕이 샘솟았다.
근래 들어 슬럼프가 온 그녀.
그런 그녀에게 다시 창작 의욕을 불태우게 만드는 그들의 공연.
둘의 노래가 끝나갈 기미가 보이자, 그녀가 슬슬 사라지기로 마음먹었다.
멋진 무대를 선보이는 저들의 버스킹을 계속 보고 싶다는 욕심도 생겼지만, 만에 하나 자신 정체가 관객들에게 탄로 난다면 버스킹을 더 하지 못할 정도로 난리가 나리라.
아쉬움을 뒤로하고 요환과 김세준의 무대가 끝나자 여인이 발걸음을 옮기려 했지만, 그녀의 선택은 조금 늦었다.
선글라스와 모자로 가리긴 했지만, 그 미모를 완벽히 숨기진 못했는지 몇몇 사람들이 그녀의 정체를 눈치채곤 말을 걸어댔다.
처음엔 작은 소란이었지만 삽시간에 번진 불길.
그녀가 당황을 감추지 못한 사이, 그 작은 소란은 점점 더 커져 거리공연을 하던 김세준과 일행들에게도 번지기 시작했다.
***
요환과의 합동 무대가 끝나자, 쏟아지는 박수를 받으며 김세준이 노래의 여운에서 빠져나왔다.
요환 때문인지 노래를 부르는 내내 진한 여운에 빠져 있던 그.
노래하는 시인, 고진규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감회에 젖어 들 그런 무대.
김세준뿐만 아니라 무대를 바라본 다른 가수들과 스텝들의 얼굴엔 아련함이 깊게 서려 있었다.
‘응?’
그런 감동적인 무대를 끝내고, 이어서 다음 공연을 진행하려던 와중 김세준이 소란스러워진 관객석을 보며 의아한 기색을 표출했다.
무대가 끝나고 보여주는 관객들의 평소 반응이 아니다.
자신들에게 집중되어야 할 이목이 다른 곳에 향해 있다.
비단 자신만 느낀 게 아닌지 다른 일행들도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뭐지?”
“그러게요. 다른 누군가가 왔나?”
이제 자신들의 공연은 뒷전이 될 정도로 혼란스러운 관객석.
자세히 보이진 않지만, 누군가를 둘러싸고 있는 듯했다.
“어... 어라? 저 사람, 에이미 아니에요?”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까치발을 들며 확인하던 이예은이 놀란 목소리로 외쳤다.
관객들 사이에서 얼핏 보이는 얼굴.
“에이미?”
“...!”
“에이미가 여기 왜 있어?”
이예은의 외침에 다른 일행들도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만약 관객들이 소란스러워진 이유가 에이미의 등장이라면 확실히 이해가 간다.
관객들로선 동양에서 온 무명 가수의 노래보다, 월드 스타인 에이미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보는 게 더 큰 관심이리라.
“에이미라고 진짜?”
김세준도 놀란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에이미.
영국 출신의 여성 싱어송라이터로, 특유의 소울 넘치는 음색으로 세계에서 사랑받는 가수.
서른이 갓 넘은 나이로, 반짝이는 금발과 매력적인 외모로 외적으로도 큰 사랑을 받지만, 그녀가 가장 큰 사랑을 받는 이유는 음악.
사람을 끌어당기는 그녀 특유의 애수 넘치는 음색과 개인적인 경험이 녹아들어 리얼리티가 물씬 풍기는 가사와 곡.
고작 서른이 넘었지만, 그 나이에 맞지 않는 폭넓은 감정 소화력으로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절로 노래에 빠져들게 만드는 가수.
비단 실력뿐만 아니라 세간에 알려진 인성도 훌륭하다. 호통하고 솔직한 성격으로 불미스러운 사건을 일으킨 적이 단 한 번도 없으며, 인종차별 같은 사회적인 문제에도 관심을 많이 가지는 연예인.
‘별명이 딱 어울리는 가수지...’
그녀의 별명.
21세기 최고의 디바.
극찬에 달하는 별명으로 에이미 본인은 너무 과한 별명이라 손사레를 치지만.
그녀를 아는 다른 사람들은 누구나 인정하는 말.
“미쳤네...”
만약 그녀가 진짜 여기에 온 게 사실이라면, 자신들의 무대가 중요한 게 아니다.
그래미 어워드 제너럴 필드(본상)를 두 번이나 석권한 가수이자, 세계에서 가장 인기 많은 가수 중 하나.
북미는 물론 아시아와 유럽 각지에서도 독보적인 인기를 자랑한다.
특히 유럽에서의 인기는 압도적. 김세준도 유럽을 돌아다니면서 그녀의 노래를 안 들어본 적이 없었다.
아직 김세준은 해보지 못한 웸블리 스타디움에서의 콘서트도, 그녀는 이미 경험한 적이 있었고 경험뿐만이 아니라 웸블리에서 가장 많은 관객을 동원한 가수였다.
단 한 번의 공연으로 98000명을 동원한 가수.
그런 가수의 등장인 만큼 관객들이 소란스러워지는 것도 자연스럽게 이해가 될 지경.
김세준과 친분이 있는 에드 케인.
그도 세계적인 가수긴 하지만, 에이미에 비하면 태양 앞에 반딧불이리라.
다음 무대 차례인 이예은은 공연도 잊었는지, 깡충거리며 그녀의 얼굴을 보기 위해 애쓰는 중이었다.
“와. 진짜 에이미네.”
“에이미가 여길 왜 왔어?”
“모르지. 아, 세준이는 알아? 그래도 에이미랑 친분 있을 거 같긴 한데? 미국에서 보지 않았어?”
“아니요. 저도 몰라요. 그냥 그래미 어워드때 한 번 얼굴 본 게 전부예요.”
현도민의 물음에 김세준이 고개를 저었다.
작년 그래미 어워드 때 잠깐 얼굴 한 번 본 게 전부다.
그녀와 특별한 친분이 있을 리 만무했다.
소란스러워진 주변을 보곤 일단 멈춘 버스킹. 그나마 잠복해 있던 에이미의 경호원들이 등장해 사람들과 에이미를 떨어트려 놓았고, 경찰들까지 등장하여 장내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시 버스킹을 벌이기엔 아직은 소란스러운 주변이었고, 제작진이 급히 회의에 들어갔다.
오늘 공연을 여기서 마무리할지, 아니면 그냥 이어서 할지.
‘흐음...’
제작진들의 회의 결과를 기다리며 김세준이 속으로 신음을 삼켰다.
특별한 장소에서 벌이는 공연인 만큼, 자신도 기대가 컸던 상황.
그런 상황에서 고작 한 곡을 부르고 공연을 멈춰야 하는 게 썩 달갑진 않았다.
아쉬운 마음에 깊은 한숨을 내뱉을 때, 누군가 그를 불렀다.
“세준. 잘 지냈어요?”
“어... 에이미?”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김세준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단순히 이름을 부르고, 안부를 묻는 것인데도 귀를 녹이는 듯한 미성이었다.
“저희 구면이죠? 작년에 한 번 뵀었는데. 아, 그리고 오늘 죄송해요. 괜히 저 때문에 방송 망친 거 같은데.”
“네네. 맞죠. 아니에요. 죄송하긴...”
고작 인사 한 번 나눈 사이. 그런데도 자신을 기억하고 친근한 척 다가와 말을 걸고, 사과하는 그녀의 모습에 김세준이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세간의 평가처럼 그 인성이 훌륭한지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그녀였다.
“아, 그냥 오랜만에 한 번 놀러 왔는데 가야금 소리가 들려와서 놀랐어요. 그래서 무대 좀 구경한다는 게... 이렇게 되어버렸네요.”
“아... 여기 자주 오세요?”
“종종 와요. 영감 얻는데 여기만 한 곳이 없더라고요.”
싱긋 웃으며 답하는 그녀였고, 그런 김세준과 에이미의 대화에 주변인들이 화들짝 놀랐다.
이예은은 자신의 우상과 남자친구가 대화하는 모습을 보고, 황홀한 듯 넋이 나갔고, 다른 가수들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세준이가 갑자기 엄청 크게 보이네...”
“그러게요...”
현도민과 로이의 대화에 다른 출연진들도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포기너 버스킹’의 메인 PD인 정동혁. 그는 이 장면을 카메라에 담아두면서도 진한 아쉬움을 삼켰다.
일단 혹시 몰라 담아두지만, 방송에 내보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
만약 내보낼 수만 있다면, 대박일 텐데.
당장 에이미에게 다가가 방송에 나와도 되냐고 묻고 싶지만, 선뜻 나서기가 어렵다.
수많은 연예인을 만나봤던 그지만 에이미는 차원이 다른 가수.
그가 촬영했던 수많은 연예인의 인지도를 다 합쳐도 저 에이미의 인지도 하나를 못 따라오리라.
그런 정동혁의 애타는 마음을 눈치챈 걸까?
김세준이 에이미를 향해 넌지시 물었다.
“아, 지금 촬영 중인데, 혹시 방송 나가도...?”
“아, 괜찮아요. 오히려 저도 좋죠.”
김세준의 물음에 흔쾌히 응하는 그녀. 둘의 대화를 유심히 지켜보던 정동혁이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게 웬 횡재야!’
바로 카메라 감독에게 지시하여 에이미를 집중적으로 찍기 시작한다.
“그나저나 저 때문에 버스킹 망쳐서 어떡해요?”
“아니에요. 아직 뭐 어떻게 할지 모르겠지만 일단 봐야죠.”
그나마 경찰들의 등장으로 그나마 진정된 몽마르뜨 언덕.
하지만 에이미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엔 아직도 흥분이 가득했다.
사실 아직도 이 자리에 사람들이 남아 있는 건 그녀의 존재 때문.
그녀가 발걸음을 옮겨 사라지는 순간, 그녀의 뒤를 따라 관객들도 사라지리라.
‘흐음...’
그리고 그런 사실을 알고 있는 김세준이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속을 끙끙 앓았다.
포기하기 아까운 오늘의 공연.
하지만 아예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다.
눈앞에서 싱긋 웃고 있는 그녀.
그녀의 도움만 받을 수 있다면 말이다.
하지만 감히 그녀에게 그런 제안을 해도 될까?
심사숙고한 김세준이 이내 크게 숨을 들이켰다.
못 먹어도 쓰리고.
까놓고 말해 그녀 때문에 오늘, 공연을 더 못 하는 것도 사실 아닌가.
이내 결심한 김세준이 떨리는 목소리로 감히 그녀에게 제안했다.
“에이미. 같이 노래 한 번 할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