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
포기너 버스킹(9)
하루 동안의 LOT40에서 숱하게 나온 그의 노래.
비록 약 오천만 명에 달하는 스페인 인구에 비하면 조족지혈의 숫자가 듣긴 했지만, 그 효과가 아예 없진 않았다.
듣는 순간 사람을 매료시키는 그의 노래.
문화와 언어가 다른 사람들에게도 특유의 감정은 고스란히 전해졌고, 스페인에서 그에게 빠져드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아직은 미약하고 작은 무리지만, 훗날엔 얼마나 창대해질진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 스페인에서 벌였던 공연들.
하루 동안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노래가 헛되지는 않았는지 공연 도중 김세준의 노래에 반응하는 이들이 종종 보였다.
그들의 얼굴에 스치는 반가운 기색.
라디오에서 들었던 알 수 없는 노래가 라이브로 들려오자 놀란 기색을 보이는 소수의 사람.
수십 명의 사람 중 고작 한두 명일 뿐이지만, 그들의 반응을 눈치챈 김세준은 공연 내내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도대체 누굴까...’
분명 누군가 자신을 도와주기 위해 벌였던 일이란 건 확실하지만, 어떤 의도를 가진지가 불명확한 상황.
약간의 찜찜함이 돌지만, 어찌 됐든 자신의 인기를 알리는 데에 있어선 도움이 된 건 사실.
찜찜함보단 고마운 마음이 더 컸다.
덕분에 이어진 스페인에서 공연은 제법 호응도 받으며 성공적으로 마쳤고, ‘포기너 버스킹’은 그들의 마지막 목적지인 프랑스 파리로 향했다.
프랑스의 수도이자, 프랑스의 정치와 경제의 중심이자 유럽 문화의 중심지라고 봐도 무방한 곳.
‘꽃의 도시’라고도 불리며 프랑스인들은 스스로 ‘빛의 도시’라고 부르는 예술과 문화의 동네.
그리고 그런 파리에 입성하자마자 눈에 들어오는 건, 파리의 상징인 에펠탑이었다.
“우와... 진짜 크다.”
도시에 막 상경한 시골 소년처럼 버스 밖 청문을 보며 호들갑을 떠는 일행들.
김세준 또한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반응으로 에펠탑의 위용을 구경 중이었다.
“오빠! 에펠탑은요. 가까이에서 보면 더욱 멋져요.”
이미 프랑스는 한 번 와본 이예은이 옆에서 어깨를 으쓱거렸고, 김세준이 웃음을 터트렸다.
한 번 와봤다고 자랑스럽게 내뱉는 그녀.
절로 미소가 지어질 정도로 귀여웠다.
자신도 에펠탑을 처음 본 건 아니지만, 지금은 촬영 중 아닌가.
그러기에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출연진들도 일부로 과장되게 반응하는 거였는데.
실제로 그런 그녀의 말에 다른 출연진들도 엄마 미소를 지은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 반응 뭐지? 뭔가 이상한데?”
“아니야.”
자신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주변 사람들을 보며 이예은이 의아해했고, 서지수가 머리를 쓰다듬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직 방송의 때가 타지 않은 귀엽고 순수한 후배였다.
그런 둘의 모습에 김세준이 피식 웃곤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프랑스라...’
문화의 나라라고 자처하는 곳이자, 프랑스인들도 자국 문화의 자부심이 상당하다. 실제로 다양한 매체에서 그 영향을 끼치기도 하고.
‘통할까?’
창밖 사람들을 보며 피어오르는 호기심.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창밖 사람들에게, 과연 자신이 깊은 감명을 심어줄 수 있을까?
그런 질문에 김세준이 살짝 미소지으며 스스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앞선 나라에서 펼친 공연으로 생긴 자신감.
까짓것 못할 것도 없었다.
***
파리에 도착한 첫날은 숙소에서 휴식을 취한 김세준과 일행들.
어김없이 멋진 숙소에 감탄하고 프랑스에서 펼칠 첫 공연을 어떻게 할지 회의하다가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다음 날, 프랑스에서 맞이하는 둘째 날.
그들은 프랑스에서의 첫 공연을 위해 예술가들의 장소, 몽마르뜨 언덕으로 향했다.
몽마르뜨 언덕.
파리 시내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파리의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이자, 보는 순간 숭엄해지는 순백의 사크레쾨르 대성당이 있는 곳.
탁 트인 전경과 사크레쾨르 대성당만으로도 올만 한 가치가 있는 명소이지만, 이곳이 유명해진 이유는 이것만이 아니다.
한때 자유를 꿈꾸던 낭만적인 예술가.
‘피카소’, ‘빈센트 반 고흐’ 같은 유명 화가들은 물론, 음악가인 ‘쇼팽’, 문학가인 ‘에밀 졸라’ 등 세계에 큰 영향을 끼친 예술가들의 고향이 이곳이었다.
그림, 문학, 음악 등 다양한 예술 분야의 거장들이 활동했던 곳.
그래도 명색의 음악 방송인데 프랑스 파리까지 와서 이곳을 안 와볼 순 없지 않나.
“와... 사람 진짜 많네요.”
그동안 공연을 펼쳤던 장소 중 가장 유명한 곳이라 그런지 가는 길부터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그리고 영감을 얻기 위해 찾아온 예술가들이 찾아온다는 속설이 거짓은 아닌 듯 예술가들의 작품이 길거리에서부터 수두룩했다.
길거리 구석에서 자신의 그림을 파는 화가와 작은 골목길에서 기타를 치며 버스킹 하는 가수들의 모습이 심심치 않게 보였다.
“멋지네.”
“좋다.”
예술의 향기가 물씬 느껴지는 모습에 다들 감탄을 내뱉었다.
이예은은 홀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한 가수의 노래가 마음에 들었는지 지갑에서 돈을 꺼내, 앞에 놓인 바이올린 케이스에 넣을 정도였다.
그런 예술적인 모습들을 지나쳐 도착한 몽마르뜨 언덕.
인산인해를 이루는 그곳에 도착하자 절로 생기는 기대감.
“오! 저희가 공연할 곳이 저기예요?”
서지수가 먼저 도착해 있던 스텝들이 있는 장소를 발견하곤 기쁜 목소리로 외쳤다.
사크레쾨르 대성당 앞, 널찍한 공간.
앞으로는 사크레쾨르 대성당이 있고, 뒤론 파리의 전경이 있는 곳으로 평소엔 많은 이들이 난간에 기대어 전경을 구경하기 바쁜 곳이었다.
누가 봐도 몽마르뜨 언덕에서 제일 버스킹 하기 좋은 장소.
서지수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의 눈빛에도 흥분이 맴돌았다.
당장이라도 공연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요환은 사전에 논의한 대로 그들을 사크레퀴르 대성당으로 이끌었다.
“공연하기 전에 잠깐 성당 구경 하고, 공연 시작하자.”
보는 사람을 숙연하게 만드는 대성당.
비록 자신들의 목적이 버스킹이긴 하지만, 시청자들에게 유럽의 명소를 보여주는 것도 하나의 역할.
다들 흥분된 마음을 뒤로하고, 고상한 자태를 뽐내는 성당 안으로 들어섰다.
생각보다 거대한 성당의 내부. 신성하고 엄숙한 분위기가 흘러나왔다.
성당 내부엔 노래만 울려 퍼질 뿐, 많은 관광객이 찾아 왔음에도 소란스러운 기색 따윈 없다.
기도를 올리는 몇몇 이들의 모습은 함부로 다가갈 수 없을 정도로 고결해 보였다.
천사 조각상과 형형색색의 스테인드글라스, 천장에 그려진 벽화까지.
종교를 믿지 않는 김세준이지만 분위기에 압도되어 의자에 앉아 작은 기도를 올렸다.
기도를 올리는 김세준 옆으로 와, 이예은도 같이 기도를 올렸고 마지막으로 향초에 불을 붙인 후 기부금을 내고 성당을 빠져나왔다.
“오빠. 무슨 기도 했어요?”
“나, 그냥 공연 잘하게 해달라고 했지. 너는?”
성당을 빠져나온 후, 이예은의 물음에 김세준이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그리고 김세준의 반문에 이예은이 주변을 휙휙 확인하곤 싱긋 웃으며 그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
“난, 오빠랑 결혼하게 해달라고요.”
“...!”
순간 귀가 빨개지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분명 농담 삼아 던진 말이고, 연인 사이에서 장난처럼 내뱉을 수 있는 말이지만...
귀가 빨개지고 놀란 김세준을 보며 이예은이 까르르 웃더니 앞서 걸어나갔다.
결혼이라...
분명 먼 미래의 일이겠지만, 할 수만 있다면 그녀와 결혼하는 것도 축복받은 일이리라.
‘할 수 있겠죠?’
김세준이 성당을 올려다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성당 중앙에 조각되어있는 성심 예수의 모습.
마치 그가 자신을 내려다보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과거로 돌아온 그.
덕분에 행복하지만, 그런 만큼 불안감도 커진다.
이 모든 게 거짓은 아닌지, 아니면 혹여 또 회귀하는 건 아닐지.
어느 날, 잠에서 깨어 눈을 뜨면 회귀하기 전 삶으로 돌아가는 건 아닐까.
지금 누리는 행복이 물거품이 될까 두렵다.
하지만 그 누구에게도 심지어 정신병원에서도 털어놓지 못하는 그의 불안감.
오늘, 그 불안감을 작게나마 신에게 아이가 투정 부리듯 하소연하며 빌었다.
만약 정말 계신다면.
지금 자신이 누리고 있는 이 행복.
이 행복을 제발 앗아가지 말아 달라고.
***
성당을 둘러보고 밖으로 나온 이들은 아까 봐둔 자리로 돌아와 버스킹 준비를 서둘렀다.
구름 한 점 없는 화창한 날씨. 그리고 그런 날씨에 밖으로 나온 사람들.
버스킹하기 어느 때보다 좋은 환경.
게다가 평소엔 작은 규모로 버스킹을 하던 예술가들도 종종 있는 곳.
하지만 지금은 그런 예술가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기에 공연하기에 더욱 금상첨화였다.
‘이제 익숙하네.’
버스킹을 준비하자 자신들에게 쏠리는 이목.
어쩔 땐 민망하고, 낯간지러울 정도로 쏟아지는 노골적인 시선.
하지만 앞선 공연들도 인해 이제 그런 코앞에서 느껴지는 관심도 웃으며 즐긴다.
“봉쥬르(Bonjour).”
모든 준비가 끝나자 요환이 마이크에 대고 입을 열었고, 관객들의 얼굴에 진한 미소가 새겨진다.
수많은 예술가들이 모여 공연을 펼치는 이곳.
그런 장소인 몽마르뜨언덕이지만, 여기서도 보기 힘든 광경이다.
동양인들로만 이루어진 무리. 그리고 다양한 악기들.
거기에 더해 그들을 찍는 수많은 카메라.
흔하디흔한 예술가들이 아니라는 걸 짐작할 수 있는 모습이었다.
“저희는 한국에서 온 가수들이고요...”
그리고 벌써 몇 번이나 내뱉은 익숙한 멘트를 내뱉는다.
프랑스에서의 첫 무대.
요환과 김세준의 합동 무대였다.
요환이 김세준의 소속사 사장인 이해진과 듀엣 하여 부른 곡인 ‘전하지 못한 편지’.
정확히는 둘의 곡이 아닌 리메이크곡이다.
한때, 대한민국에서 노래하는 시인이라 불렸던 명가수.
이제 고인이 된 가객(歌客), 고진규를 추모하기 위해 그의 노래를 요환과 이해진이 재창작한 노래.
그를 평소 흠모하던 두 후배가 선배를 추억하며 새롭게 만든 명곡이었다.
어제, 요환이 슬그머니 다가와 먼저 제안했다.
몽마르뜨 언덕에서, 가장 존경하던 선배를 추모하고 싶다고.
비록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한국 대중음악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고인.
김세준이 그의 제안에 흔쾌히 응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특별한 장소에서 부르는 특별한 곡.
감히 자신이 이 노래를 불러도 될까 싶기도 하지만 후배로서 감사한 마음을 전할 뿐이었다.
김세준이 요환에게 시선을 보냈고, 그가 고개를 작게 끄덕이자 가야금 현을 뜯었다.
몽마르뜨 언덕에 울려 퍼지는 가야금의 소리.
관객들이 작은 감탄을 내뱉고, 지금 그가 연주하는 멜로디가 어떤 곡인지를 아는 사람들은 오늘따라 그 가야금 소리가 더욱 애절하게 들렸다.
밤새며 편지를 쓰고
몇십 번 고쳐 썼지만
내 마음이 담기질 않네
그리고 이어진 요환의 목소리.
‘...!’
가야금을 연주하던 김세준이 눈을 크게 뜨곤 속으로 감탄에 빠졌다.
그에겐 그 어느 곡보다 특별한 곡.
그런 만큼 느껴지는 감정이 그동안의 공연과는 전혀 다르다.
듣는 순간, 먹먹해지는 가슴.
비단 김세준과 그의 사정을 아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관객들조차 요환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그 특별한 감정을 느꼈다.
노랫말은 모르겠지만, 곡에 실린 감정이 범상치 않았다.
기대감에 넘쳐서 소란스러웠던 그들 주변이 순식간에 조용해진다.
감각적으로 이 곡이 보통 곡이 아닌 걸 느낀 사람들.
예술가들의 고향에서 한 예술가를 추모하는 그들.
그런 그들을 향해 한 사람이 흥미로운 눈빛으로 걸어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