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야금 뜯는 천제가수-103화 (103/148)

#103

포기너 버스킹(8)

스페인에서의 첫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친 ‘포기너 버스킹’.

비 오는 날, 운치 있는 거리공연. 제법 만족스러운 장면들을 다수 건진 정동혁은 흡족한 마음과 함께 다음날, 출연진들에게 휴식을 건넸다.

그들의 노고를 위로하는 휴식이면서 동시에 굵어진 빗줄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이슬비처럼 쏟아지던 날씨.

그 정도만 쏟아져도 공연할 수 있겠지만, 새벽부터 갑자기 거세진 빗줄기.

이런 날씨에 버스킹은 무리였고, 어제와 달리 발걸음을 멈춰 자신들의 공연을 봐줄 관객들도 없을 게 분명했다.

갑작스러운 폭우에 한가로워진 하루.

처마를 때리고 지나가는 빗줄기를 김세준이 창문 너머로 보며 느긋하게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홀짝였다.

‘좋네...’

비 오는 날, 집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는 여유.

비록 혼자만의 여유가 아닌 지금 이런 한가한 풍경도 카메라들이 찍고 있는 와중이지만 그동안 콘서트 준비로 바쁘게 달려온 그에겐 꿀맛 같은 휴식이었다.

“오늘 정말 이렇게 쉬어도 되는 거예요?”

“네. 편히 쉬시면 됩니다. 편집해야 알겠지만, 좋은 컷이 많이 나와서 분량 걱정 안 하셔도 돼요.”

느긋한 하루가 좋으면서도 슬그머니 생기는 걱정에 물었지만, 정동혁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포르투갈에서의 공연. 그리고 스페인에서의 공연. 거기에 더해 공연을 준비하는 모습과 그들의 편안한 일상.

마지막으로 유럽의 기가 막히는 풍경들.

방송에 나갈 장면은 수두룩했고, 마음 같아선 한시라도 빨리 한국으로 돌아가 편집실에 틀어박히고 싶은 심정이다.

아직 스페인에서의 촬영도 남았고, 프랑스라는 마지막 종착지도 남았지만, 지금까지의 촬영만으로도 충분히 흡족할 지경이었다.

“세준아!”

“어? 네. 형.”

거실에서 여유롭게 있던 김세준을 부엌에서 막 나온 로이가 찾았다.

“우리 장 보러 갔다 와야 할 거 같은데? 저녁거리 사러.”

“형이랑 저 둘이서요?”

“응. 오늘은 예은이하고, 제니가 요리한다네.”

“아...”

로이의 말에 김세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포르투갈에서 머물 때, 자신과 로이가 대접한 저녁 식사.

이미 자신의 요리 실력을 알고 있던 이예은은 물론, 다른 이들도 감탄하게 만든 제법 괜찮은 저녁이었다.

그리고 다음엔 자신들이 해보겠다며 호언장담을 내뱉던 이예은과 제니.

오늘이 그녀들이 자신들을 위해 요리를 대접할 그날인 듯했다.

“네. 지금 바로 출발해요?”

“응. 하몽이랑 채소 간단한 거 몇 가지만 사 오면 될 거 같아.”

두 사람의 대화에 카메라 감독 한 명이 우의를 챙기며 나갈 준비를 했고, 잠시 후 세 사람이 거센 비를 해치며 상가로 향했다.

“요리는 뭐한데요?”

“부대찌개 한다는 거 같던데. 햄을 하몽으로 해서.”

“오. 그거 괜찮다.”

한국을 떠나고 나선 한 번도 입에 대지 않았던 한식.

안 그래도 요즘 들어 한식이 땅기던 참이었는데, 그녀들의 요리 선택에 김세준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거기에 스페인의 전통 햄이자 특유의 풍미가 있는 하몽을 넣어서 만든 부대찌개라.

말만 들어서는 제법 기대되는 음식이었다.

부푼 발걸음을 가지고 그들이 향한 곳은, 어제 자신들이 공연했던 마요르 광장 바로 앞에 있는 마드리드 산 미겔 시장.

스페인 3대 전통시장으로 각종 식료품점은 물론 식당도 즐비한 곳.

철골 구조물을 그대로 유지한 실내 시장이기에 거센 비가 오는 날씨와 상관없이 많은 이들이 내부에 들어서 있었다.

한국의 전통시장과 비슷하면서도 사뭇 다른 분위기.

그런 분위기에 심취한 두 사람이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온통 신기한 것투성이다.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재밌는지 흥미로운 눈빛으로 돌아다니는 두 사람이었고, 그런 그들을 향해 한 남자가 불쑥 끼어들었다.

“저기 혹시, 어제 마요르 광장에서 공연한 사람들인가요?”

“네? 아... 맞습니다.”

갑자기 말을 걸며 친근한 척하는 남자의 40대 중반의 남성.

순간 당혹스러워하던 김세준이 이내 그를 향해 친절한 웃음을 지었다.

얼굴을 보아하니 낯이 익었다.

어제 공연을 시작할 때부터 자리 잡고 있던 사람. 하지만 공연이 끝났을 땐 어느새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던 남성이었다.

“와. 여기서 또 보게 될 줄은 몰랐네요. 어제 공연 너무 좋았어요. 제가 약속이 있어서 끝까지 있진 못했는데...”

“네. 기억나요. 어제 맨 우측에서 저희보고 계시지 않았어요?”

“오! 절 기억해요?”

유창한 영어로 대화는 나누는 둘. 카메라 감독은 이게 웬 횡재인가 싶어 열심히 두 사람을 찍었고, 영어를 못하는 로이만 멀뚱히 바라볼 뿐이었다.

“진짜 어제 공연은 너무 멋있었어요! 살면서 그런 공연 본 적이 없습니다. 저기 계신 분을 포함해서 다른 분들의 공연도 진짜 멋졌지만, 특히 당신의 공연은 유독 더 좋았어요. 그 고...고야금? 이란 악기하고 조화가 너무 인상 깊었어요.”

장황한 말에 로이의 얼굴에 궁금증이 피어올랐고, 김세준이 난감한 미소를 지었다.

통역해주기엔 로이에게 조금 실례되는 말.

그러나 그 정도로 자신의 무대가 그의 뇌리에 좋은 이미지를 심어줬다는 사실에 뿌듯함과 그에게 깊은 고마움을 느낀다.

“그리고 저희 하몽을 사야 하는데 혹시 가게 위치 좀 알려줄 수 있어요?”

“아, 저 따라오실래요? 제가 여기 단골로 가는 가게가 있어요. 어제 그 집 주인이랑 저녁을 먹어야 해서 공연을 끝까지 못 봤죠.”

남자가 엄지로 길을 가리키자, 김세준도 흔쾌히 고개를 까닥거렸다.

자신에게 호의가 있는 현지인의 추천.

설마 질 나쁜 물건을 주진 않겠지.

“형, 이 분이 자기가 아는 가게로 소개해준다는데, 따라갈까요?”

“그럼 우리야 편하지.”

로이도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본 남자가 기분 좋은 발걸음으로 앞서 걸었다.

남자의 뒤를 따라 걸으며 로이가 김세준에게 은근슬쩍 물었다.

“그나저나 아까 무슨 이야기 한 거야?”

“그냥 별말 안 했어요. 어제 공연 재밌게 봤다고, 인상 깊었다고 그런 말 했어요.”

“아! 이제 이해가 되네. 어제 공연 보신 분이야?”

“네. 형 몰랐어요?”

“어. 넌 알았어?”

“네. 어제 처음부터 있으셨던 분인데...”

“와... 너 관찰력이랑 기억력 좋다. 젊어서 그런가?”

비가 오는 날이기에 우산과 모자를 뒤집어쓰고 있던 어제의 관객들.

얼굴을 알아보기 쉬운 환경도 아니었는데, 고작 그 잠깐 사이에 알아본 김세준의 세심함에 절로 감탄이 나왔다.

그리고 둘이 대화를 이어가는 사이, 가게에 도착했는지 앞서 걷던 남자와 정육점 주인이 스페인어로 유쾌한 인사를 나눴다.

절친한 사이인 듯 함박웃음을 지으며 서로를 반기는 두 사람.

어제 만났다고 했음에도 뭐가 그리 할 말이 많은지 이야기꽃이 활짝 피었다.

뒤에서 뻘쭘하게 있던 김세준과 로이가 가게로 눈을 돌렸다.

진열대에 먹기 좋게 썰린 고기가 놓여 있고, 가게 안 박스 숙성고 안엔 큼지막한 고깃덩이가 보였다.

한국의 정육점하고도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 모습.

그리고 진열대 위에 놓인 저울과 작은 라디오.

정육점에 대한 흥미를 잃은 김세준의 시선이 라디오로 꽂혔다.

이제 한국에선 좀처럼 보기 힘든 라디오.

오랜만에 보는 반가운 물건. 라디오에선 경쾌한 스페인 노래가 나오는 중이었다.

“라틴팝은 그 특유의 리듬이 좋아.”

“아, 저도요. 흥겹잖아요.”

라디오에 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김세준과 로이가 가수다운 말을 뱉었다.

한국 사람들에겐 익숙하지 않은 노래인 라틴 팝.

한국에선 인기가 많은 편은 아니지만, 세계 시장에선 영어의 팝 음악 다음으로 큰 시장이었다.

당장 미튜브 역대 조회 수 순위 2위가 라틴 팝 음악의 뮤직비디오였으니까.

노래가 마지막 부분이었는지, 얼마 안 돼서 끝난 흥겨운 노래. 그리고 이어진 DJ의 멘트와 그다음 노래가 이어질 때까지도 스페인 남자들의 수다는 계속되었다.

그리고 이어서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

어떤 노래가 나올지 기대하고 있던 김세준과 로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익숙한 멜로디가 흘러나왔고. 두 사람의 눈동자가 멍하니 라디오에 꽂혔다.

충격으로 미동조차 하지 않는 두 사람의 눈동자.

“이... 이노래가 왜 여...여기서 나와?”

“그...그러게요?”

흥겨운 라틴팝이 아닌, 잔잔하고 여운이 넘치는 노래.

김세준의 ‘봄비’가 스페인 라디오에서 나와 그들의 귀를 간지럽혔다.

충격으로 말문이 없어진 두 사람을 찍던 카메라 감독도 궁금해 가까이 다가왔고,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거... 봄비잖아요?”

카메라 감독의 확인사살.

감독의 말에 김세준이 아직도 주인과 이야기를 나누던 스페인 남자에게 다가가 어깨를 두들겼다.

“저기, 저 라디오...”

뭐라고 말을 뱉어야 할지, 정리가 되지 않아 손짓으로 라디오를 가리켰다.

“네?”

다급한 김세준의 모습에 남자가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놀란 김세준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고 손가락을 따라 라디오를 쳐다보자 이내 그의 귀에 들려오는 멜로디.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허스키한 목소리에 이내 그의 눈도 동그래졌다.

어제 약속 장소로 향하던 자신의 귀를 사로잡았던 그 노래.

눈앞에 가수가 직접 라이브로 부르던 노래가 지금 라디오에서 나오고 있었다.

“뭐야? 왜 저 노래가 저기서 나와?”

남자의 중얼거림.

그 중얼거림에 정육점 주인이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저 노래. 오늘 저기서 많이 나오던데? 오늘만 한 3번은 나왔을걸?”

“...! 진짜야?”

“응. 저 노래 말고도 비슷한 곡도 몇 번 나왔어.”

“... 저거 지금 채널이 어디야?”

“알면서 뭘 물어. 내가 맨날 듣는 채널이지. LOT 40.”

이내 남자가 정육점 주인한테 들은 말을 고스란히 김세준에게 전달했다.

지금 라디오의 채널이 LOT 40이란 곳이고, 오늘만 해도 저 음악을 3번, 그리고 어쩌면 그의 다른 노래도 나왔을지도 모른다는 걸.

“LOT 40이면 스페인에서 가장 유명한 음악 전문매체 아니야?”

“제가 알기로도 그런데요.”

LOT 40. 스페인 최대 음악 전문매체.

라디오뿐만 아니라, 방송과 언론 등 다양한 매체를 거느린 곳으로 음악 관련해선 스페인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곳이다.

자기들끼리의 시상식도 있으며, LOT40의 시상식은 라틴 팝에서도 제법 권위 있는 시상식으로도 유명했다.

당연히 음악 관련 라디오에서도 가장 많은 인기를 끄는 방송 중 하나.

이제 스페인에서도 한물간 라디오지만, 그래도 청취자가 적어도 수천 명은 되리라.

즉, 오늘 하루 그의 노래가 수천 명의 스페인 사람들의 귀에 울려 퍼졌다는 뜻.

“뭐지? 갑자기?”

LOT40 에서 자신의 음악을 어쩌다 소개해줄 순 있어도, 방금 들은 말은 단순히 소개 정도가 아니다.

누가 봐도 알 수 있는 명백한 홍보.

회사에서 순간 LOT40에 로비라도 한 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

이해할 수 없는 LOT40 라디오 채널의 노래 편성.

그는 몰랐다. 어제 자신이 깊은 감동을 심어준 한 노인의 아들이, LOT40 채널 방송국 피디라는 걸.

그리고, 지금 흘러나오는 노래가 노인의 아들이 아버지에게 소식을 듣고 그에게 주는 보답이라는 것을.

고향의 소리를 들려준 보답은.

스페인 전국에 울려 퍼지는 가야금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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