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야금 뜯는 천제가수-102화 (102/148)

#102

포기너 버스킹(7)

김세준의 ‘봄비’. 음원으로는 인트로부터 비 내리는 소리로 시작되는 명곡.

라이브로 연주하는 지금.

천막을 가볍게 두들기는 빗소리가 인트로를 대신한다.

음원에 들어간 다양한 세션들 없이, 가야금과 키보드, 그리고 기타로만 연주하는 노래.

원래 같이 울려 퍼져야 할 다양한 국악기들의 소리가 없어 허전하긴 하지만, 관객들의 귓가를 사로잡는 건 지금 들리는 음색만으로도 충분했다.

부드러운 선율들의 하모니.

천막 아래에서 합쳐지는 악기들의 조화가 발걸음을 멈춘 관객들의 귀를 간지럽혔다.

“저 사람, 자작곡이랬지?”

“응. 아까 그렇게 말했어. 근데 노래 좋다.”

“응. 부드러운 멜로디가 마음에 들어. 그리고 저 악기 소리도.”

“제목이 봄비였지? 제목이랑 어울리는 노래네.”

연주하는 김세준을 보며 관객들이 수군거렸고, 노래의 명확한 주제는 모르겠으나 하나만은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그가 연주하는 노래. 지금 날씨와 제법 잘 어울리는 감성이라는 걸.

먹구름이 잔뜩 낀 봄.

벚꽃잎이 비와 함께 떨어지네요.

당신의 얼굴에 흐르는 건 눈물일까요 빗물일까요.

그리고 김세준이 입을 열고 노래를 시작하자, 사람들의 얼굴에 미소가 더욱 깊어졌다.

“목소리도 좋은데?”

“응. 난 이런 목소리 좋더라. 허스키하고.”

“가사 뜻이 뭘까? 궁금하네.”

“한국 가수라고 하지 않았나? 한 번 검색해봐.”

멋진 무대를 선보이는 김세준을 향한 궁금증.

그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몇몇 사람들이 핸드폰을 주머니에서 꺼내 들었다.

‘한국 가수’, ‘한국 가야금 가수’, 등 어설픈 단어로 검색했지만, 그것만으로도 바로 나오는 김세준에 관한 정보.

한국에선 유명한 가수인지 제법 나오는 이야기가 많다. 특히 검색한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건, 그래미 어워드에서 했던 공연.

“아! 저 사람이 Remember 피쳐링 한 사람이네.”

“아! 에드 케인 노래?”

“응. 생각해보니까 저 악기 소리, Remember에서도 나오잖아.”

“...! 들어보니까 그런데?”

미국 가수인 에드 케인. 하지만 그의 이름은 스페인은 물론 유럽에도 널리 퍼져 있기에 그의 노래를 안 들어본 사람은 드물었다.

특히 ‘Remember’는 작년에 발매한 비교적 최신곡.

김세준의 무대를 보고 있는 젊은 세대들이 한 번쯤은 들어봤던 노래였다.

생각보다 유명인이라는 사실에 관객들이 놀라움을 내뱉을 때, 이예은의 파트가 시작됐다.

그대와 함께했던 화려했던 봄날.

차가운 빗물에 그때의 기억을 지워갈게요.

“...!”

김세준에게만 관심 가졌던 관객들에게 일침을 날리는 이예은의 목소리.

귀엽고 앳되게 생긴 얼굴과는 전혀 연상되지 않는 허스키한 보이스.

김세준에게만 빠져 있던 관객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를 바라봤다.

그런 관객들의 관심을 눈치챈 김세준이 슬며시 미소지었다.

자신을 향한 관심도 좋지만, 여자친구인 그녀에게 쏟아지는 이목도 환영할만한 일이었다.

“잘한다...”

“목소리 진짜 좋은데?”

관객들의 말.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지만 얼굴과 억양으로 어림짐작할 땐 분명 호평이리라.

“이야... 둘이 감정 절절하다. 절절해.”

“그러니까요. 저게 20대 얘들이 낼 수 있는 감정인가 싶어.”

그리고 그들의 공연을 보며 선배 가수들이 흐뭇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요환과 서지수와 현도민.

40대인 그들에게 김세준과 이예은은 연차만 10년 넘게 나는 까마득한 후배들.

그런 후배들이 보여주는 무대가 여간 뿌듯하고 만족스러운 게 아니었다.

말도 통하지 않는 관객들을 순식간에 휘어잡고 있지 않은가.

두 사람의 무대를 보자 가요계의 앞날이 아직도 창창하다는 걸 깨달았다.

듀엣이라는 걸 증명하듯 노래의 주도권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부르는 두 사람.

잠시 후, 완벽한 호흡을 보여준 무대가 끝났고, 김세준이 슬며시 웃으며 마이크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라시아스(Gracias).”

멋진 무대를 선보인 두 사람에게 쏟아지는 박수.

그 박수를 받으며 김세준과 이예은이 서로를 바라보며 슬며시 미소지었고, 이내 다음 무대를 꾸밀 제니가 준비하기 시작했다.

첫 무대를 화려하게 장식한 그들에게 질 수 없다는 승부욕을 불태운 그녀였고, 잠시 후 그녀 특유의 감미로운 미색이 광장에 가득 울려 퍼졌다.

‘녹네. 녹아.’

그녀의 음색에 홀라당 빠져드는 관객들.

그런 관객들을 보며 김세준이 마이크를 꺼두고, 그녀의 무대에 방해 안 되게 조심스럽게 가야금을 조율했다.

그리고 서지수의 무대가 끝나자 이어지는 다른 가수들의 공연.

각자의 매력을 어김없이 보여주는 버스킹.

어느덧 해가 넘어가고, 제법 쌀쌀해졌지만, 사람들의 발걸음은 여전히 멈춰있었다.

알 수 없는 가수들의 알 수 없는 노래지만 가지각색의 매력을 가졌다.

덕분에 벌써 공연한 지 1시간이 지났지만 지루할 틈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이내 다시 시작된 김세준의 차례.

가야금의 조율을 진작에 끝마친 그가, 다시 마이크를 향해 입을 열었다.

“다음은 다시 제 차례네요. 부를 노래는요, 에드 케인의 Remember. 명확히 따지자면 제 노래는 아니지만, 그래도 발 한쪽은 걸친 노래입니다.”

그리고 김세준의 뒤를 이어 현도민이 마이크를 잡고 자신을 소개한다.

에드 케인의 파트를 맡을 그였다.

둘의 소개가 끝나자 작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이미 세계에 그 매력을 널리 알린 명곡.

그 노래를 라이브로 들을 수 있다는 사실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비록 에드 케인과 김세준이 같이 부르며 감탄을 지어내게 만든 ‘Remember’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무대는 아니나, 현도민이 앞서 보여준 실력도 매력적이었다.

새로운 느낌으로 불릴 명곡을 기대하며 사람들이 두 눈빛을 반짝였고. 김세준이 슬쩍 웃으며 천천히 가야금을 뜯었다.

익숙한 리듬감과 멜로디.

네 개의 단조로운 코드가 반복되는 중독성 있는 노래.

원래는 가야금과 기타와 플롯의 삼중주였지만, 플롯의 자리를 키보드가 꿰차고 들어간다.

‘다행이네.’

앞서 연습할 땐 괜찮다고 느끼긴 했지만, 실제 사람들의 반응은 미지수.

기대와 우려가 반반 섞였었지만, 다행히 지금 사람들의 반응은 호의적이었다.

간단한 리듬에 맞춰 고개를 까닥거리는 사람들.

얼굴엔 흡족한 미소가 가득이었다.

“이 버전도 좋다.”

“그러게. 플롯 대신 피아노가 들어갔어도 괜찮았겠는데?”

“아니면 아예 4중주로 했었어도. 좋았을 거 같고.”

부드럽게 울리는 음색의 조화.

Do you remember that day? (그 날을 기억해?)

The first day you and I met. (너와 내가 처음 만난 날.)

그리고 에드 케인의 파트를 맡은 현도민의 굵직한 목소리.

한국 밴드의 자존심이란 명성이 허명은 아닌 듯 순식간에 사람들을 빨아들였다.

“와우...”

작은 감탄을 터트리는 사람들.

원곡하곤 전혀 다른 느낌이지만, 그런 만큼 색다른 매력이 있다.

관객들의 감탄 속, 연주에 집중하던 김세준도 순간 집중이 흐트러지며 그의 노래에 절로 감탄을 뱉었다.

오랜 시간 가수로 업을 살아온 걸 증명하듯, 순식간에 좌중을 휘어잡는 그였다.

밴드 보컬인 만큼 락을 부르던 가수.

그런 그가 평소 부르던 노래와 전혀 다른 장르의 노래임에도 부르는데 전혀 위화감이 없었다.

‘오히려 난 이게 더 좋은데?’

에드 케인이 알면 사뭇 섭섭해할 생각을 하며 김세준이 작게 웃었고, 이내 자신의 파트가 시작되자 입을 열었다.

Do you remember? (기억나니?)

the place with the memories of you and me. (너와 나의 추억이 담긴 그 장소가)

현도민과 달리 원곡의 음색이 흘러나오자, 관객들이 깊은 미소를 지었다.

처음 버스킹이 시작할 땐 몰랐지만, 이렇게 들어보니 귓가에 익숙했다.

‘오...’

그리고 그런 익숙한 목소리에 따라 작게 흥얼거리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보며 김세준이 작은 감탄을 속으로 뱉었다.

콘서트에서 공연한 것처럼 압도적인 떼창은 아니지만 제법 감동적인 관객들의 모습.

초등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는, 음악에 심취해 가야금을 뜯는 자신의 모습을 따라 하며 흥얼거렸다.

‘저 아이는 분명 방송에 나오겠네.’

절로 얼굴에 미소가 새겨지는 귀여운 모습.

동시에 뿌듯한 감정을 느낀다.

저 아이는 나중에 커서라도 가야금을 절대 잊지 않으리라.

한 아이의 뇌리에 선명하게 박힌 가야금의 존재.

저 아이는 물론, 이 무대를 보고 있는 다른 관객들도 그러하겠지.

가야금을 세계에 알리겠다는 그의 원대한 포부.

작지만 확실하게 나아가는 중이었다.

***

김세준과 현도민의 합동 무대 이후로도 이어진 공연.

꼬박 한 시간 반이 더 이어진 멋진 무대였고, 공연이 끝나자 포르투갈 때처럼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악수와 사인 요청을 무수히 받았다.

“그라시아스.”

자신을 따라 하던 귀여운 남자아이와 막 같이 사진을 찍고 인사를 나눈 김세준의 시선에 한 부부가 눈에 들어왔다.

노년의 부부. 서양인인 남편과 동양인 아내.

스페인에서 벌이는 공연이지만, 그동안 공연을 지켜보던 관광객이나 현지인들 사이에서 동양인들이 없던 건 아니기에 그다지 놀라운 광경은 아니다.

하지만 불어진 눈시울과 퉁퉁 부은 그녀의 얼굴은 그동안의 공연에서 보지 못한 모습이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다가와 김세준의 두 손을 붙잡고 진한 감사를 표하는 그녀.

그런 그녀의 모습에 김세준이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살면서... 다시 가야금 소리를 실제로 듣게 될 줄은 몰랐어요.”

“네?”

그녀의 입에서 한국말이 나왔지만 이해할 수 없는 말.

그리고 감정을 추스른 그녀가 스스로 소개하자 그때 서야 어떤 상황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저야말로 정말 영광입니다. 선생님께 다시 고향의 소리를 들려줄 수 있어서요.”

감동적인 그녀의 사연에 김세준이 붙잡은 두 손에 힘을 주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결과.

가야금을 널리 알리겠단 생각만 하고 있었지, 가야금을 그리워하는 사람이 있을 거란 생각은 한 번도 한 적 없었다.

“아내가 정말 많이 그리워하더라고요. 고맙습니다. 아내에게 정말 큰 선물을 주셨어요.”

아내의 어깨를 포근히 감싸며 남자가 김세준을 향해 진심 어린 감사를 내뱉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점점 더 고향을 그리워하던 그녀.

한국을 찾아갈까도 싶었지만, 머나먼 타국으로의 여행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 와중 우연히 보게 된 이번 공연.

아내에게 큰 위로가 됐을 게 분명할 터.

김세준이란 가수에게 그가 느끼는 고마운 감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가 아내에게 준 위로는, 자신이 치유해줄 수 없는 아픔이었으니까.

‘이대로 넘어갈 순 없는데...’

그에게 깊은 감사를 느끼면서도 동시에 보답할 방법이 없을까 고민했다.

그리고 남편이 고심에 빠진 사이, 김세준이 여인을 향해 자신의 포부를 밝혔다.

“선생님. 앞으론 스페인에서 가야금 소리가 더 많이 울릴 수 있게 제가 노력하겠습니다.”

눈앞에 여인을 보자 다시 한번 깊어지는 자신의 꿈.

그 꿈을 당돌하게 내뱉었고, 여인은 눈물을 흘리면서도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런 아내의 모습에 남편이 어떤 말을 내뱉었는지 물었고, 이어진 아내의 대답에 입가에 작은 미소를 지었다.

그의 말을 다른 말로 하자면 스페인에서 인지도를 올리겠다는 뜻 아닌가.

비록 엄청 큰 도움은 아니겠지만, 자신이 그를 도울 방법이 있었다.

지금 여기 수십 명에 사람들이 아닌, 적어도 수천 명에 사람들의 귀에 가야금의 소리가 울리게 할 방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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