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야금 뜯는 천제가수-101화 (101/148)

#101

포기너 버스킹(6)

‘포기너 버스킹’ 촬영진은 포르투갈 리스본에서의 사흘 동안의 모든 촬영을 마치고, 다음 촬영지인 스페인으로 넘어갔다.

다음 그들이 버스킹을 할 도시는, 스페인의 수도이자 이베리아반도의 경제 중심지인 마드리드였다.

마드리드 공항인 바라하스 국제공항(Barajas Airport)에 도착하고, 밖으로 빠져나온 일행.

“어라?”

김세준이 손바닥을 내밀곤 느껴지는 차가운 감촉에 고개를 올려 하늘을 바라봤다.

자신들을 방문을 환영하듯 화창하고 봄기운 완연했던 리스본.

마드리드는 그런 리스본과 달리 우중충하고 먹구름 가득한 날씨에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와중이었다.

“이것도 뭐 운치는 있네.”

버스를 타고 숙소로 향하는 길. 요환이 창밖으로 내리는 비를 보며 감회에 젖어 들었다.

고풍스러운 건물들을 적시는 빗줄기가 꽤 인상적인 풍경이었다.

애초에 4월의 마드리드는 한 달 중 열흘 정도는 비가 내리는 날씨.

촬영 중 하루 이틀쯤은 비가 오리라고 예상했기에 다들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게다가 폭풍우가 몰아치는 악천후도 아니고, 촉촉이 내려 사람의 감정을 차분하게 만드는 날씨.

김세준을 필두로 다들 감성적인 면모가 적잖이 있는 이들이기에 다들 이런 날씨도 반기는 모습이었다.

마드리드에서의 첫 공연은 내일.

만약 내일까지 비가 온다면 비를 맞으면서 공연을 해야 할지도 모를 상황이었다.

비오는 날 버스킹이라...

괜찮은 거 같은데?

내리는 빗속에서 공연하는 가수들의 모습. 약간 오글거리긴 해도, 꽤 낭만 있는 모습 아닌가.

특히 다른 가수들도 그렇지만, 가야금을 뜯는 자신의 모습은 썩 운치 있게 보일 터였다.

“피디님. 비 와도 공연은 할 거죠?”

“음... 내일 날씨를 봐야 알 거 같은데요? 안전상의 문제랑 공연에 큰 무리가 안 가면 공연 진행해야죠.”

김세준의 물음에 정동혁이 잠깐 고민한 후 답했고, 그런 그의 대답에 서지수가 손뼉을 마주치며 좋아했다.

“좋다... 난 찬성. 언제 또 비 오는 길거리에서 공연해보겠어요? 그것도 유럽에서.”

“저도 좋아요. 악기가 조금 걱정되긴 하는데.”

“아, 가림막이나 파라솥 같은 거 설치해야죠.”

로이의 우려에 정동혁이 걱정하지 말라는 듯 답했고, 다른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우려를 내뱉은 로이를 보며 김세준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정확히는 로이와 그녀의 옆 좌석에 앉아 있는 제니를.

리스본에서 늦은 저녁 나갔던 두 사람. 그 날 이후로 부쩍 가까워진 두 사람의 관계.

그전엔 작은 벽의 가로막혀 있는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서로를 대하는 게 무척 편해 보였다.

‘얼씨구.’

방금 시선을 살짝 마주친 둘이 풍기는 묘한 기류에 김세준이 슬며시 미소지었다.

막 사귀기 시작한 커플처럼 풋풋한 기색을 펼치는 둘.

보아하니 그날의 대화가 제법 잘 끝난 모양이었다.

그리고 둘을 따라 자신도 은밀히 즐겼던 이예은과의 데이트.

그리고 덕분에 알게 된 뜻밖의 사실.

영미권 국가 아닌 곳에서도 자신의 노래가 통한다는 걸 알 게 된 그 밤의 데이트였다.

덕분에 그날 밤 이후로 얻은 자신감.

어제, 즉 포르투갈에서의 마지막 공연도 그 자신감을 바탕으로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그였다.

‘남은 건 스페인과 프랑스...’

두 나라 다 포르투갈처럼 비 영미권 국가.

김세준이란 가수와 가야금이란 악기가 비 영미권 국가의 국민에게도 큰 감동을 심어줄 수 있을지 확인할 좋은 기회였다.

***

스페인 마드리드에 도착한 다음 날까지도, 흐린 하늘은 계속되었다.

이른 아침에 일어나 밖으로 나가 날씨를 확인한 김세준이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청량하고 상쾌한 공기가 들어와 몸 구석구석을 훑고 빠져나간다.

“좋네...”

이른 아침의 촉촉한 공기를 만끽한 김세준이 슬며시 웃었다.

버스킹하기 좋은 날씨는 아니지만, 선선하고 서늘한 이슬비의 감촉이 좋아 지어지는 미소.

“세준아! 들어와서 밥 먹어!”

바깥에서 비를 맞는 김세준을 로이가 의아하게 쳐다보며 말했다.

거센 비는 아니지만...

비를 맞으며 가만히 있는 꼴이 영 평범하게 보이진 않았다.

로이의 부름에 김세준이 고개를 끄덕이곤, 부엌으로 향하자 이미 다들 도착해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다.

간단한 시리얼로 허기를 때우는 가벼운 아침.

김세준도 뒤늦게 의자에 앉아 식사를 시작했고, 그들을 향해 정동혁이 오늘의 일정을 알려줬다.

“오늘 버스킹은 원래 계획보다 조금 늦게 시작하겠습니다.”

“늦게요? 몇 시?”

출연진 대표로 요환이 물었고, 정동혁이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답했다.

“지금 오늘 저녁쯤 되면 비가 그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날씨 좀 지켜보고 한 오후 6시쯤에 버스킹하러 출발하는 거로 일정을 수정해야 할 거 같습니다.”

“노을 보면서 버스킹하는 것도 좋지.”

“늦은 시각에 한다고 뭐라고 하진 않겠죠?”

“스페인이 열정의 나라잖아. 여기 밤늦게 시끄럽게 굴어도 별다른 항의도 잘 안 한다더라.”

정동혁의 말에 가지각색의 반응을 내뱉는 사람들.

김세준도 정동혁의 대답에 시리얼을 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포르투갈에선 낮에만 펼쳤던 공연.

지친 몸을 이끌고 퇴근길에 이르는 사람들을 치유해주는 그런 버스킹도 나쁘지 않았다.

“그럼, 식사하시고 저녁까지 오늘 공연 준비하시면서 보내시면 될 거 같습니다.”

간단한 일정 소개가 끝나자 김세준은 서둘러 아침 식사를 마무리했다.

첫날과 달리 오늘 그들의 공연은 제법 다채롭다.

각자 자신의 대표곡을 부른 그때와 달리 오늘은 다양한 가수들의 커버 곡도 부를 예정.

익숙하지 않은 코드와 멜로디를 연주하고, 낯선 노래를 불러야 한다.

거기에 더해, 오늘 같이 듀엣 하기로 한 서지수하고도 합을 맞춰봐야 하는 상황.

6시까지 아직 10시간이나 남았지만, 전혀 넉넉한 시간이 아니었다.

그렇게 점심도 거르고 연습에 빠져 보낸 김세준.

그리고 오후 6시가 됐음에도 날씨는 여전히 우중충했다.

“어우, 비가 안 그쳤는데요?”

버스킹 장소로 출발하기 위해, 숙소를 나왔고, 한 스텝의 말에 정동혁이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한국이나 스페인이나 기상청을 믿지 못하는 건 똑같은 건가.

“다행히 조금 오네. 그냥 해야지 뭐. 천막 챙겼지?”

“네! 챙겼습니다!”

짐을 챙기던 막내 조연출이 크게 답했고, 정동혁은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촬영 여건이 편하진 않겠지만, 그래도 제법 운치 있는 날씨.

카메라에 찍힐 출연진들의 모습은 제법 멋지게 보이리라.///

***

‘포기너 버스킹’의 스페인 첫 버스킹 장소는 마드리드에서도 유명 명소인 마요르 광장이었다.

유럽에서 가장 큰 공공광장 중 하나이자 평일과 주말을 가리지 않고 수많은 관광객과 현지인들이 드나드는 곳.

사면 자체가 높은 건물로 둘러싸여 있고, 중앙엔 평화의 왕이란 별명이 붙은 필립 3세의 동상이 있었다.

버스킹 명소인 만큼, 평소엔 공연과 퍼포먼스를 선보이는 사람들이 종종 보이지만, 비가 오는 오늘은 그들을 제외하곤, 공연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없었다.

하지만, 궂은 날씨에도 산책하러 온 현지인과 관광객들은 제법 많았다.

자신들이 선보일 자리에 처져 있는 천막. 천막 아래 옹기종기 모여 있는 스텝들.

잠시 후 공연이 시작하면 자신들이 공연할 자리였다.

“고생하셨습니다.”

그들의 노고를 위로하며 김세준과 출연진들이 천막 아래에 들어가 악기를 꺼내며 공연 준비를 시작했다.

악기의 조율을 점검하고, 목을 가다듬곤, 보면대를 꺼내 악보를 펼쳐 놓는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향해 호기심 넘치는 눈빛으로 쳐다보는 사람들.

우산을 쓰며 길을 걷다가도 그들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제법 흥미로운 ‘포기너 버스킹’의 모습.

평소 버스킹이 질리도록 열리는 이곳이지만, 이런 날씨에도 열리는 경우는 드물다.

덕분에 수십 명의 이목을 한눈에 사로잡았고, 어느새 자신들 주변을 가득 채운 관객들을 보며 김세준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첫 무대는 세준이하고 예은이지?”

“네.”

요환의 물음에 김세준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고, 그의 옆에 자리 잡은 이예은이 피식 웃었다.

이번 공연의 서두를 알릴 노래. 하필이면 포르투갈 때처럼 날씨와 사뭇 잘 어울리는 노래다.

‘봄비’. 자신과 그가 함께 부른 첫 노래.

“올라.”

김세준과 이예은이 마이크에 대고 입을 열며 관객들에게 인사했고, 그들의 우산을 쓰고 구경 중인 관객들이 박수로 화답했다.

제법 오랜 시간 공연을 기다려온 그들.

김세준과 이예은이 짧게 눈을 마주쳤고, 이내 김세준이 가야금을 뜯었다.

어떤 공연을 보여줄지 기대감 넘치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사람들,

이제 저들에게 한국의 소리를 들려줄 차례였다.

***

‘포기너 버스킹’의 공연. 당연히 그들의 주된 관객은 외국인들이었다.

살면서 가야금 소리는 단 한 번도, 한국 노래는 케이팝만 들어봤던 그들에게 색다른 노래를 들려주는 방송.

하지만 주된 관객들이 그들이지. 그들만 ‘포기너 버스킹’의 공연을 보는 건 아니었다.

마요르 광장으로 산책을 나온 한 노부부.

얼굴의 주름이 자글자글한 둘이지만 서로를 바라보는 얼굴엔 주름 하나하나에 기쁨이 가득했다.

젊은 나이에 고향을 떠나 스페인에 이민 온 동양 여성과 마드리드 토박이의 삶을 살아간 남성.

첫눈에 반한 둘이, 어느덧 한집에 살게 된 세월이 벌써 30년이 지났고, 마요르 광장을 산책하는 건 그들의 중요한 일과였다.

그리고 오늘도 다른 날과 다른 없이 두 손을 꼭 붙잡고 마요르 광장에 나들이를 온 둘.

우산 하나를 같이 쓰며 이슬비 사이를 걸으며 소중한 시간을 공유하던 둘의 눈에 한 곳에 모여 북적이는 사람들이 들어왔다.

호기심을 가진 채 가까이 다가갔고, 이내 둘의 얼굴엔 놀라움이 서렸다.

동양인 한 무리가 모여 촬영하는 모습.

“한국인인가요?”

남편의 물음에 여성이 잠시 주의 깊게 그들을 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생김새와 그들의 억양.

한국인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사람들이었다.

“구경할까요?”

“그래요.”

눈에 그리움과 애틋함이 서린 아내를 보며 남편이 넌지시 물었고, 노인 여성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사이좋게 우산 하나를 나눠쓰며 공연 준비를 지켜보던 둘.

그 모습을 보던 노인 남성의 눈에 호기심이 서렸다.

“오. 저건 뭐예요?”

“...!”

남편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긴 그녀.

눈빛에 당혹감과 아련함이 가득 담겼다.

가야금.

한국의 전통악기인 가야금을 여기서 볼 줄이야.

문득 떠오르는 어렸을 때의 추억.

어쩌다 우연히 보게 된 가야금 연주. 아버지의 손을 꼭 부여잡고 보게 된, 그날의 연주가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재생된다.

“가야금이란 악기에요. 한국 전통악기죠.”

“오호.”

아내의 설명에 남자의 기대감이 한층 더 깊어졌다.

그렇게 한 우산 아래에서 한 남자는 호기심을, 한 여자는 추억과 아련함이란 다른 감정을 가진 채 기다렸고, 잠시 후 김세준이 마이크에 대고 입을 열었다.

어눌한 발음으로 스페인어로 인사를 하고, 제법 유창한 영어로 자신을 소개하는 그.

짧은 인사가 끝나자, 김세준이 가야금을 뜯었고 그 유려한 음색에 남자가 진한 탄성을 뱉었다.

“오...”

예상보다 훨씬 깔끔하고 부드러운 음색.

기대 이상의 소리.

“소리 좋네요...”

아내를 향해 낮게 중얼거리며 감탄을 내뱉는 그.

여성도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오랜만에 들어보는 소리. 추억 속의 자리 잡은 음색하곤 제법 다르지만, 가슴을 울렁거리게 만드는 소리였다.

시종일관 감탄을 터트리며 김세준의 무대를 구경하는 남편과 달리, 아내는 묵묵히 감회에 젖은 표정으로 그의 무대를 바라봤다.

아련한 옛 추억을 절로 떠오르게 만드는.

정겹고, 그리움 가득한 고향의 소리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