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야금 뜯는 천제가수-97화 (97/148)

#97

포기너 버스킹(2)

“아, 카메라 감독님. 아시죠? 이 이야기는 컷.”

서지수가 카메라를 향해 손으로 목을 자르는 시늉을 하자,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서지수와 김세준의 이야기.

아직 세간에 발표된 내용이 아니다.

카메라 감독 짬이 어느덧 10년. 이런 이야기를 듣는 경우야 비일비재했으니 그다지 놀랄 말은 아니었지만.

“근데 왜 우리 회사 선택한 거야? 솔직히 난 안 될 거라고 봤거든.”

서지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구심을 표했다.

아메리카 레코드가 김세준에게 접근했다는 건, 관심이 조금 있으면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

아메리카 레코드와 SY 엔터테인먼트. 애사심을 가지고 비교 해봐도, 전자가 더 크고 좋은 회사라는 걸 부정할 수 없었다.

그녀가 김세준의 입장이었다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아메리카 레코드를 선택했으리리라.

“그냥요.”

김세준이 민망한 웃음을 지으며 얼버무리며 답했고, 서지수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분명 골머리가 아프도록 고민한 후 결정했을 터. ‘그냥’이란 답변은 생각을 밝히기 싫다는 거겠지.

“알겠어. 어찌 됐든 우리 회사를 선택한 건 후회 없을 거야. 수연이가 아주 제대로 마음을 품었거든.”

서지수가 말을 남기곤 몸을 돌렸고, 김세준도 머리를 긁적이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자신이 SY엔터테인먼트를 선택한 이유.

엄청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정수연이 보여준 진심, SY 엔터테인먼트의 능력 등 고려를 많이 했지만, 가장 큰 이유.

‘용의 꼬리보단 뱀의 머리가 낫지.’

아메리카 레코드랑 거대한 용.

자신에게 큰 관심을 보여주긴 하나, 자신이 그 회사에 들어간다고 해도 그들은 자신을 대신할 그리고 자신보다 유명한 가수가 수두룩했다.

반면, SY 엔터테인먼트.

그들에게 있어 자신은 유일한 희망.

자신과 함께 세계에 진출하려는 야망을 가진 회사였고, 자신이 거대한 지분을 차지할 터.

자신이 좀 더 자유롭게 활동하고, 자신의 의사를 적극적으로 반영해줄 회사였다.

아메리카 레코드에 비해 자신을 더 간절히 원하는 회사라는 뜻.

아레스 뮤직도 아티스트의 의사를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회사라는 점에서 좋아했던 그인 만큼, 그런 점을 고려했을 때 SY 엔터테인먼트에 좀 더 끌리는 게 사실.

아무래도 아메리카 레코드는 자신에게 이런저런 제약이 걸릴 가능성이 많았으니까.

“오빠!”

생각을 갈무리할 때, 그의 눈앞에 얼굴을 들이미는 한 사람.

이번 방송을 같이 찍는 그의 여자 친구인 이예은이 싱긋 웃으며 나타났다.

“왔어?”

“네. 차가 생각보다 안 막혀서 빨리 왔어요.”

귀엽게 웃는 그녀의 모습에 순간 이성을 잃고,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을 뻔했다.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촬영하고 있는 지금. 대참사를 일으킬 뻔한 그가, 고개를 돌려 헛기침을 한 후 작은 미소로 그녀를 반겼다.

“잠시 만요. 다들 오셨으니까, 다시 한 번 일정 및 세부 사항 말씀드릴게요.”

이번 방송의 메인 PD인 정동혁이 어수선하게 있는 출연진들을 한 자리에 모으며 입을 열었다.

오랫동안 구상했던 촬영을 드디어 찍기 때문일까?

기대감과 흥분감이 얼굴에 가득한 그.

“일단 저희 일정은 다들 아시겠지만, 이 종이 한 번 더 살펴보시고요. 안에 촬영 동안 주의해야 할 사항 같은 것도 적혀 있으니까 다들 꼭 숙지해주세요. 그리고 카메라가 24시간 동안 돌아가는 점도 주의해주시고요. 숙소 내에도 카메라 설치되니까 특히 여성분들은 더 주의 부탁드립니다.”

정동혁의 말에 출연진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사전협의 된 사항.

이제 와서 불만을 가질 사람이 있을 리가.

그리고 정동혁이 건네준 종이를 살펴보며 김세준의 가슴에 다시 기대감이 자리 잡았다.

총 2주 동안의 촬영.

포르투갈부터 시작해, 스페인, 프랑스로 이어지는 일정.

3개의 나라에 버스킹 명소를 돌아다니며 길거리 공연을 하는 촬영.

‘어떨까...’

이미 외국인들에게 공연한 경험이 있지만, 유럽은 그에게 있어 미지의 장소.

게다가 거대한 공연장이 아닌 길거리에서 하는 공연.

그런 곳에서 공연하는 자신의 음악이 유럽인들에게 얼마나 깊은 감명을 줄 수 있을까.

마음속에 슬며시 생기는 호기심과 기대감.

비단 그뿐만 그런 게 아닌지, 다른 출연진들의 얼굴에 기분 좋은 긴장감이 보였다,

가수 인생 10년을 넘어가는 몇몇 출연진들도 처음 해보는 경험.

항상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게 익숙했던 그들이 처음 마주할 낯선 시선.

“아, 빨리 공연하고 싶네요.”

요환이 일행 대표로 말을 뱉으며 의욕을 내비쳤고, 다른 이들이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빨리 그 장면을 찍어보고 싶네요. 그럼 다들 이제 출발하시죠.”

정동혁이 손목시계를 힐끔 보곤 몸을 돌렸고, 스텝들과 출연진들이 그 뒤를 따랐다.

김세준이 해외 활동을 시작하기 전, 마지막 국내 활동.

‘포기너 버스킹’의 그 아름다운 예능의 첫 시작이었다.

***

약 20시간이 넘는 비행시간.

그 고된 비행이 끝나고 포르투갈 리스본 공항에 도착한 김세준이 찌뿌둥한 허리를 피며 기지개를 켰다,

“으아아아아...”

비즈니스 석으로 왔어도 쉽지 않은 장거리 비행.

기지개를 키자 온몸에서 비명을 내질렀고, 다른 출연진들도 그와 마찬가지로 기지개를 키며 비명을 질렀다.

“오...”

그렇게 잠깐 굳은 몸을 풀고 눈을 돌려 주변을 확인하니 감탄이 나왔다.

한국과는 다른 이국적인 풍경.

유럽에 도착했다는 게 실감나며, 다시 한 번 가슴이 두근거렸다.

수많은 카메라 때문인지 자신들을 힐끔힐끔 보며 지나가는 사람들.

하지만 그들의 눈엔 호기심만 서려 있을 뿐, 연예인을 봤다는 흥분은 느껴지지 않았다.

카메라가 없었으면 관심도 가지지 않고 각자의 발걸음을 바삐 옮겼으리라.

“세준이도 유럽에선 아직 안 유명한가 보네?”

요환이 슬그머니 다가와 웃으며 말했고, 그 옆에 있던 로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 난 그래도 세준이 정도면 어느 정도 알아보는 사람은 있을 줄 알았는데.”

두 사람의 말에 다른 출연진들도 다가와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서 이예은과 함께 어린 편에 속하는 그지만 인지도만 봤을 땐 출연진 중에서 제일 유명한 가수라고 봐도 무방했다.

특히 한국에 국한하지 않고, 세계로 따지자면 인지도가 그와 비슷한 가수는 ‘포기너 버스킹’ 출연진은 물론, 한국에서도 흔하지 않다.

무려 한국인 최초로 그래미 어워드 시상식에서 무대를 꾸민 가수,

그리고 한 달 전 열렸던 그의 첫 단독콘서트인 ‘풍악’은 이백만 명에 달하는 외국인들이 시청까지 할 정도였으니.

‘그래미 어워드’의 영향으로 주로 미국인들이 시청하긴 했지만 유럽에서도 알아보는 사람은 있을 줄 알았는데.

“조금 서운하겠어?”

“서운하긴요. 제가 월클도 아니고, 당연히 이런 반응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능글맞게 묻는 요환에게 김세준이 고개를 저었다.

선배에게 보이는 겸손이 아닌, 진심.

‘그래미 어워드’로 그나마 얼굴을 알리고 인지도를 얻은 미국에서도 자신을 길거리에서 알아보는 이는 많지 않을 터.

하물며 미국이 아닌 유럽.

자신의 얼굴을 보자마자 눈치 채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혹여 자신의 얼굴을 안다고 해도 긴가민가하다가 넘어갈 사람이 태반이다.

한국에 있어야 할 자신이 지구 반대편인 유럽에 있을 리가 없지 않나.

실제로 김세준과 눈이 마주쳐도 금세 고개를 돌리고 갈 길을 가는 사람들.

그런 외국인들의 무관심에 정동혁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김세준의 얼굴이 아닌 노래를 듣고 사람들이 발걸음을 멈춰야하는 이번 방송 플롯.

다행히 아직까진 그의 얼굴을 알아보는 이들은 없어 보였다.

김세준에게 가면을 씌우고 공연을 시킬까란 고민까지 하던 그.

어차피 가야금이란 악기 때문에 금세 정체가 탄로 날거란 작가들의 만류에 무산된 계획이지만, 그 정도로 고민이 많던 그였다.

‘다행이야.’

“자자, 이동하겠습니다.”

정동혁이 슬그머니 미소 지으며 다시 일행들을 통솔하고, 공항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런 정동혁의 뒤를 따르며 김세준이 오늘의 일정을 떠올렸다.

포르투갈 시간으로 지금은 오후 2시.

오늘 하루는 숙소에서 여독을 푸는 게 전부다.

저녁준비를 하고, 머리를 맞대고 어떤 공연을 선보일지 구상하고 준비하는 시간.

이번 방송을 관통하는 주제가 ‘한국 유명 가수의 노래가 외국에서도 통할까.’ 이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일종의 힐링방송.

시청자들에게 이국적이고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주고, 연예인들의 소소한 여행기를 보여주는 플롯.

자극적이지 않고, 보는 이로 하여금 마음을 뭉실뭉실하게 만들며 작은 미소를 지어지게 하는 방송.

첫날부터 무리하게 버스킹을 하는 것보다, 오늘은 그런 소소한 장면을 찍으리라.

실제로 출연진들을 찍는 소수의 카메라를 제외하고 다른 카메라들은 아까부터 배경을 찍느라 여념이 없었다.

“오! 날씨 좋다!”

공항 밖으로 나오고, 절로 나오는 탄성.

포르투갈의 화창한 태양빛이 내리쬐며 그들을 반겼고, 동시에 시원한 바람이 그들의 머릿결을 스치고 지나간다.

서울의 4월 날씨와 비슷한 리스본의 3월의 날씨. 여행하기 딱 좋은 시기이자, 가장 날씨 좋은 시간대인 2시.

잠깐 포르투갈의 날씨를 만끽하고 방송국에서 섭외한 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버스 내에서도 이국적인 창밖 풍경을 감탄하며, 동시에 이런 날씨에 버스킹 할 생각에 슬며시 미소가 지어졌다.

“내일은 일단 각자 공연하는 거죠?”

제니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고, 다른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첫 버스킹은 각자 자신의 곡을 공연하는 걸로 이미 합의했다.

그리고 두 번 째 공연부턴 서로간의 합주, 및 다른 가수들의 노래를 커버를 한다.

다들 머릿속으로 어떤 곡을 부른지 고민이 한참.

아직 발표한 곡이 한 곡밖에 없는 이예은만이 아무 걱정 없이 창밖을 바라보며 풍경을 즐겼다.

“세준이 너는 무슨 곡 부를 거야?”

서지수의 물음에 김세준이 슬며시 미소 지었다.

포르투갈의 도착하기 전까진 고민이 한참이었다.

기념비적인 첫 버스킹에서 어떤 곡을 부를까.

자신의 데뷔곡인 ‘인연’ 혹은 최초로 빌보드 차트에 이름을 올린 ‘별이라면’?

많은 곡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고, 어떤 곡 하나를 부를지 딱 정하지 못했지만.

공항 밖으로 나오는 순간 그 고민이 싹 사라졌다.

이런 날씨엔 이 곡을 부를 수밖에 없지 않나.

아마 방송을 보는 시청자들도, 포르투갈의 날씨를 간접적으로 느끼면서 동시에 자신이 이 곡을 부르길 간절히 원할 터.

“전, 봄바람 부르려고요.”

“어머? 방송 좀 아는구나?”

서지수가 장난스럽게 물었고, 메인 PD인 정동혁이 흡족하게 웃었다.

방금 장면, 김세준의 답변을 묵음 처리하고 예고편으로 쓰기에 딱 좋은 대화.

그리고 실제로 자신도 그가 첫 공연으로 ‘봄바람’을 부르면 좋겠다고 생각한 참이었다.

포르투갈의 환상적인 날씨와 이국적인 장소를 여행 내내 시종일관 찍을 터.

그 장면들을 배경으로 울려 퍼지는 김세준의 ‘봄바람’.

생각만 해도 절로 미소가 나오는 그림의 한 폭 같은 장면이었고, 다른 이들도 똑같은 생각을 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김세준이 시선을 창밖으로 돌리며 슬며시 미소지었다.

한국에선 이미 봄마다 울리는 연금 같은 자신의 곡.

어쩌면, 유럽에서도 연금을 탈지 모를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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