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야금 뜯는 천제가수-87화 (87/148)

#87

별무리(5)

“흠. 이런 순위는 예상왼데?”

이해진과 하동준을 만나고 온 뒤, 삼일 뒤.

김세준이 음원 차트 순위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앨범 발매 이후 이제 시간이 제법 흘렀고, 점점 치고 올라오는 자신의 수록곡들.

보편적으로 타이틀곡을 제외한 다른 곡들은 발매 날 이후 순위가 점점 떨어지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흔히 말하는 오픈 빨의 효과를 톡톡히 보다가 이내 오픈 빨 효과가 끝나면 순위가 곤두박질친다.

하지만 김세준의 이번 앨범은 달랐다.

순위가 떨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점점 올라가는 그의 곡들.

특히 이예은이 피쳐링한 ‘구름 속의 별’과 ‘브라이니’가 피쳐링한 ‘초신성’.

두 곡의 순위는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1위. 김세준 - 별이라면.

2위. 김세준(Feat. 이예은) - 구름 속의 별.

3위. 김세준(Feat. 브라이니) - 초신성.

무려 1, 2, 3등을 자신의 곡으로 채운 그.

기쁘면서도, 생각지도 못한 곡들의 선전에 어안이 벙벙했다.

“예은이는 그래도 기대는 했지만, 브라이니는 완전 의외야.”

이예은이야 꾸준히 인기를 쌓으며 자신의 존재감을 부각하는 중이니 이해가 갔지만, ‘브라이니’의 경우엔 자신도 예상 못 한 선방이었다.

그가 기대했던 곡들은 에드 케인이 피쳐링한 ‘A Nothing Star’와 B.ONE의 맴버인 세현과 수호가 피쳐링한 곡들.

이번 앨범의 화려한 피쳐링 라인업 중에서도 이름값이 가장 드높은 사람들이었으니까.

에드 케인이야 말할 것도 없는 월드 스타고, B.ONE도 아시아에선 에드 케인 부럽지 않은 인기를 끄는 아시아 스타다.

세 사람이 피쳐링한 곡의 순위도 나쁘지 않다. 자신이 예상했던 등수인 10위 권 안팎에서 존재감을 내뿜고 있었으니까.

“하아... 브라이니라...”

상당히 흡족한 이번 앨범의 흥행이지만, 마음에 걸리는 딱 한 가지.

‘브라이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브라이니’의 맴버인 연아하고의 관계가 내심 마음을 무겁게 내리누른다.

‘초신성’의 흥행이 싫다는 뜻은 아니다.

자신의 곡이 많은 사랑을 받는데 싫을 리가.

다만 이 곡이 흥할수록, ‘브라이니’하고의 접점이 많아질 거고, 당연히 연아하고 얼굴을 부딪칠 날이 늘어날 터.

껄끄러운 관계가 된 그녀하고의 만남이 썩 달갑지만은 않기에 김세준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당장 이번 주에만 해도 그녀와 함께 하는 예능이 하나 있었다.

자신과 이예은과 ‘브라이니’가 게스트로 참가하는 예능.

“괜찮겠지?”

깔끔하게 정리한 관계이긴 하지만, 연아와 예은이하고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게 내심 불안한 그였다.

***

‘브라이니’가 탄 거대한 벤 안에는 활기가 가득했다.

자신들이 피쳐링한 곡의 순위가 3위까지 올라갔고, 나날이 올라가는 자신들의 인지도가 눈앞에 보인 지난 날들이었다.

방송국에서도 간간이 섭외가 들어오고, 인터넷에서도 자신들의 이야기가 종종 보인다.

데뷔한 이래로 처음 받아보는 뜨거운 관심.

비록 자신들의 곡은 아니더라도,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던 그녀들에겐 사람들의 시선이 그저 반갑고 기쁠 따름이었다.

게다가 자신들이 참여하는 이번 예능.

요즘 인기가 조금 시들고, 케이블 예능이긴 하지만 고정적인 시청자가 있는 방송이다.

게스트를 가수들로만 초청하는 음악 예능으로 K-POP 해외 팬들에게도 제법 인기 있는 예능.

게다가 자신들도 데뷔 초창기에 한 번 출연한 적이 있어서 부담감과 긴장이 조금 덜하기도 했다.

파이팅 가득한 마음을 가지고 방송 스튜디오로 들어간 그녀들.

그리고 동시에 김세준과 이예은도 ‘브라이니’와 비슷한 시각에 방송국에 도착했다.

“헤헤. 오빠랑 같이 방송하니까 좋네요.”

“나도 좋아.”

서로 마주 보며 배시시 웃는 둘이었고, 둘의 뒤에서 이주성과 이예은의 매니저가 사방을 매의 눈으로 훑었다.

그저 단순히 웃는 것 뿐이기에 사진이 찍혀도 크게 논란이 될 장면은 아니지만, 얼마 전 있었던 충격적인 사건.

그 사건을 들은 두 사람이었고, 사방을 경계하며 주차장을 빠져나와 스튜디오로 향했다.

“어. 오셨네. 저희 초면이죠? 김희철입니다. 섭외 받아줘서 고마워요.”

두 사람이 스튜디오에 도착하자, 촬영현장을 진두지휘하던 메인 PD인 김희철이 두 사람을 반겼다.

“처음 뵙겠습니다. 섭외해주셔서 저희가 고맙죠.”

“안녕하세요.”

“솔직히 말하자면 섭외 힘들 거로 생각했거든요. 세준 씨 정도의 사이즈면 우리보다 큰 방송에서도 숱하게 부를 텐데.”

“가수들의 축제도 충분히 큰 방송이잖아요.”

“그것도 옛말이죠. 미튜브에 밀려서 이제 언제 망할지도 몰라요.”

김희철이 한숨을 푹 내쉬며 푸념을 내뱉었다.

‘가수들의 축제.’가 K-POP의 인기에 힘입어 영광을 누렸던 것도 벌써 몇 년 전.

가파르게 성장한 미튜브 때문에 점점 그 인기가 시들어가고 있었다.

“그래도 아직 해외에선 인기 많지 않습니까.”

“그게 마지막 생명줄이죠. 해외에서 인기도 떨어지면 진짜 끝.”

자신의 목을 손으로 긋는 시늉을 하며 김희철이 말했고, 김세준이 작은 위로를 뱉었다.

“다시 잘 되실 겁니다.”

실제로 ‘가수들의 축제’가 금방 망하진 않는다. 결국엔 씁쓸히 종영하긴 하지만.

“고마워요. 그래도 이번 세준 씨하고 예은 씨 출연 덕분에 한숨 놨지. 오늘 잘 좀 부탁드려요.”

“열심히 할게요!”

이예은이 김희철을 보며 귀엽게 두 손을 불끈 쥐었고, 그가 귀엽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고마워요. 아 저쪽이 대기실이에요. 전 아직 할 일이 있어서.”

“네. 있다 뵙겠습니다.”

인사와 함께 그가 사라졌고, 김세준과 이예은이 대기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

그리고 대기실로 향하는 복도로 들어서자 건너편에 보이는 다섯 명의 여자들과 한 남자.

그들을 본 김세준의 표정이 꿈틀거렸고, 이예은도 두 눈을 크게 떴다.

그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김세준과 연아의 관계를.

반대편에서도 그들을 발견했는지 순감 움찔했고, 한 남자만이 호들갑을 떨며 김세준을 향해 달려왔다.

“세준 씨! 오랜만이네요!”

아무것도 모르는 김경호가 얼굴 가득 함박웃음을 지으며 달려와 그의 두 손을 움켜잡았다.

“제가 세준 씨에게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비굴해 보일 정도로 허리를 굽히며 감사를 표하는 그였고, ‘브라이니’가 그의 뒤를 쭈뼛쭈뼛 따라와 허리를 숙였다.

‘알고 있구나.’

그런 ‘브라이니’의 반응을 보며 김세준이 그녀들도 자신과 연아의 일을 알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당연히 건가...’

한 숙소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니만큼 필연적으로 눈치챌 수밖에.

크게 개의친 않았지만 다섯 명의 여자가 자신을 보며 눈치 보는 게 썩 반가운 기분은 아니었다.

‘어색하네.’

그녀들의 시선.

자신을 향해 고마우면서도 야속한 눈빛에 김세준이 천연덕스럽게 인사를 건넸다.

굳이 김경호 앞에서 자신들이 어색하다는 걸 티 낼 필요는 없었다.

“오랜만이네?”

“네. 안녕하세요!”

다행히 ‘브라이니’도 김세준의 인사에 어색한 기류를 지우곤 밝게 인사했고, 이예은도 그녀들과 아무렇지 않게 인사를 나눴다.

“오빠.”

“응?”

“고마워요. 정말로 고마워요. 저뿐만 아니라 다른 맴버들도 전부. 오빠한테 고마운 감정 하나는 진심이에요.”

‘브라이니’에서 연아와 함께 가장 연장자인 지수의 말.

그녀의 말에 다른 맴버들도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동의했다.

연아가 안쓰럽긴 하지만 그녀들이 김세준에게 가진 감정은 미운 감정보다 감사한 감정이 더 컸다.

그건 심지어 연아조차도 느끼는 감정이었고, 그런 그녀들의 인사에 김세준이 작은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네.”

지수가 뱉은 말이 단순히 감사 인사가 아니라는 걸 눈치챘고, 그녀들의 마음 씀씀이가 고마웠다.

자신들의 눈치를 보지 말라는 인사, 그리고 자신들은 아직도 그를 은인으로 여긴다는 속뜻이 담긴 말이었다.

덕분에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

‘가수들의 축제’는 일상 토크로부터 시작해 간단한 게임 및 앨범 홍보가 주된 플롯인 예능이었다.

김세준이 이 예능에 참가하기로 결심한 이유도 앨범 홍보의 목적이 컸다.

한국에선 인기가 많이 시들었지만, 해외에선 아직 고정 팬들이 남은 예능.

특히 아시아에서 많은 인기를 끄는 예능이었고, 해외 활동을 목전에 둔 김세준으로선 자신의 앨범을 홍보할 좋은 기회였다.

“그리고 여기까지 오셨는데 앨범 홍보 안 하고 가실 수 없죠?”

“당연하죠. 게다가 오늘이 보통 무대가 아니거든요. 요새 대한민국을 뒤흔들고 있는 세 곡을 들어볼 기회인데.”

MC를 맡은 두 남자가 천연덕스럽게 뱉은 짜놓은 멘트.

미리 짜놓은 말이긴 하지만 실제로 두 MC를 비롯하며 많은 사람이 이번 홍보 무대를 손꼽아 기다리는 중이었다.

무려 현재 대한민국 음원 차트 1등부터 3등까지의 노래.

그 노래를 한곳에서 볼 기회였고, 2위인 ‘구름 속의 별’과 3위인 ‘초신성’은 그동안 처음으로 방송에서 선보이는 노래였다.

“자, 그러면 먼저 구름 속의 별부터 들어볼까요?”

이어진 MC의 말에 김세준과 이예은이 작게 웃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대 중앙으로 나선 후 서로를 바라보며 그윽한 눈빛을 보내는 둘.

‘구름 속의 별’은 연인들의 사랑 노래.

남들이 보기엔 감정 연기를 하는 둘의 모습이었지만 김세준과 이예은에겐 연기가 아닌 진심이었다.

이내 두 사람의 준비가 끝나자 방송국에서 준비한 MR이 흘러나왔다.

‘별무리’ 앨범 자체를 일렉트로닉 팝으로 구성한 만큼 전자음 소리와 가야금 소리가 조화를 이루며 스튜디오에 울려 퍼졌다.

타이틀 곡인 ‘별이라면’의 쓰인 것과 달리 잔잔하고 느릿느릿하게 울리는 가야금 소리.

그런 가야금 소리와 전자음이 만나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는 곡.

이예은 특유의 분위기인 몽환적이고 신비로운 감성과 썩 잘 어울리는 노래.

김세준을 향해 꿀 떨어지는 눈빛을 보내던 이예은이 이내 입을 열었다.

문득 잠이 오지 않는 밤.

밤하늘이라도 보면

잠이 들까 싶어 밖을 나왔죠.

‘와...’

두 사람의 무대를 부러운 눈빛으로 쳐다보던 연아가 이예은의 목소리에 진한 감탄을 뱉었다.

듣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는 음색.

유니크한 그녀의 목소리와 곡의 몽환적인 분위기가 이렇게 잘 어울릴 수 없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구름만 가득한데

구름 속의 별 하나가 반짝이네요.

그리고 이어진 김세준의 파트.

이예은을 바라보며 내뱉는 그의 목소리.

허스키한 목소리지만 연아의 귓가엔 이보다 부드러울 수 없었다.

저 구름 가득한 하늘에서 빛나는 별이, 마치 자신의 울적한 마음에 자리 잡은 연인을 의미하는 곡.

마냥 달콤한 사랑 노래는 아니지만, 많은 연인이 듣고 공감하는 노래.

‘노래 좋네...’

코앞에서 보는 자신이 짝사랑한 사람이 부르는 사랑 노래.

그 날 이후로 감정을 많이 죽였지만, 사람의 감정이 그리 쉽게 정리된다면 누가 아파할까.

진득하게 남아 있는 자신의 감정.

김세준이 저 노래를 자신에게 불러준다면.

그와 단둘이 밤하늘의 별을 올려다볼 수 있다면.

그가 자신을 향해 웃음 지으며 머리를 쓰다듬어준다면.

얼마나 기쁠까.

그녀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지어진다.

이뤄지지 않을 자신의 소망.

동시에 진득하게 남아 있던 감정이 산산이 산화한다.

그리고 동시에 진한 부러움을 느꼈다.

저 노래를 별빛 가득한 밤하늘 아래에서 들을 누군지 모를 한 사람이.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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