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별무리
“후후...”
전신 거울 앞에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연아가 자신의 몸을 이리저리 살폈다.
청순해 보이는 하얀색의 블라우스와 청바지.
얼굴은 순수해 보일 수 있게 옅은 화장을 칠했고, 머리도 헤어롤과 고대기로 볼륨을 잔뜩 집어넣었다.
거기에 옷과 딱 맞는 브라운 계열의 숄더백까지.
“좋아.”
자신의 모습이 만족스러운지 고개를 끄덕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고, 동시에 ‘브라이니’의 맴버인 줄리아가 그녀의 방문을 벌컥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뭐해? 우리 피자 시켜 먹을 건데 같이 먹을...어라?”
“야! 노크 좀 하고 들어오랬지!”
후줄근한 차림인 다른 맴버들과 달리 잔뜩 꾸민 그녀를 보며 줄리아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노크는 무슨. 여기 내방이기도 하거든? 근데 뭐야?”
“뭐...뭐가?”
그녀의 웃음에 연아가 몸을 움츠리며 눈을 흘겼고, 줄리아가 그녀 주변을 빙빙 돌았다.
“오늘 어디 간다고 했나?”
“말했잖아. 오늘 친구하고 약속 있어서 나간다고.”
“흐음. 보통 친구가 아닌 거 같은데?”
그녀의 온몸을 구석구석 핥으며 줄리아가 꼬치꼬치 따지기 시작했다.
“평소 화장도 잘 안 하던 사람이 화장도 하고, 귀찮아서 캐주얼하게 입고 다니던 사람이 옷도 신경 써서 입고... 남자구나?”
뜨끔!
정곡을 찌르는 줄리아의 말에 심장이 철렁한 연아가 오히려 큰소리를 치며 재빨리 이 상황을 벗어나기로 했다.
괜히 다른 맴버들의 귀까지 이야기가 들렀다 간 여간 귀찮아지는 게 아니었다.
“대박! 계속 세준 오빠 노래를 부르더니, 오늘 뭐 만나기로 한 거야?”
능글맞은 미소와 함께 묻는 그녀에게 괜히 큰소리치며 재빨리 발걸음을 옮겼다.
“뭔...뭔 소리야! 나 늦었어. 간다.”
“갔다 오면 알려줘!”
그녀를 지나 재빨리 숙소를 벗어났고, 현관문이 닫히기 직전, 줄리아의 호들갑이 들려왔고 이내 맴버들의 경악에 찬 비명이 들려왔다.
갔다 오면 한동안 제법 시달릴 게 훤했지만, 그녀의 입가엔 진한 미소가 담겨 있었다.
“설마 먼저 연락이 올 줄이야...”
김세준에게 온 연락.
카페에서 커피 한 잔 마시자는 간단한 연락이지만, 받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지를 뻔했다.
연정을 품고 있던 상대에게 온 연락.
오늘 하루가 오기를 오매불망 기다렸고, 연락받은 순간부터 어떤 옷을 입을지 내내 고민했던 그녀다.
“커피 마시고 뭐하자고 하지? 밥? 영화?”
부푼 가슴을 가득 안고, 미리 약속해놨던 한적한 카페로 가자 창문 너머 그의 모습이 보였다.
모자를 쓰고, 마스크를 가리긴 했지만 단번에 알아봤고, 마음이 콩닥거렸다.
카페 문을 들어가기 전, 심장을 부여잡고 한숨을 크게 쉬며 마음을 다스렸고, 이내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오빠?”
“어. 왔어?”
핸드폰을 보며 심각한 표정을 짓던 그가 자신을 발견하자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답했다.
‘평소와는 다른데?’
마지막으로 본 게, 아시안 뮤직 어워드.
그때하곤 반응이 사뭇 다른 그의 모습에 연아의 가슴이 철렁했다.
나긋나긋하고 따뜻했던 목소리가 아닌, 뭔가 삭막한 느낌.
방금까지 날아갈 거 같던 기분이, 한순간에 불안하고 초조해진다.
싸한 촉이 그녀의 가슴을 후벼팠고, 김세준이 그녀를 지나쳐 카운터에서 주문한 후 커피를 들고 자리에 돌아왔다.
“아, 고마워요.”
불안한 마음을 감춘 채 애써 미소지으며 그가 건네준 커피를 받아들었고, 슬쩍 그의 얼굴을 살폈다.
‘어두워 보여.’
그동안 보지 못했던 그의 일면이 보인다.
표정이 무겁고 어둡다.
“연아야.”
“네?”
불안한 예감에 목소리가 떨렸다.
“송 피디님한테 이야기 들었어.”
그의 말에 송대준과 나눈 이야기가 머릿속에 빠르게 스쳐 갔다.
자신이 생각해봐도 티가 나던 언행들.
“아, 송대준 피디님이 너를 콕 집어서 언급한 건 아닌데, 내가 예상하기론 너인 거 같아서.”
자신의 마음을 들킨 그녀의 볼이 빨개졌고, 부끄러운 마음에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동시에 불길했던 예감이 엄습하는 걸 느꼈다.
“네 마음 정말 고마운데, 미안하지만 나 좋아하는 사람 있어.”
연아에게 정말 미안하지만, 끝끝내 연애 사실을 밝힐 순 없어 에둘러서 말하는 그.
“...!”
‘아...’
이어진 그의 말에 고개를 숙인 연아가 충격으로 입을 벌렸고, 두 눈의 초점이 갈 길을 잃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때 솔직하게 말해주지 못해서 미안해.”
계속되는 김세준의 담담한 말에 연아가 남몰래 코를 훌쩍인 후 고개를 팍 들었다.
눈물이 날 거 같지만, 애써 밝은 미소를 지었다.
“아, 무슨 소리예요. 오빠. 오빠가 뭐가 미안해요. 제가 미안하죠. 괜히 난처하게 만들어서.”
“그래...”
김세준이 짧게 답했고, 이어진 침묵.
그 찰나의 침묵 후 연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오늘 시간 뺏어서 죄송해요.”
“아니야. 내가 미안하지. 오늘 이 말 하려고 너 부른 거거든.”
“네. 아, 그리고 앞으로 괜히 저 의식해서 행동 안 하셔도 돼요. 그냥 편하게. 무슨 말인지 알죠?”
마음과 다른 말을 내뱉으며 그녀가 밝게 웃는다.
자신들에게 동아줄을 내려준 그.
혹여 자신 때문에 그와의 관계가 틀어질까, 걱정하는 그녀였고, 김세준이 그녀의 기특한 마음을 눈치채곤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먼저 그렇게 말해주니까 고맙네. 그럼 난 먼저 갈게.”
“네. 다음에 봬요.”
김세준이 뜸 들이지 않고 발걸음을 옮겼고, 연아는 그가 나간 지 한참을 됐어도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바보 같네...’
스스로의 모습이 이렇게 처량할 수가 없었고, 그동안 들떴던 자신이 너무 한심했다.
고백도 하지 못하고 차여버린 자신의 처지.
한참을 자리에서 멍하니 있던 그녀가 발걸음을 옮겨 숙소로 향했고, 그녀의 승전보를 기대하던 같은 맴버들은 그녀를 부둥켜안으며 위로했다.
***
“후우...”
김세준도 집으로 돌아와 깊은 한숨을 뱉었다.
“이것도 쉽지 않네.”
난생처음 여자의 마음을 거절해봤다.
회귀하기 전은 여자하곤 연관이 거의 없는 삶을 살았기에 처음 느껴보는 감정.
죄지은 것도 아니지만, 마음이 무겁고 미안한 감정이 물씬 들었다.
카페에서 봤던 연아의 표정.
애써 밝은 듯 웃지만, 그 안에 담긴 슬픈 감정이 여실히 느껴져 더욱 마음이 아팠고, 그 얼굴을 뒤로한 채 발걸음을 옮겨야 하는 게 미안했다.
“잘 지낼 수 있겠지?”
게다가 앞으로 앨범 활동을 하며 얼마나 더 마주칠지도 모를 일.
나중에 다시 그녀를 만날 때 어떨지 생각하자 벌써 어색하고 온몸이 간지러웠다.
“아니야. 그래도 이게 맞지.”
자신의 여자친구인 이예은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아마, 자신이 그녀의 마음을 계속 모른 체하고 질질 끌었으면 결국 상처받는 건 예은이였으리라.
“잘한 거지. 게다가 새로운 경험도 해봤으니까.”
들고 온 커피 한 잔을 홀짝이며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이번에 느낀 색다른 감정.
허투루 버릴 경험이 아니었다.
가수는 다양한 감정과 경험을 어루만져야 하는 직업.
“음... 이런 노래도 좋을 거 같아.”
김세준이 발걸음을 옮겨 배란다로 향했다.
따사로운 햇살과 차가운 바람이 공존하는 날씨를 만끽하며 그는 자신의 감정을 천천히 곱씹으며 내면 깊숙이 들여다봤다.
언젠간 자신의 곡에 이 감정을 완벽히 드러내기 위해서.
***
연아하고의 일도 일단락하자 앨범 작업은 막힘 없이 쑥쑥 진행됐다.
모든 곡의 녹음 작업이 끝났고, 송대준은 믹싱과 프로듀싱 작업에 들어갔으며 김세준도 뮤직비디오 촬영에 임했다.
그리고 그가 뮤직비디오 촬영에 들어감과 동시에 아레스 뮤직에서도 본격적으로 움직였다.
김세준의 팬들이라면 오매불망 기다려왔을 대대적인 소식들.
첫 정규앨범 소식만으로도 팬들은 난리가 났지만, 이어진 소식엔 열광했다.
무려 첫 단독 콘서트.
그의 공연을 본 사람들이라면 하나 같이 입을 모아 칭송하는 그의 무대 퀄리티.
비록 고척 스카이돔이 음향적인 부분에서 아쉬움이 많이 느껴지는 장소긴 했지만, 대부분 팬은 이번 장소섭외에 매우 흡족해했다.
첫 단독 콘서트를 고척 스카이돔에서 연다는 상징적인 의미도 좋았고, 무려 2만 명이나 들어설 수 있는 콘서트 장소.
게다가 대형 스타디움인 만큼, 무대의 화려함은 작은 콘서트홀보단 훨씬 볼만했다.
게다가 표를 구하는 것도 훨씬 여유로울 테니까.
이틀 동안 펼치는 공연이었고, 4만 개란 좌석이 쉽게 매진 될 숫자는 아니지 않나.
뮤직비디오 촬영 도중 쉬는 시간에 핸드폰으로 사람들의 반응을 확인하던 김세준이 슬며시 웃었다.
팬들의 응원이 적힌 댓글을 보자 저절로 지어지는 웃음.
얇은 재킷만 입고 있어 싸늘했던 몸이 따뜻해졌고, 제법 힘든 촬영을 버틸 원동력을 얻었다.
‘보통 깐깐하신 분이 아니네.’
슬쩍 고개를 들어 이번 뮤직비디오 감독을 맡은 남자를 쳐다봤다.
머리를 깔끔하게 전부 밀어버린 대머리와 수더분하게 나 있는 턱수염.
딱 봐도 자신은 예술가요, 라고 말하는 듯한 인상을 주는 남자.
김세준이 어렵게 고용한 뮤직비디오 계의 거장, 이중구였다.
CF와 뮤직비디오 계에서 알아주는 촬영감독인 사람이었고, 김세준이 이번 앨범을 구상했을 때부터 구애를 보낸 감독이었다.
‘이번 뮤직비디오가 중요해.’
그가 이중구를 섭외한 이유.
이번 뮤직비디오는 이제 해외에서도 어느 정도 인지도가 쌓인 그에게 중요한 대목이었다.
다양한 매체로 자신을 접할 수 있는 한국 팬들과 달리, 해외 팬들이 자신을 접할 수 있는 유일한 경로는 인터넷.
특히 그중에서도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는 건 미튜브였고, 이번 뮤직비디오는 그들의 이목을 다시 한번 사로잡을 중요한 기회였다.
기존 자신의 팬들에겐 새로운 즐거움을, 그리고 아직 자신을 접하지 못한 외국인들에겐 색다른 즐거움을 선사할 기회.
거장은 거장인지, 그동안 어떤 촬영이라도 쉽게 넘어갔던 부분도 몇 번이나 재촬영을 요구하며 까다롭게 구는 그였다.
“자, 다시 촬영 들어갈게요!”
이중구가 물고 있던 담배를 털어 끄며 외쳤고, 달콤한 휴식을 즐기던 사람들이 다시 분주히 움직였다.
김세준도 핸드폰을 집어넣고 자리에서 일어났고, 이내 이어진 촬영.
카메라를 들여다보며 이중구가 슬며시 미소지었다.
‘잘하네.’
카메라 속 김세준.
자신이 생각한 모습을 그대로 표현하는 그였고, 흡족한 미소가 지어졌다.
잘하기에 더욱 까탈스럽게 굴 수밖에 없는 아이러니한 상황.
그가 잘하면 잘할수록 더욱 욕심이 생기고 목표치가 올라간다.
게다가 상대가 무려 김세준.
자신도 그의 팬이었기에 더욱 좋은 뮤직비디오를 남겨주고 싶다는 마음이 가득했다.
그게 팬으로서 자신이 그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었으니까.
***
시간이 흘러 1월 28일.
예상했던 기간보단 제법 빠르게 끝난 앨범 작업이었고, 김세준의 첫 정규앨범인 ‘별무리’가 세간에 공개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