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야금 뜯는 천제가수-82화 (82/148)

#82

장준과 송대준

“형님. 잘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가서 예은이랑 푹 쉬다가 와. 내 걱정은 말고.”

“하... 그래도 지금 형님이 가장 중요한 시기인데 이렇게 가는 게 또 맞는진 모르겠습니다.”

“당장 5시간 뒤, 출국인데, 지금 와서 그런 말 하는 건 너무 빈말 아니야? 지금이라도 비행기 표 취소하게?”

김세준의 장난스러운 말에 이주성이 멋쩍은 웃음과 뒤통수를 긁적였다.

“그건 아니지만, 그래도 죄송스럽기도 하고 그래서...”

“괜찮아. 앞으로 더 빡세게 부려먹을 거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말고 편하게 놀다 와.”

김세준이 보내주는 특별한 휴가.

그 휴가를 가기 전에 인사를 하러 김세준의 집을 찾아온 이주성이었다.

난생처음 가는 동생과의 여행이 내심 들뜨기도 하지만, 마음 한 편이 불편한 건 사실.

요새 앨범 작업으로 고생하는 그를 두고 자신만 휴가를 즐긴다는 게 좋지만은 않았다.

사람 좋은 자신의 가수는 웃는 얼굴로 편하게 놀고 오라고 말했고, 절대 그 마음이 거짓이 아닌 사람이었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욱 마음 한 편이 무겁다.

“마지막에 왜 또 이래. 올 때 선물이나 많이 사와. 늦겠다. 얼른 가.”

어정쩡한 표정을 지은 이주성의 등을 웃으며 떠밀었고, 이주성이 허리를 숙였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잘 다녀와.”

인사를 마치고 문밖까지 배웅한 후 김세준이 아쉬운 한숨을 내뱉었다.

마음 같아선 그들을 인천공항까지 배웅하고 싶은 심정이지만, 얼마 전 있었던 사건.

조심해서 나쁠 게 없었기에 최대한 이예은과 만남을 자제하고 있는 와중이었다.

“아, 일하자. 일.”

아쉬운 마음을 빠르게 접고, 김세준이 겉옷을 챙기고 나갈 채비를 서둘렀다.

앨범 녹음 작업은 이제 몇 곡 안 남았지만, 아직도 할 일이 태산이다.

재킷 촬영과 뮤직비디오 촬영, 콘서트를 위한 세션과 게스트 섭외, 콘서트 촬영 장비 구비 등 녹음을 제외하고도 준비해야 할 것들이 산더미.

한가롭게 놀 시간이 없었고, 김세준이 재빨리 마지막으로 차 키를 챙겨 들곤 밖으로 나갔다.

오늘은 장준과 녹음이 있는 날이었다.

***

아레스 뮤직 녹음실에 도착하자,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장준이 그를 반겼다.

“왔어?”

“어. 송 피디님은?”

“일이 있으셔서 조금 늦으신대. 한 10분 정도?”

“아, 오케이. 연습은 많이 했지?”

“당연하지. 곡 좋더라.”

처음 김세준한테 곡을 받고, 집에서 들었을 때 감탄을 절로 뱉었다.

외국의 팝송을 국악으로 새롭게 재해석한 느낌.

신나면서도 약간은 몽환적인 분위기가 가미된 멜로디에, 국악의 잔잔하고 울림 있는 소리가 합쳐져 지금까지 대중가요하곤 전혀 색다른 분위기를 내뱉는 곡.

약간은 모험적이지만, 그래도 이런 뛰어난 퀄리티의 곡을 부를 수 있다는 사실에 무척 기뻐하던 그였다.

동시에 김세준이란 천재에 대한 부러움이 솟구쳐 오르기도 했지만.

천재는 노력하는 자를 이길 수 없고,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다고 했나.

그렇다면 노력도 하고 즐기기도 하는 저 천재는 무슨 수로 이겨야 하는 걸까.

김세준에게 남몰래 승부욕을 불태우던 장준.

동갑내기에 자신보다 늦게 음악에 들어선 친구가 앞서 나가는 걸 보며 언젠간 따라잡겠다며 주먹을 불끈 쥐며 마음을 다잡을 때가 있었다.

하지만 근래 들어 저 멀리 앞서나가는 그를 보며 뜨겁게 타오르던 승부욕이 차갑게 식어가는 중이었다.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자신의 친구였다.

“왜? 무슨 일 있어?”

못내 이상한 장준의 낌새를 눈치챘는지, 김세준이 우려스러운 목소리로 물었고, 장준이 고개를 저으며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아, 아니야. 아 맞다. 너 단독 콘서트 확정 났다며?”

“오. 들었어?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엄청 바쁘다. 그리고... 당연히 게스트로 와 줄 거지?”

“불러주면 무조건 가야지. 고척 스카이돔에서 한다며. 나 거기서 노래하는 게 꿈이었어.”

“좋아. 일단 게스트 한 명 섭외.”

김세준이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한 번 방구석 콘서트로 호흡을 맞춰봤던 그.

당시 사람들의 열렬한 반응을 받았던 콘서트가 아직도 생생했고, 당연히 장준은 섭외 1순위였다.

“콘서트는 뭐 준비하고 있는 거 있어?”

“당연하지. 그때 가봐. 눈이 아주 휘황찬란하게 만들어 줄 테니까.”

장준의 물음에 김세준이 입가 가득 미소지으며 답했다.

자신이 내내 꿈꿔왔던 순간이 아닌가.

머릿속으로 이렇게 무대를 꾸미면 좋을 텐데란 망상을 수십 번도 넘게 했었다.

“오...”

“늦어서 죄송합니다!”

장준이 감탄을 내뱉음과 동시에 문이 열리며 송대준이 안으로 들어왔다.

급히 왔는지 땀으로 젖은 얼굴과 거친 숨.

그냥 오긴 미안했는지, 손엔 검은색 봉지 하나를 들고 있었다.

“뭐, 그리 급하게 뛰어오셨어요.”

“천천히 오셔도 되는데.”

“에이. 늦었는데 맨손으로 올 수 있나요. 간단한 음료 몇 개 사 왔습니다.”

건네준 봉지엔 가지각색의 음료가 들어 있었고, 장준이 그중 애너지드링크 하나를 꺼내며 슬며시 웃었다.

“이건 필요 없을 텐데.”

“아, 맞네. 습관이 돼서.”

두 사람의 말에 김세준이 슬며시 웃었다.

오래 걸리는 녹음 작업을 대비해 사 온 음료수,

하지만 김세준의 녹음은 오래 걸리는 편이 아니기에 장준이 그를 치켜세우며 내뱉는 말이었다.

송대준이 사 들고 온 음료수를 마시며 잠시 노닥거리는 세 사람.

가수와 프로듀서가 모인 만큼 그들의 주된 관심사는 음악.

잠깐 음악에 관해 심도 있게 대화를 나누던 중, 송대준이 묘한 웃음을 지으며 김세준을 바라봤다.

“아, 맞다. 세준 씨. 요새 엄청 잘나가시던데요?”

“에이. 송 피디님. 세준이가 잘나가는 게 어디 하루 이틀 일입니까.”

“아니. 그런 쪽으로 말고. 다른 쪽으로 말이에요.”

‘응?’

송대준의 의미심장한 말에 김세준이 흠칫했고, 장준이 놀란 눈으로 물었다.

“설마? 연애?”

“무슨 소리야. 송 피디님. 허위사실 유포죄로 고소합니다?”

찔리는 구석이 있지만 태연한 기색으로 던지는 블러핑.

하지만 속으론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자신과 이예은의 비밀 연애가 이렇게 허술했는지.

그리고 동시에 송대준은 어떻게 그 사실을 알게 됐는지.

설마 그 사진이 벌써 몇몇 사람에게 퍼진 건 아닌지.

복잡한 심경을 감추고 완벽한 뻥카를 날렸지만, 송대준은 미소지으며 입을 열었다.

“저희한테도 숨기시는 거예요? 상대방이 엄청 티 내던데요?”

‘응?’

예은이가 티를 냈다고?

믿기 힘든 말에 김세준의 얼굴이 살짝 흔들렸고, 장준이 그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장준이 김세준을 향해 손가락을 내밀며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고, 김세준이 이내 그 손가락을 고이 접으며 시치미를 뗐다.

“있네! 뭔가 있어!”

“있긴 뭐가 있어. 아니, 저도 모르는 소문을 어디서 들으신 거예요.”

“어? 아닌가? 그 요즘 세준 씨한테 고백한 사람 있지 않아요?”

그런 김세준의 반응에 송대준이 넌지시 물었고, ‘고백’이란 단어에 발광했다.

“으아! 김세준이 고백을 받다니!”

그런 장준을 향해 시선을 거두고, 김세준이 머리를 재빨리 굴렸다.

말하는 걸 보아하니 자신과 이예은 이야기를 하는 거 같진 않았다.

예은이가 자신과 연애를 티 내고 다닐 리 없고. 무엇보다 고백은 자신이 먼저 하지 않았나.

생각이 갈무리되자 한결 편해지는 마음.

김세준이 슬며시 웃으며 손을 저었다.

“뭔가 오해하고 계신 거 같은데요? 요즘 얼마나 바쁜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

자신의 이번 앨범 프로듀서가 그 아닌가.

녹음을 위해 고생하는 자신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였고, 김세준의 말에 송대준의 아리송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자신의 무릎을 탁, 쳤다.

“아! 그럼 그냥 아직 일반적인 짝사랑이구나. 조만간 고백받으시겠는데요?”

“도대체 누군데요? 그게?”

김세준의 물음에 송대준이 작은 미소와 함께 장황하게 말했다.

“아니, 그 얼마 전에 같이 작업했던 브라이니 친구들. 처음엔 그저 그랬는데 같이 일하다 보니까 괜찮은 애들이더라고요. 그래서 좀 친해지고 종종 연락하는데, 그중 한 명이 세준 씨를 언급하는 게 유독 다르더라고요.”

“아...”

“오. 뭐야. 김세준~”

이름을 듣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고. 장준이 옆에서 호들갑을 떨었다.

“뭐라고 언급하는데요?”

“아, 그냥 세준 씨 칭찬을 엄청 많이 하고, 이야기도 많이 꺼내고. 딱 봐도 아, 얘가 세준 씨에게 관심 있구나. 그게 티 나는 정도? 말하는 것만 봐서는 조만간 도시락이라도 싸 들고 고백할 기세였거든요.”

송대준의 말이 끝나자 장준은 옆에서 야단법석을 부렸다. 몸을 흔들고 손을 가만두지 못하는 모습에 김세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내가 쟤랑 같이 드라마는 보지 않았지만, 분명 연애드라마를 호들갑 떨며 보는 성격일 거다.

’하... 연아 어떡하지.‘

나름 신경 써준다고 송대준이 이름을 밝히진 않았지만, 누군지 충분히 짐작 가는 상황.

그녀의 마음을 이미 알고 있던 김세준이 씁쓸한 한숨을 내쉬었다.

조만간 그녀를 만나러 가야 할 듯싶었다.

***

“하아... 이걸 어떻게 할까...”

김세준이 잡담을 멈추고 녹음에 열중하고 있을 때, ETBC 방송국에선 김세준을 두고 골머리를 썩이고 있었다.

요즘 한참 주가가 오르고 있는 그.

처음 이 방송을 기획했을 땐, 그의 섭외는 단연코 확정이었다.

자신들의 기획에 그보다 어울리는 이가 없었고, 섭외만 한다면 이 프로그램은 대박 난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재정과 회사 내부에서의 반대로 질질 끌던 사이, 큰 문제가 생겨버렸다.

“너무 컸어. 너무. 생각 이상으로 커버렸어...”

책상을 손가락으로 툭툭 치며 예능 PD인 정동혁이 한숨을 내뱉었다.

잠깐 프로그램을 두고 회사에서 설왕설래를 나누던 틈에 김세준의 존재감이 급속도로 성장해버렸다.

그게 한국에 국한된 문제였다면 상관없지만, 문제는 세계적으로 그 이름을 떨치게 됐다는 점.

“오빠. 그래도 섭외해야죠. 김세준보다 우리 프로그램 취지에 더 알맞은 가수가 누가 있다고.”

그의 옆에 메인 작가인 김소영이 답답한 심정을 담아 말했고, 정동혁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하지...”

세계에 널리 이름을 떨치고 있는 K-POP.

하지만 대부분 음악이 아이돌의 음악이었다.

이번 프로그램은 아이돌을 제외하고도 한국에 뛰어난 가수가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한 방송이었다.

아이돌을 제외한 가수들이 세계를 여행하며 길거리 버스킹을 하는 프로그램.

이런 플롯에 김세준보다 더 어울리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하지만 한국에 국한되지 않고 세계에 어느 정도 이름이 알려진 게 문제였다.

이번 방송은 어디까지나 가수의 실력을 보고 놀라는 외국인들의 반응을 살피는 거지, 그 이름과 얼굴을 보고 놀란 외국인들의 반응을 살피는 게 아니었으니까.

“하아... 국장님도 무조건 섭외하라 하는데...”

방송 취지에 조금 부합하지 않더라도 김세준을 섭외만 한다면 화제성은 차고 넘쳤기에 국장님은 김세준을 섭외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모가지도 자를 기세였다.

끝내 생각을 마친 그가, 결심에 찬 목소리로 김소영에게 말했다.

“아레스 뮤직에 연락해. 이예은과 김세준. 두 사람을 우리 방송에 섭외하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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