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야금 뜯는 천제가수-81화 (81/148)

#81

정수연

정수연이 책상 위에 올려놓은 8장의 사진.

전부 자신과 이예은의 흔적이었다.

‘하아... 한 번 방심한 게...’

얼마 전, 이예은과 늦은 새벽 데이트 현장 사진이었다.

분명 그 당시 주변을 봤을 땐 사람의 흔적은 보이지도 않았는데.

단 한 번 길거리에서 손잡고 스킨쉽을 한 사진이 찍혔을 줄이야.

연예인에게 사생활은 사치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대단하네. 진짜로.’

자신의 안일함을 질책하고, 파파라치들의 집요함에 감탄한 후, 김세준이 정수연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이거 어디서 나신 겁니까.”

평소 흔하게 보이지 않던 분노까지 표출하는 그였고, 정수연이 그의 모습에 손을 내저었다.

“이거 저희가 찍은 거 아니에요. 디스이치 알죠? 거기서 찍은 사진이죠. 그리고 이건, 제가 그 사람들한테 얻어온 거고.”

디스이치란 말에 김세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잘 알고 있는 연예 전문 언론사.

대한민국에서 연예인들의 사생활 관련 언론에선 부동의 1 티어.

사생활 침해로 욕도 많이 먹고, 비판도 많이 받지만. 대중들의 알 권리를 위해 움직인단 말도 안 되는 명분으로 움직이는 그들.

그들이라면 이런 사진을 충분히 찍을 만했다.

주변인들을 통해서 그들의 집요함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으니까.

그녀에 대한 순간적인 적의는 사라졌지만, 풀리지 않는 궁금증.

“근데 이 사진을 왜 사장님이 가지고 계신 겁니까.”

약간은 풀어진 김세준의 말에 정수연이 차를 홀짝이며 미소지었다.

“내가 샀어요. 그 사람들한테. 내가 디스이치 사장이랑 친분이 조금 있거든. 술자리에서 대박을 건졌다고 자랑 하길레 조금 떠보니까 바로 보여주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돈 주고 샀어요.”

“...? 대표님이 이 사진을 샀다고요?”

“네. 세준 씨에게 이렇게 선물로 주려고요.”

선물이라...

다른 의도가 없다면 이 사진은 자신에게 정말 큰 선물이었다.

만약 이 사진이 보도됐다면 이제 막 비상하기 시작한 이예은한텐 큰 타격은 물론, 곧 앨범을 발매할 자신에게도 비상이 걸릴 일이었다.

아이돌은 아니지만, 연예인의 연애를 아니꼬운 눈으로 바라보는 팬들도 분명 있었으니까.

다만 걸리는 건, 과연 그녀의 의도가 순수하게 선물일지에 대한 의문이다.

“금액이 어떻게 됩니까. 제가 보상하겠습니다.”

내심 찜찜한 김세준이 물었지만, 정수연은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선물인데, 그럴 순 없죠. 누가 선물 주는데 돈을 받아요?”

순수한 척 내뱉는 그녀였고, 김세준이 그녀를 응시하며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자신에게 호의를 베풀긴 하지만, 정수연도 사업가.

헛된 일로 돈을 쓸 사람이 아닐 터.

게다가 SY 엔터테인먼트가 어디 동네 구멍가게도 아니고, 대한민국 3대 기획사라고 불리는 곳이다.

그런 회사를 키워낸 여장부가 절대 순수하고 순진할 리 없다.

분명 숨겨둔 의도가 있을 텐데.

그 의도가 자신에게 득이 될지, 해가 될지 철저히 생각해야 했다.

‘뭐지? 계약인가?’

정황상 가장 유력한 후보는 계약.

처음 만났을 때부터 자신을 원하던 그녀였기에 그럴 듯한 추론이었다.

‘하지만 말이 안 되는 일이야.’

가장 유력하지만, 가장 말이 안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

자신은 이미 아레스 뮤직과 전속 계약을 맺은 상황이다.

전속 계약을 해지하는 연예인들도 종종 있지만, 그건 일방적으로 부당한 계약을 맺었을 때 일어나는 일.

게다가 법적으로 길고 지루한 싸움을 해야 하며, 그동안 자신은 아무런 활동도 하지 못한다.

만약 법정 싸움에서 승소하여 활동을 시작한다 하더라도, 아레스 뮤직의 사훈은 대중들에게도 널리 퍼져 있는 상태.

그런 회사와 법적으로 싸운 자신을 대중들이 곱게 볼 리 만무했고, 그런 상품성이 떨어진 자신을 그녀가 원한다고 생각하기 어려웠다.

‘무엇보다 내가 그런 선택을 할 리 없지만.’

그리고 자신도 만약 그녀가 사진으로 협박하여 계약을 강제로 원한다고 하더라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게 분명했다.

그냥 언론에 공개하라고 배짱을 부렸겠지.

정수연 정도 되는 사람이라면 자신과 아레스 뮤직이 얼마나 끈끈한지도 잘 알고 있을 터.

그런 멍청한 일을 계획하고 저 사진을 자신에게 보여줄 리 없었다.

‘계약이 아닌 건가? 그러면 나를 원하는 게... 아!’

꼬리를 물고 이어진 생각 끝에 떠오른 해답.

김세준이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렸고,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하진 않지만, 이 경우밖에 답이 없어.’

“SY 엔터테인먼트도 해외로 진출하실 생각이군요?”

“와...”

넌지시 던진 김세준의 말에 정수연이 순간 탄성을 뱉었다.

‘이러니 내가 반할 수밖에.’

순식간에 자신의 의도를 파악한 그.

실력과 인성은 물론 눈치까지 겸비한 그.

점점 탐이 나는 인재였다.

감탄을 터트리고 놀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정수연이었고, 동시에 김세준이 확신했다.

‘맞네. 해외 활동 계약을 원하는 거였어.’

김세준의 해외 활동. 이미 업계에선 소문이 파다했다.

자신이 해외의 유명 엔터테인먼트에서 러브콜을 받으며 해외 활동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문이.

글로벌로 진출을 꿈꾸는 SY 엔터테인먼트에서도 자연스럽게 욕심을 낼 법한 상황이었다.

‘SY 엔터테인먼트라...’

김세준이 턱을 어루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대한민국에선 3대 기획사란 명성이 자자한 곳이지만, 세계적으로 봤을 땐 무명의 가까운 곳. 그에게 러브콜을 보낸 기획사들과 비교했을 땐 비교조차 아까울 정도로 작은 회사다.

‘하지만 나로서도 나쁘지 않아.’

업체가 작아 보이는 것도, 자신에게 러브콜을 보낸 해외 대형 기획사와 비교해서 그렇지, 그래도 한 덩치 하는 곳이다.

대한민국에서 엔터테인먼트로 상장한 몇 안 되는 회사이기도 하고.

게다가 다른 곳에 비해 규모가 작은 만큼, 계약도 자신에게 좀 더 유리할 거고.

“이왕 들켰으니, 솔직하게 말할게요. 세준 씨의 해외 활동 계약을 원하는 게 사실이에요. SY 엔터테인먼트도 슬슬 글로벌로 진출할 생각이거든요. 저희가 아시아 쪽은 꽉 잡았지만, 아직 북미나 유럽까진 나아가지 못했고, 세준 씨와 협업해서 나아가면 괜찮을 거란 생각이에요. 선물은 저희를 긍정적으로 봐달라는 일종의 뇌물이었고.”

정수연이 숨기는 건 없이 솔직하게 털어놨고, 김세준이 작은 미소와 함께 미래를 떠올렸다.

SY 엔터테인먼트.

그녀 말대로 지금은 아시아는 주름 잡는 곳이나, 북미나 유럽까진 나아가지 못한 회사.

그래도 훗날엔 제법 그럴듯한 성과를 내던 곳이다.

몇 년 후엔 B.ONE도 아시아를 넘어 북미에도 이름을 올렸고, 먼 미래에 SY 엔터테인먼트에서 배출한 가수가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치기도 하니까.

‘적어도 엄청 나쁜 선택은 아니란 뜻이지.’

현재 그들이 해외에 미치는 여력이 어느 정도 일진 모르나, 적어도 아레스 뮤직처럼 그 능력이 전무 하진 않은 회사.

게다가 같은 한국인이고, 자신에게 이 정도로 관심을 표할 정도이니, 없던 마음도 생길 지경이었다.

“긍정적으로 생각해보겠습니다. 혼자 결정할 일은 아니라서요.”

“물론이죠. 해진이하고 잘 이야기해 봐요.”

사진을 주섬주섬 챙기며 김세준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정수연이 그를 배웅하며 문을 열어주며 말했다.

“참고로 그 사진 무려 5천만 원이에요. 내가 그 정도로 원한단 소린데... 좋게 봐줘요. 알겠죠?”

끝까지 쿨하지 못하고 마지막엔 구질구질하게 구는 그녀였고, 김세준이 작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의 사진이 5천만 원이나 한다는 말에 혀를 내둘렀다.

디스이치가 왜 그렇게 욕을 먹으면서까지 연예인들의 사생활을 집착하는지 짐작이 가면서도, 이가 갈리는 순간이었다.

***

“디스이치! 이 새끼들은 해도 해도 너무하네. 진짜!”

“수연이 누나도 대단한 사람이야.”

세현과 녹음을 마치고 이해진과 하동준을 찾아온 김세준이었고, 그녀와의 일을 이야기하자 하동준은 격한 반응을 보였고, 이해진은 정수연을 언급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두 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정수연과 같은 업계에서 일하는 두 사람. 게다가 같은 시대에 가수 활동을 했던 사람 아닌가. 자신보다 정수연이란 사람을 더 잘 알고 있을 둘이었기에 둘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용할 생각이었다.

“흠... 난 괜찮은 거 같은데?”

“나도 수연이 누나라면 오히려 외국 놈들보다 훨씬 괜찮다고 봐.”

생각보다 호평인 두 사람의 평가에 김세준이 짧은 감탄을 뱉었다.

“수연이 누나가 가수일 때 워낙 소속사에 케어를 못 받아서 자기 회사 식구들은 잘 챙겨주는 편이야. 그래도 우리보단 못 하지만.”

하동준이 자부심을 담긴 목소리로 말했고, 이해진이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수연이 누나가 고생 많았지. 아이돌인데 스캔들이 거하게 터져서 온갖 테러는 다 당하고. 스토커한테도 쫓기고. 스캔들 난 남자 아이돌 팬들한테 살해 협박도 받았을걸?”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몰상식한 일이 1세대 아이돌이 활동할 땐 버젓이 벌어졌다. 택배로 보낸 선물에 면도칼을 숨겨둔다거나, 자신의 신체 일부를 보내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그런 생활 겪으면 이쪽 일에 정떨어질 만도 한데, 끝까지 발 담그고 저렇게 회사까지 차린 사람이야. 적어도 세준이 너 캐어는 잘해줄 거야. 그쪽 얘들 평도 좋잖아?”

“네. 세현이나 수호도 정수연 대표님 칭찬을 많이 하더라고요.”

“같은 아이돌의 고충을 아는 거겠지. 일단 난 SY 엔터테인먼트를 나쁘게는 말 못 하겠다. 사적인 감정을 배제하고도 좋은 회사인 건 틀림 없어.”

“나도 수연이 누나는 본받을 게 많다고 보는 사람이라서. 우리도 많이 배우고 있고.”

두 사람의 말에 김세준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면 알수록 더욱 괜찮은 사람이 아닌가.

나중에 세현과 수호한테도 좀 더 물어봐야 알겠지만, 지금까지는 괜찮은 사람이란 평가가 머릿속에 자리 잡았다.

“예. 아, 그리고 이 이야기는 예은이한텐 비밀로 했으면 하는데요.”

“예은이가 들어서 좋을 게 없는 이야기니까.”

이예은의 멘탈이라면 괜히 자신이 짐이 됐다는 쓸데없는 생각을 할지도 모를 일.

그녀의 멘탈을 걱정한 김세준이었고, 이해진과 하동준도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그래야지. 아, 그리고 세준이 너 콘서트 장소 정해졌다.”

“벌써요?”

이야기 꺼낸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하동준의 추진력에 다시 한번 감탄했고,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콘서트 기획이 보통 일이 아니잖아. 빨리 장소 잡고 날짜 정해야지.”

“맞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장소가 어디예요? 장충체육관? 화정체육관?”

자신이 아는 적당한 규모의 장소를 내뱉었지만, 하동준이 눈을 흘겼다.

“너무 포부가 작은 거 아니냐?”

그래도 5천 명 정도의 인원을 수용 가능한 곳을 말했는데.

첫 단독 콘서트를 만 단위 이상으로 벌이는 가수는 많지 않다.

아무래도 처음 벌이는 단독 콘서트다 보니 규모를 크게 잡았다간 낭패를 볼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하동준의 반응을 보니 제법 규모를 크게 잡은 듯했다.

“어디입니까?”

설레는 목소리로 김세준이 물었고, 하동준이 어깨를 펴며 당당한 목소리로 답했다.

“고척 스카이돔.”

“...!”

놀란 눈이 된 김세준을 보며 하동준과 이해진이 슬며시 웃었다.

“거...거기 한 2만 명 들어가는 곳 아닙니까?”

첫 단독 콘서트에 2만 명이라니.

어마어마한 숫자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동안 했던 공연이 만 단위이긴 했지만, 그건 이름 있는 가수가 여럿 출연한 공연이 아닌가.

자신만의 무대가 대부분인 단독 콘서트하곤 비교할 수 없는 무대였다

“음. 게다가 하루 공연이 아니다. 이틀. 최대 4만 명이 네 공연 보러 올 수도 있다는 소리야.”

“그...그게 매진 될까요?”

게다가 이틀이라니.

예상보다 커다란 규모에 김세준이 떨떠름하게 물었고, 하동준이 피식 웃었다.

“내기할래? 난 순식간에 매진 될 거 같은데? 최대 10분 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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