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야금 뜯는 천제가수-79화 (79/148)

#79

콘서트

“흐흐...”

김세준이 거실 벽 한쪽에 놓인 장식장을 보며 작은 웃음을 터트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신인상 하나만 덩그러니 놓였던 장식장.

외롭고 쓸쓸히 홀로 자리를 지키던 신인상 트로피 옆에 무려 다섯 명의 친구가 생겼다.

영롱한 빛을 내뿜는 트로피들로 인해 장식장이 눈이 부실 지경이다.

고작 다섯 개의 물건이 추가된 것뿐인데 집안 분위기가 훨씬 화사해진 기분.

연신 웃음 짓는 김세준을 향해, 이예은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의 허리를 손으로 감았다.

“그렇게 좋아요?”

“응. 좋지.”

자신의 허리를 휘감은 그녀의 손을 잡으며 김세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12월 31일인 오늘.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 다시 한번 김세준의 집에 놀러 온 그녀.

처음은 어색하고 힘들었지만, 한 번 발을 트게 되니 그리 어렵지 않았다.

“흐응.”

이예은이 그의 품에 안기며 콧소리를 냈다가 작게 탄식을 뱉었다.

“아! 맞다. 어제 분위기 좋던데요? 오빠.”

“응?”

자신의 품에 안긴 그녀를 내려다보며 김세준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어제 무대. 엄청 좋던데요. 저 진짜 사랑에 빠진 사람인 줄 알았잖아요. 당연히 오빠 말고 연아 씨.”

“....”

여자의 직감이란.

분명 자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도대체 어떻게 안 거지?

고작 노래 부르는 연아의 모습만 보고 그걸 눈치챘다고?

날카로운 칼날보다 예리한 그녀의 촉에 김세준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나왔고 동공이 초점을 잃었다.

가까이에서 본 그녀의 눈은 웃고 있지만, 그녀를 둘러싼 분위기는 서늘했다.

“연아 씨랑 무슨 일 있었죠? 솔직하게 말해주세요.”

“아, 그게...”

죄지은 것도 아니고, 숨길만 한 문제도 아니다.

김세준이 어제 무대 뒤편에서 연아가 보여준 행동을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설명했다.

자신은 우리의 비밀 연애 때문에 두루뭉술하게 말한 거지, 절대 딴마음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라는 걸 강력히 주장하면서.

“내 착각은 아니겠지?”

“설마요. 여자는 관심 없으면 그런 거 안 물어봐요.”

이예은이 작은 탄식과 함께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복잡하고 모호한 문제.

그렇다고 이걸 연아의 잘못이라고 말하기에도 어려웠다. 그녀는 김세준이 여자친구가 없는 거로 알고 있을 테고, 김세준도 여자친구의 유무를 숨겨야 했으니까.

“남자친구가 너무 잘나도 문제네요.”

“음. 난 잘 모르겠는데?”

턱을 긁적이며 김세준이 민망한 웃음을 지었고, 이예은이 그의 양 볼을 붙잡으며 자신의 얼굴 앞까지 당겼다.

“이 정도면 엄청 잘났죠.”

코앞에서 미소 지는 그녀의 얼굴에 김세준의 볼이 빨개졌다.

이미 많이 봤지만,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다.

그녀의 눈부실듯한 외모는.

“그래도, 연아 씨한텐 솔직하게 말해야 하지 않을까요?”

가만히 뒀다간 그녀에게 희망 고문을 주는 셈.

이예은의 우려 섞인 목소리에 김세준도 신음을 삼켰다.

“음. 내가 잘 말해볼게.”

그의 말에 싱긋 웃으며 가볍게 입맞춤한 이예은이 빙글 돌며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오빠가 잘 하실 거라 믿어요. 그리고... 오늘은 술 먹어야죠?”

“...!”

한쪽 눈을 감으며 귀여운 애교와 함께 도발하는 그녀.

그런 이예은을 보며 김세준이 성난 콧김을 내뱉었다.

허허. 오늘이 드디어 저 산삼주의 효능을 알게 되는 날이구나.

***

새해가 밝고, 1월 7일이 되자 아레스 뮤직의 팬들이 1년마다 기다리는 그 날이 다가왔다.

매해 열리는 아레스 뮤직 콘서트.

매년 치열했던 아레스 뮤직 콘서트의 티켓팅이었지만, 올해엔 그 맹렬함이 남달랐다.

단 5분 만에 매진 된 콘서트 티켓.

서버가 폭주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고, 암표 거래도 빈번하게 일어났다.

고작 1년 만에 사뭇 달라진 분위기.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아무래도 가장 큰 이유는 김세준의 존재 때문이었다.

1년 전에도 제법 인기가 있던 그였지만, 1년 사이에 괄목할만한 성장을 해버린 그.

1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고정된 팬층인 중년 남성들에게 사랑을 많이 받았다면, 지금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팬들을 끌어모은 그였다.

그런 김세준과 거기에 더해 신인상을 받으며 떠오르는 신예라는 걸 증명한 이예은.

요즘 아레스 뮤직의 탁월한 한 수라고 불리는 두 사람의 영입.

그 증거로 작년과 비교하면 콘서트 규모가 어마어마하게 늘었다.

작년엔 사천 명의 관객들이 입장했던 콘서트.

일 년 만에 그 숫자가 4배 가까이 늘었다. 무려 만오천 명의 관객이 오늘 그들의 공연을 보기 위해 올림픽 체조경기장을 찾아오는 중이었다.

그리고 시작된 공연.

만오천 명의 관객을 앞에 두고 시작된 아레스 뮤직 콘서트는 부푼 마음을 가지고 찾아온 관객들의 기대를 충족시켰다.

실력과 개성 하나는 다른 엔터테인먼트에 비해서도 부족하지 않은 아레스 뮤직의 가수들.

가지각색의 개성을 선보이며 관객들의 눈과 귀를 즐겁게 만드는 그들이었고, 김세준 또한 다른 가수들이 무대를 할 땐 한 사람의 팬으로서 그 무대를 즐겼다.

그렇게 무대를 즐기다 보니 어느새 다가온 그의 차례.

이제 곧 있으면 그가 무대로 올라 자신을 보러 온 팬들에게 노래를 선보일 시간이었다.

‘혼자는 아니지만.’

자신의 옆에서 노래를 따라부르며 기분 좋은 미소를 띠고 있는 그녀.

귀엽고 아름다운 그녀의 모습에 순간 충동적으로 손을 붙잡을 뻔했다.

팬들은 물론, 이해진과 하동준을 제외한 같은 소속사 식구들에게도 비밀로 하는 연애.

‘후우...’

속으로 한숨을 내쉰 그였고, 이예은이 그런 그의 어깨를 가볍게 툭툭 치더니 귓속말을 속삭였다.

“오빠랑은 진짜 오랜만에 같이 무대에 서네요.”

“그치. 반년도 넘었으니까.”

작년 봄쯤에 같이 무대에 선 이후로 처음 서는 무대.

게다가 이번엔 ‘봄비’는 물론, 커플 듀엣곡으로 유명한 다른 가수의 사랑 노래도 함께 부른다.

연기가 아닌 진심으로 부를 수 있는 노래.

서로 눈을 마주 보며 가볍게 웃다가 자신들에게 황급히 다가오는 스텝을 보며 둘이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다음 무대 곧 시작합니다! 준비해주세요!”

“네. 감사합니다.”

스텝의 말에 김세준이 헛기침을 내뱉고 먼저 발걸음을 옮겼고, 이예은이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이 무대 뒤편에 도착하고 나서 얼마 안 되어 진행하던 무대가 끝났고, 김세준과 이예은이 발걸음을 무대 위로 옮겼다.

꺄아아아아악!

그들이 등장하자마자 체조경기장을 가득 울리는 함성.

아레스 뮤직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두 사람의 등장에 어두운 내부를 비추던 야광봉의 움직임이 더욱 현란해졌다.

“안녕하세요! 김세준입니다!”

“안녕하세요. 이예은입니다.”

허리를 숙이며 인사한 후, 김세준이 미리 준비한 멘트를 내뱉었다.

“먼저, 이번 콘서트에 와주신 팬분들께 감사하고, 저랑 예은이가 듀엣을 준비했거든요.”

까아아아악!

“저랑 오빠가 같이 열심히 준비했는데, 다들 즐겨주셨으면 좋겠어요.”

까아아아악!

‘하하하...’

자신과 이예은.

둘 중 누가 말 한마디만 뱉어도 열광적으로 반응하는 그들.

최근에 했던 공연 중 가장 열렬한 관객이었다.

‘하긴 여기 온 거면, 진짜 팬 중의 팬들이란 소리니까.’

그래미 어워드나 아시안 뮤직 어워드와 달리 지금 온 사람들은 자신들만 보려고 온 진정한 팬.

그 반응이 유독 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팬들이라 생각하니 더욱 깊어지는 고마운 마음.

“그럼 먼저 저희의 곡이 아닌, 커버 곡부터 들려드릴게요. 곡 제목은 좋은 날입니다.”

까아아아아악!

‘좋은 날’.

커플들의 노래방 애청곡 1위.

사랑에 빠진 연인의 감정을 달달하고 부드럽게 녹아내린 곡.

포근한 느낌을 주는 피아노의 선율이 유독 아름답게 들리는 곡.

그리고 김세준인 만큼, 이 곡을 가야금의 선율을 추가하며 포근한 느낌을 더욱 가미시켰다.

어쩌면 좋아.

이렇게 좋은 날이 또 올 수 있을까.

처음 벌스는 이예은.

그리고 평소와 다른 그녀의 목소리.

여자치곤 허스키한 그녀의 목소리지만 지금은 창법을 바꿔 제법 부드럽고 감미롭게 부른다.

‘잘하네.’

그런 이예은을 김세준이 꿀 떨어지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자신을 향해 작은 눈웃음을 지으며 노래를 부르는 그녀.

조명 때문인지 몰라도 유독 더욱 빛나 보였다.

완벽한 하루.

너와 처음 함께한 오늘 이날이

내 생에 최고로 좋은 날.

그리고 김세준의 벌스.

그도 창법을 바꿔 부드럽게 노래를 불렀고, 콘서트 가득 울리는 두 사람의 하모니에 관객들은 야광봉을 천천히 좌우로 흔들었다.

‘진짜 좋네.’

한 관객이 두 사람의 노래를 들으며 입가에 진한 미소를 그렸다.

자신의 최애가수인 김세준과 이예은이었고, 둘의 하모니는 자신에게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이었다.

‘와... 두 사람 눈빛봐. 진짜 장난 아니다.’

그리고 대형 스크린을 통해 보인 둘의 표정.

한없이 부드러운 눈빛과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올라간 미소.

곡의 감정이 여실히 드러나는 둘의 얼굴을 보며 관객들이 동시에 감탄을 터트렸다.

마치 진짜 사랑에 빠진듯한 모습이었다.

***

“여기서 무슨 궁상을 떨고 있어.”

“와... 진짜 어떻게 또 알고 온 거야?”

성공적으로 끝난 아레스 뮤직 콘서트 2층의 후미진 관객석.

그곳에서 의자에 앉아 텅 빈 무대를 바라보던 이해진이 등 뒤에서 들려온 친숙한 말에 혀를 내둘렀다.

“내가 널 찾고 다니는 게 하루 이틀이야? 또 어디 처박혀서 궁상떨고 있을 거 다 알았지.”

그의 옆자리에 앉아 캔커피를 건네주는 하동준이었고, 이해진 피식 웃었다.

자신을 개처럼 부려먹고 존중하지 않던 회사와 싸우고 잠적하던 자신을 귀신같이 찾아내던 그.

그땐 이런 캔커피가 아닌 캔맥주를 마시며 둘이서 미래를 그렸다.

“그래서 오늘은 또 무슨 궁상이야? 공연 잘 끝내놓고.”

“그냥. 목표를 이뤄서 그런가? 마음이 싱숭생숭해.”

“목표? 무슨 목표?”

하동준이 캔커피를 홀짝이며 관심을 표했고, 이해진이 주변을 천천히 훑었다.

“아레스 뮤직 콘서트. 관객 만 명. 그게 이 콘서트 처음 시작할 때 정했던 내 목표였거든.”

“... 그랬나? 왜 말 안 했어?”

“쪽팔리잖아. 우리 그때 소속 가수가 고작 3명인가 그랬는데. 만 명은 가당치도 않은 숫자였고.”

“아, 기억난다!”

하동준이 아련한 옛 추억을 떠올리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아레스 뮤직 콘서트의 시작.

그의 말대로 지금 모습은 꿈도 꿀 수 없을 정도로 초라했다.

“고생했다. 고생 많았지. 너나, 나나.”

하동준이 낮게 중얼거리며 감회에 젖어 들었다.

“그치. 아. 형 와서 감성 다 깨졌잖아.”

막 감회에 젖어 든 하동준과 달리 추억팔이가 끝난 이해진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기지개를 켰다.

“맨날 내 탓이야.”

그런 이해진을 따라 하동준도 투덜거리며 짧은 감회를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터덜터덜 발걸음을 옮기며 1층으로 내려가는 둘.

옆에서 묵묵히 걸어가는 하동준을 향해 이해진이 입을 열었다.

“아, 형. 그리고 아까 잠깐 생각해봤는데. 우리 세준이 해외로 가기 전에 선물 하나 해야 하지 않아?”

“해야지. 근데 뭘 좋아할진 모르겠다. 걔가 뭐 부족한 게 있어야지.”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여자친구가 없는 것도 아니다.

요새 부족한 것 없이 풍족한 삶을 누구보다 영위하고 있는 인물이 그였다.

“세준이가 지금 가장 원할 선물이 하나 있어.”

그런 하동준을 향해 이해진이 웃음 지으며 말했고, 하동준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뭔데?”

“세준이도 할 때 됐잖아.”

“그니까 뭐?”

하동준의 되물음에 이해진이 눈빛을 반짝였다.

“세준이... 단독 콘서트. 준비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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