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야금 뜯는 천제가수-76화 (76/148)

#76

연말 파티

이해진과 하동준을 만난 다음 날, 김세준의 스케줄은 이예은과의 데이트였다.

그래미 어워드 스케줄 때문에 크리스마스 때에도 만나지 못했기에, 크리스마스와 연말을 축하하기 위해서.

“이제 슬슬 올 때가 됐네.”

김세준이 기묘한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긁적이려다, 애써 세팅한 머리가 흐트러질까 재빨리 손을 멈췄다.

이예은과 단둘이 만나는 건 좋다.

하지만 사람들이 어디나 붐비는 연말.

사람들의 이목을 피하기 위한 장소를 예약하려 했지만, 이미 웬만한 장소는 예약이 꽉 찬 상태였다.

평범한 산책도, 오픈된 식당에서도 데이트할 수 없는 둘.

결국, 난색을 보인 둘이 데이트 장소로 정한 건 김세준의 집이었다.

자신의 집에서 단둘이 파티를 보내기로 했다.

평범한 연인이라면 이상할 게 없는 날이지만, 김세준과 이예은은 사귄 지 이제 한 달을 간신히 넘긴 상태.

게다가 그동안 만난 날은 손에 꼽는다.

사귀고 나서, 평양 공연과 그래미 어워드 공연이 연달아 있던 자신.

자연스럽게 언론과 대중의 관심이 쏟아졌고, 그 이목을 피하며 만남을 추구하는 게 쉽지 않았다.

당연히 단둘이 밀폐된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도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때, 김세준의 초인종이 울렸으며 그가 떨리는 마음으로 현관으로 다가갔다.

이내 문을 열자 마스크와 모자를 쓴 이예은이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재빨리 안으로 들어왔다.

“춥지?”

“아니에요.”

마스크를 벗은 그녀의 볼이 불그스름했다.

한파로 인해서인지, 아니면 부끄러워서인지 모를 빨갛게 상기된 그녀의 얼굴을 보며 김세준이 헛기침을 내뱉었다.

자칫 잘못하면 촌스러워 보일 수 있는 홍조도 이렇게 이쁠 수가 있을까.

게다가 패딩을 벗은 그녀의 옷도 파티에 맞춰 눈길을 끄는 복장이었다.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크림색 니트 원피스에 검은색 스타킹을 신은 그녀.

평소 그녀의 스타일보단 저돌적인 복장.

그녀의 복장을 훑어본 김세준도 얼굴이 빨개졌고, 손을 잡으며 부엌으로 이끌었다.

“음식 준비 다 됐어. 식겠다. 빨리 먹자.”

“네...”

갑작스럽게 손을 잡힌 이예은이 개미 기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답했고, 이내 향한 부엌 식탁을 보며 감탄을 뱉었다.

“우와... 이거 오빠가 다 요리한 거예요?”

식탁 위에 차려진 화려한 음식들.

부드러워 보이는 빠네 파스타와 새우 감바스. 파프리카와 양파와 함께 구운 촙스테이크까지.

거기에 와인까지 곁들여져 있는 완벽한 음식 세팅은 연말 분위기를 한껏 뽐내고 있었다.

“응. 나 요리 잘한다고 했잖아.”

이예은의 반응이 만족스러운 김세준이 어깨를 으쓱하곤 그녀를 자리에 앉혔다.

“어때?”

“잠시만요...”

이예은이 먹기 전에 사진을 찍으며 오늘을 기념한 이예은이 이내 포크를 들어 스테이크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와... 진짜 맛있어요.”

입에 넣는 순간 살살 녹는 스테이크에 이예은의 두 눈동자가 커졌다. 웬만한 음식점보다 훨씬 나은 그의 요리 실력.

“다행이네.”

40대 중후반까지 홀몸으로 살던 김세준. 그러다 보니 요리에 취미가 들렸고, 오늘 홀몸으로 산 보람을 물씬 느꼈다.

“음. 맛있네.”

김세준도 스테이크를 오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고, 이내 둘이 와인잔은 가볍게 부딪쳤다.

‘흐음...’

김세준이 와인을 마시며 힐끔 시선을 부엌 벽장으로 보냈다.

벽장에 고이 간직하고 있는 한 술.

오래전, 팬 미팅에서 받았던 산삼주가 그 고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사실 와인 대신 저 산삼주를 꺼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저걸 준 팬분도 마신 날, 자녀를 봤다고 할 정도로 탁월한 효과를 발휘하는 술.

하지만 음식과 맞지 않을 거 같아 와인을 준비했다.

“그래미 어워드에서 공연하는 건 어땠어요?”

“아, 솔직히 처음엔 떨렸는데, 나중 가선 잘 모르겠더라. 그냥 지금까지 했던 공연이랑 별로 다른 게 없는 느낌? 그냥 관객들만 평소와 다른 사람들인 기분이었어.”

벽장을 보던 김세준이 그녀의 물음에 고개를 돌리며 답했다.

매우 심취했던 무대. 처음 시작할 땐 긴장이 가득했지만 인이어에서 MR이 흘러나오자 긴장감이 싹 가시고 노래에 빠져들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무대 중간엔 어떻게 불렀는지 기억도 안 날 정도로 집중했던 공연이었다.

그런 김세준의 대답에 이예은이 작은 감탄을 터트렸다.

“역시 무대체질이에요. 오빠는.”

콩깍지가 가득 담긴 시선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그녀의 시선에 그가 미소로 답했다.

“예은이 너도 이제 곧장 잘하잖아. 청심환도 이제 안 먹고, 많이 발전했지.”

“다 오빠 때문이죠.”

배시시 웃으며 말하는 그녀를 향해, 김세준이 먹다 말곤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었다.

행동 하나하나, 말투 하나하나가 이렇게 이뻐 보일 수가 없다.

연애 경험이 없는 건 아니고, 연애 초반의 설레는 감정을 잘 알고 있지만.

이예은과의 연애는 그동안 해왔던 연애와는 궤가 다른 느낌.

이예은을 향한 감정이 다른 연애 때보다 훨씬 크다는 걸 여실히 느끼는 그였다.

생각을 끝내고 김세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자신에겐 큰 축복이지만, 둘의 관계에서는 어쩌면 불행일 수도 있는 이야기.

“아, 그리고 예은아. 나 잘하면 내년엔 해외 활동 시작할지도 몰라.”

“네? 진짜요?”

이예은이 깜짝 놀라 김세준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런 이예은을 보며 김세준이 불안한 눈빛을 보냈다.

해외 활동. 자신의 커리어에 있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활동이지만, 이예은과 만남에 있어선 큰 걸림돌이다.

지금도 얼굴 보기 힘든 사이인데 자신이 해외 활동까지 하게 된다면 더욱 얼굴 보기가 쉽지 않을 테니까.

최소 한 달에 한 번 얼굴 보는 것도 힘들어지리라.

“축하해요. 오빠!”

“응? 아, 고마워.”

이예은이 김세준의 불안한 눈빛을 읽곤 일부로 밝은 목소리로 답했다.

알고 있다. 그가 해외 활동을 시작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그렇기에 아쉽고 속상한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하지 말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

그렇다면 속상한 마음을 감추고, 웃으며 그를 축복해주는 게 자신의 역할이었다.

실제로 그래미 어워드 공연을 실시간으로 보며 김세준의 여자친구가 아닌 팬으로서 얼마나 뿌듯하고 감동적이었던가.

“고마워. 예은아. 근데 시작하면 아마 지금보다 얼굴 보기 힘들어질 거야.”

“알아요. 근데 어쩔 수 없는 거잖아요? 그리고 당장 시작하는 것도 아닐 테고. 또, 해외 활동한다고 국내에서 활동 안 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애써 긍정적으로 말하는 그녀를 보며 김세준이 미안하고 고마운 복잡한 심경으로 바라봤다.

그런 그의 눈빛에 이예은이 화제를 돌렸다. 좋은 날에 마음 한구석이 쿡쿡 쑤시는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진 않았다.

“아, 그리고 오빠 대상은 거의 확정이라고 사람들이 난리 치던데. 축하해요. 오빠.”

내일모레 있을 아시안 뮤직 어워드.

올해 대한민국에 가장 큰 감동을 준 가수를 꼽는다면 누구나 주저 없이 김세준을 택할 건 이견 없는 말이었다.

연초, 봄의 감성을 가득 살린 노래로 시작해, 단심가와 하여가. 에드 케인의 노래인 ‘Remember’, 그리고 수호의 결승 곡인 걱정하지 마, 그리고 전국에 있는 어머니를 울린 섬집 아가까지.

그의 수상을 부정할 수 없었고, 김세준도 이예은을 향해 축하의 목소리를 뱉었다.

“예은이도 신인상 축하해.”

“전 아직 오빠와 달리 모르죠.”

이예은이 손을 내저으며 엄살을 부렸고, 김세준이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독보적인 김세준과 달리 올해 신인상은 각축의 장이긴 했지만, 그중에서도 강력한 후보로 손꼽히는 게 이예은이다.

자신의 앨범 수록곡인 ‘봄비’, 그리고 그녀의 솔로 데뷔곡 ‘마녀의 꿈’.

두 곡 다 만만치 않게 많은 사랑을 받았던 노래다.

봄과 여름에 연달아 히트 친 곡들을 발표한 그녀였고, 최소 올해 상반기는 다른 신인들보다 압도적인 영향을 끼친 가수다.

그 여파가 올해 가을까지도 이어졌고, 비록 연말엔 활동을 쉬었다지만 객관적으로 봐도 김세준이 생각하기엔 그녀보다 나은 신인은 없었다.

“둘 다 받았으면 좋겠네.”

“응응. 만약 둘 다 받으면, 그때 또 이렇게 파티해요.”

김세준이 와인잔을 들고 말하자, 이예은이 싱긋 웃으며 잔을 가볍게 부딪쳤다.

***

준비한 식사는 끝났지만, 파티는 계속됐다.

음식을 다 먹고, 아이스크림 케이크를 안주 삼아 먹은 두 번째 와인.

두 번째 와인을 반쯤 마시자, 이예은의 얼굴에 취기가 올라왔다.

자세가 흐트러지고, 눈이 살짝 풀린 그녀가 혀가 꼬인 발음으로 김세준을 불렀다.

“오빠...”

“응?”

취하고 흐트러진 모습조차 귀엽고 사랑스러운 그녀를 미소와 함께 바라보던 김세준이 이내 이어진 그녀의 말에 흠칫했다.

“해외로 나간다고... 저 버리면 안 돼요...”

괜찮은 척,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술에 취하자 담아놨던 본심이 빠져나왔다.

혹여 그의 마음이 변할까 두려웠던 심정을 내뱉는 그녀였고, 김세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내가 널 왜 버려.”

“하지만... 막 외국 애들 보면... 엉덩이가 얼굴만하고... 가슴도...”

그녀가 슬쩍 고개를 숙여 자신의 가슴팍을 내려다보더니 눈물을 글썽였다.

‘얼씨구.’

술 취한 그녀가 보여주는 촌극에 김세준의 입가에 미소가 새어 나왔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가 입을 맞췄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슬슬 일어나. 집에 가야지. 주성이한테 데리러 오라고 할게.”

그도 남자였고, 오늘 산삼주를 따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아쉽게도 이예은이 너무 취해버렸다.

김세준이 핸드폰을 주머니에서 꺼내 들었고, 순간 이예은이 그의 손목을 낚아챘다.

“허업...”

그리고 이예은이 그의 입술을 향해 저돌적으로 입을 맞췄다.

달콤하고 쌉싸름한 그녀의 입술.

이예은과의 첫 키스는 진한 포도 향으로 기억되리라.

“오빠...”

“응?”

한참을 그의 입을 탐미하던 이예은이 입술을 떼며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저 술 더 먹고 싶은데...”

“...”

“저, 오빠한테 들었어요. 오빠 옛날에 팬한테 산삼주 받았다고...”

“...!”

“그리고, 오빠가 말해줬어요. 형님이 그 술은 아주 중요한 날에 먹을 거라 했다고...”

이주성한테 흘러가는 말로 뱉은 기억이 난다.

설마 그 말을 자신의 동생한테 말했을 줄이야.

이예은이 그의 목을 양팔로 감싸 안았고, 매혹적인 눈빛으로 그에게 다시 한번 속삭였다.

“제 생각엔... 오늘이 그 날인 거 같은데요?”

이예은의 말은 기폭제가 됐고, 김세준과 이예은은 다시 진하게 입을 맞추며 서로를 거칠게 탐닉했다.

부엌에서 시작된 키스는 거실을 지나쳐 그의 침실까지 이어졌다.

비록 그렇게 계속 입술을 탐하느라, 산삼주를 따진 못했지만.

연말과 크리스마스를 기념하는 파티에 맞는 그 어느 때보다 뜨거운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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