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그래미 어워드(3)
에드 케인을 만난 다음 날.
김세준은 ‘그래미 어워드’ 시상식 리허설을 위해, 스테이플스 센터에 들어섰다.
평소 스포츠 경기장으로 쓰이며 이만 명이란 거대한 숫자를 허용 가능한 장소를 시상식 무대로 탈바꿈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그리고 김세준이 감회 어린 시선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스테이플스 센터.
2000년대 들어선 이후, 대부분의 ‘그래미 어워드’ 시상식이 이곳에서 열렸다. 그가 기억하기론 2번을 제외하곤.
즉, 나름대로 ‘그래미 어워드’와 관련된 전통과 역사가 있는 장소였다.
‘가수들의 꿈이지.’
이곳에서 레드 카펫을 밟으며 취재를 받고, 지금은 텅 비어 있는 무대에 올라 공연과 수상을 받는 꿈.
가수들의 꿈이자, 회귀하기 전 자신의 꿈이었다.
그런 꿈이 이제 내일이면 일어난다는 상상에 흐뭇한 미소가 지어짐과 동시에 김세준은 진한 아쉬움을 느꼈다.
내일 자신을 향한 관심은 자신의 노래가 아닌 자신의 인종이리라.
아시안 최초로 ‘그래미 어워드’ 선다는 관심과 대목이 더 끌릴 게 분명했다.
최초란 수식어가 좋긴 하지만 만족할 수 없는 이유.
그런 생각과 함께 김세준이 작은 다짐을 속으로 뱉었다.
‘내년엔 다르다.’
내년에 이곳에 다시 와서, 사람들이 자신의 인종이 아닌 노래와 앨범에 관심을 끌게 만들리라.
“형님. 에드도 도착했답니다. 바로 리허설 준비하라는데요?”
“알겠어.”
테일러와 전화한 이주성의 말에 김세준이 고개를 끄덕였고, 발걸음을 옮겼다.
***
다음 날. 스테이플스 센터 인근은 사람들도 발 디딜 틈도 없이 붐볐다.
미국에서 내로라하는 가수들이 한 곳에 모이는 몇 안 되는 순간.
그들을 보기 위해 미국 전역에서 모인 팬들과 취재진. 거기에 미연의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고용한 수백 명의 경호원까지.
미국 3대 시상식이란 말이 허황한 말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 엄청난 인파였고, 스테이플스 센터 인근에 있는 리츠 칼튼 호텔 주변도 사람들로 붐볐다.
“엄청 막히나 본데?”
자신을 데리러 오기로 약속한, 에드 케인의 차량이 늦어지자 김세준이 낮게 중얼거렸고, 이주성이 옆에서 난감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거의 다 왔다고 합니다.”
그의 말에 김세준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고, 10분 후, 주차장으로 들어서는 하나의 밴을 보며 김세준이 발걸음을 옮겼다.
자신이 채 다가가기도 전에 활짝 열리는 문. 그 안엔 에드 케인이 있었고, 자신을 보자 그가 반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늦어서 미안!”
늦은 것치곤 상당히 쾌활한 목소리.
하지만 그게 에드 케인이기에 김세준이 피식 웃곤 벤에 탑승했다.
“조금만 더 늦으면 그냥 한국으로 돌아가려 했어.”
“호오. 그것도 제법 화제가 될 일이긴 하지. 근데... 오늘, 네 복장이 엄청 마음에 드는데?”
시상식인 만큼, 깔끔한 양복을 갖춰 입은 에드 케인이 김세준을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
오늘 김세준이 차려입은 옷.
작년 참여한 시상식인 ‘아시안 뮤직 어워드’에 입고 간 옷과 그대로였다.
즉, 에드 케인처럼 양복이 아닌 개량 한복.
‘이런 시상식에 한복을 입고 참가하고 싶었지.’
비록 주인공은 아니지만, ‘그래미 어워드’ 같은 시상식에 한복을 입고 레드 카펫을 밟는 꿈을 꿈꿔왔던 그였다.
화려하면서도, 과하지 않은 그 아름다움에 에드 케인이 넋이 나간 듯 중얼거렸다.
“진짜 아름다운데? 내 건 없어? 나도 이딴 양복 말고 네가 입고 있는 옷 입고 싶은데.”
“미처 생각 못 했네. 다음에 미국 올 때 챙겨와 줄게.”
“음. 부탁하지.”
한복 끝자락을 만지작거리며 감탄을 뱉는 그였고, 김세준이 뿌듯한 마음과 함께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사람들로 가득한 길거리. 그중 눈에 띄는 사람을 발견한 김세준이 에드 케인을 보며 호들갑을 떨었다.
“오! 에드! 저기 네 팬도 있는데?”
김세준이 창문 밖으로 에드 케인의 이름이 적힌 피켓을 들고 다니는 팬을 보며 말했고, 에드 케인이 한복을 계속 만지작거리며 피식 웃었다.
“오늘 관객이 만 구천 명인데, 한 명쯤은 있어야지.”
“근데 왜 내 팬은 안 보... 어라?”
김세준이 반 장난삼아 던지려던 말을 급히 수정했다.
자신의 이름, 석 자가 적힌 피켓을 들고 다니는 한 무리의 팬들.
동양인으로 보이는 그들을 보며 김세준이 사뭇 놀랐다.
설마 자신의 팬들이 이 시상식까지 올 줄이야.
그런 그를 보며 에드 케인이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여기 LA잖아. 한인타운이 크게 있지 않아?”
“아!”
그의 말에 김세준이 탄식을 뱉었다. 미국에서도 재미교포들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한인타운이 LA 아닌가.
“이거 공연할 맛 나네.”
직접 무대를 보러 오는 팬들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김세준이 입가에 작은 미소를 그렸다.
이 시상식에 참석하는 가수들의 이름이 얼마나 쟁쟁한가.
그런 그들 말고, 고작 피쳐링을 하는 자신을 보기 위해 팬들이 오늘 시상식까지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LA에 사는 너의 팬들한테는 다른 가수들보다 네 얼굴 보기가 더 힘든 거잖아. 그럴만하지.”
진심으로 한복에 빠져든 에드 케인이 수놓아진 자수를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고 김세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의 다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조수석에 앉은 이주성이 뒤를 돌아보며 외쳤고, 김세준이 침을 꿀꺽 삼켰다.
이제 이 차에서 내리면 모든 연예인의 로망.
레드 카펫을 밟으며 취재진의 카메라 불빛이 그들을 비췬다.
한복에 빠져 있던 에드 케인도 옷매무시를 가다듬었고, 김세준도 한복을 둘러보며 마지막 점검을 시작했다.
이윽고 차량이 멈췄고, 이주성이 먼저 내렸다.
잠깐 열린 조수석 문틈 사이로, 보이는 풍경에 김세준의 심장이 급격하게 뛰었다.
레드 카펫과 연신 빛을 내뿜는 수십 개의 카메라. 팔짱을 낀 채 늘어져 가이드 라인을 친 경호원들. 그리고 그 경호원들과 안전차단봉 너머로 인파를 이루고 있는 수백 명의 사람.
그리고 이내 이주성이 밴의 문을 활짝 열었고, 사람들의 환호성이 김세준의 귓가에 들렸다.
“가자고.”
약간 얼어붙은 김세준을 향해 에드 케인이 미소지으며 등을 툭 친 뒤 먼저 내렸고, 김세준이 그 뒤를 따랐다.
말로만 듣던 그래미 어워드의 레드 카펫.
김세준의 긴장한 모습을 감추려고, 어깨를 펴고 당당한 발걸음으로 그 카펫 위를 걸었다.
에드 케인과 나란히 서서 걸으며, 주변을 향해 미소지었고, 동시에 느꼈다.
자신은 오늘 초대받았지만, 초대받지 않은 손님과 비슷하다는 걸.
어색했다.
자신을 보며 의아한 시선을 보내는 그들을 향해 미소지어야 하는 게.
창문 너머로 보였던 자신의 팬들.
하지만 여기 모인 군중에 비하면 극소수에 불과한 사람들이었고, 대부분의 시선이 자신이 아닌 에드 케인에게 꽂혀 있었다.
그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물었다.
너는 누군데 여기 있는 거냐고.
방금까지 떨렸던 마음이 거짓말처럼 식어버렸다.
무슨 기대를 하고 있던 걸까.
자신은 이 시상식에 참석한 사람 중, 가장 인지도가 떨어지는 게 사실.
그런데도 마치 동화 속 주인공이 된 기분을 느꼈고, 단 1분도 안 되어 현실로 돌아왔다.
김세준과 에드 케인의 발걸음이 멈춘 건, 취재를 나온 미국 연예 방송 아나운서 앞이었다.
당연히 자신을 향한, 질문보단 에드 케인에게 던지는 질문이 많았고, 김세준에겐 예상한 질문만 날라올 뿐이었다.
아시안 최초로 그래미 어워드에 서는 소감이 어떠냐는 형식적인 질문.
김세준 또한 형식적인 대답으로 답했다.
“이런 좋은 자리에 초대해주신 그래미 어워드 관계자 분들께 감사드리고, 아시안으로 처음 그래미 어워드에 초청받게 되어 진심으로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인터뷰가 끝났고, 김세준은 에드 케인과 함께 발을 맞추며 스테이플스 센터로 들어갔다.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데?”
자신들을 적나라하게 찍던 카메라가 사라지자, 에드 케인이 물었고 김세준이 고개를 적었다.
“내 위치를 다시 느낀 것뿐이야.”
별이 빛난다고 해도, 달 옆에 서면 그 빛이 바래는 법.
오늘은 별은 물론 달과 태양까지 한곳에 모이는 자리다.
당연히 더 빛나는 그들을 향해 시선이 꽂힐 수밖에 없었다.
***
“오! 에드!”
내부로 들어간 김세준과 에드 케인을 반긴 건, 이미 수많은 사람에 파묻혀 있던 한 여성이었다.
“오. 이게 누구야. 오늘 주인공이잖아?”
그런 여성을 향해 에드 케인이 반가운 목소리로 말했고, 그녀는 그의 말을 장난스럽게 받아쳤다.
“그치. 오늘 너는 영 꽝이겠지만.”
웃음을 터트리며 말하는 그녀였고, 김세준이 그런 그녀를 보며 감탄을 뱉었다.
에드 케인과 장난치며 말하는 그녀.
김세준도 너무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올해 8월에 데뷔해 혜성처럼 등장한 신인.
데뷔하자마자 빌보드 차트는 물론, 한국을 비롯한 해외 차트에서도 1위를 하며 전 세계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여자 싱어송라이터.
오늘 그래미 어워드에서 가장 많은 상을 독식하리라고 예상되는 인물이기도 했다.
본상인 올해의 노래상과 최고의 신인상.
거기에 더해 베스트 팝 솔로 퍼포먼스 상까지.
신인치곤 믿기지 않을 성적이었지만, 더욱 놀라운 건 그녀가 아직 고작 스무 살이라는 점이었다.
“인사해. 여기는 이번 내 앨범 타이틀 곡 피쳐링 해준 김세준. 그리고 이 사람은 누군지 말 안 해도 알지? 브리나.”
에드 케인의 말에 김세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브리나. 데뷔 때부터 최고의 활약을 펼친 그녀이지만 향후엔 더욱더 많은 인기를 끄는 가수다.
훗날엔 세계 순회공연까지 거뜬히 소화하는 월드클래스.
“오오! 반가워요! 브리나에요!”
그녀가 김세준을 보며 감탄을 뱉으며 손을 내밀었다.
“김세준입니다.”
“저, 당신 미튜브도 몇 번 봤어요. 기대하고 있는데, 아직 제 노래는 커버 안 하셨더라고요?”
“아, 한국에 돌아가자마자 바로 커버할게요.”
“오! 약속했어요? 에드 노래 커버한 영상 보면서 얼마나 놀랐는데요. 솔직히 에드 이번 노래가 성공한 것도 당신 공이 컸죠!”
에드 앞에서 당당하게 까는 그녀. 에드 케인이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지만, 속으론 뜨끔했다.
자신도 많이 공감하는 그녀의 말이었다.
“다음번에 기회가 된다면 저도 피쳐링 부탁하고 싶네요.”
싱긋 웃으며 말하는 그녀였고, 김세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야 당연히 환영이죠.”
“오. 저는 거절하지 않네요. 저도 저스틴이나 제인처럼 거절당할 줄 알았는데.”
어린 나이여서 그런 걸까. 말하는 데 거침이 없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모습이 예의 없어 보이진 않았다. 발랄하고 재기 넘치는 여성.
그런 매력을 가진 게 브리나였다.
“더 떠들다간 방송 시작하겠어. 안으로 들어가 자리에 앉자고.”
에드 케인이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하며 입을 열었고, 김세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김세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브리나가 입술을 혀로 핥았다.
가수들의 퍼포먼스로도 유명한 ‘그래미 어워드’.
매년 역대급 무대가 쏟아져 나오는 시상식이었고, 오늘 그녀가 가장 기대하는 무대가 김세준이 나오는 무대였다.
김세준이란 이름.
지금 이 자리에 그 이름을 명확히 아는 사람은 몇 없지만, 그 이름을 아는 사람들은.
그 이름을 절대 가볍게 생각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