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야금 뜯는 천제가수-69화 (69/148)

#69

북한 공연(2)

이번 북한에서의 공연은 북한의 대표적인 공연장인 동평양대극장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최대 1500명이 들어설 수 있는 규모의 극장. 남한과 비교하면 큰 편은 아니지만, 북한에서 공연을 즐길 수 있는 소수의 사람을 생각한다면 나름대로 규모 있는 공연장이었다.

그리고 공연 시간이 다가오자, 1500석의 자리가 꽉 차기 시작했다.

남자들은 양복을 입고, 여자들은 한복을 입은 채 객석을 채운 사람들.

그런 북한 관객들을 무대 뒤편에서 보던 가수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분위기가 뭔가 어두운데?”

성민이 낮게 중얼거렸고, 옆에 있던 콰인도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표정이 왜 이렇게 굳어 있는 거야?”

한국에서 펼쳤던 공연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

어디서 공연을 하든, 자신들에게 열광하고 시작 전부터 기대감 넘치는 눈빛을 보내던 관객들과는 전혀 다른 감정이 느껴졌다.

부정적인 느낌보단 무미건조하다는 느낌.

무표정 일색인 관객들을 보며 적응 못 하는 가수.

하지만, 김세준은 지금 관객들의 반응이 생각처럼 심각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역지사지로 생각했을 때, 우리도 북한에서 공연단이 온다고 했을 때, 온전히 즐길 수 있을까?

호기심이 동하긴 하겠지만, 긴장감이 앞서는 게 사실. 저들 또한 그런 기분과 비슷할 터.

게다가 아직 다른 가수들에게는 전해지지 않았지만, 북한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북한 최고지도자인 김정은이 내일이 아닌, 오늘 공연을 보러 찾아온다는 걸.

오늘 관객으로 찾아온 이들이 북한에서 상위 1% 정도는 되는 사람들이겠지만, 이들이라고 김정은의 얼굴을 실제로 보는 건 흔하지 않을 터.

긴장감이 그들을 휘감는 게 당연했다. 혹여 웃는 낯으로 있다가 김정은의 심기라도 불편하게 만든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지 않나.

‘뭐 그래도 막상 공연이 시작하면 반응은 괜찮았으니까.’

북한에서 촬영을 맡은 이번 공연은, 대한민국에서도 방영이 된다. 본방송은 아니었지만, 방송에 나왔던 무대의 반응은 제법 나쁘지 않았다.

박수도 하고, 종종 미소를 띠며 공연을 관람하는 관객들의 모습도 카메라에 나타났으니까.

“너무 긴장하지 마세...”

다른 가수들의 긴장을 풀어줄 겸, 말을 뱉으려던 김세준의 시선에 하얗게 질린 얼굴로 뛰어오는 블루라인의 막내 제나의 모습이 보였다.

“대...대박!”

“응?”

단걸음에 달려온 제나가 숨이 넘어갈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김...김정은이 왔는데요?”

“뭐?”

“김...김정은? 북한 독재.. 헙!”

말을 가볍게 놀리려던 콰인이 급히 입을 다물고 주변 눈치를 살폈다. 이곳은 표현의 자유가 있는 대한민국이 아니었다.

아연실색한 콰인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다른 가수들이 제나에게 달려들었다.

분명 김정은은 오늘 공연이 아닌, 내일 있을 공연을 관람하러 온다고 하지 않았나.

“진짜로? 확실해?”

“네! 방금 그, 같이 온 기자분들이 이야기하는 거 들었어요.”

“아니... 갑자기 왜...”

“아이씨...”

안 그래도 관객들을 보며 긴장감에 빠져 있던 공연단들의 얼굴이 찌푸려지며 신경질을 내뱉었다.

‘진짜 왔네...’

이미 예상했던 일이 벌어져서일까. 김세준은 그들보단 가벼운 마음이었고, 그의 시선에 VIP들이 자리 잡은 2층 무대가 혼란스러워지는 걸 발견했다.

김정은의 등장.

순간 무대를 바라보고 있던 모든 관중이 자리에서 일어나, 김정은을 바라봤다.

1500명이 한 사람을 향해 경외심을 내비치는 풍경.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이곳에서 볼 수 있는, 두려움마저 느껴지는 그 광경에 가수들이 다시 한번 얼어붙었다.

김세준과 단 한 사람을 빼고.

“자자, 어차피 내일이면 만날 사람이었어. 긴장들 풀고 공연 준비나 마무리해. 가수잖아. 그냥 평범한 관객이라고 생각하라고.”

가왕 이주관.

백 차례에 달하는 공연을 치렀다는 그의 연륜이 어디 안 갔는지, 공연단 대표로서 가수들을 다독였고 그의 말에 다른 가수들이 한숨을 내뱉었다.

많은 위로가 되진 않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

오후 4시 30분.

대한민국 예술단의 평양공연이 드디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첫 무대를 꾸미는 건 트로트의 여왕, 박지희.

그녀의 히트곡인 ‘울지 마세요’를 부르며 시작된 공연이었고, 김세준의 생각대로 관객들의 반응은 썩 나쁘지 않았다.

박지희가 등장하자 박수로 그녀를 맞이했고, 노래 중간중간에도 그녀의 노래를 깊이 감상하는 모습도 보였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처음 봤던 관객들의 모습에 비해서 괜찮다는 뜻.

한국 공연처럼 열렬하게 반응하지 않았다. 다소 경직된 사람들의 반응과 갑작스럽게 등장한 김정은.

박지희는 본디 제 실력에 절반도 뽐내지 못하고 무대를 내려왔고, 그건 박지희의 뒤를 이어 무대에 올라간 다른 가수들도 마찬가지였다.

‘아쉽네...’

텔레비전으로 봤을 땐, 괜찮다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실제 무대에 와보니 자신이 아는 그들의 실력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는 생각에 김세준이 안타까운 시선을 관객들을 향해 보냈다.

‘저 사람들도 지금 오로지 무대에 집중할 수 없겠지.’

말 한마디로 자신은 물론, 가족들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는 권력자가 등 뒤에 있다.

그런 상황에서 무대에만 집중하는 사람이 미친 사람일 터.

관객들의 반응만 좀 더 활발했다면 공연단의 공연 퀄리티도 지금보단 훨씬 좋았을 텐데.

아쉬운 마음을 가지며 김세준이 침을 꿀꺽 삼켰다.

어느덧 공연도 절반이나 치러진 상황.

이제 다음 무대가 자신의 차례였다.

자신이 이번 공연에서 부를 곡은, ‘심청가’와 ‘단심가’.

자신의 대표곡이자 북한 사람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두 곡을 선보이기로 했고, 자신의 ‘단심가’가 끝나면 세현이 나와 ‘하여가’를 부르는 무대 구성이었다.

“형. 잘하고 오세요.”

그의 다음 차례인 세현이 그를 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응원을 보냈고, 김세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종일관 다른 가수들에 비해 침착했던 그지만, 막상 무대에 오를 시간이 다가오자 손에서 땀이 스며 나왔다.

‘괜찮아. 다른 무대와 똑같은 무대야. 너무 신경 쓰지 말자.’

머릿속으로 혼자 되뇌며 하는 마인드 컨트롤.

그리고 이내 김세준의 전 차례였던 성민의 무대가 끝났고, 불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내려오는 그를 지나치며 김세준이 무대 위로 올라갔다.

‘흐음...’

무대에서 바라보는 관중들의 얼굴.

공연을 즐기러 온 사람들의 표정이 아니었다. 대부분 긴장되고 경직된 얼굴.

항상 흥분에 가득 차 있던 관객들의 얼굴을 봐왔던 가수들이 괜히 제 실력을 못 내는 게 아닐 정도로 위화감이 흘렀다.

‘괜찮아. 바꾸면 돼.’

그나마 다행인 건 저들의 얼굴에 궁금증이 생겼다. 북한에서도 전통 악기인 가야금 2개를 들고 무대에 오른 김세준을 향한 작은 호기심.

“아. 안녕하세요. 평양 시민 여러분. 저는 가수 김세준입니다. 오늘 이런 뜻깊은 자리에서 공연을 펼치게 되었습니다. 제가 연주할 곡은 저희의 전통 노래인, 심청가와 시조인 단심가를 재창작하여 만든 곡입니다.”

김세준이 마이크를 잡고 떨리는 목소리로 인사를 올렸고, 관객들이 박수로 그를 환영했다.

그리고 동시에 아까보다 커다란 호기심이 그들에게 생겼다. 여기 모인 자들의 배움은 북한에서도 절대 짧지 않다.

심청가는 물론, 고려 시대 유명 시조인 단심가도 이름 정도는 들어봤을 수준.

자신들이 아는 그 노래와 시조를 어떻게 재창작했을지에 대한 궁금증이 생긴 그들이었고, 김세준이 받침대 위에 가야금을 올려놓곤 천천히 현을 뜯었다.

김세준이 현을 뜯음과 동시에 울리는 다른 국악기들의 절절한 음색.

익숙하고 친숙한 그 음색에 그동안 긴장감에 절여져 있던 사람들의 얼굴에 작게나마 미소가 지어졌다.

눈을 감으면 당신이 떠오르죠.

당신은 눈을 감아도 저를 떠올리지 못하시겠죠.

더듬거리며 제 얼굴을 어루만지던 당신의 손길이

너무 따뜻하여 하염없이 눈물 흘렸죠.

그리고, 심청이의 분야가 시작되자, 이번 평양공연을 거절한 강유나 대신, 블루라인의 메인 보컬인 서리가 무대로 나타났다.

‘음. 이 정도면 괜찮아.’

긴장감 덕분에 평소 제 실력을 발휘하진 못하고 있지만, 그래도 서리 특유의 고운 음색은 여전했다.

많이 걱정했는데, 다행히 걱정보다는 나은 모습을 보여주는 서리를 보며 김세준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이어서 울리는 김세준의 목소리.

거칠 게 들리지만, 딸을 잃은 아비의 심정을 고스란히 나타내는 김세준의 목소리에 관객들의 눈동자의 놀라움이 스쳤다.

긴장 가득했던 그들의 얼굴이 조금씩 그리고 천천히 풀리기 시작했다.

오늘 관객으로 참여한 사람들. 여성들도 있지만, 대다수가 중년 남성들이었다.

즉, 이곳에 모인 대다수가 한 가정의 아버지란 뜻.

쉽게 감정 이입할 수 있는 김세준의 곡은 그들에게 깊은 울림을 줬고, 대놓고 눈물을 흘리진 못했지만, 감동한 표정이 역력했다.

‘하. 다르네.’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며, 무대 뒤편에서 기다리고 있던 세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혀를 찼다.

김세준의 무대 전후로, 관객을 감싸고 있던 공기가 달라졌다.

무대 뒤편에서도 또렷하게 전해지던 냄새.

언제 끊어질지 모르게 팽팽히 당겨진 실처럼 조여지던 분위기가 한결 풀어졌다.

‘심청가’란 노래와 가야금.

북한 주민들에게도 친숙하고 정겨운 존재가 그들을 무대에 빠져들게 하고 있었다.

‘진짜... 저 형도 대단해.’

대단한 사람인 건 진작 알았지만, 오늘 새삼 다시 한번 깨달았다.

좀처럼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던 다른 가수들.

다른 가수들도 본래의 실력을 뽐냈다면 관객들을 무대에 빠져들게 하 기량은 충분했다.

다만 너무 긴장한 나머지, 자신의 실력을 제대로 뽐내지 못했다는 게 문제지만.

반면 김세준은 그런 모습 따윈 없이 자신의 실력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후우...’

세현이 안도의 한숨을 내뱉으며 김세준에게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자신의 앞 차례에서 관객들의 경계를 풀어준 김세준 덕분에 자신도 조금 더 편하게 공연을 펼칠 수 있을 거 같았다.

‘심청가’가 끝나고 이어진 ‘단심가’의 무대.

‘심청가’보다 제법 묵직한 분위기.

하지만 이미 김세준의 무대에 빠진 사람들을 사로잡는 데엔 큰 영향이 없었다.

게다가 여기 있는 자들이 ‘단심가’를 모르는 것도 아니었으니.

오히려 김씨 정권에 충성해야 할 그들의 시선에서 ‘단심가’는 호응하기 좋은 소재였다.

오히려 이 노래에 호응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면 자신들의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을 터.

‘단심가’의 무대가 끝나자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엄청 큰 박수가 터져 나왔고, 김세준은 흡족한 미소와 함께 무대 뒤로 내려왔다.

“잘하고 와. 세현아.”

“네. 덕분에 잘 할 수 있을 거 같아요.”

긴장이 풀린 세현이 작은 미소와 함께 무대로 올랐고, 김세준은 가수들이 대기하고 있는 방으로 향했다.

개인적으로도 만족스러운 무대. 게다가 세현은 물론 자신의 뒤를 이어 무대를 꾸밀 다른 가수들에게도 도움이 됐으리라.

그런 생각과 함께 발걸음을 옮기던 그를 한 남성이 붙잡았다.

“김세준 동포.”

“예?”

자신의 어깨를 붙잡고, 들리는 북한 말에 김세준이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건장한 체구의 남성 다섯 명이 보였다.

“무...무슨 일입니까?”

무대에서도 긴장하지 않던 그가 이번만큼은, 식은땀을 흘렸다.

그들의 모습. 심상치 않아 보였다. 북한에서 흔히 볼 수 없는 거대한 덩치와 날카로운 눈빛.

정장을 입고 있지만, 딱 봐도 그들이 군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어깨를 붙잡은 한 남자가 냉철한 눈빛을 보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국무위원장께서 동포에게 전한 말씀이 있습네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