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여자의 마음
“어? 예은아?”
김세준이 갑작스럽게 녹음실을 찾은 이예은을 보며 당혹감을 숨기지 못했다.
뭐랄까.
죄 짓은 건 아니지만, 순간 죄를 지은 듯한 죄책감이 밀물처럼 밀려 들어왔다.
녹음실로 들어온 직후, 자신을 본 이예은의 표정이 순간 너무 슬퍼 보였기 때문에.
평소 자신에게 고마워하고, 부끄러워하던 감정만 얼굴로 내비치던 이예은.
저런 표정을 지금까지 본 적이 없었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일그러진 그녀의 표정을 김세준은 놓치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그냥 한 번 놀러 왔는데, 손님이 있었네요.”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말투로 내뱉는 그녀의 말에 김세준이 말을 떠듬거렸다.
“어...어. 내 앨범 피쳐링 해줄 브라이니라는 걸 그룹 분들이야. 인...인사해.”
“안녕하세요! 브라이니입니다!”
김세준과 이예은의 속마음도 모른 채 ‘브라이니’가 밝은 목소리로 이예은에게 인사를 건넸다.
이예은이 누군가.
요새 대한민국 남성들의 마음을 뒤흔드는 여자 중 한 사람으로 꼽을 수 있는 가수.
수려한 외모는 물론, 실력까지 논란의 여지가 없는 싱어송라이터로 올해 신성처럼 나타난 신인.
데뷔부터 처참한 실패를 겪었던 자신들과 달리,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는 그녀.
‘진짜 이쁘네...’
그런 이예은을 보며 연아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비록 인기는 없지만, 자신도 아이돌.
남부럽지 않은 외모를 가졌다고 자부하지만, 그녀의 얼굴을 보자 자신의 외모에 처음으로 아쉬움을 느꼈다.
특히 크진 않지만, 깊어 보이는 그녀의 눈. 서양적인 눈이 아닌 동양적인 눈.
“와 진짜 이쁘시네요...”
속으로 감탄만 내뱉던 연아와 달리, 막내인 줄리아는 스스럼없이 말을 뱉었고, 다른 맴버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연아와 줄리아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그녀의 외모를 보며 진심으로 탄복 중이었다.
“아, 아니에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이예은이라고 해요.”
이예은이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히며 허리를 숙였다.
힘껏 치장하고 온 자신의 모습을 외향을 칭찬해주는 그녀들의 모습이 기분 나쁘지 않았다.
다만, 막상 알아보고 칭찬해주길 바랐던 사람이 묵묵부답인 게 조금 서운하고 답답할 뿐.
“예은아. 마침 잘 왔어. 지금 안 그래도 브라이니하고 부를 곡을 들어보려고 했는데, 너도 같이 들을래?”
기분이 조금 풀어진 듯한 이예은의 심정을 놓치지 않고 김세준이 재빨리 화제를 돌렸고, 음악 이야기가 나오자 그녀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네. 근데 괜찮아요?”
이예은이 ‘브라이니’를 보며 우려를 표했다.
외부인인 자신이 곡을 들어도 될까 싶었지만, ‘브라이니’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네! 괜찮습니다!”
그녀들의 매니저인 김경호가 대신하여 밝은 목소리로 답했다.
설마 그녀가 노래를 듣는다고 무슨 문제가 생길까.
애초에 자신들은 피쳐링일 뿐, 곡의 주인도 아니었다.
맴버들 또한 흔쾌히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고, 당사자들의 반응을 확인한 김세준이 곡을 틀었다.
이윽고 녹음실 가득 퍼지는 멜로디를 들으며 김세준이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고, 김경호를 필두로 ‘브라이니’의 입가에 미소가 드리어졌다.
‘곡 좋네...’
이예은도 노래의 귀를 기울이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트로피컬 하우스(Tropical house) 풍의 노래로 상큼함이 톡톡 터지는 발랄한 곡.
트로피컬 하우스의 장르적 특성상 분위기가 밝고 흥겨웠고 과하지 않은 신디사이저의 소리와 가야금의 조화가 귀를 사로잡았다.
자칫 잘못하면 흔하디흔한 업텝포 댄스곡처럼 들릴 수도 있는 곡이, 가야금이 가미되자 그 뻔한 감성이 사라지고, 김세준 곡 특유의 독특한 개성이 물씬 풍겼다.
밝은 에너지를 뿜어내는 곡.
그 곡이 중간 랩 파트로 들어가자 분위기가 제법 무거워졌다. 베이스로만 울리는 묵직한 파트.
래퍼인 미진인 직감적으로 여기가 자신의 파트라는 걸 느끼고 얼굴 가득 미소를 지었고, 김세준이 그녀의 미소를 놓치지 않았다.
‘마음에 드나 보네.’
전체적인 곡의 무게감을 잡아주기 위해 넣은 약간 무겁게 만든 중간 랩 파트.
덕분에 밝은 곡이면서도 그런 느낌이 과하지 않다. 억지로 설레고 밝은 느낌을 주기보단, 적절한 조화를 선택한 김세준이었고 사람들의 미소를 보며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신했다.
4분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곡이 끝나자, ‘브라이니’ 맴버들은 다들 자신도 모르게 감탄을 흘렸다.
“우와...”
연아는 곡이 끝난 순간 확신할 수 있었다.
2년 동안 활동할 동안 불렀던 많은 노래 중, 이 노래보다 좋은 노래는 없었다고.
“어때요? 다들 괜찮아요?”
김세준이 슬며시 웃으며 묻자 다들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김경호 또한 옆에서 감동한 표정으로 김세준을 바라봤다.
천재.
업계에서 들리는 그의 별명과 이야기를 수없이 들어봤지만, 막상 실제로 보니 진짜 천재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사람이다.
그동안 그가 보여줬던 음악이 아닌 전혀 색다른 방식의 노래 퀄리티가 이렇게 뛰어날 줄이야.
“일단 피쳐링으로 들어오시는 거긴 하지만, 곡의 분위기가 분위기인 만큼 아마 파트가 적지는 않으실 거에요. 래퍼 빼고 솔로 파트는 없을 거 같긴 하지만요.”
이어진 김세준의 설명에 미진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지어졌고, 다른 맴버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들이 지금 솔로인지 아닌지를 가릴 처지가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가만히 있던 이예은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빠. 이거 곡 컨셉은 뭐에요?”
“컨셉? 글쎄. 아직 확실하진 않지만 달달한 사랑 노래 아닐까?”
그의 말에 ‘브라이니’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밝고 상쾌한 곡. 연인의 달짝지근한 사랑놀이 아니면 딱히 표현할 주제가 없었다.
그리고 그의 말을 들은 이예은이 이번엔 김세준도 눈치채지 못하게 살짝 표정을 구겼다.
노래이긴 하지만, 그와 다른 여자가 서로 알콩달콩한 말을 주고받는단 생각을 하니 썩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의 내면 깊은 곳을 천천히 들여다봤고,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인정하기로 했다.
자신이 그를 좋아하고 있다는 걸. 그리고 동시에 자신이 생각보다 질투가 심하다는 것을.
***
박진숙은 평소 예능을 잘 챙겨보진 않지만, 아들인 김세준이 종종 나오는 방송은 매번 챙겨봤다.
평소 재미없다고 생각하던 방송도 아들만 나오면 그렇게 재밌고, 행복할 수가 없었고, 보기 힘든 아들의 얼굴을 텔레비전을 통해 보는 것만으로도 좋았으니까.
“얘가 웬일이래.”
그리고 박진숙이 슬며시 미소 지으며 얼마 전 김세준이 한 말을 떠올렸다.
이번 주 ‘명곡의 대결’에 출연하니까 무조건 챙겨보라고 말하던 아들.
평소 방송에 나오는 자신의 모습을 부끄러워하며 보지 말라고 장난스럽게 말하던 아들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시작해요! 여보!”
먼저 거실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던 김창용이 부엌에 있던 박진숙을 불렀고, 그녀가 과일 접시를 들곤 거실로 향했다.
“이거 노래 부르는 거 맞죠?”
두르고 있던 앞치마를 푸르며 박진숙이 묻자, 김창용이 고개를 끄덕였다.
“음. 무슨 옛날 노래를 리메이크해서 부르는 거라는데 얼른 와서 앉아요.”
오늘따라 유독 호들갑을 떠는 남편의 모습에 박진숙이 순간 의아해했으나 그의 말을 순순히 따랐다.
그리고 그런 아내를 보며 김창용이 속으로 작은 미소를 지었다.
그의 아들과 합작하여 만든 깜짝 선물.
요 며칠 동안 근질거리는 입을 참느라 정말 힘들었었다.
‘얼마나 좋을까.’
공식 방송에서 아들이 불러주는 노래.
김창용이 부러운 감정이 가득 담긴 시선으로 박진숙을 바라봤다.
‘심청가’ 때문에 한동안 자신을 질투하던 그녀의 심정이 단번에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다들 잘하네요. 세준이가 우승할지 모르겠네.”
박진숙이 텔레비전 속 무대를 바라보며 걱정스러운 말투로 중얼거렸다.
김세준의 무대 순서는 네 번째.
김세준보다 앞서 무대를 보여준 다른 참가자들의 노래도 박진숙이 보기엔 나쁘지 않았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세준이가 잘 준비했겠지.”
반면 이미 아들을 통해 결과를 들었던 김창용은 느긋하게 방송을 바라봤다.
그리고 방송이 시작한 지도 어느덧 40분 정도가 흐르자, 드디어 김세준의 차례가 다가왔다.
“어머?”
그리고 김세준이 마이크를 잡자마자 뿌듯하면서도 걱정 섞인 복합한 심정으로 바라보던 박진숙이 놀란 얼굴이 되었다.
어머니들을 위한 노래라는 아들의 말.
“아니. 얘는 그냥 한 말 가지고. 또 무슨 방송에까지 나가서 저러는 거야.”
호들갑을 떨며 박진숙의 얼굴에 진한 미소가 새겨졌다.
김세준이 왜 저런 무대를 준비했는지 단번에 이해가 갔으니까.
고마우면서도 미안한 심정. 하지만 아들이 어미를 위해 노래를 불러준다는 생각을 하니 가슴이 무대 시작도 전에 벅차올랐다.
“...!”
그리고 이내 시작된 김세준의 무대.
첫 멜로디를 듣자마자 박진숙의 눈이 크게 떠졌고, 옆에 있던 김창용의 팔뚝을 연신 내리쳤다.
“여보! 여보! 여보! 이거 그거네! 그거!”
“아! 아파요! 아파!”
제법 매운 박진숙의 손맛에 김창용이 어깨를 움츠러들며 고통을 호소했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아들이 부르는 감미로운 노래.
자신이 수없이 불러줬던 노래였다.
섬집 아기.
수많은 자장가 중에서 세준이가 유독 좋아했던 노래.
잠투정이 심한 아들이 이 노래만 불러주면 눈이 사르르 감겼다.
한참 미운 네 살 때도 이 노래를 들으며 잠들던 아들의 모습은 천사가 따로 없었다.
“어떡해...”
박진숙이 입을 틀어막으며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자식을 키우는 게 힘들고 괴롭지 않았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허리가 부서지는 줄 알았고, 손목이 끊어지는 줄 알았다.
숙면이 아닌 쪽잠만 잘 수 있어도 감사했고, 밥 한 끼 챙겨 먹기도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 모든 걸 감내할 수 있을 만큼 기쁨과 행복을 느꼈다.
쌕쌕거리며 잠든 아들의 모습은 어떤 보석보다 아름다웠으며 자신을 향해 싱긋 웃는 아들의 미소는 아침 햇살보다 눈이 부셨다.
그런 아들에게 자장가를 불러주던 자신의 옛 추억.
소중하고 귀한, 그리고 떠올리면 마음이 뭉클해지는 그때의 나날들.
자신만 그런 줄 알았다.
아들은 어렸고, 이런 추억은 부모만 간직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런 그녀에게 김세준의 무대가 알렸다.
당신의 아들도, 그때의 추억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고.
당신의 사랑과 희생을 잊지 않고 있다고.
그리고 2절이 시작되자 박진숙은 텔레비전에 나오는 백스크린을 보며 눈물을 하염없이 쏟아냈다.
자신과 아들의 어렸을 때의 사진들.
요즘도 종종 꺼내보는 낡고 빛바랜 사진들이 등장하자 박진숙이 울며 김창용을 바라봤다.
“고생했어요. 여보.”
김창용도 막상 무대를 보자 감정이 벅차오르는지 약간 물기가 담긴 목소리로 그녀를 위로했고, 박진숙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 장씩 넘어가는 사진과 김세준의 호소력 짙은 노래.
박진숙이 진한 감정이 담긴 목소리로 낮게 중얼거렸다.
“우리 아들... 다 컸네요...”
“음. 다 컸지. 진짜 다 컸어.”
사진 속 갓난아기가 어느새 장성해 방송에 나와 어미를 위로한다.
부모로서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을 느꼈고, 박진숙의 입가엔 작은 미소가 그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