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야속한 마음
“이거... 캐논 변주곡이네요?”
김세준이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웃음 지었고, 민호와 찬하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캐논 변주곡.
요한 파헬벨(Johann Pachelbel)이 작곡한 곡으로 삼백 년 전에 만들어진 곡이지만, 아직도 널리 사랑받는 곡.
단순히 클래식 음악뿐 아니라, 대중음악에서도 편곡되어 사용되는 멜로디.
수많은 클래식 중에서 대중들에게 익숙한 노래 중 하나라고 말할 수 있는 노래다.
정확한 시기는 기억 안 나지만, 가야금도 캐논 변주곡과 접목한 적이 있다.
캐논 변주곡을 가야금이 연주하며, 비보이가 춤을 추는 영상이 제법 큰 화제가 됐던 기억.
국악과 클래식의 조화가 대중들은 물론, 김세준에게도 제법 인상 깊게 다가왔던 영상이었다.
‘올드하다더니... 꼭 그런 것도 아니네.’
인트로는 캐논 변주곡을 가야금이 연주하며 시작한 이 곡. 전체적인 분위기는 트루비 특유의 감각이 세련되게 녹아들어 있다.
캐논 변주곡을 사용하여 곡에다가 올드한 분위기를 심었다기보다는, 트렌디한 분위기 속 캐논 변주곡을 녹여 냈다는 게 더 정확한 느낌이다.
“좋은데요?”
노래가 끝나고 김세준이 흡족한 표정으로 둘을 바라봤다.
둘이 작곡한 노래. 자신의 기대 이상이었다.
클래식과 가야금의 조화는 자신도 상상하지 못했던 조합. 그리고 그 결과물이 썩 마음에 들었기에 김세준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웠다.
‘이 노래에다가 수호의 랩하고 내 노래가 들어가면...’
완성된 작업 본을 생각하자 절로 끄덕여지는 고개.
그런 김세준을 보며 트루비가 서로 손뼉을 마주쳤다.
“됐다.”
“한 번에 만족해서 다행이네.”
자신은 있었지만, 음악이란 게 사람마다 감상이 다르다 보니, 작은 불안감이 있던 것도 사실.
김세준이 만족감을 드러냄과 동시에 가지고 있던 불안감이 해소되었다.
“그러면 수호랑 해서 한 번 일정 조정해보자. 우리도 최대한 맞춰볼 테니까.”
“네. 굳이 무리해서 안 맞춰주셔도 돼요. 당분간 전 일정 거의 없을 테니까.”
“아, 알겠어. 그러면 우리가 수호랑 맞춰보고 연락 줄게.”
그들의 친절한 말에 김세준이 싱긋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
“꺄아아아아악!!!!”
‘브라이니’에 숙소에서 때아닌 비명이 울려 퍼졌다.
그것도 한 사람의 비명이 아닌 다섯 명의 목소리가.
“오빠! 그... 그 말 진짜예요?”
분홍색으로 머리를 염색한 세나가 입을 틀어막으며 자신들의 매니저인 김경호에게 되물었다.
방금 김경호가 전해준 말. 좌절 속에 살아가던 자신들에게 한줄기 단비 같은 소식이었다.
“어! 진짜야! 방금 사장님한테 연락 왔어! 너희 김세준 앨범에 피쳐링으로 들어갔다고!”
김경호도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고양된 목소리로 외쳤다. 사장님의 호출을 받았을 땐,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2년 동안 유의미한 성과를 내지 못한 아이돌.
설상가상 마지막 기회라고 여겼던 ‘명곡의 대결’에서도 연아가 삼 주 연속 우승에 실패한 직후.
더 기회는 없을 거로 생각했고, 여기서 2년 간의 장정이 막을 내릴 줄 알았다.
그렇게 마음의 준비를 하고 두들긴 대표님의 방문.
하지만 대표님 입에서 나온 말은 자신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말이었다.
자신들에게 주어지는 또 한 번의 기회.
김세준의 정규 앨범 피쳐링을 해보겠냐는 대표님의 말에 김경호는 순간 말을 잃었다.
그렇게 5초간 멍을 때리고 정신을 차리고 재빨리 허리를 숙였다.
전후 사정은 모르지만, 감사하다는 인사말만 연신 내뱉었고, 정신 차려보니 대표님 사무실을 빠져나온 후였다.
긴장감으로 그 뒤엔 무슨 말을 했는지 정확히 기억도 나지 않았다.
“어떡해... 아... 흐윽...”
김경호의 확답에 세나가 울먹거렸다.
그와 마찬가지로 자신들도 이제 큰 기대를 저버린 지 오래였다.
숙소로 들어온 매니저를 보며 가슴이 철렁했고, 그의 입에서 나올 말이 너무 무서워 귀를 틀어막고 싶은 심정이었는데...
세나가 눈물을 보이자, ‘브라이니’의 다른 맴버들도 이어서 눈물을 떨어트리기 시작했고, 이내 ‘브라이니’의 숙소는 울음바다로 변했다.
김경호만 억지로 눈물을 참으며 뭉클한 심정으로 그녀들을 바라보고 있었고, 한참 후 모든 눈물을 쏟아낸 그룹의 막내인 줄리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근데, 어떻게 저희가 김세준 앨범 피쳐링에 들어간 게 된 거예요? 회사에서 꽂아준 거예요?”
“아니. 나도 자세히는 모르겠는데, 회사에서 먼저 이야기 꺼낸 게 아니라 아레스 뮤직에서 먼저 이야기해왔다고 하던데?”
그리고 대표의 말을 떠올린 김경호가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아! 사장님이 연아 칭찬하더라. 김세준이 개인적으로 먼저 이야기 꺼낸 거라고. 명곡의 대결에서 어떻게 김세준을 꼬드긴 거냐고 칭찬하셨어!”
김경호의 말에 숙소 내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놀라서 토끼 눈이 된 연아에게 집중됐다.
“네? 저요?”
“뭐에요! 언니! 어떻게 한 거예요!”
“꺄악! 진짜 잘했어!”
연아가 영문도 모른 채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지만, 다른 맴버들은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그녀의 가녀린 몸을 껴안았다.
‘내가 뭘 했다고? 난 한 게 없는데?’
회사의 추측과 달리 자신은 김세준과 별다른 접점이 없었다.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그 앞에서 보인 추태.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자 부끄러운 감정이 밀물처럼 밀려 들어왔다.
‘설마, 동정심인가?’
동정이라...
씁쓸한 감정이 드는 게 사실이지만, 연아는 이내 속으로 그 생각을 털어버렸다.
동정이면 뭐 어떻단 말인가.
지금은 하늘이 내려준 동아줄을 부여잡는 게 우선이었다.
“근데, 저희 타이틀 곡은 아니죠?”
‘브라이니’에서 연아와 함께 가장 연장자인 지수의 말에 다른 맴버들도 혹시나 하는 기대를 하고 김경호를 바라봤다.
그녀들의 기대를 저버리는 게 미안하지만, 김경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마 타이틀 곡은 아닌 거 같아. 대표님이 수록곡이라고 하셨으니까.”
“아... 그러면 별로 크게 기대 안 하는 게 좋겠네요...”
냉소적인 지수의 발언에 다른 맴버들이 크게 반발했다.
따지고 보면 현실적인 그녀의 말이지만, 겨우 생긴 희망을 깎아내리는 그녀의 말이 사뭇 잔인했다.
“언니! 그건 모르는 거죠!”
“맞아요! 김세준 저번 미니 앨범도 모든 곡이 대박 났잖아요!”
쌍심지에 불을 켜고 내뱉는 동생들의 말에 지수가 눈물을 글썽이며 낮게 중얼거렸다.
“근데...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잖아...”
“...”
순간 침묵이 도는 장내였고, 다들 그녀의 말에 쉽게 반박하지 못했다.
지금까지 그랬으니까.
음반을 내고, 음악 방송에 나간 후, 대중들의 사랑을 기대했다가 실망하기가 수차례.
롤러코스터 같은 감정의 변화를 2년 동안 겪은 그녀들이기에 지수의 심정을 십분 이해했다.
“자자. 아직 모르는 거잖아. 벌써 침울해하지 말자. 그리고 내가 생각해봤는데, 조만간 우리가 한 번 김세준 작업실 찾아가서 감사 인사 한 번 드릴까 하는데, 너희들은 어때?”
김경호의 말에 ‘브라이니’ 전체가 고개를 끄덕였다.
***
김세준은 아레스 뮤직 녹음실에서 가장 넓은 곳에서 작업하는 중이었다.
굳이 집이 아닌, 아레스 뮤직에서 작업을 하는 이유.
오늘 ‘브라이니’가 자신에게 인사하러 온다는 말을 전해 들었기 때문이었다.
“걸 그룹이랑 작업은 처음이네.”
김세준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아이돌 덕후였던 그가 난생처음 걸 그룹과 함께 작업하는 순간.
절로 웃음꽃이 피어났다.
아이돌 출신인 강유나와 작업한 적은 있지만, 그룹은 아니었으니까.
“언제 오려나.”
김세준이 기대감 가득한 표정으로 문 쪽을 바라봤다.
‘브라이니’가 부를 곡은 진작에 완성한 지 오래다.
그것도 한참 전에. 자신이 회귀하기 전, 걸 그룹과 노래를 불렀으면 하는 마음에 작곡했던 곡 중 하나.
그중에서도 ‘브라우니’와 가장 잘 어울릴 거 같은 곡 하나를 이미 골라둔 터였다.
그리고 그때, 녹음실 문을 누군가 두들겼고, 김세준이 늘어져 있던 자세를 고쳐 잡았다.
김세준이 자세를 고쳐잡음과 동시에 들어오는 6명의 사람.
‘브라이니’와 그녀들의 매니저인 김경호였다.
“안녕하세요! 브라이니입니다!”
들어오자마자 허리를 90도로 꺾으며 크게 인사하는 그녀들이었고, 김경호가 김세준에게 곱게 포장된 상자 하나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매니저인 김경호라고 합니다. 이건 저희가 약소하게 마련한 선물입니다. 초면인데 빈손으로 오기가 뭐해서요.”
“아이고. 반가워요. 그리고 뭘 이런 걸 다 준비하셨어요.”
김세준이 ‘브라이니’에게 환한 미소와 함께 인사를 건넸고, 김경호가 준비한 선물을 두 손으로 건네받았다.
“감사한 마음에 비하면 부족한 선물입니다. 크게 부담 안 가지셔도 됩니다.”
“무슨 말씀을. 고마워요.”
김세준이 싱긋 웃으며 선물을 책상 옆에 고이 놔뒀고, ‘브라이니’ 한 사람 한 사람을 손바닥으로 가리키며 말을 꺼냈다.
“연아 씨는 또 뵙네요. 그리고 세나 씨, 미진씨, 줄리아 씨, 지수 씨. 처음 뵙네요. 반가워요.”
“우와...”
김세준이 한 사람 한 사람을 정확하게 지목하며 이름을 내뱉자, 막내인 세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감탄을 뱉었다.
2년 동안 자신들이 먼저 소개하기 전에,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었던가?
김세준의 배려에 뭉클한 감정이 들었고, 비단 자신뿐만 그런 게 아닌지 다른 맴버들의 눈동자에도 비슷한 감정이 새겨져 있었다.
‘뭐야? 분위기가 뭔가 이상한데?’
김세준만 그녀들의 반응을 보며 의아해할 뿐.
‘어색해서 그런가?’
나름대로 추측한 김세준이 분위기를 환기할 겸 그녀들이 가장 관심 가질 만한 주제를 꺼냈다.
“아, 이렇게 인사하러 와줘서 진짜 고마워요. 아, 그리고 이왕 온 김에 곡 한 번 들어볼래요?”
“곡이 벌써 나왔어요?”
연아가 눈을 크게 뜨며 물었고, 다른 맴버들도 순간 고개를 내밀며 놀라움을 표했다.
“네. 예전부터 생각해놨던 곡이라. 다들 들어볼 거죠?”
싱긋 웃으며 묻는 김세준이었고, ‘브라이니’는 당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들의 희망이 될 곡. 그 곡이 어떤 곡인지 지금 세상에서 가장 궁금한 사람이 자신들이었으니까.
그녀들의 대답에 김세준이 미소를 지으며 노래를 틀려 할 때.
녹음실 문을 누군가 두드린 후, 안으로 들어왔다.
***
이예은은 ‘마녀의 꿈’ 발매 이후로 눈코 틀 새 없이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첫 음반치곤 지나치게 좋은 대중들의 관심.
그녀의 노래는 물론 마스크에도 반한 사람들이었고, 순식간에 여자 싱어송라이터에서 떠오르는 샛별이 된 그녀였다.
음반을 낸 이후로, 그녀의 스케줄은 마를 날이 없었고 이예은도 기쁜 마음으로 그 일정을 감당했다.
부끄럼 많던 성격이지만 방송에 나오는 자신의 모습이 좋았고, 자신을 좋아해 주는 대중들의 반응이 좋았다.
그리고 정말 오랜만에 찾아온 달콤한 휴일.
집에서 오랜만에 늦잠을 잔 그녀는 일어나서 한참을 멍하니 있었고, 불현듯 한 남자가 떠올랐다.
자신의 은인.
서로가 바쁜 탓에 꽤 오랫동안 보지 못했다.
‘오랜만에 보러 갈까?’
자신도 휴일이고, 그도 다음 앨범 때문에 당분간 일정이 없는 거로 알고 있다.
이예은의 입가에 자연스럽게 미소가 지어졌고, 그녀가 자신의 오빠인 이주성에게 곧바로 메시지를 보냈다.
[오빠. 세준이 오빠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아?]
[아마 아레스 뮤직 녹음실에 있을 거야.]
이주성의 답장에 주먹을 불끈 쥔 이예은이 재빨리 욕실로 향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근데, 뭐라고 말하지?’
오랜 시간을 공들여 만반의 준비를 하고 밖으로 나온 이예은이 고뇌에 휩싸였다.
생각해보니 그와 사적으로 단둘이 만나는 건, 그가 자신을 캐스팅한 이후로는 처음.
그동안 단둘이 사적으로 만나고 싶은 생각은 많았지만, 그럴 용기가 없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오랜만에 맞이한 휴일을 그와 함께 보내고 싶단 욕심이 없던 용기도 생기게 했다.
‘밥 먹자고 할까? 카페? 아니면... 영화?’
머릿속으로 온갖 시뮬레이션을 그리며 발걸음을 옮기는 그녀.
마음이 말랑말랑해지고, 심장이 두근거리며 괜히 새어 나오는 웃음.
그런 감정을 가진 채 아레스 뮤직 사옥에 도착했고, 녹음실로 향했다.
그리고 유일하게 불이 켜져 있는 녹음실.
그 녹음실 앞으로가 깊게 심호흡을 했다.
‘먼저 잠깐 쉴 겸 커피라도 마시자고 하자.’
고개를 끄덕이며 머릿속 말을 몇 번이나 입으로 중얼거린 후, 그녀가 녹음실 문을 두들긴 후, 안으로 들어섰다.
“...!”
그리고 방 안에 보이는 풍경에 이예은의 눈이 충격으로 물들었다.
김세준과 다섯 명의 여자.
실없는 웃음을 짓던 그의 얼굴이 보였고, 자신을 보며 놀라는 얼굴이 보였다.
‘아...’
이예은이 속으로 짧은 탄식을 뱉었다.
항상 고맙고 은인이라 여겼던 그지만.
왠지 지금만큼은 이렇게 야속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