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야금 뜯는 천제가수-62화 (62/148)

#62

연아

김세준의 무대가 끝난 후, 이어진 연아의 무대.

2주 연속 우승이 운은 아니었다는 듯 좋은 공연을 선보였다. 무대를 바라보는 방청객들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새겨질 정도로.

하지만, 그녀의 모든 걸 선보인 무대도 김세준이 보여준 감동을 뛰어넘지 못했고, 이번 주 ‘명곡의 대결’ 우승자는 김세준으로 정해졌다.

그리고 방송이 끝나자마자 연아는 화장실로 급히 달려갔다.

방송 내내 참고 참았던 눈물이, 화장실에 도착하자마자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내렸다.

“흐윽...”

울면 안 되는데.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청담의 고급 샵에서 받은 메이크업이 눈물에 지워져 녹아내린다.

억지로 참아보려 해도 멈추지 않는 눈물.

메이크업과 함께 그녀의 마지막 희망이 사라져간다.

‘브라이니’를 살릴 마지막 기회. 무참히 끝나버렸다.

이제 자신의 걸 그룹 생활의 끝이 다가오고 있다는 게 무섭고 서러워 연아는 끊임없이 눈물 흘렸다.

처음 시작할 땐, 그 누구보다 빛날 줄 알았는데.

세상에 별은 많지만 아무나 별이 될 수 없는 냉혹한 현실.

현실에 벽에 부딪혀 한참을 울던 연아가 코를 훌쩍이며 간신히 진정했다.

휴지로 눈물을 찍어 닦은 후, 화장실 밖으로 나왔다.

‘아... 왜 하필...’

그리고 동시에 한탄했다. 1분만 더 늦게 나올걸.

왜 하필 화장실을 나오자마자, 자신의 희망을 끝낸 당사자와 마주치는 걸까.

“축하드려요.”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추스르며 연아가 싱긋 웃으며 축하를 건넸다.

“아, 감사합니다.”

김세준이 놀란 얼굴로 축하를 받아들였다. 반쯤 지워진 화장과 퉁퉁 부은 얼굴. 자신의 심정은 몰라도, 어떤 상황인지는 짐작한 모양이었다.

“노래 너무 좋았어요. 진심으로 감동했습니다.”

연아가 허리를 숙이며 크게 인사했다. 그녀의 말.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사실이었다.

‘억울하지 않아.’

자신을 제치고 우승한 그. 덕분에 자신의 걸 그룹 생활은 끝나버렸지만 그를 원망하는 마음 따윈 추호도 없었다.

변명할 여지가 없는 완패.

자신의 무대는 그의 무대만큼 감동을 심어주지 못했고, 방청객들은 정직했다.

아마 김세준이 자신과 같은 무명의 인지도였더라도 오늘 방송은 자신의 패배였다.

“저도 무대 너무 잘 봤습니다. 옛날 추억이 떠올라 즐거웠어요.”

김세준이 싱긋 웃으며 그녀의 인사를 받아쳤다.

일주일 내내 오늘 하루를 위해 노력했던 그녀를 알아주는 따뜻한 김세준의 말.

그 말에 연아의 눈물이 다시 터져버렸다.

“아... 죄송합니다.”

연아가 눈시울을 훔치며 재빨리 다시 화장실로 향했다.

우승자 앞에서 보일 만한 모습이 아니다. 자신의 못난 추태를 가리기 위해 다시 화장실로 들어간 연아.

그런 연아의 뒷모습을 김세준이 묘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

‘명곡의 대결’ 출연도 끝낸 김세준은 자신의 작업실에 박혀 정규 앨범 구상을 시작했다.

“흐음. 일단 곡은 10곡 정도 들어가야 하는데...”

올해 봄에 냈던 미니 앨범과 달리 정규 앨범은 곡의 개수부터 확연히 다르다.

최소 10곡 이상의 노래가 들어가는 앨범이니만큼, 들어가는 노력과 규모가 남다른 앨범.

“피쳐링으로 일단, 에드 케인은 확정, 그리고 수호랑 트루비 형들도 확정, 세현이도 부탁하면 충분히 들어줄 거 같고...”

그리고 김세준은 자신의 첫 정규 앨범을 혼자 채울 생각은 없었다.

그동안 자신이 쌓아둔 인맥. 그 인맥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때였다.

“진아 누나나 예은이도 부탁하면 들어줄 수 있고, 준이한테도 부탁해볼까?”

같은 회사 식구들까지 떠올리며 자신을 도와줄 사람들을 손꼽던 김세준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좀 더 발랄하고 상쾌한 느낌이 있는 가수가 필요한데...”

지금까지 자신이 쌓았던 인맥.

밝고 상쾌한 이미지하곤 다들 하나 같이 거리가 먼 사람들이다.

실력파 가수이긴 하지만, 싱그러운 느낌이 드는 사람이 없다. 진아 누나나 예은이도 싱그러운 느낌보단 각자의 개성이 넘치는 가수들이고.

“흐음...”

신음을 흘리며 김세준이 컴퓨터에 ‘브라이니’를 검색했다.

며칠 전, ‘명곡의 대결’에서 함께 출연했던 연아.

깔끔하게 무대를 꾸민 그녀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실력은 괜찮았지.”

실력도 좋고, 걸 그룹 특유의 명랑하고 밝은 에너지가 가득했던 무대.

앨범의 한 곡쯤은 그런 곡을 만들고 싶다는 욕망에 검색한 김세준이 짧은 탄식을 뱉었다.

“오호... 잘하는데?”

비단 연아만 두고 하는 말이 아니었다.

미튜브로 검색해 본 ‘브라이니’의 무대.

연아를 필두로 다른 맴버들도 기본기는 탄탄한 편에 속했다.

엄청 잘 한다고 볼 순 없지만, 노래 자체만으로 봤을 땐 왜 아직도 무명인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이대로 묻히긴 아깝긴 하네.”

미튜브를 통해 그녀들의 영상 몇 개를 챙겨본 김세준이 간단한 감상평을 내놓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화장실 앞에서 마주쳤던 연아의 모습이 떠올랐다.

눈물을 한 바가지 쏟은 듯한 그녀의 얼굴.

전후 상황은 몰라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명곡의 대결’에서 떨어진 여파였겠지.

무명인 만큼, 이번 방송에 자신의 인생을 걸었을 거고.

“설령 나를 이겼다 하더라도 무명은 변치 않았겠지만...”

미래를 알지 못하는 그녀가 자신을 향해 진심으로 내뱉던 인사가 떠올랐다.

진심으로 축하하며, 칭찬하던 그녀의 모습.

퉁퉁 부은 얼굴로 내뱉는 그녀의 말이 제법 인상 깊었다.

눈물을 쏟아낼 정도로 절망했지만, 그 상황 속에서도 자신을 원망하지 않은 그녀의 심성도 감명 깊었고.

“한 번 제안해볼까?”

자신의 이번 앨범으로 그녀의 무명 생활이 끝난다는 보장은 없지만, 기회를 주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이미 자신 때문에 수차례 바뀐 미래.

그녀들의 미래도 자신 때문에 긍정적으로 바뀔지 모르는 일.

“나도 브라이니가 필요하고, 브라이니도 나로 인해 기회를 잡고.”

말 그대로 상부상조.

김세준이 결심을 마무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회사로 찾아가, ‘브라이니’의 섭외를 요청할 생각을 가지며.

***

“흐음. 브라이니라...”

회사로 찾아간 김세준이 ‘브라이니’를 앨범 수록곡 피쳐링으로 쓰고 싶다는 의견을 내뱉자, 이해진이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빠졌다.

“완전 무명인데 괜찮겠어?”

“네. 무명이어도 실력은 좋더라고요. 명곡의 대결에서 보고 영상도 찾아봤는데, 기본 이상은 합니다.”

“흐음. 걸 그룹이랑 가야금의 조화라... 그것도 좋을 거 같긴 해.”

이해진이 흡족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발랄하고 상쾌한 걸 그룹 특유의 에너지와 국악의 시너지가 어떤 곡을 만들어낼지 기대되는 부분은 분명 있었으니까.

“그래. 앨범 작업 때문에 미국행도 거절했는데 내년 상반기 내에는 낼 수 있겠지?”

“당연히 내야죠. 적어도 내년 4월 안에는 발표하고 싶은 욕심이 있네요.”

이해진이 반쯤 농담 삼아 던진 말에 김세준이 희미한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올해도 벌써 9월. 올해 안에 음반을 내는 건 시기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 회사에서 공식적으로 제안 보내고, 답장 오면 바로 알려줄게.”

“네.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제 올해는 대도록 스케줄 안 잡을 테니까 작업에 열중하고.”

“잠깐만.”

이해진이 말을 자르며 하동준이 김세준을 부르며 뻔히 쳐다봤다.

그의 부담스러운 시선에 김세준의 얼굴에 의아함이 생겼고, 그가 이내 입을 열었다.

“세준아.”

“예.”

“너... 북한 가래.”

“네에?”

놀라 되묻던 김세준이 이내 몇 달 전 있던 사건을 떠올리며 속으로 탄식을 뱉었다.

‘아... 저번에 말한.’

이해진이 정부 측에서 추진하고 있다는 프로젝트가 있다며 넌지시 알려줬던 그때의 기억.

“저번에 말한 거 있지? 정부에서 추진하는 프로젝트. 그게 대한민국 대중문화 아티스트들이 올해 말쯤에 북한으로 가서 공연하는 프로젝트였어. 세준이 너도 거기에 뽑히게 된 거고.”

이해진의 설명을 김세준이 경청했고, 하동준이 옆에서 인상을 찌푸렸다.

“솔직히 난 결사반대인데, 일단 네 의견이 가장 중요하니까.”

‘흐음...’

김세준이 속으로 잠깐 생각했지만, 이내 마음을 정했다.

이미 이해진한테 말을 들었을 때부터 자신은 확고한 뜻이 있었다.

“전 가보고 싶습니다.”

“음. 그럴 줄 알았어.”

이해진이 짐작했다는 듯 작게 두어 번 고개를 끄덕였다.

“쓰읍... 난 반댄데. 북한 가서 무슨 일 있을 줄 알고.”

“설마 뭐 인질극이라도 벌이겠어요?”

김세준이 농담 삼아 던진 말이지만, 이해진과 하동준은 그의 농에 쉽게 웃지 못했다.

막말로 그런 일은 없겠지만, 무슨 일이 벌어질지 쉽게 짐작하기 어려운 곳인 건 사실이었으니까.

***

이해진과 하동준의 미팅을 끝낸 후 김세준은 집으로 가지 않고 트루비를 보러 향했다.

‘쇼미’ 결승전 후 뒤풀이 때 곡을 만들어달라는 자신의 부탁.

그 부탁을 한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곡이 나왔다는 트루비의 연락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떤 곡이려나.”

절로 생기는 기대감.

트렌디하고 센스 넘치는 트루비의 작곡 실력은 이미 업계에서 유명하다.

그들의 시그니처 사운드가 들리며 시작되는 노래는 믿고 들어도 된다는 대중들의 평이 있을 정도로.

실제로 자신이 피쳐링을 맡은 ‘쇼미’ 결승 곡도 음원 차트 2위를 하며 그 실력을 여실히 드러낸 실력파 프로듀서였다.

“왔어?”

“오랜만이네.”

“잘 지내셨죠?”

그들의 작업실에 도착하자, 트루비의 맴버인 민호와 찬하가 그를 반겼다.

“뭐 이리 빨리 왔어? 천천히 와도 된다니까.”

민호가 김세준을 향해 살갑게 말은 건넸다. 뒤풀이 전까지만 하더라도 어렵게 느껴졌던 김세준.

하지만 막상 뒤풀이에 가서 술 한잔을 깃들이며 이야기하니 이름값과 달리 소탈하고 진국인 동생이었다.

덕분에 부담감이 한층 덜어져 좀 더 편하게 대할 수 있었다.

“형들 곡이 나왔다는데, 어떻게 안 옵니까.”

이렇게 뻔히 들여다보이는 말이지만,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드는 말재주도 있고.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인데?”

찬하가 능글맞은 미소를 지었고, 민호도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뭐, 실망해도 우리 탓은 아니니까. 그리고 세준이가 부탁한 거잖아. 곡이 별로여도 어쩔 수 없는 거지.”

둘이 주고받으며 던지는 농담에 김세준은 작은 미소를 지었다.

말은 저렇게 해도, 쓰레기통에 가득 담겨 있는 에너지 드링크와 커피 캔을 보면 곡을 위해 며칠 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잔 게 분명했다.

“트렌디하게 잘 뽑아주셨을 거라 믿습니다.”

“흐음... 트렌디하다라...”

“그건 좀 아닌데?”

하지만 이어진 김세준의 말에 둘은 농담이 아닌 제법 진지한 말투로 받아쳤다.

“트렌디하다기 보다는 좀 올드하지?”

“그치. 올드하지.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클래식하지?”

‘응?’

진중해 보이는 둘의 표정.

이번 말은 농담이 아니었다.

유행을 선도하던 그들의 노래가 올드하고 클래식하다고?

김세준의 표정이 의아하게 변했고, 그 표정을 본 둘이 작은 웃음을 지었다.

“뭐, 들어보면 알 거야.”

“클래식 이즈 심플. 심플 이즈 베스트. 즉, 클레식은 베스트다.”

“좋네요. 지금 들어보죠.”

아직 곡은 들어보지 않았기에 김세준이 의자를 끌어 컴퓨터 앞으로 향했고, 민호가 컴퓨터에서 곡을 튼 후 벽에 기대어 팔짱을 꼈다.

찬하는 세준 옆에서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린 채 자신만만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리고 민호가 틀자 시작되는 노래.

트루비의 시그니처 사운드가 들리고, 김세준이 감았던 눈을 크게 떴다.

인트로부터 익숙한 소리.

그들의 말대로 이건 클래식한 멜로디.

‘와... 이건 나도 생각 못 했네.’

김세준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거... 캐논 변주곡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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