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명곡의 대결
“뭐...뭐라고?”
떨어트린 핸드폰을 집어 든 하동준이 목소리를 떨며 물었다.
제인이 아닌 저스틴을 선택한다 해도 받아들일 생각이었지만.
둘 다 거절하겠다는 선택지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저, 이번 제안은 다 거절하겠습니다.”
“왜! 아니, 화내는 게 아니라 왜? 이유가 뭐야?”
언성을 높인 하동준이 자신의 금세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목소리를 가라앉혔다.
“저 지금 해야 할 일이 태산입니다. 당장 명곡의 대결 곡 작업도 해야 하고, 정규앨범 작업도 해야지요. 명곡의 대결은 급하게 해결한다 해도, 정규앨범 작업은 제법 미뤄질 거고요.”
“그렇지.”
하동준의 떨떠름한 대답에 김세준이 차분하게 다시 말을 이었다.
“미국에서 피쳐링하는 것도 좋지만, 가수는 앨범이 먼저 아니겠습니까? 명곡의 대결만 끝나면 앨범 작업에 몰두하고 싶습니다.”
“하아...”
하동준이 깊은 한숨을 내뱉곤, 아쉬움을 토로했다.
“아니, 딱 이번 일까지만 마무리하고... 아니다...”
아쉬움을 숨기지 못하고, 김세준을 설득하려던 하동준이 이내 말을 끊었다.
아티스트의 의견을 존중해준다는 아레스 뮤직의 사훈.
여기서 자신이 더 말을 꺼내는 건 회사의 가치를 위반하는 거나 다름없는 짓.
“그래... 알겠어. 일단 그럼 두 곳에다가 거절 의사 밝혀놓을 게.”
“네. 감사합니다.”
진한 아쉬움이 남는 하동준의 한탄을 마지막으로 전화가 끊어졌고, 김세준도 입맛을 다셨다.
“좋은 기회지만,,, 득보다는 실이 크지. 왜 하필 저스틴이랑 제인이야?”
김세준이 저스틴과 제인을 떠올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세계적인 대 가수인 둘.
하지만 훗날 범죄자로 몰락하는 두 사람이다.
저스틴은 성추행 및 성폭행 관련 문제로, 제인은 음주운전과 뺑소니를 일으켜 순식간에 사회에서 매장당한다.
범죄에 그나마 유한 미국에서까지도 몰매를 맞고 평생을 자숙하며 살아갈 둘.
“물론 지금 당장은 아니겠지만.”
자신과 함께 작업할 때 그런 범죄를 저지르진 않을 거다. 정확한 날짜가 기억나진 않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었다.
“그래도 찜찜하지.”
훗날 범죄자인 그들과 함께 작업한다는 게 내키지도 않았고, 그들의 범죄 행위가 밝혀졌을 때 자신에게도 불똥이 튈지도 모를 일.
그런 찜찜함과 위험수단을 감수하면서까지 지금 당장 미국에서 활동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에드 케인의 피쳐링으로 이미 세계에 천천히 눈도장을 찍기 시작한 그다.
지금은 그 정도로도 충분했다.
***
명곡의 대결 녹화 날 당일.
김세준은 방송국이 마련해 준 개인 대기실에 도착한 후, 큐 카드를 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제일 큰 경쟁자는 연아인가.”
자신을 포함한 5명의 가수가 경쟁을 벌이는 프로그램.
이 주 연속 우승을 한 연아를 제외하곤, 크게 신경 쓸 가수가 없어 보였다.
“브라이니라...”
걸 그룹 덕후였던 그도 처음 들어보는 이름.
아무리 덕후라 해도 모든 걸 그룹을 알 순 없는 법.
미래를 경험한 그도 들어보지 못한 아이돌이라면 아마 끝끝내 대중들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소리소문없이 해체한 게 분명했다.
“명곡의 대결에 사활을 걸고 있겠네.”
그런 와중 지상파 예능인 명곡의 대결에서 예상하지 못한 선전.
연아가 이 프로그램에 대하는 각오가 남다르다는 걸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까닥 잘못하면 질 수도 있겠는데?”
궁지에 물린 쥐는 고양이도 무는 법.
필사의 각오를 다지고 온 그녀가 어떤 결과를 낼지 모르기에 김세준이 대기실에서 목을 가다듬었고, 잠시 후 리허설을 시작한다는 말에 스튜디오로 향했다.
“오...”
스튜디오에서 텅 빈 객석을 향해 노래를 부르고 있는 한 여성.
그 여성을 보며 김세준이 짧은 감탄을 내뱉었다.
그녀가 리메이크 한 곡은 1세대 걸 그룹이자 걸 그룹 최초로 단독 콘서트를 열 정도로, 많은 사랑을 받았던 ‘파트라’의 ‘약속’.
발랄한 노래와 귀여운 춤으로 ‘파트라’의 대표곡으로 뽑히는 노래다.
“잘하는데?”
그리고 ‘약속’을 리메이크하여 부르는 연아의 리허설을 보며 김세준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원곡의 분위기를 잘 캐치 하여, 발랄한 느낌을 더욱 강조하여 부르는 그녀.
춤을 추면서도 흐트러지지 않은 발성과 호흡이 그녀의 실력이 범상치 않다는 걸 보여줬다.
2주 연속 우승이란 위엄을 그냥 달성한 건 아니라는 듯, 자신의 실력을 여실히 보여주는 그녀.
리허설을 준비 중인 다른 가수들도 경계 어린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연아를 보며 김세준이 다른 가수들관 전혀 다른 생각을 하며 눈빛을 빛냈다.
***
명곡의 대결 메인 PD인 신호진은 녹화를 시작하고 앞선 3개의 무대를 보곤 아쉬움이 담긴 신음을 흘렸다.
나쁘진 않았으나 그렇다고 세간의 화제가 될 정도로 좋은 무대라곤 말할 수 없었다.
방청객들도 그 본분을 위해 웃으며 감탄을 내뱉긴 했지만, 진심으로 감동한 눈치는 아니었다.
방송 피디만 벌써 15년째. 방청객들의 반응이 진심인지 아니면 연기인지 현장 분위기로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뭐, 진짜는 지금부터니까.’
신호진이 아쉬움을 털어내고, 시선을 스튜디오로 보냈다. 오늘의 하이라이트라고 봐도 무방할 김세준의 차례가 다가오고 있었다.
“자, 이제 다음은 김세준 씨 차례인데요. 저희 모두 기대가 커요. 김세준 씨야 이미 배진구 선생님의 연꽃을 한 번 리메이크 한 경험이 있잖아요. 너무 리메이크를 잘 하셨잖아요. 배진구 선생님도 극찬했다는 말이 있던데.”
메인 MC를 맡은 김호석의 말에 김세준이 손사래를 쳤다.
“아, 아니에요. 원곡에 비하면 부족한 곡인데 그렇게 큰 사랑을 받아서 너무 감사했죠.”
그의 말에 김호석이 싱긋 웃으며 약속된 질문을 던졌다.
“그러면 일단 오늘 부를 노래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해 주시겠어요?”
“음. 일단 여기 계신 모든 분이 모를 수 없는 노래고요.”
김세준이 방청객을 향해 손짓하며 말하자, 방청객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제가 오늘 부를 노래가 꽤 오래됐어요. 노래가 처음 세상에 나온 게 제가 알기론 1950년대?”
“와... 이 정도면 명곡의 대결에서 나온 노래 중 가장 오래된 노래 같은데요?”
방청객들의 감탄이 들려오고, 김호석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까 말씀하신 게 여기 계신 분들이 모를 수 없다고 했잖아요. 그럼 최소 60년 동안 꾸준히 사랑받은 노래라는 뜻이네요?”
그의 말에 김세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정말 꾸준히 사랑받은 명곡이죠. 아마 다들 한 번 이상은 무조건 들어봤을 노래라고 확신합니다. 아, 그리고요.”
김세준이 잠깐 말을 멈추곤,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방청객들을 바라봤다.
“이 자리에 어머님들도 많이 오셨는데, 이 노래 어머님들을 위해 부르는 노래거든요. 듣고 많이 좋아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 방청객으로 온 어머니들의 표정에 감동이 서렸다.
김세준이 부른 ‘심청가’.
그 노래를 흥얼거리는 자신의 남편을 보며 얼마나 부러워했던가.
언젠가 김세준이 어머니를 위한 노래를 불러주기를 고대했는데, 그게 오늘일 줄이야.
방청객들의 표정을 본 김호석이 웃음을 터트렸다.
“지금 어머님들 표정이 빨리 노래 들려달란 얼굴이거든요? 더 지체했다간 화내실 지경이에요. 그럼 지금 노래 들어볼까요?”
김호석의 말과 함께 김세준이 무대 앞으로 나섰고, 방청객들이 기대 섞인 박수를 그에게 보냈다.
“후우...”
김세준이 한숨과 함께 가야금 앞으로 다가갔고, 이내 시작되는 노래.
“...!”
익숙한 멜로디에 방청객들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김세준이 앞서 설명했던 말이 틀리지 않았다.
여기 있는 사람 중에서 이 노래를 모를 사람은 없었다.
“아...”
한 중년 여성이 절로 탄성을 뱉었다. 이 노래를 얼마나 많이 불러줬던가. 자신을 위해 부른 노래가 아닌, 누군가를 위해 부른 노래.
하지만 이 노래를 부르는 그 순간, 세상에 둘도 없는 평화를 느꼈다.
김세준이 가야금을 뜯기 시작했고, 가야금과 산조대금의 조화가 원곡의 분위기를 한껏 살렸다.
마치 바닷가에 온 것처럼, 바닷바람을 연상케 하는 대금의 소리.
그리고 김세준이 평소보다 느린 박자로 가야금을 뜯으며 잔잔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국악의 서정적인 음색이 원곡의 감성을 더욱 배가시켰다.
차분하고, 잔잔하게 흘러가는 멜로디 속 김세준이 입을 열었다.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기가 혼자 남아
집을 봅니다.
평소보다 한껏 힘을 빼고, 마음을 가라앉히며 부르는 김세준.
그런 김세준의 노래를 들으며 어머니들이 추억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자신의 둘도 없는 보물.
그 보물을 등에 업고 노래를 흥얼거리던 그때로.
어깨와 허리가 부서질 듯 아프지만, 고개를 돌려 잠든 아기의 얼굴을 보는 순간.
세상만사가 부럽지 않았다.
바다가 불러주는 자장노래에
팔 배고 스르르르 잠이 듭니다.
대금과 가야금의 깊은 울림. 거기에 더해 해금마저 등장해 원곡의 잔잔하고 아련한 감성을 살렸다.
‘항상 불러주는 측이었지.’
김세준이 속으로 어머니를 떠올리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항상 이 노래를 자신을 위해 불러주기만 했던 어머니.
김세준의 기억에도 어머니가 이 노래를 불러주신 추억이 가득했다.
어머니의 무릎을 베고 잠이 들락 말락 할 때, 자신의 머리를 쓸어넘기며 잔잔히 불러주시던 그때의 추억.
아직도 그의 뇌리에 선명하게 적힌 보물 같은 추억이다.
1절이 끝나고, 2절이 시작되자 무대 뒤편에 있는 거대한 스크린에 사진이 뜨기 시작했다.
김세준이 어머니 박진숙 몰래, 아버지인 김창용에게 부탁한 사진들.
그의 유년기 시절의 사진이었다.
정확히는 어린 김세준과 젊은 박진숙의 모습이 함께 담긴 사진들.
아기는 잠을 곤히
자고 있지만
갈매기 울음소리
맘이 설레어
노래 한 소절 한 소절을 부를 때마다, 한 장씩 넘겨지는 사진들.
김세준을 보며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며 다양한 감정이 느껴지는 사진이지만, 딱 한 가지 감정은 변함없다.
그녀의 눈빛 속에서 느껴지는 김세준을 향한 사랑.
오래된 사진으로도 느껴지는 그녀의 사랑이었고, 스크린을 보던 몇몇 중년 여성들의 눈시울이 촉촉해졌다.
다 못 찬 굴 바구니
머리에 이고
엄마는 모랫길을
달려옵니다...
노래가 끝나고, 침묵만이 맴도는 스튜디오.
김세준도 여운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가야금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스텝의 신호에 따라 박수하는 방청객들.
스튜디오를 가득 울리는 박수를 보면서 연아가 고개를 떨궜다.
자신도 모르게 깊이 감명받은 그의 무대.
국악과 자장가의 조합이라니.
생각지도 못했고, 생각 이상으로 좋았다.
“하하...”
떨어지는 눈물을 닦으며 연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떻게든 우승하겠다 다짐했고, 아직 자신의 무대는 펼치지도 않았지만.
김세준이 준 감동보다, 더 큰 감동을 사람들에게 줄 자신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