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거절
“오빠! 오빠!”
“어우. 아침부터 소리 지르지 마. 골 울리니까.”
명곡의 대결 메인 PD인 신호진이 부스스한 머리와 퀭한 얼굴로 손을 내저으며 자신의 프로그램 메인 작가인 이미혜의 부름에 답했다.
어젯밤 예능국장님을 모시고 늦게까지 달린 술자리.
덕분에 머리는 깨질 듯 아프고, 속은 당장이라도 토할 것처럼 느글거린다.
숙취해소제를 먹었음에도 아직도 어질어질한 머리.
그런 와중에 이미혜의 높은 고음의 목소리가 아침부터 속을 뒤집어 놨기에 신호진의 얼굴이 죽을상으로 변했다.
하지만 이어진 이미혜의 말에 신호진은 숙취가 단숨에 사라지는 걸 느꼈다.
“김세준! 김세준 우리 프로 출연하겠다고 연락 왔어요!”
“뭐! 진짜로?”
“응응. 진짜로. 어제 우리 막내한테 연락 왔대! 저번에 섭외 제안 아직 유효하냐고!”
“그래서? 그래서 뭐라고 했대?”
신호진이 이미혜의 어깨를 양손으로 붙잡고 흔들며 소리쳤고, 이미혜가 눈살을 찌푸렸다.
“아, 미안. 너무 흥분했다. 근데 막내가 답변 잘했지?”
“괜찮아요. 당연히 잘했지. 우리가 김세준, 김세준 노래 부른 게 얼만데. 섭외는 확정 났고, 일정만 조율하면 된대요.”
“나이스!”
이미혜의 말에 신호진이 두 손을 불끈 쥐며 하늘 위로 치켜 들었다.
그의 이름을 부르짖은 나날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어떻게든 그를 섭외하려고, 있는 인맥, 없는 인맥 총동원하며 이해진을 비롯한 아레스 뮤직 관계자들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았지만,끝내 돌아오는 대답은 거절 뿐.
하지만, 드디어 자신들의 프로에 김세준이 그 귀한 발걸음을 행차하신단다.
‘꼴좋다. 박 피디.’
신호진이 요즘 잘 나가는 예능 프로그램 하나를 제작한 자신의 라이벌 박 피디를 떠올리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안 그래도 어제 예능국장님과 함께한 술자리에서도 김세준의 이름이 나왔다.
김세준 섭외하라고 넌지시 돌려 말하던 국장님의 말씀에 박 피디가 자신만만하게 자신만 믿으라고 외치던 그 꼴이 얼마나 눈꼴 시렸던가.
“일정은 김세준에게 맞춰준다고 해. 언제든지 상관없다고.”
“네. 그럴게요.”
이미혜도 신이 난 목소리로 답했다.
방송작가로 일한 지 벌써 10년.
이제 출연진만 봐도 대강 사이즈를 측정할 짬밥정돈 된다.
“오빠. 이거...”
이미혜가 약간은 음흉한 미소를 짓자, 신호진 또한 비슷한 웃음을 지었다.
“알아. 우리 그동안 최고 시청률이 몇이지?”
“우리 그, 강유나 나왔을 때였죠. 22%.”
그녀의 말에 신호진이 눈을 빛내며 굳은 다짐을 내뱉었다.
“우리 이번에 그 기록, 무조건 갱신하자.”
***
“네? 오빠 그말 진짜예요?”
매니저가 급하게 전화를 받고 돌아온 뒤 내뱉은 말.
그 말에 연아의 두 눈이 급격히 흔들렸다.
“어. 방금 작가한테 전화 온 게 그 이야기야. 아... 하필 왜 다음 주야! 진짜 운도 지지리도 없다. 우리도...”
화를 냈다가 이내 체념한 듯 고개를 떨구는 매니저의 말.
연아가 그를 안쓰러운 눈빛으로 쳐다봤다. 자신들의 매니저가 그동안 얼마나 고군분투했는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
“아... 괜찮아요. 제가 잘 해볼게요. 아직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잖아요.”
연아가 좌절에 빠진 매니저를 애써 위로하며 그의 등을 토닥였다.
무엇하나 뚜렷한 결과를 내지 못하고 쏜살같이 흐른 시간이 2년.
이젠 신입이라고 말할 수 없는 무명의 걸 그룹 ‘브라이니’.
연아는 그런 걸그룹인 ‘브라이니’에서 메인 보컬을 맡은 여자 아이돌이었다.
2년이란 시간 동안 내내 무명이었던 자신들.
그런 와중에 회사에서 마지막 기회로 꽂아 넣어준 ‘명곡의 대결’.
연아는 저번 주에 출연한 ‘명곡의 대결’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이번 주도 우승하면서 다음 주의 출연도 확정이었다.
‘계속 우승해야 하는데...’
2주 연속 우승이지만, 연아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무명의 아이돌로 회사에서 언제 계약을 끝내도 이상하지 않을 지경.
하루하루를 불안감에 잠도 제대로 못 자며 지냈고, 그런 와중에 연아의 ‘명곡의 대결’ 우승은 그녀들에게 한 줄기 빛 같은 소식이었다.
우승 직후, 연아가 울먹거리며 우승했다는 소식을 전화로 전하자, 맴버들이 동시에 울음을 터트릴 정도로.
그리고 절망의 나날이었던 그녀들의 삶이 희망차게 변했다.
‘명곡의 대결’ 5주 연속 우승. 그리고 연말에 있을 최강자전까지 진출한다면, 기나긴 무명 생활을 끝내며 회사에서도 한 번 더 자신들을 믿어주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생겼으니까.
그런 장밋빛 미래를 그리던 ‘브라이니’였지만 방금 매니저가 전해준 말은 그녀들의 희망을 산산이 부숴놓았다.
“왜 하필 다음 주에 김세준이 출연하는 건데...”
‘브라이니’의 다른 맴버인 줄리아가 눈물을 쏟으며 투정을 뱉었다.
울음을 터트리며 말한 그녀는 벌써 연아의 패배를 직감한 듯했다.
“바보야. 왜 울어. 내가 이길 수도 있는 거잖아!”
그런 줄리아를 보며 연아가 줄리아의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지만, 다른 맴버들 또한 알고 있었다.
김세준이 출연한다면, 그녀가 우승할 확률은 제로에 가깝다는 걸.
‘명곡의 대결’ 우승자는 방청객들의 투표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인기 많은 가수인 김세준이 등장한다면 방청객들의 투표권이 그에게 향하리라는 건 불 보듯 뻔한 예상이었다.
“노래라도 못하는 애가 나오면 밉지라도 않지...”
또 다른 맴버인 미진의 말에 연아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의 말대로 투표가 인기투표로 변질된다면 억울하기라도 할 텐데, 김세준의 실력은 자타공인 탑 클래스.
매번 곡을 낼 때마다 대중들을 뒤집어 놓은 그다. 이번 ‘명곡의 대결’에서도 분명 수준 높은 곡을 들고 와서 대중들을 감동에 도가니에 빠트릴 게 뻔했다.
인지도와 실력.
무엇 하나 앞설 수 없는 현 상황에 ‘브라이니’와 매니저 모두 좌절했고, 연아도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질 뻔했지만, 간신히 마음을 다잡았다.
‘나까지 포기하면 안 돼!’
회사에서 마련해준 마지막 기회.
해보기도 전에 포기할 수 없었다.
그러기엔 2년이란 자신의 청춘이 너무 아까웠고.
무엇보다 족적 하나 남기지 못한 채, 자신의 가수 생활을 마무리할 순 없었다.
***
“흐음... 수호야 미안하다.”
김세준이 음원 차트를 보며 난감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동시에 이 차트를 보며 기뻐할 수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며칠 전 수호와 함께 꾸몄던 ‘쇼미’ 결승전.
그 결승전에서 펼친 무대의 음원이 세간에 발매됐고, 수호는 곡의 순위를 보며 기쁨을 표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2위. 수호(Feat. 김세준) - 걱정하지 마.
2위라는 호성적. 기뻐할 만한 성적이고, 충분히 만족할 만한 성적이지만.
원래 수호의 노래가 1위를 한다는 걸 알고 있는 김세준으로선 수호에게 미안한 감정이 들 수밖에 없었다.
“이게 일이 이렇게 되는구나...”
미묘한 말투.
김세준의 시선이 위로 올라가며 1위를 차지한 곡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그가 알던 미래 대신 1위를 차지한 곡.
1위. Ed Kane(Feat. Kim sejun) - Remember.
자신이 피쳐링했다는 사실이 밝혀짐과 동시에 매섭게 치솟던 ‘Remember’의 인기.
‘쇼미’ 우승자의 노래에도 흔들리지 않고 그 자리를 굳건히 지켰다.
준우승을 우승으로 바꿔놨지만, 1위를 2위로 떨어트렸다.
묘하게 뒤틀려버린 미래에 김세준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어쩔 수 없지. 이것도 운명이라면 운명이니까.”
그리고 김세준이 음원 차트를 보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1위와 2위가 모두 자신이 피쳐링한 노래.
엄연히 따지면 자신의 곡은 아니지만, 그래도 흐뭇하고 뿌듯한 마음이 절로 생겼다.
게다가 그뿐만이 아니었다.
김세준이 엄지손가락으로 핸드폰 액정을 조금 쓸어 올리자 그의 이름이 다시금 보였다.
22위. 김세준 ? 단심가.
20위권으로 밀려나긴 했지만, 그가 부른 ‘단심가’ 또한 꾸준히 인기를 발휘하는 중이었다.
“회사 회식에서 인기곡이라던데.”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말로는 회사를 향한 충성심을 표하는데 이만한 노래가 없다는 평이 많았다.
사장님을 상대로 한 회식엔 이 노래가 최고라고.
최근에 본 커뮤니티의 반응을 떠올리며 피식 웃은 김세준이 시선을 조금 더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 하여가도 24위라.”
자신이 작곡한 ‘하여가’도 단심가 못지않게 인기를 누리는 중이다.
음원 차트 상위 25% 안에 그가 개입한 곡이 무려 네 곡.
가수라면 누구나 부러워할 현실에 김세준이 자신을 스스로 칭찬했다.
“열심히 했다. 그리고 잘했다.”
누구보다 열심히 했고, 노력에 걸맞은 보답이 나오자 일할 맛이 절로 났다.
“더 빡세게 해볼까.”
김세준이 부엌에서 드립 커피 한 잔을 컵에 따르고 작업실로 향했다.
24시간이 부족한 삶이다.
1집 정규앨범의 작업량도 태산이고, 당장 다음 주에 출연 예정인 ‘명곡의 대결’에서 부를 노래도 작업해야 했다.
“후우우... 응?”
작업실 의자에 앉아 심기일전하던 김세준이 핸드폰이 울리자 의아한 얼굴로 바라봤다.
아레스 뮤직 부사장인 하동준의 전화였다.
“예. 부사장님.”
“세준아! 세준아! 대박! 또 대박 났다!”
김세준이 전화를 받자마자 하동준이 호들갑을 떨었다. 고양된 감정을 감추지 못한 채 말을 내뱉는 그였고, 김세준이 얼떨떨한 목소리로 답했다.
“예. 왜 그러세요? 무슨 일 있어요?”
김세준의 말에 하동준이 심호흡을 깊게 하곤 입을 열었다.
“놀라지 마. 너, 미국에서 또 제의 왔다!”
“... 진...진짜로요?”
놀라지 말라는 하동준의 친절한 설명에도 김세준이 순간 들고 있던 커피잔을 떨어트릴 뻔했다.
에드 케인과 작업한 지 얼마나 됐다고, 바로 또 연락이 온단 말인가.
김세준이 떨리는 손으로 커피잔을 책상 위로 올려놨다.
계속 들고 있다간 떨어트릴 거 같은 직감.
“어! 그것도 무려 2명한테 동시에 왔어! 저스틴이랑, 제인! 너도 누군지 알지?”
“와우...”
김세준이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뱉었다. 하동준의 말대로 누군지 잘 알고 있는 가수들.
둘 다 에드 케인 못지않은 세계적인 가수들이다.
저스틴.
보이 그룹 출신으로 수려한 외모와 부드러운 미성으로 많은 여성 팬을 사로잡은 가수.
그리고 제인.
흑인 특유의 소울이 담긴 음색으로 가창력은 그 누구에게도 뒤쳐지지 않는다는 평을 가진 여가수였다.
“뭐...뭐라고 왔습니까? 에드 케인이 소개해줬답니까?”
미튜브를 통해 연락했던 에드 케인과 달리, 이번엔 회사로 다이렉트로 연락한 둘.
아마 에드 케인이 그들에게 다리를 놔준 듯싶었다.
“어! 에드 케인이 말을 잘해줬나 봐. 그리고 에드 케인이랑 말도 비슷하고. 둘 다 너하고 함께 작업하고 싶은 의지가 강해. 근데 문제가 있어.”
“문제요?”
“둘이 활동 시기가 겹쳐. 그러다 보니까 우리가 한 사람을 정해야 해. 회사 생각에는 저스틴보다는 제인이 더 낫다는 의견이 강세야. 흑인 특유의 음색하고 너의 가야금하고 합쳐지면 제법 신선하고 색다른 음악이 나온다고 기대하는 평이 많아.”
흥분에 휩싸여 장황하게 내뱉는 하동준이었고, 김세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을 경청했다.
“물론 너의 의견을 가장 존중하겠지만, 회사 차원에서는 제인을 추천한다는 거지.”
“네. 알고 있습니다.”
하동준은 말하는 내내 흥분감을 감추지 못했고, 그럴 만했다.
‘Remember’가 한국은 물론 미국에서도 크게 흥행 중이니까.
덕분에 김세준의 이름이 미국 사람들에게도 심심치 않게 들려오는 와중이었고, 이번 피쳐링도 완벽하게 마무리한다면 세계를 상대로 피쳐링이 아닌, 그의 곡을 발매하는 것도 힘들지 않으리라.
“그래. 지금 당장 정하는 건 힘들지? 일단 알고 있고, 나중에 회사에서 다시 이야기해보자.”
하동준의 신나는 목소리.
그런 하동준을 향해 김세준이 자신의 결심을 내비쳤다.
“아뇨. 부사장님. 이미 정했습니다.”
“응? 벌써?”
하동준이 놀라 되물었다.
이번 일. 심사숙고한 후 결정해도 늦지 않을 일이다.
김세준이 너무 급하게 결정한 게 아닌가 싶어 하동준이 우려를 표했다.
“좀 더 고민해봐도 돼.”
“아니요. 진짜 마음먹었습니다.”
“그래? 그러면 누구랑 할 건데?”
하동준이 궁금증을 가득 안은 채 물었고, 이어진 김세준의 말에 하동준은 들고 있던 전화기를 떨어트렸다.
“저... 둘 다 거절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