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마녀의 꿈
세현이 김세준의 노래에 홀딱 빠진 그 순간, 다른 한 남자도 세현과 마찬가지로 감탄을 내뱉는 중이었다.
SY 엔터테인먼트의 프로듀서인 박대정.
그도 김세준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미소를 참을 수 없었다.
듣는 순간, 이 노래는 될 거 같다는 프로듀서만의 직감.
그를 지금의 위치까지 오르게 만들어준 특유의 감각.
예리한 그의 직감이 김세준의 노래를 듣자마자 알람을 울렸다.
이 노래는 될 거라고.
자신만의 직감을 느낀 박대정이 낮게 중얼거렸다.
‘소문이 헛소문이 아니었네.’
프로듀서들 사이에서 도는 소문이 있다.
김세준과 함께 작업한 프로듀서는 한동안 다른 가수들과 작업은 하지 못할 거라는 풍문.
눈이 너무 높아져 다른 뮤지션은 성에 차지 않는다는 웃긴 그 소문을 듣고, 한 번쯤 그와 작업해보고 싶었다.
그리고 실제로 김세준과 작업하는 지금, 박대정은 업계에 도는 그 소문이 단순히 농담만은 아니라는 걸 여실히 깨달았다.
‘어이가 없네. 어이가 없어.’
흠잡을 데가 없었다.
목소리는 물론, 자신이 곡을 듣고 느낀 감정까지.
완벽하게 표현해내는 그였다.
‘어떻게 저러지?’
김세준을 보며 어이가 없어 허탈한 웃음을 터트리는 박대정.
20대 중후반의 청년이 중년 남성의 꼬장꼬장하고 융통성 없는 그 특유의 감성을 저렇게 잘 표현하는 게 가능키나 한 일일까.
그러면서도 나라를 위해 비루한 육신 따위는 진토(塵土)가 되어도 상관없다는 그 충심마저.
망국(亡國)이 될 조국의 미래를 걱정하는 애국심까지 무리 없이 표현하는 그였다.
녹음을 마무리하고 부스 바깥으로 나온 김세준에게 박대정이 고생했다는 말과 함께 녹음 내내 가지고 있던 궁금증을 풀었다.
“세준씨. 혹시 군대를 부사관으로 다녀왔어요? 아니면 장교?”
“아, 저 아직 미필입니다.”
‘허...’
해맑은 웃음과 함께 답하는 그였고, 박대정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맥빠진 소리가 나왔다.
심지어 미필이라니.
복무 신조도 모르는 친구가 충(忠)이란 단어를 이렇게 잘 표현해내는 게 가당키나 한 소리일까.
‘아니야. 오히려 군대를 안 갔다 와서 충성심이 있는 걸지도?’
실없는 생각과 함께 박대정이 김세준에 대해 평가했다.
그냥 천재.
천재라는 말 외에는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다음은 세현이 들어가자.”
박대정이 김세준에게 시선을 떼고 세현을 불렀고, 세현이 긴장한 표정을 지으며 녹음 부스로 발걸음을 옮겼다.
흠잡을 데 없는 실력을 보여준 김세준이었고, 자연스럽게 세현의 어깨에 적지 않은 부담감이 내려앉았다.
당연히 그와 비교될 수밖에 없었으니까.
녹음 부스에 들어간 세현이 신호를 보냈고, 박대정이 ‘하여가’를 틀었다.
그리고 잠시 후, 녹음실 안에 가득 울려 퍼지는 세현의 목소리.
세현의 목소리를 음미하는 김세준의 눈이 반달처럼 휘어졌다.
‘이거지.’
자신이 생각했던 곡의 분위기와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제법 높은 고음으로 시작해서, 상대를 깔보는 듯한 감정이 가득 담긴 세현의 창법.
차갑고 냉혹한 이방원이 직접 읊는 듯한 노래에 미소가 자연스럽게 그려졌다.
일편단심인 그대의 마음.
알아주는 이 아무도 없는데.
이런들 어떻고, 저런들 어떨까.
OST 노래인 만큼, 세현이 ‘하여가’를 무대에서 부르는 경우는 많지 않을 터.
‘B.ONE 팬들은 아쉽겠네.’
김세준이 머릿속으로 하나의 이미지를 떠올렸다.
세현이 이 노래를 무대 위에서 부르는 상상을.
팬들이 절로 비명을 내지를 정도로 차가우면서도 아름다웠다.
***
‘단심가’와 ‘하여가’의 녹음을 순조롭게 끝낸 김세준은 얼마 후, 다시 녹음실을 찾았다.
하지만 이번엔 SY 엔터테인먼트의 녹음실이 아닌, 아레스 뮤직의 녹음실이었다.
오늘은 그의 노래로 첫 음반을 내는 이예은의 녹음 날이었다.
작곡가로서, 당연히 행차해야 할 날.
익숙한 길을 따라 발걸음을 옮기면서, 김세준이 슬며시 미소지었다.
‘궁금하네.’
과연 이예은이 어떻게 자신의 곡을 소화할지, 그리고 편곡을 했다면 어떻게 편곡을 했을지.
서로가 각자 바쁜 탓에 어떻게 곡이 진행되는지 알지 못한 그였고, 오늘이 자신의 궁금증을 해소할 날이었다.
녹음실 안엔 이미 이예은과 송대준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고, 김세준은 문을 두드린 후 안으로 들어갔다.
“오셨어요?”
“오랜만입니다.”
밝은 표정을 지으며 자신을 반기는 두 사람에게 김세준도 짧은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자신을 보며 싱긋 웃는 이예은을 보며 물었다.
“오늘도 청심환 먹었어?”
“네!”
대학 축제 때 청심환의 효과를 톡톡히 봤는지, 무슨 일이 있기만 하면 청심환을 들이켜는 그녀다.
배시시 웃으며 답하는 이예은이었고, 김세준이 이예은의 눈을 마주 보며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다 속 버려.”
“괜찮아요.”
따뜻하면서도 깊은 감정이 담긴 그의 목소리에 이예은이 순간 흠칫했으나, 이내 아무렇지 않은 척 밝게 답했다.
“세준씨. 아직 곡 못 들어봤죠?”
그리고 송대준이 김세준을 향해 의미심장한 웃음과 함께 말을 건넸다.
“네. 말씀하시는 거 보니, 편곡했나 보네요.”
곡을 작곡한 건 자신이나, 이예은도 싱어송라이터인 만큼, 조금의 편곡이 들어갈 수 있다고 예상했다.
“크게 바뀐 건 없어요. 예은이도 원곡을 크게 건드리고 싶지는 않은 눈치였고요. 근데 이게 또 느낌이 묘해요.”
“오호...”
묘하다는 단어에 강한 억양을 주며 말하는 송대준의 말에 김세준이 기대된다는 듯 감탄을 뱉었고, 이예은이 부끄러운지 고개를 숙였다.
“아니예요... 진짜 그냥 오빠 곡이 좋은 거예요. 원곡이 좋으니까, 편곡을 조금만 해도 좋은 거죠.”
“빨리 들어보고 싶네요. 바로 시작합니까?”
자신감 없이 내뱉는 그녀였지만, 김세준의 기대감은 이미 하늘을 뚫을 듯 천정부지처럼 치솟았다.
김세준의 말에 송대준이 고개를 끄덕였고, 잠시 후 이예은이 녹음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김세준이 그녀에게 준 곡은, 가야금과 바이올린의 조화가 눈에 띄는 곡이다.
부드러운 선율이 시종일관 귀를 간지럽히는 곡이었다.
궁금증을 참지 못한 김세준이 송대준의 컴퓨터를 슬쩍 봤고, 곡의 제목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녀의 꿈?’
제법 난해한 곡의 이름에 김세준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이예은을 바라봤고, 그녀의 목울대가 한 번 울렁이더니 이내 녹음실 안에 ‘마녀의 꿈’의 전주가 흘러나왔다.
송대준의 말대로 크게 달라진 건 없는 도입부.
하지만 작은 차이가 하나 있었다.
‘템포를 바꿨네.’
원래 그의 곡의 템포가 모데라토(Moderato) 즉, 보통 정도의 속도라면, 지금 이예은이 수정한 곡의 템포는 안단테(Andante) 보통보단 조금 느린 정도의 템포다.
그리고 어쿠스틱 기타 대신 그녀가 주로 사용하는 악기인 키보드가 메인 멜로디를 잡았다.
전주를 듣는 그에게 송대준이 낮게 중얼거렸다.
“이게 전부예요.”
편곡한 게 이게 끝이라는 뜻.
말 그대로 곡을 많이 바꾸지 않았다.
템포를 늦추고, 바이올린을 키보드로 바꾼 게 다다.
하지만 그 작은 차이가 만들어낸 색다른 조화가 김세준의 귓가를 사로잡았고, 이내 그는 송대준이 말한 묘하다는 느낌이 뭔지 깨달았다.
그의 원곡은 잔잔하고 부드러운 멜로디를 중심으로 화사한 분위기가 시종일관 유지되는 곡.
‘와. 근데 이게 이렇게 변하네.’
하지만 이예은이 편곡한 곡은 원곡과는 느낌이 색달랐다.
원곡처럼 잔잔하고 부드러운 멜로디가 메인이지만, 화사한 원곡과 다른 분위기.
마치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에 온 듯한 몽환적인 분위기가 곡에 물씬 풍겼다.
곡의 제목처럼 신비하고 묘한 느낌.
그리고 이예은의 목소리가 곡을 덮는 순간, 김세준의 동공이 커졌다.
하늘을 수놓은 별들도
세상을 뒤덮을 정도의 황금도
모두 다 내가 만들 수 있는데
왜 그대는 다시 만들 수 없을까요
“...!”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평소 허스키했던 그녀의 목소리보다 조금 더 감미로운 목소리.
그녀의 본래 창법을 알고 있는 김세준이기에 조금 어색하게 들릴 만도 했지만, 그런 느낌은 전혀 없었다.
몽환적인 곡과 너무 잘 어울리는 잔잔하고 감미로운 목소리에 한없이 올라간 김세준의 입꼬리가 내려올 생각을 안 했다.
가끔 이럴 때가 있다.
노래를 듣는 순간, 그 노래가 너무 좋아 미소가 멈추지 않는 순간이.
시종일관 웃음 짓게 만드는 멜로디의 향연이 엄습할 때가.
지금 김세준이 그랬고, 김세준은 이날 새로운 쾌감을 맛봤다.
가수가 아닌, 작곡가로서 느끼는 쾌감을.
***
김세준이 새로운 쾌감에 눈을 뜬 그 순간, 지구 반대편에선 한 남성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자신의 컴퓨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의 이름은 에드 케인.
국가를 넘어서 글로벌 한 명성을 펼치는 대 가수.
30대 초반의 나이에 세계의 이름을 알린 싱어송라이터였다.
그런 그가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건 미튜브 영상이었다.
정확히는 김세준이 가야금을 뜯고 연주하는 영상.
“테일러! 컴온!”
에드 케인이 재빨리 자신의 매니저를 불렀고, 그의 매니저인 테일러가 그의 부름에 한걸음에 달려왔다.
“에드. 왜? 무슨 일인데?”
테일러가 다가오자, 에드 케인이 시청하던 영상을 다시 처음으로 돌렸다.
“이것 봐.”
컴퓨터를 향해 손가락을 내밀며 에드가 말했고, 자연스럽게 테일러의 시선이 컴퓨터로 향했다.
“뭐야? 미튜브? 무슨 영상인데?”
“그냥 한 번 봐. 미쳤으니까.”
테일러의 질문에 에드가 미소지으며 답했고, 그의 말에 테일러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의 가수가 이렇게 빠질 정도의 동영상이면 분명 노래하는 영상이리라.
그리고 잠시 후 김세준이 가야금을 뜯었고, 테일러는 가야금의 음색에 놀랐고, 익숙한 멜로디에 한 번 더 놀랐다.
“와우. 음색 미쳤네. 그리고... 이거, With You잖아?”
테일러의 말에 에드 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김세준이 연주하고 있는 곡은 자신의 곡인 With You.
고향인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유행한 명곡.
“이 친구가 내 노래 커버하는 영상이야. 이건 무슨 악기랬지? 고...고야금?”
“좋아. 소리가 하프랑 비슷한데?”
가야금의 음색에 빠진 테일러가 다시 말을 뱉었다.
가야금뿐만 아니라, 제법 그럴듯하게 부르는 김세준의 모습까지.
에드가 흥미 생길 법한 동영상이었다.
제법 인상적이었으니까.
에드 케인은 시종일관 흥미로운 표정으로 끝까지 동영상을 바라봤고, 영상이 끝나자 테일러에게 말을 건넸다.
“괜찮지?”
“어. 매력적이야.”
“한국 가수래.”
“오! 어쩐지. 실력이 아마추어 수준은 아니었어.”
영어로 쓰인 댓글들을 본 에드가 말했고, 테일러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수가 아니면 이해하기 힘든 실력이었다.
그런 테일러를 향해 에드 케인이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테일러.”
“응?”
“우리 7월에 한국 공연 가잖아.”
“...!”
에드 케인의 말에 테일러가 자신의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그가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거 같았다.
그리고 그런 그를 향해 에드 케인이, 예의 장난꾸러기 같은 표정으로, 하지만 진심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 이 친구랑 함께 무대를 꾸며보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해? 이 친구의 악기랑 내 기타의 합주. 상상만 해도 아름답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