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야금 뜯는 천제가수-47화 (47/148)

#47

하여가(何如歌), 단심가(丹心歌)(2)

“...!”

재생 버튼을 누르자마자 흘러나오는 인트로(Intro).

그 인트로에 세현과 수호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번졌다.

김세준의 시그니처라고 할 수 있는 가야금.

그 가야금 특유의 소리가 인트로부터 울리기 시작했다.

‘잠시만.’

하지만 이내 세현의 고개가 살짝 갸우뚱거렸다.

김세준의 팬인 만큼, 그의 노래를 숱하게 들었다.

그만큼 가야금의 소리에 익숙해져 있는 세현이었지만, 지금 들리는 소리는 평소 김세준의 가야금 소리와 사뭇 달랐다.

‘거칠다.’

깔끔하고 청아했던 평소 김세준이 연주하던 가야금 소리가 아닌, 뭔가 막힌 듯 뭉개지게 들리는 소리.

하지만 전혀 듣기 싫은 소리가 아니다. 그리고 그 뒤를 잊는 거문고의 든든한 소리가 들려왔고, 세현이 속으로 감탄을 뱉었다.

‘와우...’

청아한 음색의 가야금과 묵직한 거문고의 조화만 들었던 지금까지와 달리, 약간은 투박하게 들리는 조화.

그리고 이어지는 북의 억세면서도 단조로운 소리가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드라마랑 엄청 잘 어울리겠어.’

아이돌을 어렸을 때부터 꿈꿔왔던 그다.

남들이 학업에 매진할 때 연습실에서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연습에 몰두했던 삶이었다.

그런 그도 알고 있는 ‘하여가’ 그리고 ‘단심가’.

한 남자의 모습이 머릿속으로 절로 그려졌다.

관복을 입은 중년의 사내가 죽음에 의연한 모습으로 한 시조를 읊는 장면이.

자신의 충절을 내뱉는 그의 단호한 말투와 태산 같은 굳건한 의지가 떠오른다.

‘이게 단심가...’

제목과 물씬 어울리는 노래에 세현의 눈가가 반짝반짝 빛이 났고 옆에서 같이 듣고 있던 수호가 넋 나간 표정을 지었다.

“와... 웅장한데? 이건... 드라마 OST 느낌이 아니라 거의 영화 OST 같은데?”

수호의 말에 세현도 고개를 끄덕였다.

거대한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다음 곡은 하여가...”

‘단심가’가 이 정도인데, 하여가는 또 얼마나 훌륭할까.

세현이 조심스럽게 그다음 음원 파일을 눌렀다.

“...!”

“와우...”

차분히 노래를 듣던 두 남자가 작은 감탄을 뱉었다.

단심가하고는 전혀 다른 인트로.

단심가가 초반부터 무거운 분위기였다면, 하여가는 시작부터 날카롭다.

관악기인 태평소와 대금의 합주로 시작되는 인트로.

찡한 소리를 울리는 태평소와 한겨울의 바람처럼 들리는 대금의 소리가 합쳐져 살벌한 느낌을 물씬 줬다.

매서운 한파처럼 날카롭고 살이 애는 듯한 소리.

그리고 아까와 달리 이번엔 청아한 가야금의 연주가 뒤를 받쳤다.

‘템포가 빠르다.’

하지만 청아한 음색이 무색하게도 빠르게 휘몰아치며 긴박감을 주는 가야금의 템포.

그리고 해금과 아쟁의 예리한 음색이 그 뒤를 받치자 곡의 긴장감이 한층 더 고조되었다.

세현의 머릿속에 단심가를 들었을 때처럼 이미지가 자연스럽게 그려졌다.

근엄한 사내의 모습이 그려졌던 단심가와 달리, 하여가는 카리스마와 패기가 넘치는 젊은 사내의 모습.

마지막 자비를 베푸는 사내는 냉혹하고, 냉정하다.

입꼬리를 살짝 비틀며 비웃음을 짓는 사내에게 눈앞에 있는 중년의 충심은 하찮고 보잘것없다.

오히려 자신의 제안을 자비롭게 여기는 거만한 젊은이.

하지만 오만한 그런 모습이 누구보다 잘 어울리는 사람.

“우와... 야 이건 교과서에 실려야겠다.”

노래가 끝나자 수호가 경외심이 실린 말을 뱉으며 팔뚝을 손으로 긁었다.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완벽한 노래에 목울대가 울렁거렸다.

“진짜, 이건 음악 교과서에 실려야 해. 얘들한테 이 노래 들려줘봐. 하여가하고 단심가 평생 안 까먹을걸?”

몸을 떨며 여운을 잊지 못하는 수호였고, 세현은 핸드폰을 바라보며 진한 웃음을 지었다.

노래 너무 좋다고 보낸 자신의 메시지. 그리고 김세준이 보낸 답장.

[그래? 다행이네. 네가 어떤 곡 부를래?]

‘뭘 부르지?’

너무 행복한 고민이었다.

***

‘단심가’와 ‘하여가’의 작곡을 마무리한 김세준이 작사에 매진할 때, 이해진과 이예은이 그를 찾아왔다.

긴히 할 이야기가 있다며 집까지 오겠다는 둘이었고, 김세준은 둘의 방문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집 좋다.”

“안녕하세요.”

“들어오세요.”

반가운 두 사람의 방문에 김세준이 밝은 미소로 반겼고, 거실로 안내했다.

“작업은 어때? 잘 돼가?”

이해진이 기분 좋은 웃음과 함께 물었고, 김세준이 흡족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네. 느낌이 좋네요. 생각보다 빨리 완성할 거 같습니다.”

“괴물이네. 괴물. 곡 2개를 준비하는데. 확실히 천재야.”

자신 있게 내뱉는 그를 향해 이해진이 혀를 내둘렀고, 이예은도 존경심이 가득 담긴 눈빛을 보냈다.

그들 또한 싱어송라이터.

이해진의 작업 속도가 얼마나 대단한 건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누추한 곳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누추하기는. 우리 집과 비교하면 내 집은 돼지우리야.”

이해진이 짧은 농을 던지고, 이예은을 향해 흐뭇한 시선을 보냈다.

“예은이. 이제 데뷔한다.”

“오! 축하해!”

김세준이 진심 어린 축하를 보냈다.

빨개진 얼굴로 수줍게 감사하다고 말하는 그녀였고, 김세준이 지난날을 떠올렸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이예은을 아레스 뮤직에 데려온 지도 벌써 반년을 훌쩍 넘겼다.

시기도 적절하고, 자신의 앨범으로 대중들에게 큰 인상을 남겼으니 지금이 딱 알맞은 타이밍이긴 했다.

“설마 집까지 찾아온 이유가 이걸 말씀하시려고 온 건 아니죠?”

김세준이 살짝 웃으며 말했고, 이해진과 이예은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예은이 침을 꿀꺽 삼키며 결심한 뒤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오빠. 혹시 오빠 곡 하나만 저 주시면 안 될까요?”

“곡? 갑자기?”

“네...”

“흐음...”

김세준이 턱을 쓰다듬으며 신음을 내뱉었다.

“예은이 네 곡은?”

“...”

이예은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오빠 곡으로 하고 싶어요.”

“굳이?”

이해할 수 없는 이예은의 고집에 김세준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회귀하기 전, 그녀의 자작곡들이 얼마나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렸던가.

“그 곡 기억나?”

“어떤 곡이요?”

그때 이해진이 둘 사이에 끼어들어 김세준에게 말을 건넸다.

“네가 나한테 들고 온 두 곡.”

“아! 그 처음 회사 들어올 때요?”

“음. 그 곡들을 예은이한테도 들려줬는데, 예은이가 그 뒤로 그 곡 중 하나에 빠졌어.”

“오호,..”

이해진의 말에 김세준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스스로 생각해도 묵혀두기엔 아까운 명곡이다.

이예은이 곡을 듣고 마음을 사로잡힌 것도 충분히 이해 가는 대목.

‘게다가 이미 완성된 곡이라 내 시간이 뺏길 일도 없지. 그리고 내 입장에선 언제 그 곡을 발매할지도 모를 일이니까.’

지금 당장 자신은 해야 할 일 투성이다.

OST 작업이 끝나고 새로운 앨범도 작업에 들어갈 터. 하지만 다음 앨범도 이미 생각해둔 구성이 있기에 이해진에게 들려준 노래가 들어갈 틈이 없었다.

‘그럴 바엔 아예 예은이한테 주는 것도 나쁘지 않아.’

이예은이라면 이 곡을 주기 아깝지 않은 가수다.

게다가 그녀만의 색다른 해석으로 예상보다 뛰어난 곡을 만들지도 모를 일.

“예은이 너는 네 곡으로 안 해도 괜찮겠어?”

김세준의 물음에 이예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쉬운 마음도 있지만, 그 노래를 못 부르는 게 더 아쉬울 거 같아요.”

이예은의 대답에 김세준이 결심을 마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네가 한번 해봐.”

그의 말에 이예은의 얼굴에 밝은 빛이 스쳐 지나갔다.

“감사합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90도로 숙이는 그녀였고, 김세준이 작게 미소 지었다.

‘궁금하긴 하네.’

자신의 곡을 그녀가 어떻게 바꿀지, 그리고 어떤 결과를 만들어낼지.

***

‘태조 이성계’의 음향 감독인 박준영의 반응도 세현과 수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김세준이 보낸 음원 파일을 듣자마자 환호성을 내질렀고, 곡 괜찮냐는 김세준의 물음에 박준영은 핸드폰 너머로 비명에 가까운 대답을 질렀다.

그렇게 박준영의 승낙까지 받은 이상 남은 일은 녹음뿐이었고, 녹음을 위해 김세준은 B.ONE의 소속사인 SY 엔터테인먼트를 찾았다.

“확실히 SY는 SY네.”

국내 3대 소속사의 속하는 SY 엔터테인먼트다. 아레스 뮤직하곤 비교하기도 민망할 수준으로 건물 근처엔 팬들로 보이는 무리가 수두룩했다.

건물 내부로 들어가면서 세현한테 연락하자, 세현이 건물 로비로 마중을 나왔다. 한 여성과 함께.

‘저 여자는?’

그리고 그 여자를 보며 세준이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40대 중반의 나이지만, 관리를 얼마나 잘했는지 30대로 보이는 미녀.

군살 하나 없는 완벽한 몸매와 주름 하나 없는 완벽한 피부를 가진 여인.

SY 엔터테인먼트의 사장인 정수연이었다.

여성의 몸으로 SY 엔터테인먼트를 굴지의 회사로 키워낸 여장부.

왕년엔 미녀 가수로 제법 이름을 떨쳤던 그녀였고, 김세준에겐 대선배나 다름없었다.

김세준을 발견한 정수연이 화사한 미소와 함께 손을 내밀었다.

“세준씨. 저희는 초면이죠? 반가워요.”

“반갑습니다. 선배님 김세준이라고 합니다.”

“방금 나가려고 했는데, 마침 세준씨가 왔다고 하길래 잠깐 인사라도 하려고 왔어요. 우리 회사까지 왔는데, 이런 기회 아니면 언제 또 세준씨랑 인사하겠어요. 요새 제일 바쁜 가수잖아요?”

싱긋 웃으며 말하는 그녀였고, 김세준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과찬입니다. 선배님. 여기 세현이가 있는데요.”

남의 회사에 와서까지 자신을 치켜세울 필요가 있을까.

김세준이 세현의 등을 툭 치며 말했고, 정수연이 손을 내저었다.

“에이. 얘들은 아직 멀었죠. 이제 슬슬 가봐야겠네. 혹시 해진이가 잘 안 해주면 나한테 말해요. 세준씨 우리 회사에 오는 건 언제든지 환영이니까.”

정수연이 끝까지 미소를 지은 뒤 등을 돌리고 멀어졌고, 세현이 입을 열었다.

“사장님이 형 엄청 좋아해요.”

“그래?”

“네. 형 계약 끝나면 무조건 데려올 거라는데요?”

“...”

세현의 말에 김세준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대형 기획사에서도 자신을 탐낸다는 사실이 감개무량했다.

세현과 함께 녹음실로 향하자, 프로듀서로 보이는 남성이 의자에 앉아 있었고, 간단한 인사와 함께 녹음이 시작됐다.

먼저 ‘단심가’를 부르기로 결정 난 김세준의 차례였다.

‘단심가’와 ‘하여가’를 제법 오랫동안 고민하던 세현이였지만, 심사숙고 끝에 ‘하여가’를 선택했고 자연스럽게 김세준은 ‘단심가’를 부르게 됐다.

‘뭐 나도 단심가가 더 낫다고 생각했으니까.’

정확히는 이방원과 세현의 이미지가 묘하게 비슷했다.

젊은 나이에 성공을 이룬 패자.

게다가 날카로운 곡의 분위기하고도 세현의 목소리가 사뭇 잘 어울리기도 했다.

김세준이 녹음 부스 안으로 들어가자 세현의 얼굴에 기대감이 잔뜩 서렸다.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곡.

이 곡에 김세준의 목소리가 입혀진다면 어떤 느낌일지 기대를 감출 수 없었다.

그리고 녹음 부스로 들어간 김세준이 곡의 박자에 맞춰 입을 열었다.

님 향한 일편단심이 사라질 일이 있을까.

‘역시...’

단 한 소절.

브릿지(Bridge) 부분에 들어가는 단 한 소절만 들었음에도 세현은 작은 미소를 지었다.

거칠고 허스키한 김세준의 목소리.

자신이 생각한 ‘단심가’와 딱 어울리는 감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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