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야금 뜯는 천제가수-46화 (46/148)

#46

하여가(何如歌), 단심가(丹心歌)

하여가(何如歌)와 단심가(丹心歌).

의무교육을 받은 국민이라면 모를 수 없는 유명한 시조다.

과장 조금 보태서 이방원과 정몽주가 누군지 모르는 사람도, 하여가와 단심가는 들어본 적 있다고 말할 정도다.

이방원과 정몽주의 첨예한 정치적 대립 관계를 잘 보여주는 시조로, 김세준이 ‘태조 이성계’를 듣자마자 떠올린 컨셉이었다.

조상님들의 한과 얼이 담긴 문학을 한 번쯤 재창작해보고 싶다는 욕망이 그의 마음속에 언제나 담겨 있었다.

“하여가와 단심가라...”

김세준의 제안을 들은 김병서와 박준영이 낮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김세준을 바라보는 둘의 시선엔 놀란 기색이 가득했다.

참신한 아이디어를 내뿜길 기대했지만, 기대 이상이 아닌가.

“전... 전 괜찮은 거 같은데요? 이방원이랑 정몽주는 비중 있는 조연들이고, 둘의 주제곡으로 삼으면 이보다 잘 어울리는 곡이 없죠.”

박준영이 흥분감을 감추지 못하며 말을 빠르게 뱉었고, 김병서도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리고 이거 둘이 대화하는 씬에 OST로 삽입하면 그림 기가 막히겠는데?”

“제 말이 그 말입니다!”

‘너무 민망한데?’

김세준이 민망할 정도로 강한 긍정을 표하는 둘을 보며 김세준이 슬며시 미소 지었다.

그의 제안에 홀라당 빠진 둘이었고, 연신 이 OST에 관한 이야기를 조잘거리는 둘이었다.

“크흠. 그러면 혼자서 두 곡을 부르시겠다는 건가요?”

한참을 흥분하던 김병서가 헛기침을 내뱉고, 김세준에게 물었다.

“아니요. 그러는 것보단 다른 가수 한 분을 더 섭외하는 게 더 나을 거 같습니다.”

김세준이 고개를 저었다.

이방원과 정몽주.

역적과 충신, 완전히 다른 길을 걸어가는 두 인물인 만큼, 혼자서 두 곡을 부르는 것보다, 둘이서 각자 부르는 게 더 나으리라.

“흐음... 다른 가수라...”

김세준의 말에 김병서가 턱을 쓰다듬었다.

불가능할 건 없었다.

가수 한 명 더 섭외할 예산쯤은 충분했다.

“일단 대략적인 곡의 그림을 가지고 계신 분이 세준씨잖아요. 혹시 생각해두신 분이 있습니까?”

김병서의 물음에 김세준이 이마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누가 좋을까...’

하여가와 단심가. 남녀차별은 아니지만, 여자가 부르는 건 조금 그렇다. 그러면 예은이는 제외.

그리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한 남자.

‘장준?’

얼마 전 자신과 함께 미튜브 라이브 방송을 꾸렸던 남자.

‘잘 어울릴 거 같긴 한데...’

장준의 실력이야 자부할 수 있다. 아직 무명이라 이들이 의아하게 여길 수 있어도, 묵직하고 진중한 이 감성을 표출하기에도 무리 없는 실력.

“흐음...”

하지만 김세준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장준의 목소리는 감미롭고, 부드럽다.

미성이 섞인 그의 목소리보단 자신처럼 조금은 거친 느낌이 필요했다.

계속되는 고뇌. 잠시 후, 고민을 끝낸 김세준이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예산은 충분하십니까?”

“네. 누구를 불러도 감당 가능합니다.”

김병서의 자신 있는 대답에 김세준이 크게 고개를 끄덕인 후 재차 입을 열었다.

“세현이는 어떻습니까?”

“세현이라면... B.ONE의 그 세현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박준영의 질문에 김세준이 미소로 답했고, 두 남자가 다시 생각에 잠겼다.

세현.

아이돌이긴 하지만 그 가창력엔 한 치의 의심도 없다.

수많은 솔로 곡을 히트시킨 실력 있는 가수이기도 하고, 목소리도 김세준이 말한 컨셉과 제법 잘 어울릴 듯했다.

생긴 건 야리야리하게 생긴 게, 목소리는 제법 느낌 있는 가수였으니까.

하지만 문제는.

“좋긴한데...”

“저도 잘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근데... 세현이 거절하면 어떡하죠?”

B.ONE 같은 탑 아이돌을 섭외할 땐 돈이 문제가 아니다.

그들을 원하는 곳이야 바다의 물고기처럼 차고 넘쳤다.

아무리 돈을 억수같이 준다 해도 섭외하기 힘든 게 그들 같은 존재.

둘의 고민에 김세준이 밝은 미소로 화답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거절 안 할 겁니다.”

***

김병서와 박준영과 미팅이 끝난 후, 김세준은 곧바로 작업에 몰두했다.

둘도 긍정적인 반응이었고, 음향 감독인 박준영은 하여가와 단심가에 대한 작업을 그에게 부탁했다.

김세준 또한 싱어송라이터로서 스스로 곡을 작업하고 싶었기에 기꺼이 그의 부탁을 받아들였다.

“흐음. 일단 묵직해야지.”

이번에 작곡할 하여가와 단심가.

분위기 자체가 무겁고, 굵다.

잔잔하고 산뜻한 멜로디보다는 듣는 순간 장엄하고 엄숙해야 할 멜로디여야 했다.

“일단 그럼 거문고는 필수.”

가야금보다 소리가 무거운 거문고는 이번 곡과 찰떡궁합이었다.

“그렇다고 가야금을 빼기도 아쉽지.”

김세준의 시선이 구석에 있는 오래된 가야금으로 향했다.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지만, 낡은 골동품이 아닌 시간을 고이 간직한 명품.

그가 평소 애용하던 25현 개량 가야금이 아닌, 12개의 현을 가진 가야금.

수백 년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대한민국 전통 가야금인 정약가야금이었다.

그가 가진 정악가야금도 그의 할아버지부터 내려와 아버지를 거쳐 그에게 넘어온 유례 깊은 물건이었다.

“정악가야금도 괜찮지.”

애초에 산조가야금과 달리 궁중음악을 연주할 때 사용하던 악기다.

지금처럼 무겁고 분위기 있는 연주를 해야 할 땐, 이보다 어울리는 악기가 없지.

게다가 조선 사극이라면 더할 나위 없다.

25현 개량 가야금보다 소리가 조금 텁텁하고, 뭉개진 것처럼 들릴 수 있지만, 오히려 그런 느낌이 곡의 분위기를 물씬 살리리라.

“좋아. 좋아.”

만족스러운 미소와 함께 김세준이 고개를 끄덕였고, 다시 곡의 구성을 떠올렸다.

“흐음. 그리고 단심가는 조금 더 애절한 느낌을 넣어야겠지.”

이방원이 정몽주의 단심가를 듣고 죽임을 결심한 건 유명한 이야기다.

그러면 정몽주도 자신이 단심가를 내뱉을 때, 스스로의 운명을 예상하지 않았을까.

고려에 대한 충심을 위해 목숨을 내던지는 그.

무거우면서도, 브릿지 부분은 애절한 느낌이 조금은 가미되어야 했다.

“하여가는 단심가보다 조금 더 날카로운 느낌으로.”

반역자인 이방원.

이방원에 대한 이미지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철퇴를 들고 있는 느낌.

또한, 조선왕조에서 세조와 함께 카리스마 하면 단연코 손꼽히는 왕이다.

“아... 미치겠네.”

김세준이 자신의 머리를 헝클였고, 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느낌이 너무 좋았다.

대박곡이 나올 거 같은 느낌이.

***

“세현아. 너 이번에 OST 제안 들어왔는데, 어떡할래?”

세현이 자신의 매니저인 오승환의 말에 읽고 있던 책에서 시선을 떼고 슬며시 고개를 그쪽으로 돌렸다.

“OST요?”

“응. 이번에 BBS에서 사극 드라마 하나 크게 제작한다고 하더라. 그쪽에서 너를 섭외하고 싶다 하더라고.”

“형! 저는요? 저한텐 안 들어왔어요?”

매니저의 말에 숙소 거실 소파에서 뒹굴뒹굴하던 수호가 벌떡 일어나 물었다.

“너는 지금 하는 예능 있잖아. 거기 피디님이 너 칭찬 많이 하시더라. 센스 있다고. 그니까 너는 일단 예능에 집중하자.”

오승환의 말에 수호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분명 칭찬이긴 하지만, 뭔가 내심 아쉽다.

“OST... 무슨 드라만데요?”

“아까 말했다시피 사극이고, 제목은 태조 이성계. 어떡할래? 고민 좀 해볼래?”

BBS의 제의가 사뭇 나쁘지 않았기에 오승환이 기대감 넘치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사극...’

그런 오승환의 기대감 넘치는 눈빛과 달리 세현은 차분한 눈빛으로 고민에 빠졌다.

OST 작업을 참여 안 해본 건 아니지만, 사극은 처음이었다.

‘나랑 어울릴까?’

개인적으로 사극을 좋아하지도 않고, 본 적도 많지 않다.

어렸을 때 아빠 따라서 몇 번 본 기억이 전부다.

‘흐음...’

세현이 고민을 하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거절해 주세요. 별로 내키지 않아요.”

“형! 제가 할게요! 저 할 수 있습니다!”

세현의 말이 끝나자마자 수호가 손을 치켜들었고, 오승환이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수호 너는 좀 가만히 있고. 세현아 진짜 안 할 거야? 난 개인적으로 네가 해봤으면 좋겠는데.”

“형은 맨날 나만 미워하더라?”

수호의 찡찡거림을 무시한 채 오승환이 다시 입을 열었다.

“네 음악 스펙트럼을 넓힐 좋은 기회잖아. 게다가 이번 OST 성공하면 음악가로 더 큰 인정을 받을 거고.”

오승환의 말에 세현이 다시 곰곰이 고민에 빠졌다.

그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이내 세현이 다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도 안 할래요.”

“후우...”

세현의 거절에 오승환이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벌써 몇 년 동안 동고동락한 사이다.

그리고 그들을 챙겨주는 어미 새 같은 존재가 자신이었다.

그동안 지켜본 세현의 성격 상 두 번 거절한 거면 받아들일 리는 없으리라.

“그래 알겠다. 거절이라고 전해줄게.”

“네. 감사합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세현이 다시 시선을 책으로 돌렸고, 오승환이 발걸음을 돌려 숙소를 나가려고 했다.

‘아, 맞다.’

숙소를 나가기 전, 김병서가 당부했던 마지막 말.

김세준이 참여하는 걸 꼭 말해달라는 그들의 신신당부.

“아, 맞다. 세현아. 이거 김세준 알지? 김세준도 참여한다고 하던데. 곡 컨셉이 김세준이랑 답가 형식이래.”

“...!”

오승환의 말에 세현의 눈빛이 다채롭게 변했다.

고개를 홱 돌려 다시 시선을 오승환한테 보냈다.

“진짜예요?”

‘허 참... 얘가 이런 모습도 있었어?’

의욕이 활활 불타오르는 듯한 세현의 모습에 오승환이 적잖이 당황했다.

몇 년 동안 같이 지내면서도 처음 본 그의 모습.

항상 조용하고 수동적인 세현의 모습과는 전혀 상반되었다.

“어... 진짜야.”

당황한 채 말을 내뱉는 그였고, 세현이 책을 덮고, 작지만 확실한 목소리로 말했다.

“형. 저 할게요. 무조건.”

***

자신의 참여가 확정 나고 일주일 뒤, 세현은 김세준이 보낸 음원 파일 두 개를 확인하며 작은 미소를 지었다.

‘하여가와 단심가라...’

처음 컨셉을 들었을 때, 자신도 모르게 감탄을 뱉었다.

진짜 이 사람은 천재구나 싶었지.

그리고 김세준이 보낸 파일 밑에 온 메시지.

[일단 100% 완성은 아닌데, 느낌은 이래. 듣고 네 감상 알려줘.]

“뭐야? 이건? 세준이 형이 보낸 거야?”

소파에 앉아 핸드폰을 보며 히죽거리던 그에게 수호가 다가와 핸드폰을 향해 얼굴을 들이밀었다.

“오! 이번에 들어간다는 드라마 OST 그거? 들어봤어? 어때?”

속사포처럼 물어보는 수호를 향해 세현이 고개를 저었다.

“아직. 같이 들을래?”

그의 제안에 수호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세현만큼은 아니지만, 자신도 김세준의 노래를 좋아하는 팬이다.

아직 세간에 발표되지 않은 따끈따끈한 그의 곡을 들을 기회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빨리 틀어봐.”

수호의 재촉에 세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대감과 함께 세현이 떨리는 손가락으로 첫번 째 음원 파일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

어떤 음악일까.

항상 세상을 놀라게 만드는 그의 새 노래.

두근대는 심장과 함께, 세현이 두 눈을 감았고, 이어서 나오는 전주를 들으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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